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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식 진보주의를 위하여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주의’를 이론 없이 곧장 실천으로 들어간 ‘진보주의자’…한국 지식계의 축복, 그의 엄격한 책임 윤리가 곳곳에 스며드는 세상이 오길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께 질문을 하나 드리겠다. 민주노동당(민노당)이 창당 기념일 행사로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여론 형성에서 민노당의 발전과 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지식인에게 감사장을 수여한다면, 1순위로 누구를 꼽겠는가?

 

가장 효과적인 민노당 지지

 

나는 고종석이다. 고종석의 반열에 오를 만한 다른 지식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이런 주장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 고종석이 펴낸 <바리에떼: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개마고원)이라는 책을 읽기를 권한다. ‘사람’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고종석의 ‘복잡성’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아니 무심코 읽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나는 자칭 ‘고종석 전문가’로서 그가 얼마나 ‘복잡한 사람’인지에 대해 이제부터 예비 지식을 드리고자 한다. 고종석에 대한 칭찬도 비판도 아니다. 담담하게 해부해보는 것이다.

 


△ 고종석은 진보마저도 책임 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래서 선뜻 “나 진보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다.(사진/ 한겨레 장철규 기자)

고종석은 “개인적으로 나는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나는 진보 정당의 지지자가 아니다”(203쪽)라고 했다. 고종석은 진보주의자가 아닐뿐더러 집단주의를 혐오한다. 그는 “만국의 개인들이여, 흩어져라! 흩어져서 싸우라! 민족주의의 심장에, 모든 집단주의의 급소에 개인주의의 바이러스를 뿌려라!”(30쪽)라고 선동적인 개인주의 선언을 한 바 있다. 고종석이 낙관적 열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나는 염세주의자에 가깝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탐욕과 포악과 비굴에서 사람에게 맞설 만한 동물이 있을지 모르겠다”(291쪽)고 털어놓았다.

 

이 정도면, 고종석을 잘 모르는 분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런 사람에게 왜 민노당이 감사장을 줘야 한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고종석만큼 효과적인 민노당 지지를 역설한 지식인은 찾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이다.

 

민노당 당원이거나 당원은 아니더라도 민노당 색깔을 가진 진보적 지식인들은 평소 글쓰기 활동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민노당 당원들도 잘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로 논문식 글을 쓰는 지식인들이 다수다. 대중적인 글을 쓰는 지식인들도 있지만, 이들은 보수(자유주의 포함) 정당 비판에만 몰두한다. 보수 정당 비판이 곧 민노당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충분히 입증된 것 같은데도, 이들은 왜 민노당을 지지해야 하는지 겸손하고 간곡한 자세로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보수 정당 지지자들에 대한 호통, 야유, 조롱이 주요 메뉴다. 비극은 많은 민노당 당원들이 그걸 말리면서 “손님 쫓아내지 말라”고 고언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고 속 시원해라” 하면서 즐긴다는 사실이다.

 

호통, 야유, 조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차분하고 정중한 설득보다는 그게 더 필요할 때도 있고 효과를 낼 때도 있다. 문제는 시종일관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져 본말이 전도되는 사태다. 나를 위한 진보인가, 민중을 위한 진보인가?

 

고종석은 시종일관 겸손하게 민노당 지지를 설득한다. 그는 한국 사회의 극우 편향을 개탄하면서 ‘이념적 정상화’를 위해 자유주의자들이 민노당에 표를 던져야 한다고 타이르고 호소한다. 이 책에도 그런 호소가 나와 있지만, 고종석이 정치를 주제로 쓴 많은 글엔 명시적·암묵적인 민노당 선전이 들어 있다.

 

고종석이 묘한 사람인 건 분명하다. 한국 사회의 야만에 대해 그 어떤 진보주의자보다 더 진보적 의분을 표출해왔으면서도, 자신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니 말이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고종석의 소설집 <제망매>에 쓴 발문에서 고종석의 묘한 이념 지향성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한국형 진보주의의 리트머스 시험지

 

“그는 우리나라의 어떤 ‘좌파들’보다도 더 좌파적이었고, 어떤 ‘우파들’보다도 더 우파적이었다. 인간과 세상의 진보를, 아니 진보의 험난한 좌절들을 진실로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그는 충실한 좌파였고, 많은 좌파들을 부끄럽게 만들 줄 안다는 의미에서 또한 충실한 우파였다.”

 

사회과학적 분석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고종석은 한국형 진보주의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진보 세력이 ‘고종석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선 큰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 시험의 이름은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 정립 문제다.

 

개인주의는 오랫동안 사회주의와 갈등 관계를 유지했다.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사람들도 개인주의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해 유보적 자세를 취하곤 했다. 예컨대,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사회주의에 공감했지만 사회주의가 개인과 천재에 반대하는 것을 싫어했다. 가치 있는 것은 오직 개인뿐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그런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1891년에 낸 <인간의 영혼과 사회주의>에서 “우리가 사회주의를 통해 이르고자 하는 것이 개인주의”라고 주장했으며, 조레스는 1898년에 낸 <사회주의와 자유>에서 “사회주의는 완전하고 논리적인 개인주의”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를 개인주의의 논리적 완성으로 보았으며, 빅토르 바슈는 1904년에 낸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에서 “일관성 있는 개인주의는 사회주의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알랭 로랑의 <개인주의의 역사>)

 


△ 고종석은 참여정부의 파산을 염려해 열린우리당 지지를 역설하고 다른 대안으로 민주노동당 지지를 제시했다. 2003년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개최된 열린우리당 창당대회.(사진 / 한겨레 김정효 기자)

한국에서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주의’를 시사한 이는 한양대 교수 임지현이다. 그는 “낡은 전통에 가위 눌려 있는 남한의 좌파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에서만 건설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회한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것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론 없이 곧장 실천으로 들어간 대표적 인물이 바로 고종석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종석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 가운데 사회주의자는 얼마나 되겠는가? 고종석은 진보주의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고종석은 한사코 자신이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개인주의와 진보주의가 양립하지 못하는 한국의 진보주의 풍토를 정면 돌파할 뜻이 없기 때문일까? 나는 그게 고종석의 개인주의가 요구하는 ‘책임 윤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책임 윤리가 박약한 편이다. 책임 윤리란 어떤 일을 할 때 나타난 결과뿐만 아니라 예상 가능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윤리의식을 말한다. 옳은 일이니까 결과에 개의치 않고 무조건 밀어붙인다는 진보주의는 책임 윤리가 없는 모험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선 곧잘 모험주의가 진보주의로 통용되기도 한다. 독재정권 시절에 형성된 습속이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지속된 탓이다.

 

이념을 떠나 일상의 차원에서도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공직을 맡는 걸 두려워한다. 책임 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비극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공직자, 특히 고위 공직자들의 책임 윤리 부재 또는 박약을 들겠다. 대부분 고위 공직을 출세로 생각한다. 그건 ‘출세’가 아니라 ‘봉사’하는 거라고 반박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봉사하기 위해 치열한 로비를 하고 남이 자신보다 좋은 봉사 기회를 갖게 되면 배 아파하고 헐뜯는 사람들이 왜 그리도 많단 말인가?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함부로 공적 단체를 만들지도 않는다. 공공의 목적을 위한 단체면 성공 가능성을 검토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만들고 보는 게 우리 시민사회의 풍토다. 하다 안 되면 때려치우면 그만이다. 책임? 공익을 위한 이타적 활동에 무슨 책임?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이타성을 면죄부로 내세우는 그런 반문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책임 윤리 유전자를 가진 고종석이 영원히 공직을 맡거나 상시적인 공적 단체를 만드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여태까지 내가 분석해온 고종석은 그렇다는 것이다.

 

선뜻 “나 진보요!”라고 하지 않는 이유

 

고종석은 진보마저도 책임 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선뜻 “나 진보요!”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진보를 고위 공직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백철의 평가를 다시 읽어보라. 가슴에 와 닿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고종석은 과격한 개인주의 선언을 하였지만, 나는 실천에선 내가 고종석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이기주의에 더 충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2003년 12월 나는 고종석과 민주당 분당 문제로 논쟁을 한 바 있다. 이와 관련된 글이 <바리에떼>에 실려 있으므로, 이 이야기를 좀 해보자.

 

민주당 분당에 비판적이었다는 점에선 나와 그의 생각은 같았지만, 전체 또는 집단을 생각한다는 점에선 고종석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고종석은 “가난한 부모가 창피하다며 집을 뛰쳐나갔다가 세상에서 따돌림당하는 자식을 거두어 보살피는 어미의 심정으로 호남 유권자들은 신당을 감싸야 한다”(187쪽)는 주장을 폈다.

 

나는 이런 ‘부모·자식·어미’론이 부적절한 유추라고 생각한다. 고종석이 ‘참여정부의 파산’을 염려해 열린우리당 지지를 역설하고, 다른 대안으로 민노당 지지를 제시한 건 나로 하여금 “이 양반 개인주의자 맞나?”라는 의문을 갖게 했다. 고종석은 나의 주장이 ‘민주당 지지’를 ‘암시’한다고 해석했지만, 나는 “이 양반 진짜 개인주의자 맞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혹 ‘대안 중독증’이나 ‘독수리 5형제 신드롬’에 빠져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했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노무현의 해체주의는 ‘창조적 파괴’라고 예찬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그건 노무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란 말이냐고 내심 쏴붙였다.

 

나는 열린우리당은 내가 반대한 정당이므로 열린우리당이 파산하건 말건 아무런 책임 의식이 없는 반면, 고종석은 대선에서의 투표에 대한 책임을 말하면서 노 정권에 대한 책임 윤리마저 역설하는 게 아닌가! 고종석이 자유주의자요, 개인주의자라고?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노무현은 자신의 약속을 뒤집고 민의를 폄하하면서 결과야 어떻게 되든 모험주의라고 불러주기조차 어려운 도박주의로 치달리는데도 고종석은 그런 노무현까지 어미의 마음으로 껴안자고 역설했으니, 나로선 “오지랖도 참 넓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종석은 “노무현이 아무리 나빠도 최병렬이나 이회창보다는 수백 배 덜 나쁘고, 전두환보다는 수만 배 덜 나쁘다”(199쪽)는 논리를 내세워 특검법 통과에 한나라당과 공조한 민주당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나는 여기서 고종석의 평소 ‘쿨함’이 사라졌다는 게 흥미롭다. 이는 그가 ‘개인’보다는 집단적 ‘대의’를 앞세운 탓이리라.

나도 평소 대안을 어지간히 강조하는 편이지만, 잘못된 것을 비판함에 있어서 늘 그 결과와 대안까지 미리 생각하고 비판에 임하진 않는다. 그런데 고종석은, 비록 그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단어를 혐오할망정, 사실상 국가와 민족을 염려하는 지극한 애국심을 발휘했으니 이 어인 일인가.

 

<바리에떼>엔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 대한 성실한 반론이 실려 있다. 87쪽에서 137쪽에 이르는 긴 글이다. 고종석 스스로 “식민지 시기의 역사적 복권을 통해 민주주의 운동의 정통성을 흔들려는 온갖 ‘경제론’들의 급소를 이 글이 비교적 정교하게 움켜쥐었다고 나는 판단한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 이상이다. 최근 홍수처럼 쏟아져나오고 있는 식민지 시절에 대한 모든 논란에 대해 명쾌한 교통정리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종석은 복거일을 내내 비판하지만 그의 비판은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하다. 나는 복거일에 대한 과분한 대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복거일은 철저한 사회진화론자이며,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니 보수주의니 하는 건 편의적으로 동원되는 것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고종석이 복거일의 자기 교정 가능성에 대해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건 자신이 복거일로부터 배운 점이 있다는 것에 대한 책임 윤리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닌가 의심하곤 한다.

 

내려다보는 일부 진보주의자에게

 

고종석과 같은 희귀한 지식인이 있다는 건 한국 지식계의 축복이지만, 내가 정작 높이 평가하는 그의 미덕은 매사를 깊이 꿰뚫어보는 시력이다. 내 기준으론 보아선 과도할망정 고종석의 엄격한 책임 윤리가 곳곳에 스며드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물질적으론 낮은 곳에 있을망정 정신적으론 높은 곳에 서서 진보 아닌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일부 진보주의가 고종석형 진보주의로 교체되는 그런 세상은 언제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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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7-03-10 0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진보가 바뀌기를 바라지만, 정작 자기가 그 안으로 뛰어들어가 바꿀 생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러기엔 또 자기가 세워놓은 벽이 너무 높기도 하겠지요... 전 강준만 선생이 진보를 내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기인 2007-03-10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강준만 선생은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하시는 분이죠. ^^;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키는 지도 궁금하네요. 별로 '레떼르'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도 같고요..

릴케 현상 2007-03-10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려 본다^^ 는 표현 재밌는 것 같아요. 보통 사람들이 진보주의자들에게 받는 느낌이 그런 것 아니던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기인 2007-03-10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계몽성이 거부감이 들 수 있죠. 그게 어떻게 해결되야 할지는 참...
 
 전출처 : 딸기 > 프랑스 대선에서 '이변'이 일어날 것인가

프랑스 대선에서 이변이 일어날 것인가.

좌·우파 후보들 간 각축으로 진행되던 대선 구도에 중도파 다크호스가 급부상하더니, 이젠 대권을 넘보고 있다. 8일 발표된 한 여론조사에서는 집권 우파 국민행동연합(UMP) 후보 니콜라 사르코지와 범야권 좌파 후보인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이 모두 중도파 프랑수아 바이루 후보에 패배할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좌우 양 진영은 예상 밖 `바이루 태풍'에 초긴장하고 있다고 르몽드, BBC, 뉴욕타임스 등이 일제히 보도했다.


바이루가 이긴다?


르몽드지 보도에 따르면 이날 공개된 여론조사기관 CSA의 대선 후보 지지율 조사에서는 사르코지 26%, 루아얄 25%, 바이루 24%로 각기 1%씩의 차이만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차범위가 3% 이내임을 감안하면 세 후보 지지율엔 거의 차이가 없는 셈이다.

같은 날 발표된 BVA 조사에서는 사르코지가 29%로 다른 두 후보보다 조금 높았다. 이보다 사흘전 실시된 LH2 조사와 입소스 조사, TNS-소프레스 조사에서 바이루의 지지율은 18∼20%였는데 하루가 다르게 치고 올라간 셈이다.

더 놀라운 것은 바이루가 결선에 진출할 경우 좌·우 후보 모두를 제칠 것으로 전망된다는 점. BVA 조사에서 바이루는 사르코지, 루아얄 중 어느 쪽과 붙든 10% 가까운 차이로 승리를 거둘 것으로 예상됐다. 파리마치 조사에서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다. 사르코지와 루아얄을 번갈아 비춰주던 프랑스 미디어들은 이젠 바이루로 초점을 옮겼다. 이번 주에 나온 시사잡지들은 하나같이 `제3의 인물 바이루'를 커버에 싣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그동안 바이루가 루아얄의 표를 갉아먹는다는 생각에 은근히 여유를 즐겨운 사르코지는 뒤늦게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모든 여론조사들에서 부동층이 25∼45%에 이르고 있어, 대선 향방은 말 그대로 오리무중이다. 다음달 22일 1차 투표 때까지 후보들은 한 차례 말실수나 구설수에도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정당보다 인물, `색깔'보다 `교감'


사르코지와 루아얄 캠프는 `바이루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느라 분주하다. 당초 양측은 바이루의 인기가 거품에 불과하며 대선전이 진행되면 결국 유권자들은 왼쪽과 오른쪽 중 하나를 택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때문에 양쪽은 중도파 유권자들을 끌어들이려는 노력보다는 `자기 표 다지기'에 더 열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사르코지가 계속 이민자 범죄 문제를 거론한 것이나 루아얄이 에어버스 감원 반대와 최저임금 인상 등을 공약한 것이 그런 예들이다.

반면 `농가 태생, 교사 출신, 평범한 아버지'임을 내세운 바이루는 경쟁자들과 정반대의 자세를 취했다. 스테디셀러 역사책 저자이면서 여전히 교외에서 자기 밭 농사를 짓는 모습으로 유권자들의 감성에 호소한 바이루는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중도파'임을 줄곧 강조했다. 정치경력 20여년에 1990년대 교육장관을 지낸 각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 얼굴'로 자신을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좌우 대립보다 `생활의 이야기'를 원하는 유권자들에게 다가서는데 성공한 것은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우며 화려한 미디어전을 벌였던 루아얄이 아니라 소박한 바이루였던 것.

뉴욕타임스는 "보모같은 좌파와 범죄에 부르르 떠는 보수주의자 사이에 중도파 후보가 떠오른 것"이라면서 "정당 위주 정치, 거대정당들의 헛된 약속들에 지친 미국 유권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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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_세상] “가난, 생각하면 슬퍼지는 것”

마들창조학교에서 만난 꿈 많은 금슬이

명숙, 미류
172센티미터라는 유난히 큰 키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금슬이. “첫번째 꿈은 모델이에요. 두 번째는 사육사, 세 번째는 공부방 선생님요. 뭘 준비해야 할 지는 잘 몰라요. 그냥 텔레비전에 나오는 모델들 걷는 거 봐요.” 꿈만큼 고민도 많다. “중3이 됐는데 친구들 잘 사귀고 싶어요. 1, 2학년 때처럼 자연스럽게 친구들 사귈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올해는 유난히 아는 애가 없어서 고민이에요.”

금슬이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이랑 피씨방도 가끔 들르고 공부방에서 공부도 하는”, 쉽게 볼 수 있는 중3 소녀다. 금슬이처럼 사람은 성장하면서 누구나 청소년기를 거치게 된다. 그래서 청소년은 사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존재라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에 대한 권리 보장은 거의 없다. 그들은 ‘가족의 보살핌’의 대상일 뿐, 권리의 주체에서 배제되어 있다. 청소년은 자신들의 가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마들창조학교 금슬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 올 때마다 불이 꺼지는 화장실

금슬이네는 엄마 아빠가 모두 일하신다. “엄마는 잠깐 아침에 봐요. 엄마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밥도 못 드시고 일하러 나가세요. 낮에는 어떤 교회의 점심을 해주는 일을 하고 그게 끝나면 호떡장사를 하느라 밤 12시에야 들어오세요. 아빠는 전파상 일을 해요. 요즘 일이 많지는 않지만 한번 나가면 다음 일도 받아오는 편이에요.” 이렇게 열심히 사는 금슬이네 집이지만 가난은 쉽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더구나 이런 엄마 아빠마저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 거 같냐는 물음에 금슬이는 “…밥도 못 먹고 공부도 못하고…할 수 있는 게 없지요”라며 잠시 말을 멈춘다.

그녀는 어떤 때 가난을 느낄까. “돈이 필요해서 집에 갔는데 돈이 없을 때랑, 친구들은 지갑에 기본 3천원은 있는데 난 없을 때요. 그리고 음...가끔 가난을 느끼는 곳은 집이에요. 지금 집은 (언니 둘과 남동생 하나, 엄마, 아빠 6인 가족이 살기에) 조금 좁아요. 언니 둘과 오랫동안 같이 방을 써서 내 물건을 옷 속에 잘 숨기니까 크게 불편하지 않아요. 하지만 친구를 데려오기 힘들어요. 어쩌다 친구들을 데려와도 한 두 시간 후에 언니들이 한 명씩 들어오니까. 그러니 맘 놓고 친구와 방에 있기 불편하지요. 참, 그리고 비오는 날. 비올 때마다 불이 꺼지는 화장실을 보면 우린 정말 가난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밥을 못 먹고 살지는 않으니까 (지금의 상태에) 불만은 없지만 그래도 집이 나아지면 좋겠어요. (형편이 나아진다면) 지금보다 좀더 넓은 집에서 살고 싶어요.” 친구도 데려올 수 있고 정도 더 붙을 것 같은 집에서 가족들과 건강하게 사는 것이 금슬이의 바람이다. “(나는) 아침을 챙겨 먹지는 않는데 아프지는 않아요. 1년에 감기 한번 정도 걸릴까? 그 정도요. 근데 아빠가 술 담배를 많이 해서 걱정돼요. 간에 피가 차는 것은 아닌지……. 정기검진 같은 건 못해 봐요.” 평소 아빠와 친하게 얘기하는 편이 아니라 더욱 걱정이 된다고 한다.

“가난, 생각하면 슬퍼져요”

“음...생각하면 슬퍼지는 거요.” 가난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렇게 얘기한다. “가끔 예쁜 연필도 사고, 예쁜 양말도 사고 싶어서 사요. 사고 나면, 몇 천원씩 없어지고...그러면 내가 너무 막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생하는 엄마 아빠 생각나니까 슬퍼져요. 그런데 그래도 사고 싶어져요.” 금슬이에게 그 물건들은 ‘갖고 싶은 것’이면서 ‘욕심을 부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금슬이는 또래들이 좋은 물건을 갖고 다닌다고 마냥 부러워하는 철없는(?) 아이는 아니다. 사실, 사회는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없는 일을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철들었다’고 말할 뿐이니 금슬이가 좀더 철없어도 좋지는 않을까. 헐벗고 못 먹어야 가난은 아니다. 누구나 누리고 있는 것을 욕심조차 부리지 못하는 현실도 이 시대의 가난이 아닐까.

“사회...왠지 막막하고, 잘할까 두려워요”

중3이니 진학에 대한 고민도 많다. “큰언니는 공부를 잘해서 성암여고에 갔어요. 올해 대학교 들어갔는데 등록금 버느라 바빠요. 알바하다가 새벽 두시가 돼야 들어오거든요. 엄마는 저더러 (언니와) 같은 학교 가래요. 언니 교복값 아깝다고. 나도 가고 싶기도 한데 언니만큼 공부를 잘하지는 못해요.”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는 것이 그리 싫지는 않다. 친구들은 “실업계 가서 열심히 공부하면 대학가기 더 쉽다”며 지지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이 남는다. “얼마 전에 대학등록금이 얼마인지 알아본 적 있거든요. 천만원이나 되는 학교도 꽤 많았어요. 거의 몇 백이래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몇 백만원이 넘는 그 많은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 겁나요.”

그래서 금슬이에게 사회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커다란 벽이다. “사회…왠지 막막하고, 잘 할 수 있을까 두려워요.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성공한 사람 많잖아요. 하지만 전 왠지 못할 것 같아요.” 그녀가 두려운 이유 중 하나는 게으름이다. “저는 좀 게을러요. 집에서도 엄마 힘든 거 보면 청소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안 해요. 공부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잘 안돼요.” 집에서 아빠와 언니, 동생들의 식사를 준비하기도 하고 공부방에서 즐겁게 공부하기도 하는 그녀가 스스로 게으르다고 자평하는 것은 “가난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사람은 능력 있고 부지런한 사람들” 뿐이라는 사회의 시선에 자신을 되비쳐보기 때문이다. 가난을 무능하거나 게으른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는 편견은 청소년인 그녀에게도 너무나 귀에 익은 이야기다. 이야기의 끝자락에서야 그녀는 가난한 것이 모두 당사자의 책임이라고 하면 억울하겠다고 끄덕인다.

“배우는 것도... 공연 보는 것도 마음껏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 문제가 많아요. 나라가 힘 있는 사람 위주로 법도 만드는 것 같고.” 어떤 문제를 느끼냐는 질문에, 말을 꺼내다 말다 하기를 한참 하더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며 포기하고 말았다. 아직 그녀에게 사회는 멀다. 자신의 삶 어딘가에서 사회와 맞닿아있음을 느끼지만 가족과 학교라는 울타리 바깥은 청소년에게 허용되지 않다 보니 막연하기만 하다.

그런 그녀에게 만약 사회가 가족이 아니라 청소년에게 직접 지원을 해준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물어보았다. “교육비를 지원했으면 해요.” 하고픈 공부를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녀의 바람은 학교 교육에서 멈추지 않는다. “공연이나 전시도 청소년들이 마음껏 구경하도록 하면 좋겠어요. (공연이나 전시를) 좋아하거든요. 저번 여름에 인체의 신비전을 봤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그리고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니까 장학제도를 얘기한다. 공부를 썩 잘하지 못하는 금슬이는 “한 2백명쯤은 장학금을 주면 좋겠어요” 하며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는다.

아직 친하지 않은 단어, 인권

“그런데 인권이 뭐예요? 전 아직 인권과 친하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이야기를 마무리할 무렵이 돼서야 금슬이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금슬이에게 ‘인권은 말 그대로 사람답게 살 권리’이고, 건강하게 살 권리, 살만한 집에 살 권리, 배우고 싶은 것들 배울 권리, 이 모든 것들이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잘사는 사람들이 못사는 사람들 도와주다가 망하면 어떡해요?” 인권이 여전히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금슬이도 사람답게 살 권리가 사회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라고 느껴볼 새가 없었나보다. 하지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녀는 “그런 (인권이 보장되는) 세상이 언제 오겠어요?” 하며 얼굴을 찌푸리다가도 “빨리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어요.” 하고 설레어했다. 그런 세상이 오면 그녀의 고민도 많이 줄어들 테니 말이다.

가난을 생각하면 슬퍼진다는 금슬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가난으로 인해 빼앗긴 청소년의 권리에 무감한 사회의 모습을 보게 된다. 청소년이 자신의 미래를 그릴 때 생각해야 하는 수많은 조건 중에 ‘빈곤’은 가장 큰 족쇄이다. 어마어마한 등록금과 교복값 때문에 배우고 싶은 욕구들을 눌러야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빈곤으로 인한 박탈감을 많이 느끼지 않아 다행이지만, 빈곤으로 인해 자기 미래를 만들 수많은 기회를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족쇄가 아닐까.

“공부방에 처음 온 것은 재작년 10월이에요. 엄마가 가라고 해서 왔어요. 공부방에 오면 모두 좋아요. 선생님들도 예쁘고 착해요. 학교와 가까워서 자습서도 빌린 적도 있어요. 그래도 무엇보다 좋은 것은 선생님들이에요. (어른들이지만) 말도 잘 통해요.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좋은 얘기도 많이 해줘요 ” 그래서인지 공부방 선생님은 금슬이가 되고픈 미래 중 하나이다. 아마도 그런 꿈을 가진 게 된 것은 “얘기도 잘 들어 주고 잘 말해주는” 선생님들을 통해 어렴풋하게 인권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권오름 제 44 호 [입력] 2007년 03월 07일 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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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에로이카 > Communist Manifestoon

http://www.youtube.com/watch?v=j1oGIffyVVk

 

영어로 되어 있어서 좀 그렇지만, 정말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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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번 대치동에서 논술 과외를 했었는데, 최근에 부쩍 늘은 자의식이

"너 지금 뭐 하고 있냐? 이것이야말로 이론과 실천의 괴리요, 입으로는 맑스를 말하면서, 몸으로는 자본주의를 누리는 것이다!"라고 계속 뼈아프게, 곤란하게 물어오던 차에,

때마침

1. 공부하고 싶던 주제를, 함께 공부하고 싶은 선배들이 함께 세미나를 토요일(학원 강의하는 날)에 하자고 했다.

2. 학교 도서관이 휴학생에게도 이용가능하게 되어, 책값을 많이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3. 하루 종일 공부해도 공부량이 얼마 안된다는 것을 자각했다. 소년이로학란성! 공부 좀 더 열심히!

4. 영어 공부랑 일어 공부를 더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 한 단체(?)에서 맑스주의 문예이론 세미나 간사를 맡게되었다.

 

결국! ㅋ 일주일에 5시간(강의 3시간 오고가고랑 준비시간 합해서) 정도 투자하는 학원(그러나 반대급부로 나름 융택하고 안정적이게 했던;;;) 때려쳤다. 그래도 시급 300원 노가다로 먹고 살수는 없는 일, 은사님 따님 영어 과외랑 아빠 친구 아들 논술/교양 과외를 하고 있는데, 이건 뭐 자의식에서 별 말 안 한다;; ㅋ

홀가분하다. 역시 최소한으로 벌고, 최대한 방에서 뒹구는 것이 장땡이다!

문제는 역시, 과외는 정말 불안정한 비정규직이라는 것;;; 열심히 가르쳐서 안 짤려야 하는데 ㅡ.,ㅡ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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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7-03-08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멋져요

파란여우 2007-03-08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은 구하되, 과하게 착취하지 않는 것.
달리 방법이 없다고 봅니다. 다시 맑스로 돌아갈 순 없지요.
그러기엔 기인님의 몸이 자본의 달콤한 맛을 너무 잘 알잖아요.
소년이로학란성! 에 따라서 복창 한 번 하고 가요. 찡긋~^^*

Mephistopheles 2007-03-08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맑스주의자라기보다는 도인이나 선인의 경지로 보여집니다..ㅋㅋ ^^

이잘코군 2007-03-08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님보다 자본주의적인지라 -_- 제가 그 상황에서라면 그러진 못했을 것 같습니다. 글쎄 그 학원 논술이란 것이 마음에 찔리는건지는.

해적오리 2007-03-08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홧팅!

기인 2007-03-09 0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ㅎ 다시 맑스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정신을 배운다는 것이겠죠. 자본의 달콤한 맛이라는 것은 몸의 문제이니, 이 또한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맑스가 추구한 사회와 금욕적 사회는 많이 동일시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ㅋ 저도 금욕주의자 아니에용~ㅎㅎ 물론 '맑스주의'는 위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종교처럼 되면! 맑스를 선생님으로 모셔야지, 우상화하면 어떻게 되는 지 우리는 역사를 배우는 것이 있어야겠죠.
메피님/ ㅋㅋㅋㅋ 뭐가용~ 단지 앞으로 집에서 5시간 더 뒹굴거린다 뿐인데;;
아프락사스님/ 뭐랄까. 계층 또는 계급 재생산의 일원이 된다고나 할까.. 예전에 어느 활동가 분의 글을 퍼 온적이 있었는데, 사교육을 하면서 활동을 하는 이율배반적인 것을 말이에요. 더군다나 '대치동'에서 부잣집 애들에게 더 좋은 학교 가라고 논술 가르치는 것,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어요...
layla님, 해적님/ 감사합니다. ㅋ 뭐 멋지고 화이팅 까지는 아니에용;;

seeker16 2007-03-14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 아끼려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건 우리 똑같구나. 흐흐. 오늘도 집 밖을 한 발자국도 안 나갔는데, 역시 공부 능률은 좋지 않아!

기인 2007-03-15 0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