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다. 2월에 입사를 했는데 그새 열 달이 지나가버렸다. 그 중 최근 두 달 가량은 말 그대로 눈코뜰새 없이 바빴는데, 또 그 중 한달은 회사 인근 '모텔 투어'로 보냈다. 야한 상상은 금지. 출퇴근 시간조차 아껴야하는 다급한 상황이었던지라 나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그리 되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나 할까. 세상에, 이토록 집에 오랫동안 들어가지 않은 적도 - 군대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 처음이고, 이토록 날이 가는줄 모르고 지냈던 적도 처음이고, 이토록 늦게까지 일을 했던 적도 처음이었다. 이렇게 공부한 적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이렇게 일해 본 적도 없고, 그래도 한번쯤 있지 않았을까 싶겠지만, 이렇게 놀아본 기억조차도 없다.

  일은 어찌어찌 마무리 되었고, 초췌해진 얼굴과 만신창이가 된 몸덩이만이 남았다. 그렇게 12월을 맞는다. 일은 무척 재밌지만 내가 한 만큼 인정해줄 수 없는 구조이고,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은 무척이나 비윤리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이기적이었다. 정확히, '모두'가 아닌 그들 중 '일부'는. 나는 교과서 편집자다. 직업상 편집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저자의 몫까지 해야 했다. 능력도 안되고, 성실하지도 않고, 겸손하지도 않은 저자들을 위해서. 그들 중 일부는, 아니 상당수는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없었고, 그저 이름 한자 넣어서 이름값이나 높여볼까 하는 이들이었고, 동시에 그들은 이름과 더불어 돈을 바라고 필자를 자청한 것 같았다.

  해서, 결과야 어쨌든 제 이름값을 높이고, 돈을 가져가게 될, 연락도 끊어진 저자들을 위해(?), 저자 역할을 떠안아야 했다. 나에게 온다고 해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난 이 교과서의 상당 분량을 썼고, 수정했고, 다듬었다. 현재 필자들 중 상당수는 합격 발표 후 아마도 교체되겠지만, 그들은 어쨌든 5년간 떡고물을 그냥 거저먹게 생겼다. 심지어는 현재 결과물에 본인의 원고가 전혀 살아남지 않은 저자들도 있다. 애초의 계약이 아닌 결과물만 놓고 보자면, 이 저자들은 저자 목록에서 빠져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들은 그동안 얼굴도 비치지 않았고, 연락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도장을 찍으러 회사에 찾아왔고, 결국 저자로 올라갔다. 정의와 부정의를 논하고, 도덕과 윤리를 가르친다는 이들이 이렇다. 그러니 그동안 내가 배우고, 가르쳐왔던 교과서가 이같은 과정을 거쳐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분노치 않을 수 없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나의 주제를 삼아 따로 하게 될 것이다. 저자들에게 느낀 실망감과 더불어 회사 사람들에게 느낀 서운함, 실망감도 못지 않지만, 이는 나중에 꺼내련다. 일은 끝났고, 나는 다시 이 곳에 돌아왔다. 내가 편히 쉴 수 있고,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이곳으로. 지친 마음과 몸을 이곳에서 풀어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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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12-07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고 고생이 많았군요~ 어서 오세요. 알라딘 마을은 언제나 문열어 놓고 있으니까요.^^

마늘빵 2008-12-07 22:43   좋아요 0 | URL
^^ 다시 엔진을 가동해야죠.

Mephistopheles 2008-12-07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화도 나고 열도 받고 짜증도 나고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일의 진행방식에 제대로 머리에 뚜껑이 열리곤 하지만 한 10년 넘으면 익숙해지면서 알게 모르게 사람을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되실 껍니다..수고 많았어요 아프님..근데 난 왜 오늘도 출근했지..아 짱나~!

마늘빵 2008-12-07 22:44   좋아요 0 | URL
거기에 익숙해져야하는 게 현실이라면, 저는 또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그 익숙함을 깨고, 현실을 개선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행태들이 눈에 자꾸만 보이는군요.

웽스북스 2008-12-07 22:51   좋아요 0 | URL
아아 메피님 츄릅. ㅜㅜ

Mephistopheles 2008-12-08 00:23   좋아요 0 | URL
어 익숙해지라고 말한거 아닌데~~~근데 어느 분야나 먹물들이나 좀 배우고 자리 차지하는 사람들은 거기서 거긴 듯...우리쪽도 건축분야 교수님들 심의위원으로 껀당 몇천씩 뇌물 받아 먹는게 일상이다 보니까..^^ 터져봤자...감봉 2개월..?? 정직이나 면책 같은 건 절대 안일어나죠..

마노아 2008-12-07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았어요.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좀 쉬고 몸도 마음에도 휴식을 주세요. 그래도 해 안 넘기고 돌아온 게 어디에요. 아프님 이름 보니까 막 반가워요!

마늘빵 2008-12-07 23:43   좋아요 0 | URL
'벌써 1년'이 지나가는군요. 뇌만 고갈되는 느낌입니다. 파이고 파여서 더이상 나올 것도 없고, 그나마 남은 껍질도 박박 긁혀서 멍청해지는 느낌이에요. 반가워요.

웽스북스 2008-12-07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프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세상에 도덕과 윤리를 가르친다는 사람들이.. 참 아이러니컬하네요! 이래서 이 사회가 이모냥인가봐요. 모텔 전전이라니. 어후, 어후, 정말 힘들었겠다. 나중에 나오면 싸인해서 주실 거에요?

마늘빵 2008-12-07 23:42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게 도덕윤리이기에 더더욱 그렇죠. 외양과 포장을 좋아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챙겨가는 구조인 듯 합니다. 제가 저자 목록에는 안 오르지만, 나오면 싸인해서 한 권 드릴게요.

비연 2008-12-0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많으셨어요..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힘드셨을 것 같네요.

마늘빵 2008-12-07 23:41   좋아요 0 | URL
^^ 비연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도넛공주 2008-12-0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잘 오셨습니다.원래 힘든 일을 겪은 분일수록 저리도 담백하게 표현하시더군요...

마늘빵 2008-12-07 23:41   좋아요 0 | URL
마음 편히 머물 곳이 없군요. 원래 사회란 것이, 현실이란 것이 이런 건지 아니면 유독 제가 불합리와 부조리와 부정의를 많이 보게 되는 것인지.

2008-12-07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7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8-12-07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학교교과서가 저렇게 만들어지는건 아니겠죠? 어떤 교과서인지 궁금...^^
고생많으셨어요. 일하다보면 세상에 참 아니다 싶은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솔직히 일보다 그런 사람들이 더 힘들잖아요.

마늘빵 2008-12-07 23:40   좋아요 0 | URL
글쎄, 과목마다, 출판사마다, 모두 각기 다르겠지만, 결과물만 접해서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더군요. 이미 다른 교과로부터도 저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일화들을 많이 들어서. 학교 교과서가 저렇게 만들어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_- 저건 정도가 심한 경우라고 보시면 되고.

이매지 2008-12-07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그 쪽 일이 좀 그런 것 같아요.
어쨌거나 힘드셨을텐데 무사히 살아돌아오셨습니다^^;

마늘빵 2008-12-07 23:44   좋아요 0 | URL
이 쪽에 기대를 했는데, 많이 실망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마음 기댈 곳이 없어요.

L.SHIN 2008-12-08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서오세요.^^

마늘빵 2008-12-08 09:27   좋아요 0 | URL
^^ 엘신님도 반갑.

2008-12-08 0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0 1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08-12-08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웰컴백. 고생 많았소. 그런 싸이클로 일했다면 살도 좀 찌고 수염도 좀 나고 그래야 되는데.. 아프님, 그렇게 됐어요? 그런 얼굴이라면 정말 궁금한데!

2008-12-08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8-12-08 09:28   좋아요 0 | URL
살은 좀 찌고, 수염은 그래도 매일 깎아줬다요. ^^ 다시 살빼기 프로젝트.

2008-12-08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tty 2008-12-08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아프님 오랜만이네요. 안보이셔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바쁘셨군요.
건강은 잘 챙기면서 일하신거죠? ㅠㅠ
그나저나 교과서도 누군가가 만든다는 생각을 하니까 무척 신기하네요.
중고등학교 교과서는 왠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아프님 같은 분들의 수고로 만들어졌군요. 생각해보면 당연한건데요...ㅎㅎ

마늘빵 2008-12-08 09:36   좋아요 0 | URL
네 그런대로 버틸만했어요. 이렇게 시간가는줄 모르고 뭔가를 한 적이 없어요. 결과물은 그런대로 그런대로 만족스러운데,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고 그래요.

보석 2008-12-0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자주 뵙겠네요.ㅎㅎ

2008-12-08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8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8-12-08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그런일을 하고 그렇게 지내셨었군요. 이 페이퍼 읽으며 같이 분노하다가 아프락사스님이 다시 이 주제로 말하게 될 페이퍼를 기다리고 있어요.

고생많으셨어요, 아프락사스님.
이제 이곳에서 좀 편히 쉬셨으면 좋겠네요. 당분간이라도.

마늘빵 2008-12-08 20:07   좋아요 0 | URL
페이퍼 곧 써야죠. 쓸 이야기는 많은데, 수위 조절하고 있습니다. :)

2008-12-08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8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Jade 2008-12-08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역시 30대는 체력이 딸리죠? ㅋㅋㅋ

마늘빵 2008-12-08 20:09   좋아요 0 | URL
음 딸리지는 않는데! :p 올해도 이렇게 그냥 가다니. 제이드도 나이를 한 살 먹는다아.

Jade 2008-12-08 21:14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게요 가장 좋을때라는 24살이 이렇게 가네요 >.<

그러고 보니 바람둥이 아프님이 연애 못해서 어째 ㅎㅎ
아, 혹시 하고 있는데 저만 모른건가 ㅎㅎ

마늘빵 2008-12-09 08:53   좋아요 0 | URL
-_- 나 바람둥이 아닌데...

마냐 2008-12-08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숨 돌리고, 체력 보강하시고. 세상에 황당한 일은 더없이 많고...충전할 쉼터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죠. 저도 밥벌이에 바빠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여튼 방가~

마늘빵 2008-12-08 20:09   좋아요 0 | URL
오랫만여요. 부조리와 부정의와 마주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꾸 눈에 보이니 어쩐답니다. -_- 그나마 덜 보려고 이 바닥에 들어온건데.

무스탕 2008-12-0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웰컴!! :)
마지막까지 저자의 이름을 제대로 올렸다가 출판 직전에 아프님 이름으로 바꾸는 계략을 꾸며 보심은 어떨런지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는 현실이네요..
하여간 좌우당간 잘 살아남고 돌아오셔서 무지 반갑답니당~ ^^*

마늘빵 2008-12-08 20:10   좋아요 0 | URL
흐흐. 그러고프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답니다. :)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죠. 꿈만 꿔야죠. 여기서 또 재밌게 왁자지껄 놀아봐야할텐데요. ^^

Arm 2008-12-11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엄청난 위로와 활력이 될 소식을 전해드리지요!!!! ^-^ 하하하~
저 씨알사상 강연회 갔었거든요.
그런데,

두두두두......!!!

다음달 강연회의 연사는 '김.상.봉.' 선생님이시랍니다!
힘나시죠? ^-^

마늘빵 2008-12-11 09:13   좋아요 0 | URL
오 다녀오셨군요. 그렇담 그것도 엠피가? ^^ 담달 꼭 가야겠네요.

아라리요 2008-12-11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으셨네요.
근데, 씨알 사상 강연회는 한달에 한번씩 있나봅니다.
언제 다녀올 기회 있었으면 합니다.^^

마늘빵 2008-12-26 02:07   좋아요 0 | URL
^^ 앗 이걸 이제서야. 네. 씨알 사상 강연회 또 공지 올렸습니다. 있을 때마다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