한국 교육 거듭나기 SERI 연구에세이 61
박정수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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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자리가 들어와도 덥썩 하겠다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자리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자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하건 교육부 장관 자리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대개는 교육부 장관 개인의 비리나 결점이 드러나 그만두기보다는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커다란 사건으로 인해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던거 같다. 그만큼 한국땅에서 교육은 매우 민감한 영역이다. 무슨 정책을 내놓아도 어디로부터든 욕을 먹는게 '교육' 분야이고, 뭘해도 잘했다 소리 못듣는게 '교육'이다. 지속적으로 안정되게 유지되어야 할 교육 정책이 일 년을 못가서 쉽게 바뀌어버리고 바로 몇 달 뒤 대학입시를 앞 둔 수험생들은 혼란에 휩싸이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박정수씨는 <한국 교육 거듭나기>에서 한국 교육에 보이는 모든 문제들을 주제별로 분류하고 진단과 처방을 내린다. 고교평준화, 교육자치, 학생평가, 교원임용 및 평가, 학제 개편, 사교육과 공교육, 대학입시, 대학교육의 질적 수준, 지방대학 살리기, 학벌사회 등을 다루는데, 너무 많은 주제를 140쪽 가량 분량에 담다보니 각각의 주제를 그렇게 깊이있게 살펴보지는 못한다. 하지만 교육에 대한 저자의 오랜 고심의 흔적은 엿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자신의 전공 분야인 행정학적 관점에서 교육을 바라보고, 정책상의 문제점들, 행정상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먼저,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픈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자율화'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커리큘럼이나 학생의 선택에 있어서, 입시에 있어서, 좀 더 자율화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율화'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흑백논리적 시각이다. 매일 뉴스며 신분이며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율화 하면, 3불제를 놓고 된다 안된다 치열하게(?) 싸우던 국회의원들이 생각나는데,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저자의 입장은 중간이다. 자율화를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협소한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전반적인 교육의 영역에 있어서 자율화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세계화, 고령화 시대에 평준화 정책은 경쟁력이 없다며 비판하고 나선다. 대학이 대중화되어 대학원이 대학 수준으로 전락해버렸고 그 비용은 학생들이 다 감당해야 하는게 오늘이고, 사회의 수요에 걸맞는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대학 갈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학에 가지 않을 사람을 위해서는 실용적인 직업학교를 만들고 그들이 적성을 살려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평준화만 붙잡고 늘어지는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이런 입장이라면 나도 대략 동의한다. 평준화를 붙잡을 것이 아니라 학력에 따른 서열화를 벗어난 다양한 학교들이 생기고 점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흥미와 적성에 의해서 진학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게 안되니 평준화를 붙잡고 있는 것인데, 방향이 옳고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일단 과감하게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대학 또한 특성화 시켜서 서울대가 모든 학과를 독점하는 현실을 깨야한다. 어느 대학은 의학, 어느 대학은 철학, 어느 대학은 경영학이 커리큘럼도 좋고 교수진도 빵빵하다더라,라는 식으로 분산되어야 한다. 자연스레 그렇게 형성된다면 더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바랄 수 없는 부분이니 인위적으로라도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저자 또한 이 책에서 이 같은 주장을 하고 있고, 대학별로 특화된 분야에 집중 투자해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 주의할 것은, 각 대학들이 서로 돈되는 학과를 집중양성하려고 할테니, 소외되고 결국 없어지는 학과가 없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가령 문사철 이라고 불리우는, 국문과, 사학과, 철학과 같은 학과들은 국가차원에서 보호해줘야한다. 이미 내가 대학생이었던 수년전 전국의 몇몇 대학에서는 철학과가 사라졌다. 아예 없애버린 경우도 있고, 문화콘텐츠학과, 교양학부 등으로 이름을 변경해 보존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상 '보존'이 아니라 '소멸'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전에 진중권이 칼럼을 통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되고 우리 애니메이션은 안되는 이유를 아는가, 라면서 그 원인은 기술이 아니라 내용물에 있다고 했다. 어떤 문화산업이고, 드라마고, 영화고, 애니메이션이고 간에 시나리오가 탄탄하고 내용이 좋아야 하는데, 이걸 등한시 한 채 최신 기술만 적용시키려고 하니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국에서 문사철이 사라지거나 소외되고 시대의 부름이라며 업종변경시키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화콘텐츠가 생겨나고 문화강국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용의 충실함은 기본 학문과 기본 바탕에서 찾아야지, 변형된 수박껍데기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고등학교 역시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분야의 학교들을 만들어서 선택의 폭을 넓혀주자고 한다. 특목고의 경우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함으로써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더 열어주자 한다. 저자는 결국 이는 실업학교의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 말한다. 현재 실업고 졸업생의 많은 수가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모순된 현실에서 본래의 취지에 맞게 직업교육과 기능인력 양성의 역할을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사실상 지금의 실업계 학교는 중학교 때 성적이 안되어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그들의 몸이 머물고 있는 곳은 직업학교이지만 머리는 대학을 향해 있다. 이런 모순된 현실에서 실업계 학교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럴 듯한 주장이지만 전제되어야 할 것은, 특목고는 특목고의 취지에 맞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특목고가 사실상 하늘대학을 바라보는 학부모와 학생이 머무는 곳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이 본래 취지대로 진학치 않고 업종변경(?)해 진학하는 이대로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 진학했으나 중간에 업종을 바꾸고 싶은 사람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시도해야지, 모른 척하고 그곳에 머물며 다른 곳을 바라봐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애환은 있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다른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고, 애초 진학할 때부터 꿈꾸던 업종은 해당 특목고와는 상관없는 것이지만 눈감고 머무는 경우가 태반일 것. 그래서 좀 더 다양한 학교들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적에 따라 줄지어진 학교 등급 시스템이 아니라 취향과 흥미에 따라 구분된 시스템으로. 너무 이상적인 바람일까.

  이 얇은 책에서 저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어 일일히 모두 언급하기는 어렵다. 전반적으로 저자의 입장은 자율화에 닿아있고, 그가 주장하는 바에는 대략 큰 틀에서 동의하지만, 자율화의 난점을 너무 언급하지 않는 경향도 보인다. 자율화를 우려하는 건 경쟁 체제를 부추기고 서열화를 더더욱 굳건히 할까봐서다. 본래의 의미대로 자율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신자유주의 체제로 둔갑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이다. 그래서 자율화를 말하려거든 예상되는 난점을 모두 언급해야 하고, 온전히 자율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구비해야 한다.

  교육이 현재 엉망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답할 수 없다. 그만큼 민감하기 때문이고, 정책 하나가 누군가의 미래를 쉽게 뒤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따지고 들면 한도 끝도 없다. 여기에 나온 문제는 그 중 굵직굵직한 몇 가지일 뿐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끝도 없이 나올 것이다. 안 된다고만 고집하지 말고, 잇속 챙길 목적으로 개방하자 하지말고, 우선 터놓고 바람직한 방향 설정에 대한 대화가 오가야 할 것이다. 원초적 입장에서 당사자들간의 최초의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현 상황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뻔하고 이상적인 말이긴 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이상을 꿈꾸는데서부터, 이상에 대한 합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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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7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아이들 세 명을 특목고(한 명은 과학고, 두 명은 외고)에 보냈었습니다.
특목고 선생님들은 참 훌륭하셨지요.
선생님으로서의 자부심과 걸맞는 실력을 갖추고 계시더군요.
각지에서 모인 아이들역시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학습열의가 충만함을 감지할 수 있었답니다.
실력있는 선생님과 역시 뛰어난 아이들이 모인 학교에서 아이들의 실력이 죽죽 신장하더군요.
문제를 놓고 선생님과 학생들이 질문과 토론을 통해 해결하곤 했지요.
참 좋은 교육체제였답니다.
한국의 현실에서 비교적 이상적인 학교들이었답니다.
그런 좋은 학교를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옥죄는 한국의 현실이 서글픕니다.
네째 아이는 특목고에 가해지는, 갈수록 심해지는 핸디캡이 마음에 걸려 일반고등학교를 보냈답니다.

결과적으로 네째 아이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이 아이가 자질면에서는 가장 뛰어난 편이지요..)
특목고에 다녔던 아이들보다 객관적인 실력면에서 처집니다.
현행의 한국 대입평가제도에 맞추느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
참 안타까운 한국의 현실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들에게 국가차원에서 핸디캡을 주는 나라는
아마도 세계에서 한국이 거의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하

특목고에서는 선생님들의 밸류에 대한 평가가 자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특목고를 지원하는 선생님들을 교육청에서 평가합니다.
그렇게 선정된 선생님들이 특목고에 가게 되면 두번째 평가가 기다립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의 실력을 평가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능력이 부족한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평가를 견디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질문을 감당하지 못하는 선생님은 평가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그 선생님께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실력있는 선생님들은 화장실에 갈 시간이 없을 정도로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사실 이 부분이 더 무섭고 가혹하지요.
그렇게 특목고의 선생님들의 수준이 유지됩니다.


마늘빵 2007-11-27 11:10   좋아요 0 | URL
특목고가 본래의 취지대로 운영된다면 괜찮겠지만, 오늘날 현실을 보면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인지라 핸디캡이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기회가 주어졌고, 누구는 공부를 잘해서 특목고에 가고, 누구는 공부를 못해서 일반고등학교에 간다고 해서, 공정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특목고가 일반고보다 상대적으로 모든 여건이 나은 상황에서, 학생들은 3년간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고, 다른 아이들은 비록 그들이 공부를 더 못해서 일반고를 가게 됐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공부하게 됩니다. 이렇게 3년을 지내고 대학입시에 응하는 두 학생이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고 보기는 힘들 것 입니다. 그래서 특목고에 핸디캡이 주어지는게 아닐까요.

본래 취지대로 과고는 과고의 목적대로, 외고는 외고의 목적대로 운영되고, 학생들이 본래 취지에 맞게 진학할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해서 핸디캡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그들은 그들대로 하소연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교육 환경을 원했을 뿐인데 본래 취지대로 진학치 않는다고해서 핸디캡을 주는건 너무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특목고를 제외하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음'을 이유로 들지만, 그만큼 또 혜택을 받았으니 핸디캡 역시 어쩔 수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는 그들보다 수혜를 받지 못하는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배려차원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공부를 못하는 학생을 대학에 입학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입학하고도 적응하지 못하는 상업고, 공업고 학생들에 대한 배려는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상업고, 공업고는 본래의 취지가 대학입시가 아니라 직업교육에 한정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고요. 그러나 일반고등학교의 경우는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같은 조건에서 생활한 학생이라면 동일하게 취급받아야겠지만, 그렇지 못하니 배려가 필요하단 거겠지요.




비로그인 2007-11-27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부분의 학교를 정상 학업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퇴행시켜놓은 채,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비정상적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핸디캡을 준다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 면에서나 상식적인 면에서 공정한 일일까요?
저는 난센스라고 생각한답니다. 아프락사스님.


마늘빵 2007-11-27 19:50   좋아요 0 | URL
한사님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시는건 어떨까요. 자녀도 없고, 오로지 나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만 바라봤을 때, 과연 어떤 것을 원할 것인가, 를 생각해보면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롤즈의 <정의론>에 등장하는 원초적 입장에 처한 당사자들로 돌아가보는거에요. 저는 항상 어떤 문제를 판단할 때 처음으로 돌아가보려고 하는데 롤즈는 그것을 원초적 입장이라고 말하더군요. 나의 이해관계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나서 오로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만 판단을 하는거죠. 그렇지 않더라도 일반고등학교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여건이라는 것 안에는 아마도 공부를 많이한 능력있는 선생님 말고도 열심히 하는 친구들, 또 학교 환경, 토론과 토의 위주의 수업 등등도 포함되겠죠. 이런건 '정상 이상의 것'이라고 보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고등학교에선 바랄 수 없는 것들이고, 채워줄 수 없는 부분들이죠.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일반고등학교를 제로 기준점에 놓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반고등학교의 교과과정과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는 점은 별개로 논의를 해야할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