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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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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ㅣ 지식인마을 23
이양수 지음 / 김영사 / 2007년 9월
평점 :
2002년 평생 정의만을 연구했던 한 철학자가 타계했다. 그는 공리주의가 온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이론을 내놓아 세상을 놀래켰고, 철학 분야에 있어 죽어버린 정의의 영역을 부활시켰다는 칭송을 받았다. 1957년에 발표한 논문 <공정으로서의 정의>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 이 논문을 보완하는데 또 한 세월을 쏟아 필생의 역작 <정의론>을 1971년에 펴냈다. 그는 바로 다음해 하버드 대학을 빛낸 교수로 뽑혔고, 이후의 모든 정의론은 그를 가운데 두고 퍼져나갈 만큼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죽기 10년 전 <정의론>에 이어지는 후속 연구 결과인 <정치적 자유주의>와 이 이론의 적용 영역을 세계로 넓힌 <만민법>이 출간되었다.
김영사에서 나온 스물 세번째 지식인 마을 시리즈 <롤스&매킨타이어>는 이런 롤즈의 이론과 그의 동료인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담아낸 책이다. 제목은 두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했지만 무게는 확실히 롤즈에 쏠릴 수 밖에 없다. 매킨타이어만을 다루는 책이라면 모르겠지만 그와 함께 롤즈를 다룬다면, 자연스레 무게는 롤즈에 실리게 된다. 롤즈는 그의 역작 <정의론>이 출간된 이후 수많은 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는데, 그들은 모두 '롤즈의 비판자' 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본래는 주목받지 못하던 철학자들도 롤즈의 비판자가 됨으로써 롤즈와 더불어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롤즈의 비판자로는 대표적으로 샌들, 테일러, 왈쩌, 그리고 이 책에 다루는 매킨타이어가 있다. 롤즈의 이론과 그에 대한 이 네 사람의 비판은 스티븐 뮬홀(표기는 스테판 뮬홀로 되어있으나 스티븐 뮬홀로 부르는게 옳다)과 애덤 스위프트가 지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한울아카데미)라는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있다. 그외에도 로티, 드워킨, 래즈, 노직 등도 롤즈와 관련해서 살펴봐야 할 인물들이다. 앞의 네 명은 공동체주의자로, 뒤의 네 명은 자유주의자로 분류된다. 롤즈가 이렇게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은 그의 이론이 바라보기에 따라서 어느 진영으로부터도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롤즈의 이론은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의 양 진영 사이 어디엔가 위치해 있다.
이 책에서 롤즈와 함께 다뤄지는 매킨타이어는 공동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다. 고로 이 책에서 롤즈가 비판을 받는 점 또한 공동체주의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주의에서도 해당 철학자마다 롤즈를 비판하는 부분이 다 다르다. 매킨타이어의 경우 롤즈의 '원초적 입장'에 처한 당사자들에 주목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이렇게 비판한다.
"도덕성은 타인의 이익에 대해 무관심하면서도 항상 자기 합리성을 추구할 줄 아는 특정한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마주치는 보통 사람들에게 요구된다. 보통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러나 이 불완전함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의 도덕적 함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불완전함이다. 따라서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을 굳이 도덕적 인간의 대변자라고 볼 이유가 없다. 설령 그들이 도덕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해도 그 입장이 반드시 실제의 인간들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거센 환경의 변화에도 굳건함을 잃지 않는 덕성이다. 이러한 덕성을 지닌 사람들은 비록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하고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줄 아는 구체적인 인간들이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을 토대로 이후의 논의를 전개해 나가는데, 이때 원초적 입장에 처한 당사자들은 '합리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여기서 합리적이란 말은, 남의 것을 빼앗아 가면서까지 욕심을 부리지는 않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존재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공동체주의들은 롤즈의 이론에서 제일 첫번째 전제가 되는 '원초적 입장'을 비판함으로써 이후의 논의를 무너뜨린다.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너무나 이상적인 존재이고, 현실적으로 상정할 수 없는 인물들이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매킨타이어는 따라서 그들이 도덕적이라고 간주할 근거가 없으며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의 도덕적 덕성을 기르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의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개인을 굳건히 지켜주는건 오랜 시간 다듬고 가꿔온 길러진 덕성이라는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공동체주의자 중에서도 테일러와 함께 가장 바깥에 서있는 자이다.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하면 매킨타이어와 테일러, 다음이 샌들과 왈쩌가 될 것이고, 롤즈가 다음에 서게 될 것이다. 먼저 언급한 인물이 공동체주의적 경향이 더 강하단 말이다. 고로 저들 중엔 롤즈가 가장 덜 공동체주의적이다.
롤즈의 이론이 다소 이상적이라는 점은 그의 <정의론>을 읽으면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롤즈는 자신의 이론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으며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이상적으로 보이는건 전제가 되는 원초적 입장에 놓인 당사자들의 조건 때문인데, 현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간 유형은 아니어도 충분히 현실을 살아가는 개개인의 머리 속에서 사고 가능하고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스스로에게 적용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두 사람의 견해 차이를 느껴 볼 수 있을테지만 매킨타이어의 비판은 롤즈와 대립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롤즈가 바라보지 못하는 구멍을 메꾸기 위한 비판이라고 봐야한다. 롤즈의 이론을 무너뜨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롤즈가 충분히 기존에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공리주의를 뒤엎는 성과를 냈고, 그것을 인정한 채로 더 완벽한 이론으로 만드는데 목적이 있다.
롤즈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를 비판하면서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선의 극대화는 사회 성원의 희생을 볼모로 잡은 채 전개된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롤즈는 칸트에 자신의 이론적 기초를 의지하고 있는데, 칸트의 관점에서 보아 공리주의는 수단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유린하기에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롤즈는 공리주의가 버린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받는 사회를 <정의론>을 통해 실현시킨 것이다. 롤즈의 정의 원칙 중 '최소수혜자의 이익 극대화의 원칙'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만으로 롤즈의 이론과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저 대략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정도를 파악하는 정도, 그리고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 접근은 하지 않지만, 대략 어떤 관점에서 두 사람이 사회를 바라보고 정의를 논하는지를 파악하는 정도로 책을 활용하면 되겠다. 롤즈와 매킨타이어로 들어가는 입문서 격으로 보면 영양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철학자고 마찬가지이지만 롤즈는 워낙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는데 있어 새로운 용어과 개념을 등장시키기 때문에 용어에 대해 개념을 잡고 내용접근을 할 필요가 있는데, 입문서격인 책으로는 그것을 수용하기 힘들어보인다. 저자는 맨 뒤에 대표적인 용어들을 간단하게 서술했는데 서비스 차원으로 봐야지, 이 정도 해설로 용어를 파악했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롤즈는 <정의론> 이후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책을 통해서 그 사이에 있었던 여러 철학자들의 비판점을 수용하고 이론을 좀 더 현실적이고 완벽하게 만든다. 가장 흔한 비판인 너무나 이상적이라는 주장을 의식한듯이 이후 '중첩적 합의', '공적 이성', '정치적 구성주의'와 같은 개념들을 새롭게 선보이며 완성도를 높였다. 이 책에선 <정치적 자유주의>의 논의는 다루지 않는다. 롤즈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정의론>에 머물러있고, 그에 가해지는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니 <정치적 자유주의>의 출간 이전의 논의라고 보면 되겠다.
참으로 방대한 영역에 걸쳐서 논의를 전개하고, 쉽게 읽히지 않는 롤즈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또 롤즈를 둘러싼 여러 철학자들의 논의를 살펴보기 위해 입문서는 중요하다. 한 눈에 그 모든 것이 쉽게 들어오지 않고, 바로 일차서적을 읽는 건 너무 막연한 접근이라 어렵다. 롤즈와 비판자들의 논의를 살펴보려면 이 책 이후에 영역을 조금 더 넓히고, 깊이는 몇 배 더하여,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읽는다면 한 눈에 모든 것이 파악될 것이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롤즈의 일차서적을 읽기 전에 롤즈 이론을 개념잡길 원한다면 염수균씨가 정리한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를 권한다. 이것도 마냥 쉽지는 않겠지만 이것 말고는 일차서적 읽기 전에 마땅히 접근할 만한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아싸리 무대뽀로 <정의론> 1장부터 차근차근 접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대신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p.s. 소크라테스는 "잘못된 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이 책 18쪽에선 이렇게 전제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자세한 것은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권창은 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과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 누가?>(김주일 저, 프로네시스, 2006)을 참조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