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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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보다 어리고, 국문과를 졸업한 이의 소설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소설은 꽤나 괜찮다. 소녀적, 순정만화같은 감성도 과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라는 형식과 26(작가의 나이와 같음.)의 백수의 서사, 딱 작가가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잘 쓸 수 있는 것을 썼다는 느낌.

문학을 공부하고 더 많은 책들을 읽어나가면서, 무엇보다 하루하루 살아내면서, 문학관이 점점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삶이란, 세상이란 하나가 아닐 수도 있구나랄까, 아니면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 이런게 늙어가는 과정일까.

여물지 않은 날카로운 이성으로 파헤치고, "현실"이라는 것을 문학에 너무 성급히 들이대려했던 과거들.. 다시 점점 문학을 '읽어내는' 틀을 가져야 할터인데, 너무 성급히 만들려고는 하지 않아야겠다.

이 82년생 소녀 같은 ^^;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82년. 그녀의 맑음, 산뜻함,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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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28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세대 소설가들의 연령대가 점점 내려가는거 같아요. 그럼 내가 나이 들었구나 하는 생각도. -_-

기인 2007-08-28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점점 그래야죠.. 이제 연예인들은 뭐;;;;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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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지인들이 하도 격찬하기에 관심과 기대를 엄청 했던 책.

허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별로 없다는 인상. '동시대 소설에 빚진 게 없다'는 평이나, 한국문학의 계보를 새로 짜야된다는 평론가들의 호들갑에 더욱 '문학동네'에 대한 이미지만 굳어진다.

전근대적 스토리텔링과 근대적 스토리텔링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우리는 새로움을 말할 수 있으려나. 여튼 나에게는 시대에 동떨어진 가상현실 속의 전근대적 민담으로만 읽힐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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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7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8-27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8-27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별 기대 없이 봐서 그런지 (홍보문구따위 쌩까주는 쎈스!ㅎ)
굉장히 괜찮았는데,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네용-

기인 2007-08-28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ㅎㅎ 저는 하도 기대가 많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
 

친구랑 이야기를 하다가, 그 친구도 드라마를 안 봐서 친구들과 이야기할 수가 없다고 한탄하던 중, 나름 '국문학도'이고 '문화연구'에 관심이 있다고 하는 나에게 '커피프린스'라는 드라마에 대해서 '얻어들은'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헐. 듣다보니 2000년대 유행을 한 '트랜디 드라마'를 몇 가지 떠올려보며 그들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니 '커피프린스', '파리의 연인', '궁' 등, 또 한쪽으로는 '허준', '대장금', '주몽', '불멸의 이순신' 등이 떠올려지더라고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 이름은 김삼순', '옥탑방 고양이', '환상의 커플', '쩐의 전쟁', '풀하우스'등.

90년대 인기 드라마였던, '모래 시계', '사랑과 야망', '한지붕 세가족' 등과의 격차가 새삼 느껴집니다.

뭐랄까. 드라마를 보지도 않고, 흘러 들은 풍문만으로 짐작해보자면.

90년대는 80년대 이후 대문자 '역사/시대'와 삶의 겹쳐짐, 그 폭압성을 다루고 고민하는 드라마들이 제법 있었고, 이 때는 '국가'가 세련되지 못한 방식으로 대중의 삶에 개입하면서 마찰도 많았고, 대중도 이 '국가'가 삶에 간섭하는 힘을 끊임없이 자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드라마는 또한 이를 반영했고요. 

반면 이제 2000년대 드라마들을 살펴보면, '지금-여기'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역사를 소재로 차용해서 새로운 상상력의 공간으로 만들어활용하는 역사 드라마가, 자본의 확대와 몇몇 '사극'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한편에 계속 만들어지고 있고, 또 '만화'같은 상상력 또는 만화에 원작을 둔 드라마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대문자 '역사/시대'가 아니라 '일상'에서 느껴지는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탐구한다기보다는 이를 소재적으로 차용하여 '차이'의 매력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노처녀'/'동성애'/'사채업'/'혼전동거'/) 한편에서는 고전문학에서부터 계속 이어져내려오는 혼사장애담, 출생의 비밀, 환생, 첫사랑, 기억상실, 불치병 등의 classical한 소스도 들어가 있고요. 

이것에 대해 가치평가를 섣부르게 하지는 못하겠지요.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본 드라마도 없고, 90/2000년대라고 딱 자를수도 없고 어떤 경향성만을 지적할 수 있을 뿐이겠지요. 요즘에는 친구의 추천으로 '연애시대'를 조금씩 보고 있는데, 꽤나 재미있는 면도 있기는 합니다.


'역사/시대'를 고민하는 것에서, '일상'을 사유하는 것으로 '세계'가 변화하고 있는 것만은 정말 사실인 것 같습니다. 대문자 '역사/시대'가 아닌 '일상'이야말로 '역사'이고 '시대'이다라는 의미라면 동의할 수 있겠지요. 국가는 세련된 방식으로 대중의 삶에 개입하고 있거나, 개입하는 듯 보이게 선전선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최근 FTA나 이랜드 사태를 보면, '본질'이 달라진 것이 있을까 싶지만, 이에 반응하고 대응하는 각 주체들의 반응은 여러모로 달라진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역사/시대'로 '일상'을 억압했던 것이 80년대의 '과오'였다고 누군가 지적할 수 있다면, '일상'이 곧 '역사/시대'이다라는 인식이 없이는 21세기는 희망이 없는 시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직도, '역사/시대'에 대해, '진리'나 '정의'에 대해 '인간'에 대해,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 이러한 일반명사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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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7-08-23 0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봤어요 ^,^ 커프는 별 생각없었는데 작가의 인터뷰를 보니 동성애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나서 다시보니 또 드라마가 새롭게 보이데요. 역사,정의,진리까지는 힘들지만 조금씩 부드럽게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드라마의 힘에 새삼 놀라곤 해요

기인 2007-08-23 0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ㅎㅎ 사실 참 그게 힘든 것 같아요. 적당한 '새로움'을 통해서만 인기를 끌 수 있다는 것이.. 좋은 대중드라마란 그런 것이겠지요..

도서관여행자 2007-10-0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프린스... 저는 이 드라마를 근대성, 성 등의 주제로 접근해서 과제를 해야하는데, 시청하지 않아서 난감하네요^^; 특히 전 수용자의 반응과 언론 기사 등을 살펴보는데, 글 잘 읽었습니다.

기인 2007-10-07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럼 시청하셔야죠 :) somun.info 에도 커피프린스 관련 기사 있으니 한번 봐보세용~
 


 

 

 

 

 

 

 

민가영, 「성매매, 누구와 누구 혹은 무엇과 무엇 사이의 문제인가?」


0. 들어가며

성매매에 대해서 주위 지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종종있었다. 그럴때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성매매의 금지이다. 매번 듣게 되는 반론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성매매 여성의 ‘노동권’, ‘생존권’과 같은 문제이다. 내가 성매매 여성을 너무 ‘구조의 희생자’로 몰아 그들을 ‘대상화’하거나, 어짜피 ‘구조’가 작동중이고 이를 제거할 수 ‘없다면’ 보장해줘야 할 권리를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성매매를 허용하는 것이 '비성매매 여성'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남성들의 성욕이 일정할 터인데, 이를 '풀 곳'을 막아버리면 어디로든 '터지게' 되지 않겠냐는 논리이다. 나는 이에 대해서는 성매매를 합법화하거나 이를 ‘당연시’하게 되면, 이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가부장적 인식을 강화시켜 오히려 ‘비성매매’ 여성을 성폭력에 노출시킬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사실 이러한 내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새내기 때 페미니즘 교양학교에서 읽은 「섹슈얼리티 강의」의 영향이 컸다. 성매매 여성은 포주와의 관계에서 억압되어 있고, 그들은 ‘피해자’일 뿐이라고 99년에 나온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종종 ‘나이든 남자’ 선배들이 성매매 여성이 항상 그렇게 억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술자리’에서 넌지시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던지, 아니면 그래도 그것도 ‘가부장제-자본주의 구조’ 속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해방의 대상’으로만 생각해왔다. 내 인식의 한계선이라고 최근 깨달은, ‘대상성’의 문제와 ‘주체성’의 문제가 여기서도 계속 내재해있었다.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2004년 전후 성매매 여성들의 ‘생존권’ 발언 때도 나는 이것은 ‘포주’가 강압적이든 교묘한 세뇌로든 시켜서 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나에게 그들은 ‘주체’가 아니었다. 이제 이런 문제들이 가시화되고 논의된 2006년 다시 이 책은 나에게 말을 건다.


1. ‘성매매’와 ‘성매매 여성’은 동의어인가?

198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매매 문제를 ‘구조’로만 환원시켜 사고할 수도 없고, ‘개인의 자율적 선택’으로만 사고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매매를 둘러싼 문제들이 ‘구조로서의 성매매’와 ‘구조 안의 개인인 성매매 여성’이 만나서 만들어 내는, 의도되지 않은 다양한 사회적 경향 속에서 논의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성매매 근절이나 성노동이 왜 성매매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없는가?

199 성매매를 비판하고 근절하려는 움직임은 성매매를, 개별 남성과 여성 사이의 ‘거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가부장적 전제와 여성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 빈곤 같은 여러 가지 문제가 결합되어 구조화된 여성 억압의 총체적 문제로 보는 시각에 기반한다. (...) 가부장제 사회는 성을 파는 여성과 성을 팔지 않는 여성 사이에 구분과 위계와 낙인의 체계를 갖고 있지만, 성을 사는 남성과 성을 사지 않는 남성 사이의 구분을 부각하지는 않는다. 사는 남성은 주체할 수 없는 강한 성욕을 지닌 ‘정상적 남성성’으로 이해되지만, 파는 여성은 ‘정상적 여성성으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한다.

200 성매매 여성들의 성노동자화를 지지하는 측은 성매매 여성의 선택을 모두 구조로 환원시키면서 강요된 수동적 선택으로 보는 급진주의 입장을 비판한다. 이들은 성매매의 근절 존속 변화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여성주의자가 아니라 문제 당사자인 성매매 여성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성매매 여성 스스로가 근절이든 존속이든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성매매 근절 의지를 가진 페미니스트들이 성매매 여성을 무기력한 ‘피해 대상’, ‘구제 대상’으로 만드는 것을 비판한다.

201 성노동이냐, 성매매 근절이냐 하는 양자택일 규정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여성의 삶을 하나의 구조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존재하는 모든 지식과 주장은 그 지식과 주장을 만든 인간의 ‘부분성’ 때문에 ‘전체’가 아닌 특정 부분을 설명하는 지시이다. 따라서 성매매 근절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의 주장도 성노동자화를 주장하는 성매매 여성과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도 모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앎의 부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와 다른 입장을 참고하여 나의 부분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 서로 다른 입장들이 각자 스스로가 부분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서로를 참고하여 자신의 부분성을 보완하면서 비판적으로 더 넓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성매매 문제와 당사자 여성을 이해하는, 덜 왜곡된 방법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02 근절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성매매 근절보다 성매매 여성들의 기본적인 인간 욕구 충족을 정치적 목표로 상정할 때 더욱 현실적인 이해와 변화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친하게 지내보자는 것인데, 이 ‘친하게 지내는 것’이 누구와 누구 사이에 가능한 것인가? 마초들과도 ‘서로의 부분성’을 참고해서 나의 부분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까. 나의 부분성을 고려하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어떻게 이렇게 논의할 수 있을까. 결국 대문자 ‘진리’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각 개별 여성들의 사례에 집중해야한다는 것은 어느 차원에서는 옳지만, ‘나의 입장’을 세우고, 그것을 의제화하는 것. 또는 운동이나 법제정의 차원에서 이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어떤 여성에게는 성매매가 ‘자율적 선택’이거나 ‘취미’일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사회 구조가 강요한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사기와 납치’ 후의 고문일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을 가능성으로 인정하는 것. 그러면 이제 우리는 ‘성매매’ 자체에 대해서는 입장을 가질 수 없고, 개별 ‘성매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문제는 ‘사기와 납치’ 후의 고문의 입장인 성매매나 구조적으로 강요된 성매매 여성은 과연 발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를 대신 발화해주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성매매 ‘근절’을 주장하는 이유는 성매매 여성들의 기본적인 인간 욕구 충족이 ‘성매매’라는 관계에 종속되어 있을 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인간 욕구 충족’과 같은 애매한 어휘는 많은 논의로 정교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3. 성매매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는 한 가지 방법

여기서 민가영은 가부장제는 성적 등급화의 문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문화 구조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여성들은 다양한 행위성을 통해 성적 등급화 문화와 협상을 벌인다고 주장한다. 이 때의 협상은 ‘자유의지로 동기화된 행위가 아니라 성적 등급화 문화를 통해 구성된 행위성’이라고 한다.

203 성적 침해를 등급화하는 문화에서 여성들은 그들이 경험한 성적 폭력 그 자체로 문제화되지 않는다. 가부장제는 피해를 당한 여성이 어떤 여성인가, 가해를 한 남성이 어떤 남성인가에 따라 여성의 피해에 등급을 매긴다. (...)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성의 성적 침해는 그 자체로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남성과 남성 사이에 문제를 발생시킬 때 ‘정치적’인 사안으로 부상한다. 다시 말해, 남성과 여성 사이의 문제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피해 여성과 관계된 남성과 남성 사이의 문제로 나타난다.

208 성매매 여성들이 성매매를 금지하려는 사회의 움직임에 반대하고 나선 ‘시위’는, 성매매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작업이 가부장적인 성적 등급화의 문화 구조를 해체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지면서 입체적인 지형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가영이 이야기하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공허하다. 구조 밖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언제나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자유의지’가 문제이고, 구조가 얼마나 압박을 하느냐의 문제이지, ‘자유의지’가 없는 사람도 없다. 즉 생물학적으로 재귀조직으로 사람의 인식과 판단을 생각해본다면, 모든 ‘재귀조직’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이러할 때 우리가 공격할 수 있는 지점은 이것이 ‘자유의지’냐 ‘구조’냐 하는 문제틀이 아니라, 한 개별 주체가 ‘재귀적’으로 구성하는 문화 구조의 폭력성일 것이다. 모든 개별 주체들은 주체적으로 선택을 한다. 다만, 문제는 그 주체의 선택의 맥락인, 문화 구조이다. 이것이 공격의 대상이지, ‘자유의지’같은 말을 쓰기 시작하면 관념론적 이야기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러기에 ‘가부장적인 성적 등급화의 문화 구조를 해체하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 (결국 개념의 어휘들만 바꾸었을 뿐이지 나는 아직도 '구조'만을 문제시하는지도 모르겠다... )


4. 성매매 경험이 체화된 여성의 몸에 대한 탐구로

인간 경험이 언어, 기호, 담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언어적 영역인 ‘몸’에 대한 탐구가 중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매매가 성매매 여성에게 경험되는 방식은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조건에 의존적인가, 독립적인가?’ 등의 질문을 제기하고, 생물학적인 심리학적인 연구를 필요로 한다. 호주, 네덜란드, 북유럽처럼 성매매가 합법화된 곳에거 성매매 여성들의 몸에 관한 연구를 참조(있다면, 있을 법한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몸’이 과연 독립적인 실체인지, 담론에 의해서 영토화되지 않는 ‘신비’의 지대인지는 미지수이다. 인간이라는 것 mindful body라는 것은, ‘몸-마음’ 이분체라기 보다는 ‘뫔’적 존재이다. 그래도 성매매 속에서 이루어지는 섹스 자체의 특수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문화에 의해서 매개되지 않는, 심히 의심스럽지만) 이것을 밝혀내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일 터이다.


5. 성매매/여성과 차이의 정치학

210 젠더는 그 자체로 작동하기보다는 계급, 인종, 성적 위계 같은 다른 사회적 불평등 권력관계와 상호 지지하거나 의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젠더와 관련된 문제가 젠더 하나로만 환원되어 이해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12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 하의 결혼과 성매매를 성적 노예화와 연결시키면서, 여성들이 그들을 성매매로 몰아 내는 것과 동일한 힘에 의해 결혼을 강요받는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사랑과 결혼을 최고의 만족으로 규정하는 가부장 이데올로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결혼을 한다. 이런 면에서 가부장제에서의 자유결혼이 성매매와 공통되는 맥락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 방점은 성매매/여성이 아닌 비성매매/여성이다. (...) 이제 성매매/여성에 대한 이해와 소통을 위해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은 성매매를 경험한 여성이 지닌 차이와 특수성이어야 할 것이다. 이 특수성에 대한 이해는 두 범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매매를 작동시키는 성별 권력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로 연결된단. 그리고 이 특수성과 차이를 부각하는 것은 성매매 여성들에게 단순한 피해의 ‘대상’이 아닌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어떤 문제를 바라볼 때 특수성과 공통성의 문제는 복잡하다. 성매매/여성, 비성매매/여성은 ‘여성주의’라는 입장에서, 가부장제 속의 억압이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그런데 이것이 ‘최종심급’인가.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이야기할 지도 모른다. 여성-노동자 모두 ‘자본주의 체제’ 속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고. 그러면 이제 ‘자본주의 타도’의 깃발 하에 뭉치면 되는 것일까. 그 와중의 억압은 어떠한가. 하나의 깃발 하에 뭉쳐서 분명한 적을 향해 행진을 하는 ‘강철의 군대’ 이미지. 이것이 포기된 이유는 여러 가지 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이제 그게 사람들을 ‘끌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 민가영은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 개념’으로 새로운 상상을 제시한다.


213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 개념은 공통성과 특수성이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 맥락을 공유하는 의미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 ‘유사한’ 것이다. 이 유사도 공통적이거나 보편적인 유사가 아니라, 서로 엇갈리는 ‘가족 유사’라는 특징을 갖는다. (...) 연속선이라는 개념이 어떤 것을 중심으로 그것에 가깝거나 먼 연속을 말한다면, 가족 유사성은 부분적으로 겹치는 유사, 서로 다르게 겹치면서 형성되는 유사성을 의미한다. 가족 유사성 개념은, 성매매를 전체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의 문제와 연결시키면서도 성매매 문제의 특수성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준다.


민가영이 이 개념을 통해 구성하는 우리 편과 적은 결국 ‘전체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와 ‘가부장 사회’이다. 이로서 연대하면서도, 서로의 차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이러한 전략은 결국, 점진적으로 반가부장 사회로 나아가면서, 서로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연대하여 힘을 키울 수 있다는 전제에서 성립한다. 혹은 이러한 담론은 그러한 전제를 만드려는 노력이다. 차이는 인정하지만 연대하자.

2004년 성매매특별법 이후 터져나온 성판매 여성들의 목소리는 '성실한' 기존 급진주의적 페미니스트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음에 분명하다. 민가영의 통찰이 분명한 '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목소리들을 끌어안고 통찰하려고 하는 모습은 분명 있다. 성매매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 또한 가부장적 문화구조 속에 작동하기 때문에 문화구조를 해체하면서 성매매 여성의 '기본적인 인권'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조금은 '추상적' '정답'과 함께 보다 '정치'한 답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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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8-12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권택 감독의 영화 "창"을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집창촌에서 수십년 슈퍼를 운영하는 부부가 나누는 대화에서 옛날엔 잡혀오고 끌려와서 억지로 일하면서 벌은 돈으로 동생들 대학보내고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지발로 스스로 이곳으로 들어온다고 라고요. 일부의 경우일 수도 있으며 요즘의 성향을 보여주는 것일수도 있는 대사이지 않나 싶습니다.

기인 2007-08-12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제 생각에 문제는 성매매 여성의 '자발성' 또한 가부장제 문화구조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라서, 우선은 그 문화구조를 공격하고 흔드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구체적 방법은 더 고민해야 되겠구요. 민가영 선생의 글에서도 아쉬운 점이 그 구체적 지점인 것 같습니다. 물론 여성주의 운동의 구체적 '지침'을 내리는 글은 아니고, 그렇게 '지침'이 내려오고 그것을 받아서 운동하는 것도 '여성주의'적이지 않은 것 같지만, 좀 답답하네요 ^^;

마늘빵 2007-08-12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왤케 뜸하십니까? :) 뭐하고 지내세요?

기인 2007-08-13 0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푹 쉬고 있어요~ 8월말이나 부터 정신차려야죠 ^^;

2007-08-16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에 2007-08-16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

기인 2007-08-18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넵 ^^; 언제 뵈요~ ㅎㅎ 지난번 죄송해요~ 요즘 쫌 일이 많아서요
누에님/ 감사합니다 ^^~
 
자정의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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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을 읽은 후에, 몇달 전에 사두었던 '자정의 픽션'을 지금에서야 읽었다. '토끼..'때보다 유머와 실험성이 강해진 느낌.

고등학생 때 써두었다는 단편 등도 실려있어, 일관되게 균질한 질과 깊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박형서'만의 독특한 색깔이라는 것도 판단하기는 힘들고, 그 만의 '주제의식'이나 등등 여튼 '박형서'가 대표하는 것을 한두 단어로 포착하기는 힘들다.

지식인과 학자, 교수들을 비판하는 유머, 소설 형식을 패러디하는 실험성, 판타지나 SF의 상상력, 그로테스크함과 자극적인 폭력을 추구함 등이 섞여서 때로는 섬뜩해하며, 때로는 낄낄대며, 때로는 입을 약간 벌린 채 읽을 수 있는 소설.

한국작가도 이런 사람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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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춘 2007-08-07 0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간만에 뵈어요. 공부잘하고 계시나 와봤더니... ㅎㅎㅎ
공부를 해얄 때일수록 소설이 더 땡깁니다그려.

기인 2007-08-07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ㅋㅋ 항상 춘님 유머에 쓰러지고 있습니다 ;)

누에 2007-08-16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궁금해집니다.

기인 2007-08-2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 한번 읽어보세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