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yoonta > 조승희씨의 희곡 작품



인터넷에서 발견한 조승희씨의 희곡 한 편이다..

내용은 읽어보면 알겠지만 한 stepson이 자신의 stepfather에게

반항하는 스토리인데 murder랄지 kill 이라는 단어들이 속출한다.

sexuality와 관련된 대목도 눈에 뜨인다...

정상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이 썼다고 보기 힘든 내용이다.

내면의 분노와 폭력이 위험수위로 보일 정도다..

그의 대학강사가 이 play를 보고 그를 매우 걱정하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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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yhome.naver.com/deadbird99/political_compass_frame.htm

 

 

Your political compass

Economic Left/Right: -6.25
Social Libertarian/Authoritarian: -6.31

Authoritarian
Left





















Right
Libertarian
 

흠.. 저는

Economic Left/Right: -6.25
Social Libertarian/Authoritarian: -6.31

 

이렇게 나오네요;;;

역시;; 경제적 좌파이고 사회해방론자?

ㅡ,.ㅡa

 

심하게 왼쪽이고, 심하게 아나키틱한데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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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4-20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해요. 님보다 아주 조금 더 오른쪽으로, 위쪽으로 였던거 같은데. 아님 거의 차이 없거나.

비로그인 2007-04-20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uthoritarian
Left





















Right
Libertarian

 

저랑 비슷하군요. 후-    (간디, 달라이라마, 만델라님과 같은 성향, 영광이네요)


가넷 2007-04-20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디족.. ^^;;;

마법천자문 2007-04-20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conomic Left/Right: -8.50
Social Libertarian/Authoritarian: -2.92

다 좋은데 달라이 라마 따위가 도대체 왜 저쪽에 있는가???

비로그인 2007-04-20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테츠님하고 같아요. 간디, 달라이라마, 만델라... ^^;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4-2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해봤는데 비슷하게 나오더군요 ㅎ

기인 2007-04-21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알라디너들의 성향? ㅎㅎ
울프님은 극단적으로 왼쪽이시면서 동시에 덜 아나키틱 하네요. '진짜 좌파' 스럽습니다 ^^ ㅎ

마늘빵 2007-04-21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실제로 제가 느끼는 전 제 지점보다는 오른쪽으로 가있는거 같아요. 위쪽은 아닌거 같구.

나비80 2007-04-21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conomic Left/Right: -6.13
Social Libertarian/Authoritarian: -6.05
그래도 제가 기인 님 보다는 좀 더 사회 적응자(?)인 것 같군요. ^^

kocka 2007-04-22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옹^^ 이거 재미있네요 Economic Left/Right: -5.0
Social Libertarian/Authoritarian:-5.59

기인 2007-04-22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ㅎㅎ +로 나오는 분이 없어서 아쉽네요~ ㅋ
 

허세욱 씨 추모제, 그리고 버지니아 참사

[기자의눈]'미안함' 잃은 사회가 버지니아 참사 애도하는 역설

2007-04-19 오후 2:08:46

"저렇게 데모나 하는 새끼들, 모조리 총으로 쏴 죽여야 하는데…."

고(故) 허세욱 씨의 추모제가 열린 18일, 서울 시청 앞 광장을 지나는 택시 안에서 기사가 계속 구시렁댔다. "허세욱 씨도 당신처럼 택시 기사였어요"라는 말이 목으로 넘어오려 했지만, 그냥 꾹 눌러 삼켰다.

"나라가 잘 되려면,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

이런 반응이 그다지 낯설지 않아서다. 각종 온라인 뉴스 사이트에 실린 고 허세욱 씨 관련 기사의 댓글 중에도 이런 내용이 흔하다. "택시 기사가 FTA에 대해 뭘 안다고…." "FTA가 택시 기사와 관계가 있나요? 별 관계없어 보이는데 왜 분신을 한 거죠" 등의 반응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측에게 적나라한 비난을 퍼붓는 경우도 많다.

잠시 머뭇대다 택시 안에서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얼마 전에 한미FTA를 반대하는 택시 기사 한 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FTA는 해야죠.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잖아요. 농민들이야 손해보겠지만, 그래도 나라가 잘 되려면 누군가는 희생해야죠." 대화가 멎었다. 너무 익숙한 반응이어서 금새 흥미를 잃었다.

이 택시 기사처럼 한미FTA를 찬성하는 측도 한미FTA가 체결될 경우, 피해를 입는 이들이 있다는 데는 대개 동의한다. 대신 이렇게 피해를 보는 경우보다 이익을 누리는 경우가 더 많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판단이 정확한 것인지를 판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을 함부로 비난하는 것은 무리다.

'미안함'을 잃어버린 사회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측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한미FTA로 피해보는 이가 없다"는 판단에서 나왔다면 정당하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피해를 본다"고 여기고 있다면 분명히 병리적 상황이다. 자신이 누리게 될 이익이 약자의 피해를 담보로 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 당연시하는 게 정상일 리 없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됐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신질환일 수 있다.

앞서의 상황에서라면 "(피해보는 측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찬성한다"는 게 정상이다.

조승희 씨와 한국 사회의 닮은 점…남의 아픔에 공감 못 해

그런데 FTA 반대 시위를 하는 이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접한 이날, 대부분의 매체가 하필 '총기난사'에 관한 기사로 지면을 메웠다. 버지니아공대 학생 조승희 씨의 총기난사 사건이다.

조 씨의 범행동기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아직은 명확한 게 없다. 조 씨는 어떤 이유로 심한 절망감을 느꼈을 게다. 그리고 이런 고통을 느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총에 맞아 희생될 이들, 그리고 그 주위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 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들도 자신과 똑같이 아픔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 하고 있었던 셈이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 한다는 점에서 이런 모습은 "누군가는 한미FTA로 피해를 본다"고 여기면서도 FTA반대 시위를 하는 이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이들과 닮았다.

"내가 힘드니, 남은 덜 힘들었으면" vs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

고 허세욱 씨의 추모제가 열린 서울 시청 근처를 다 지나갔을 때, 택시 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죽은 사람(허세욱 씨)도 택시를 몰았다던데…. 택시 기사 중에 안 힘든 사람 있나요. 다 힘들지. 그렇다고 죽긴 왜 죽나."

"허세욱 씨는 자신의 힘든 상황을 피하려고 죽은 게 아니잖아요. 한미FTA가 체결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힘든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여겼던 거예요." 맥없는 대답을 내놓고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관련기사 : "가방끈 짧다고 시대의 진실 모를까" , "늘 따뜻했던 당신을 어찌 잊을까요" )

힘든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조금 덜 힘들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 허세욱 씨가 이런 경우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또 내가 괴로우니 남도 나처럼 고통스러웠으면 사람도 있다.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 하던 다른 이들이 자신처럼 고통을 겪고나면 달라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조승희 씨가 이런 경우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만 힘드냐, 나도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만 뇌까리며, 다른 이들의 고통에 무감각한 이들이 있다. 앞서의 택시 기사, 그리고 허세욱 씨의 죽음을 비아냥대는 많은 이들이 여기에 속한다.

버지니아공대 희생자는 애도하면서, 허세욱에 대해서는 무관심

우리 사회는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있는데, 이날 저녁 서울 시청 앞에서 일부 누리꾼들이 버지니아공대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또 대부분의 언론이 버지니아공대 사건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청와대도 가세했다. 이태식 주미대사는 조 씨의 총에 맞아 숨진 이들의 수에 맞춰 32일간 금식하겠다고까지 밝혔다(☞ 관련기사 : <조선일보>, 총기난사 추모게시판 개설, 이태식 주미대사, 32일간 자성의 금식 제안 ).

다행이다 싶었다. 바다 건너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나라 전체가 슬퍼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는 아직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이상했다. 버지니아공대 사건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보도가 넘치는 가운데, 허세욱 씨의 장례식을 다룬 기사는 드물었다. 그리고 허 씨의 장례식을 다룬 얼마 안 되는 기사에 대한 악성댓글도 여전했다. 버지니아 참사에 대해 두 차례나 애도 메시지를 발표했던 청와대가 허세욱 씨의 죽음에 대해서는 계속 침묵했다.

대한민국. 참 이상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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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4-20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다 마다요....
그 택시 기사양반도..아마 자기가 손해 본다면 전혀 상반되는 이야기를
했을 껍니다...^^

파란여우 2007-04-20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송에서 '오버'하는 짓이나 그만 봤으면 싶어요

기인 2007-04-20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남한이라는 나라... 언론으로 재현되는 남한은, 정신분석학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성질인 것 같아요. 아직 유아기인 듯. 항상 세계사고 나면, '한국인은 안 다쳤나'가 최우선이고 나머지는 거의 보도도 안하고.. '한국인'이 쫌이라도 관련될 것 같으면, 금새 '한국인'으로 호명해서 난리 피우고.. 하인즈 워드, 그 에로배우 등..
콤플렉스가 많은 나라죠.. 한편으로는 안 됬기도 합니다..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세계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공동토의)(2)

 

세계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공동토의)

   - 시마다 마사히코(島田雅彦), 야마시로 무쯔미(山城むつみ),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자본의 운동이 끝날까. 실은 그것은 간단한데 잉여가치가 없게 된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간단하지 않은 것은 잉여가치가 이윤과 달리 개별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개의 기업에게, 노동자에게 잉여가치는 불투과적입니다. 잉여가치는 사회적인 총자본, 엄밀하게 말하면 세계적인 총자본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는 일반적으로 잉여가치가 생산과정에 있으며 노동자가 그것을 다시 탈취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고전파 경제학의 사고에 기초하고 있으며 교환이 화폐를 매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거기에 자본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맑스 이전에 리카도좌파는 노동가치설에 근거하여 잉여가치=착취이론을 생각하고 노동운동(차티스트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것은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를 보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를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 봉건사회에서 영주가 농민을 착취하지만 이제는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하여 같은 것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사회적」인 모든 관계는 본래는 대단히 투명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투명할 수밖에 없음에도 화폐경제에 매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보이지 않으며, 그것은 인간의 관계가 물과 물의 관계로서 물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된다. 루카치의 물상화론은 그런 논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기초한 논의도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경제에서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를 영주와 농노의 관계와 비슷한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폐경제에서 교환관계는 영주와 농민이라든가 주인과 노예라고 하는 지배관계와 완전히 다른 관계이다. 일반적으로는 맑스도 고전파 경제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생산과정에서 착취로부터 전체를 본다고 하는 관점을 취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자본론』이 난해한 것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맑스는 유통과정을 중시했다. 맑스가 가치형태론과 같은 난해한 것은 쓴 것은 교환이 화폐를 매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또한 가치가 실제로 교환되는 것에서만(사후적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맑스가 자본을 상인자본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찰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산업자본에서도 잉여가치가 실현되는 것은 생산과정만이 아니라 유통과정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생산과정이 어떻든 간에 팔리지 않는다면 가치도 잉여가치도 없다. 신고전파는 맑스를 고전파의 아류로 보고 그 노동가치설을 형이상학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맑스가 중시한 것은 오히려 사용가치(효용)입니다. 생산물은 우선 타인에게 사용가치가 없다면 가치일 수 없습니다. 가치를 생산과정에서 투과적인 것으로 보는 고전파의 견해가 맑스주의에 계수되었을 때, 전생산과정과 교환을 국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컨트롤하면 좋다는 사고가 도입되었습니다. 그것은 맑스가 고전파 경제학의 비판에서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인 것입니다.


  맑스는 산업자본의 잉여가치는 생산과정 자체는 아닌, 또한 유통과정 자체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가 로도스섬이다. 여기서 뛰어라」라는 유명한 건입니다. 그러면 자본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잉여가치라면 자본의 운동에 대한 대항은 어디에서 가능할까. 생산과정 자체에서는 아니며 유통과정 자체에서도 아니다. 예를 들면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물상화된 의식을 계몽하고 자본에 저항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레닌이나 루카치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생산과정에서 임노동자는 「주체」가 아니다. 거기서 가능한 것은 단지 경제적인 투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제 경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노동자의 의식을 변하게 하는 것은 곤란하며, 실은 지금은 이미 그것을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경제과정은 자본에 맡겨져 있으며 그것을 정치적으로 제어해 나간다고 하는 사회민주주의의 사고가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 운동에 대한 제어장치일 수 없으며 국가를 제어하는 것도 될 수 없다. 생산관계 자체를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본제도 국가도 남게 되며, 또한 실제로 자본도 국가도 그것이 존속하기 위해서 사회민주주의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쌍방에 관계된 장소가 아니라면 자본의 운동에 대한 저항은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운동에 대항하는 운동의 주체성이라는 것은 나는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본론』에는 그러한 윤리, 「주체」가 나올 여지는 없다. 그런데 자본의 운동 G-W-G', 그 속에서 주체를 형성하는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 자본가가 주체적으로 보이는 것도 자본가 개인이 주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운동하는 자본의 「인격적 담당자」이기 때문이며, 자본의 장소가 능동적, 주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되는 장소는 어디인가, 그것은 노동자가 「사는 입장」, 결국 소비자로서 존재하는 장소입니다. 자본의 운동에 대항할 수 있는 장소는 거기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소비자운동이나 시민운동이라면 생산관계에 미치는 것이 없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것이 된다. 결론을 말하면 나는 소비자협동조합과 생산자협동조합을 조직해 나가는 것만이 자본주의의 존립기반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리고 그것을 자본도 국가도 저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이나 국가를 가능하게 하는 것과 같은 기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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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오늘날 우리의 상식은 투쟁과 타협의 결과다
100권의 금서 - 금지된 책의 문화사
니컬러스 J. 캐롤리드스.마거릿 볼드.돈 B. 소바 지음, 손희승 옮김 / 예담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 2006년 9월 즈음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인권평화전시회 - 안녕, 국가보안법"이라는 릴레이 전시회에서 "감옥에 간 금서들의 이야기전" 기획에 참여한 적이 있다. 대학원에서 논문으로 준비 중인 주제 역시 "금서"와 관련이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금서를 읽은 사람들의 의식 혹은 그것이 형성한 문화에 대한 연구를 논문 주제로 잡고 있다. 대학원 기간 2년 내내 지도교수를 제외한 다른 교수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설명해야 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직까지 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직업상의 이유로 모두가 가을을 살고 있을 때, 홀로 겨울을 준비하고, 모두가 겨울을 살고 있을 때 홀로 봄을 예비한다. 그래서일까? 많은 이들이 지금 우리는 자유라고 외치는데, 나는 홀로 지금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가를 묻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어느 사회에서 특정한 관습이나 인식이 '상식(혹은 공식적인 지식)'으로 인정되기 까지는 꽤나 복잡한 절차와 지난한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오늘날 회사 같은 공공 영역에서 또라이 취급을 받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 번씩 두둘겨줘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남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변화가 생긴 것은 불과 한 세대만의 일이다. 물론 이 같은 변화가 발생하기 까지는 수많은 조건들이 작용했을 것이지만, 그만큼 많은 이들이 싸워온 결과이기도 하다. 황사를 비롯해 많은 기상이변이 발생하고 있는데, 요새는 그 원인이 산업화의 결과로 초래된 지구온난화로 인한 문제라는 것을 동네 꼬마들도 알고 있다. 이같은 인식의 변화 역시 근래 20여년간 생태환경운동가들의 노력 덕분이다.

그 반대로 우리나라가 UN이 선정한 대표적 '물부족 국가'라는 잘못된(?) 인식은 좀체로 바뀌지 않는다. 실제로 UN이 한국을 앞으로 10년 내에 물부족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낸 적은 있다. (내가 알기로는 딱 한 번이라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댐 건설론자들의 주장과 정부가 출자한 공사가 해마다 광고비를 지출하여 널리 알린 덕이다(물론 나는 어느 것이 진실인지 말할 수 있을 만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물부족 사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책이 댐 건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처럼 어느 사회의 상식이란 그 사회 구성원들의 갈등과 타협의 결과이지 본래부터 상식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많은 것을 학교 교육을 통해 알게 된다. 교육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공공지식(상식)을 재생산하는 가장 유력한 공간이자 도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언제나 교육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통제할 방법은 무엇인가 궁리한다. 그러나 교육은 학교라는 공간에서만 이루어지진 않는다. 때로 우리는 언론을 통해 오피니언 리더라는 불특정한 집단의 의견을 여론이란 형태로 수렴하게 되는데, 이때의 오피니언 리더란 반드시 전문가집단, 지식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배계급에 충실한 언론일수록 오피니언 리더 그룹은 해당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이해관계가 관철되었을 때 이득을 보는 이들일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얼마전 모언론에서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 100여명에게 물어본 결과 이들 중 대다수가 FTA에 찬성하더라는 기사를 내보낸 적이 있는데, 이 오피니언 리더들이 언론사의 행사에 초빙되어 온 이들이었다는 후문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피니언 리더들의 의견은 힘이 세다.

니컬러스 J. 캐롤리드스, 마거릿 볼드, 돈 B. 소바. 세 사람의 공동저서인 "금지된 책의 문화사 - 100권의 금서"는 말그대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금서로 지정된 이유 등 다양한 각도에서 선정한 100권의 금서 이야기를 통해 조망하고 있는 책이다. 어느 사회의 공공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면 반대로 어느 사회에서 금기의 지식, 혹은 금지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데 가장 유력한 표본이 있다면 바로 금지된 책, 금서일 것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배제하는 형태로 스스로의 생존방식을 규정해왔다. 어느 사회가 무엇인가를 허용하고, 권장할 때, 그 이면에는 거의 반드시 그 공동체의 이해관계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만약 그 이유를 이 책의 구분법에 따르자면 그 이유는 크게 다음의 네 가지 이유, 정치, 종교, 성, 사회적 이유로 구분될 수 있다. 이 책 속에서 다뤄지고 있는 것들은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로부터 "카마수트라", "율리시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종류의 것들이다. 우리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분명히 권장도서 목록에 수록되었을 법한 책들까지도 금지된 도서 목록에 올라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면엔 '다빈치 코드'와 같이 뭔가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이유를 다음의 인용문에서 유추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20세기 한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소설로 주목받는 "태백산맥"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과 적에 대한 고무 찬양이라는 죄목으로 내사를 하여, 1992년 대검찰청은 "학생이나 노동자들이 읽으면 불온서적 소지, 탐독으로 위법조치할 것이며, 일반 독자들이 교양으로 읽는 경우는 무관하다"라고 알쏭달쏭한 발표문을 냈다.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는 그렇게 방종한 여대생이 우리나라에 있을 수 없다며 판매금지되었고, 저자는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 옮긴이의 글 가운데

검찰청의 발표대로라면 학생과 노동자는 일반인이 아니란 말이고, 방종한 여대생이 우리나라에 있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은 그와 같이 방종한 여대생이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무죄라는 판결이 된다. 어떤 논리로도 설명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우리 사회엔 수많은 금서가 존재해왔고, 금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양산되고 있다. 아니 인류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동안 어떤 사회이든 금지시키고 싶은 지식은 존재할 것이고, 이에 대한 반항 역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해주는 것은 지배집단이 금지시키고 싶어 한 어떤 지식도 결국 금지시키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금지된 지식 혹은 금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는 이라도 이 책은 읽어둘 만하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책들이나 저자들의 책들이 하나 같이 추천할 만한 명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금서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책들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필두로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조지 오웰의 "1984", 커트 보니컷 주니어의 "제5도살장", 로버트 코마이어의 "나는 치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나기브 마푸즈의 "골목길의 아이들",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 캐슬린 윈저의 "내 사랑 엠버", 존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눈", 휘트먼의 "풀잎", 안네 프랑크의 "일기",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허버트 셀비 주니어의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등등이 모두 금서에 포함되어 있고, 이 책에는 그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가운데 상당수는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지만, 또한 상당수는 정치적 이유보다는 자본과 시장의 검열로 인해 출판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출판되지 못했다. 오늘 나는 연세가 많으신 원폭피폭자 한 분에게 전화를 받았다. 그 분은 전쟁 중 일본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된 분으로 현재까지도 일본 정부는 물론 국내에서도 이와 관련한 일들을 하고 있다. 이 분이 최근 일본에 거주했던 다른 피록 교포들이 일본어로 기술한 회고록을 번역하여 출판하길 원했고, 내게 부탁을 하셔서 몇 군데 알아봤지만 아마도 이 책이 국내에서 일반 독자들 손에 단행본으로 전해지긴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출판인들의 눈으로 보자면 시장성이 없기 때문이다.   

올해는 우리나라에 자본론이 번역출간된지 만 2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자본론"이 아직도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고 남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겠지만 입맛이 씁쓸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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