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하비의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구동회 박영민 옮김)을 우선은 한국어본으로 읽으면서 잘 안 읽히는 것을 영어 원문과 비교하면서 읽었다. 읽다가 읽다가.. 역시 짜증나서 한국어본을 놓고, 영어본으로 읽는다.

번역이 힘든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 책의 번역은 실망이다. 하비의 영어는 그닥 어렵지 않아서 노력만 충분히 했다면 이 보다 괜찮은 번역은 가능할터인데... 오역들을 일일히 지적하며 따지다 보면 한세월이라서. 본격적 리뷰가 아니라, 페이퍼에 올려놓는다.

 

이제부터는 영어로 읽다가, 한국어본을 참조해야 겠다. 힘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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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데이비드 하비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6년 8월
절판


이 책의 나머지 부분들은 ‘정치 경제적 배경’에 대한 검토작업(다소 단순화된 방식으로)을 거친 뒤에, 자본주의 역사 지리 발전의 역동성과 문화생산 및 이데올로기적 전환의 복잡한 과정 사이에서 매우 중요한 중간고리 역할을 하는 ‘공간 및 시간 경험’을 보다 자세하게 살피고 있다.
-12쪽

'오역'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의미가 잘 전달이 안 되는 부분이 바로
'매우 중요한 중간고리'라는 것. 원문에서는 one singularly important mediating link로. 역사 지리 발전의 역동성과 문화생산 및 이데올로기적 전환의 '하나의 남다르게(특별하게?) 중요한 매개하는 연결 정도의 의미가 적확하지 않나 싶다.
'매개'와 '중간'의 차이. '매우 중요한'과 singulary의 차이는 무시하기 힘든 듯.
아래 해당부분의 원문을 적어놓는다.

The rest of the work examines the political-economical background (again, in a somewhat simplified way) before looking much more closely at the experience of space and time as one singularly important mediating link between the dynamism of capitalism's historical-geographical development and complex processes of cultural production and ideological transformation. (iix)

작가들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여 자기지시적 배치를 하는 일은 흔하지만, 레이번과 마찬가지로 겉모습을 이리저리 뒤바꿈으로써 인간 본성의 가변성을 역설한 주장은 충격스럽다.-23쪽

이는 명백히 오역. 원문은
The parallel with Raban's insistence upon the plasticity of human personality through the malleability of appearances and surfaces is striking, as is the self-referential positioning of the authors to themselves as subjects. (7)
'as is'로 연결되는 데, 번역은 역접으로 이었다.

2번째 줄 '포스트모더니즙' 오타.-25쪽

오역은 너무 많아서 지적하다가 포기. 페이퍼 참조. 오타 등만 지적. 오타도 많아서 너무 큰 잘못만 지적.

199페이지 각주 6번 중간에 짤림;-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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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데이비드 하비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6년 8월
절판


삶과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일반적 관점들이 실증적 지식의 증대에 뒤따르는 결과물일 수 없다는 점을, 그리고 우리가 큰 감동을 받고 신성시하는 지고(至高)의 이상들이 타인들이 신성시하는 이상들과 투쟁함으로써 형성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지식의 나무를 먹어치운 한 시대의 숙명이다. -Max Weber-17쪽

아, 그야말로 명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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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라는 어원은 고대 로마 시대에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즉 생산수단과 분리된) '가난한 자유민'을 뜻했던 라틴어 'proletari'에서 유래한다.

반면 노동자(勞動者 -labor worker)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이를 댓가로 임금을 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자를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 (이하 pt) = 노동자라는 등식은, 노동자=프롤레타리아 라는 등식과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 (자본론의 상대적 가치형태에서 이러한 등식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pt는 노동자이다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pt의 재생산은 노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생산수단과 유리된 계급.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서는 임금노동 이외에는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노동자는 pt이다 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이를 댓가로 임금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댓가로 임금을 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자이다. (자본주의의 양극화 테제도 있지만, 결국에 끝끝내 살아남은 소부르들.)

사실 그렇게 따지만, 이건희도 삼성에서 '페이'를 받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라 할 수 있지 않는가. (이건희의 '노동'이 과연 어떠한가는 차치하고, 출퇴근과 뭐 비슷한 것을 할 것이다.)

이건희 같은 오너-자본가가 '임금'을 받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라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삼성전자 사장은 분명 노동자이다.

그러나 이들이 pt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수십억, 수백억대 자산가로 그들의 자산(자본)을 바탕으로 이윤을 얻고 있기 때문에 분명 자본가이다.

즉 노동자이면서 자본가일 수 있다. 노동자이면서 bg일 수 있다.

 

그럼에도 노동자=pt, pt=노동자 임을 강조하는 것. 용어를 전유하려는 시도는 분명 계급적, 정치적 목적(효과)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용어를 정의한 후에 따지는 것은 순전 스콜라적 관심일 수 있다.

결국 정치가, '우리편'의 이익을 달성하는 것이라 할 때, 일정한 경계를 짓고 '우리편'을 '우리'에게 설득시켜서 이를 기반으로 정치적 세를 결집하는 것이라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할 때. 삼성전자 사장진이 와서 우리도 노동자여~ 라고 하는 것.

맑스와 엥겔스가 '모든 인류는 형제다'라는 테제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바꾼 것은 분명 정치적 의미가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래서 노동자=pt, pt=노동자로 개념을 전유하고자 하는 목적과 의도가 있다. 용어의 재정의.

노동자는 바로 pt고 pt는 노동자라고 하는 것.

생각해 보자. 우리가 만국의 '무산자/pt'여 단결하라 라고 했을 때의 효과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의 의미효과는 분명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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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2-27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언>에 있는 규정은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 노동자 계급'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구도 아시다시피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죠. 기인님의 말씀은 '노동자=pt'론은 정치적 효과를 의도한 것일 뿐(마르크스의 의도인가요?) 둘은 구별되어야 한다, 인가요?..

기인 2007-02-2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pt를 노동자의 의미로 쓰는 것 또는 노동자를 pt의 의미로 쓰는 것 모두, 정치적 효과를 의도한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를 혼용하면서(혹은 개념을 전유하면서) 이것이 일치하는 범주처럼 말하거나 정의하는 것의 배후에는 그런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인 2007-02-27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국의 '무산자'여 단결하라, 라고 하면서 만국의 '노동자'를 호명하고 있는 것. 맑스 시대와 지금 시대의 효과는 조금 차이는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무산자는 재산이 있고 없고, 생산수단, 자본의 유무의 문제고, 노동자는 직업의 문제이고 물론 이 둘은 연관성이 있지만, 다른 범주인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pt와 노동자라고 하는 것보다, 무산자와 노동자라고 하면 그것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기인 2007-02-27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노동귀족'과 같은 조금은 극단적인 형태를 고려하지 않아도, 무산자이지 않은 노동자를 상정할 수는 있고, 실제 현실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없지 않지요. 계급이 '생산수단'의 소유여부라고 했을 때도 조금 문제가 있는게, 그렇다면 '부르주아'라는 것은 임금노동을 하고 있건 아니건, 자신의 현재 '재산'으로 재생산을 할 수 있는 사람. 이라고 정의해야 할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노동이 아닌, 자본의 이윤을 통해 이득을 얻는 사람으로 할 지. 등의 문제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닌 '소부르'라는 계급이 상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제하고 '무산자'들만을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양극화로 인해 너희들도 '무산자화'하고 있거나 되어가는 과정의 지연에 불과할 뿐이니까 무산자=노동자, 노동자=무산자 임으로, 만국의 무산자=노동자, 노동자=무산자여 단결하라는 것이 논리적 배경이 아닐까요?

기인 2007-02-27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보면, 무산자의 현실태와 가능태(자본주의 내에서의 필연태?) 합이 노동자 vs 유산자가 되겠네요.

에로이카 2007-03-01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안녕하세요.. ^^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의 한 부분이 도움이 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 이진경이 임노동자 계급과 프롤레타리아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를 다루는 부분이 있어요 (235쪽 이후, 혹시 관심 있거든 보시고, 책이 없다면 제가 밑줄긋기 해놓은 게 있으니 한번 찾아보세요..). 저는 사실 이진경이 "이 시대의 프롤레타리아(소수자 / 비-계급)는 이 시대의 부르주아지(다수자 / 계급)를 뺀 전부다"라는 주장이 별로 말해주는 것도 없고, 이래저래 문제도 많게 들려서 별로 수긍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 240-1쪽을 보면 발리바르가 맑스가 <자본>에서 어떻게 프롤레타리아와 임노동자계급을 구분해서 썼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와요. 프롤레타리아트는 기인님께서 아시는 바대로 무산자입니다. 하트와 네그리는 Vogelfrei라고 부르고요...

제 생각에 님께서 혼란스러워 하시는 지점은 "1848년 당시 혁명적 시국에서 정치적 팸플렛이었던 <공산주의 선언>에서 접합되어 동일시되었던 프롤레타리아와 임노동자가 과연 오늘날에도 동일시될 수 있는가?" 하는 지점인 것 같아요.. 맞나요? ^^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임노동자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라는 것이 이진경의 입장이고, 저는 잘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당시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나 가능했던 현실적 접합 (혹은 정치적 구성)을 과연 이 시기에 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입니다. 거기에도 어떤 지혜가 있겠지만, 21세기의 현실을 19세기의 언어로 재단하기에는 무리입니다. 쫌 심하게 말하면, 불행히도 "우리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 좌파들의 관성이고 사대주의입니다.

이건 그냥 제 짧은 생각이니 괘념치 마세요...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인 2007-03-01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에로이카님 안녕하세요. :) 흠 사실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라기 보다는, 무산자=임노동자라고 호명하는 배후에는 정치적 의도성(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임노동자와 무산자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사실 '프롤레타리아'와 '무산자'도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혁명적 주체성의 여부로 나뉠 수도 있습니다. 즉 대자적 계급으로서, 정치적 계급으로서의 pt와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무산자로요.
에로이카님 말씀처럼 임노동자=무산자라고 호명했던 당대 정치적, 이론적 배경이 물론 있었고, 지금도 그게 통용될 지는 정말 미지수입니다. ㅋ 그러니까 공부해야 되는 것이겠지요.
요즘은 조합주의에 관심이 많은데. 베네주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망으로 삼을 수 있을지. 관심만 갖고 있는 수준입니다. 빨리 이 부분을 공부하고 싶어욧!
(현실에 억매인 -_-;;; ) 어쨌든 좋은 지적해주셔서, 페이퍼로 따로 정리하겠습니다.
 
 전출처 : 이잘코군 > 무조건 사형제 폐지?(조정래)

2007. 2. 27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SERIES/108/192896.html



[조정래칼럼] 무조건 사형제 폐지?

» 조정래/작가·동국대 석좌교수
다섯 사람이 작당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돈을 뺏었습니다. 그렇게 죽인 사람이 대여섯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죽인 사람들은 그들과 아무런 감정도 없었던 전혀 일면식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좀 유식한 말로 하자면 그들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살인행위를 자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이 목표로 한 액수는 수십억원이었다고 합니다. 10억원을 모으기 전에 대여섯을 죽이고 잡혔기에 망정이지 …. 만약 잡히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꿈을 실현시키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까요. 이건 어떤 추리소설이 아닙니다. 막연한 상상도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잊었을지 모르지만 분명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형의 사건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사형제 폐지가 세계적 조류라고 합니다. 국제기구인 유엔이 그 결의를 했고, 세계 여러 나라 종교단체들이 그 운동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민생법안 통과에 아무 관심도 없는 이 나라 국회에서도 엉뚱하게 그 문제에는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민주주의와 함께 인도주의는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최상의 창조물이고 지고한 아름다움입니다. 그 인도주의가 피워내고자 하는 꽃송이 중의 하나가 ‘사형제 폐지’입니다. 그러나, 사형제 폐지가 세계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20여년 전부터 저는 작가로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지만, 그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좀 생각해봅시다. 앞에서 예로든 다섯이 대여섯 명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인 사람이 그뿐일까요. 그들은 그 유가족들까지 ‘간접살인’했습니다. 유가족들이 받은 상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죽음으로 어린자식들의 인생이 망쳐져버렸다면 그보다 큰 겹살인은 없을 것입니다.

‘사형제 폐지’는 그런 사람들까지 살려주자는 것입니다. 그 사건의 범죄자들은 모두 사형당했다고 대들지 마십시오. 앞으로도 그런 사건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인도주의는 모든 사람의 인권과 목숨을 ‘내 목숨처럼’ 귀히 여기고 존중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되는데 닥치는 대로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사형제가 있어도 살인이 줄었다는 증거가 없다. 죄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다.’ 이것이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분들이 내세우는 이유입니다. 그지없이 인도적이기는 하나 좀 단순하고 무책임합니다.

그럼, 사형제가 없어져도 살인이 늘지 않는다는 보장을 무한책임으로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죄인들이 진심으로 회개한다고 하는데, 그 ‘진심’의 잣대가 무엇이며, 죽어간 사람들의 억울한 인권은 누가 책임지는 것입니까. 또한 유가족들의 통한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사형제도의 악용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적 제거용이나 통치수단의 하나로 쓰는 경우입니다. 인류의 긴 역사를 통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형제도의 정치적 악용은 끝없이 자행되어 왔습니다. 저도 사형제 폐지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신중하게 경우를 구분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혜와 슬기는 그 두 경우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법은 구속인 동시에 우리의 공동체를 엮어가는 울타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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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27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리적으로 치밀하지는 않네요. 조정래 선생이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는 의미에서 퍼다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