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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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化粧)이란 무엇인가. 본질을 가리기 위함. 아니 더 넘어서 화장 한 얼굴 자체가 본질이다. 상품광고는 상품의 화장이고, 맨얼굴의 덧칠이 화장이다. 시뮬라르크의 시대.

그리고 또 화장(火葬)이란 무엇인가. 육신을 불태워 사라짐이요, 소멸이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몇개의 뼈조각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다. 불교에서 스님들의 사리식이 그것. 헛것인 육신을 불길로 지우는 것.

이러한 '화장'에 대해 김훈은 이렇게 표현한다. '건더기는 없고 껍데기뿐이었지만, 이 업계에서 건더기와 껍데기가 구별되는 것도 아니었고 껍데기 속에 외려 실익이 들어 있는 경우는 흔히 있었다.' '헛것들이 사나운 기세로 세상을 휘저으며 어디론지 몰려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화장을 김훈은 중첩시켜서 표현한다. 화장품 광고 상무이사로 화장품에 대한 광고 방안을 아내 상을 당하면서 까지 보고를 받고 결정을 한다. 정작 이 사내는 사내 어느 여직원을 '환상' 속에서 사랑하고 있다. 변변히 말한마디 건네본적이 없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이 사내는 '이름'과 '실재'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 고민한다. 아니 결국 '실재'라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저의 부름이 당신의 이름에 닿지 못해서 당신은 마침내 3인칭이었고, 저는 부름과 이름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건너갈 수 없었는데, 저의 부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몸은 햇빛처럼 완연했습니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말의 환영일 테지요.'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

이는 아내가 말기 뇌종양이 되자 냄새의 구별을 못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아내는 아이스크림이나 더운밥에서 구린내가 난다고 냄새를 맡지 못한다. 이에 주인공은 생각해 본다.
'아내가 치를 떨던 그 구린내는 본래 음식 깊은 곳에 종양처럼 숨어 있던 냄새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뇌가 온전할 때 맡을 수 없었던 그 냄새가 종양이 번지자 비로소 아내에게 감지되는 것은 아닌지'

본질, 실재라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의 인식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 이상의 '실재'는 그야말로 '물자체'인 것.

또 화자는 TV에서 이라크 전쟁을 본다. 화장장에서 자신의 친지의 죽음에 울부짖는 사람들 속에서. 거대한 살인 현장을 무덤덤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TV속의 살인은 더 이상 '실재'가 아닌 것. 화면 속의 살인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무덤덤하다. TV 화면 속에서 이라크 군인에게 잡힌 미국 포로들은 '너는 이라크 군인을 몇 명이나 죽였니?'라고 묻지만 대답하지 못한다. 전쟁은 실재가 아니다. 오락이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에서 보면 실재로 미국 군인들은 하드락 음악을 들으면서 포를 쏘아댄다고 한다.

주인공은 집에 돌아와, '보리'라는 개를 안락사 시키고, 화장 상품건을 처리하고 의식이 허물어지듯 깊은 잠에 빠진다.

김훈의 위와 같은 '실재'에 대한 물음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를 인간 존재의 죽음과 '화장'이라는 소재와 연결시킨 질문은 새롭다. 인간은 살아가며 '자신'(즉 실재)을 숨기며, 사회 또한 자신의 진면목(실재)를 숨긴다. 아니, 인간은 살아가며 여려가지 가면을 얻게 되고, 사회 또한 그 인간의 가면들마다 각자의 사회로 존재할지 모른다. 공허한 가면 축제에 가면들만이 부유한다. 짙은 화장을 덧칠하고, 언젠가는 화장으로 사라질 것을 망각한 채로...

이러한 화장들을 하고, 화장을 잊는 것이 이 사회를 유지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도 하루 하나뿐인 생명을 소진시키며 일터에 나서게 한다. 자본주의 허상, 광고, 여인들의 화장, 친지의 죽음, 등은 너무 쉽게 잊혀지거나, 매우 빨리 잊혀지려고 노력된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화장술로 사람들에게 망각을 부여하고, 사람들은 그러한 화장들에 취해 자본주의를 유지하게 한다.

김훈은 덤덤히 질문을 던진다. 그런 것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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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학부 01학번 입니다. 사실 들어올 때 21세기 첫학번이라고 난리도 아니었던 기억이 납니다. Y2K 문제가 그 때있었는지 아닌 그 작년이었는지, 여하튼 공식적 첫 21세기 학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다른 점은,,, 아마 없었겠지요. 그렇지만 분명 90년대 선배들과는 다른 지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맑스의 자본론을 지하철에서 읽은 세대지요. (헉; 저만 그런건가)

이를 보고 90년대 중반 선배는 자기는 그럴 수 있다는 것, 그래도 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 그런거였나. 그랬지요.



아. 존대로 쓰니 잘 안써지네요; 그냥 쓰겠습니다 ㅎㅎ;


여튼 나는 그랬다. 맑스는 지하철, 버스에서 읽었다. 붉은 자본론을 너덜너덜 할 때까지 읽었는데, 지하철에서 읽는 나를 한 선배는 말렸다. 사실 별로. 내가 자본론을 읽고 있을 때, 나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고 타인도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나는 21세기 학번이고, 21세기 남한 사회는 이제 그렇게 되었다. 물론 어떤 선배가 잡혀갔다고 변호사비 마련을 위한 주점에 가서는 수배중인 다른 선배의 이름을 말하면 안됬지만, 곧 그 선배는 학교에 돌아왔고 학원 강의를 시작했다.


'이데올로기 투쟁' '네가 서있는 곳이 계급투쟁의 장이다'라고 하는 선배에게 '에어콘을 만들 수 있는데, 부채를 만들고 있는 것이야말로 위선'이라고 못 박았지만. 지금 봐라. 나 뭐 하고 있니?


그랬다.


그럼에도 임화의 시 전집을 지하철에서 읽을 때는 주위 시선이 의식되었다. 미제 놈들 때려부수자, 원수의 가슴에 총칼을 꽂고 김일성, 스탈린 만세!! 등의 활자들은 너무나도 커 보였고 사람들은 내게 너무 붙어서 서 있었다. 그래도 내게 와서 무슨 말 하는 이 없었다.


오늘도 재미있게 지하철 2호선 교대역에서 임화 '문학의 논리'를 펴들고 읽고 있었다.

나는 김남천의 '고발문학론'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자신의 소부르주아적인 면모를 고백해서 도대체 무엇을 어쩌겠다는 것인지.. 그것이야말로 소부르주아적인 면모가 아닌가!!! 라고 제법 도도한 포즈로 '부채 만들어서 어쩌라고!'라는 식으로 턱짓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남매'라는 소설은 최서해적 경향으로의 후퇴로 파악하고 있었던 바, 임화가 '남매'에 대해서 '의식이 없네, 세계관이 없네' 등등 혹평하는 부분에 대해서 열심히 읽고 있는 중.

 

 

 


어느 6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할머님이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아.. 임.. 임화.. 이게 누구에요? 나도 국문학도인데... 평론집이네.. 누구에요?


나는 아; 70년전 활동한 분입니다. 했다.


아.. 나도 국문학도인데 처음들어봤는데..


네;; 카프 서기장이었습니다. '납북'되셔서 아마.. 90년대 되서야 연구가 되었습니다.


아.. 그래요.. 우리때는 이태준이 유명했지...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왜 나는 임화가 '납북'된 인물이라고 했을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21세기 학번이다. 맑스를 지하철에서 읽고, 국사과 수업 발표때는 신자유주의적 친미적 포즈로 발표를 해 대던 경제학과 학생들에게 짜증이나서

'나는 사회주의자 입니다. 이를 감안해서 발표문을 들어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한국전쟁에 관해서 매우 좌파적 견해로 발표를 하고는 했었다.


그럼에도 결국 지하철 낯선 60대 할머님에게는 순식간에 임화를 '납북'된 인물로 만들어버리고는 말었던 것이다. 아; 이런 어이없음이여!!!



그리고는 오늘 김남천을 지지하는 분(?)에 대항하여 임화를 열심히 변호하는 발언을 해댔다.

37년 38년 39년에 매우 다른 면모를 각각 보이는 임화에 대해서. 임화의 문학과 정치와 생활의 불일치에 대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발문학론을 운운하는 성실한 청년 김남천보다 내가 임화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를. 이데올로기 투쟁, 네가 서 있는 곳이 계급 투쟁의 장이다 운운하며 임화를 옹호했다.



아아.... 임화 선생께 심히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납북된 임화라니 말이다!!!


열심히 지하철 2호선에서 임화의 '문학의 논리'를 펴들고 있다가 다시 묻는 이가 있다면

분명 말해야겠다. 에고. 심약한 소시민이여...




ps. 무엇인가. 이 글이야말로 김남천에게 절을 해야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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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형식론
신용호 옮김 / 전통문화연구회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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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평측의 율격을 준수하여 지은 시가 바로 근체시이고, 평측율격을 준수하지 않은 시가 고체시였다. 그러나 근체시가 형성된 이후에 지어진 고체시는 근체시의 영향을 받아 성조적 미감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짓지는 않았으며, 근체시가 형성된 이후에 지어진 모든 형의 시들이 모두 평측의 조화 즉 성조적 조화를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게 되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고체시를 비롯한 사와 곡까지도 평측의 조화에 유의하게 되었다.


평성이 자음의 두움과 두미에 변화가 없는 평조라면 측성은 자음의 운두와 운미가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즉 변화가 있는 불평조이다.


4성 8병으로 상징되는 육조적 운율론이 '평측, 근고'로 상징되는 당대적 운율론으로 이행하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첫째, 사성을 단위로 한 성조의 조합은 지나치게 세밀하고 실용성이 부족하며, 둘째, 사성의 구분은 상호 불가결적인 것이 아니고 개별적인 개념의 집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성에 비하여 평측은 세와 조의 중용을 취한 실용적인 운율 단위로, 시인이 시를 지을 때에 평측의 조화를 도모하도록 한 것은 그들에게 지나친 속박도 가하지 않으면서 성조의 조화도 이룰 수 있게 한 것이며, 한시에서의 평측의 구분은 상호 불가결적이면서 상관적인 조합이어서, 한어 본래의 대우적 성격을 적절히 들어내는 운율단위이다. 즉 평측의 관계는 비상관적인 사성과는 달리 상관적으로 이분한 것으로, '평'은 필연적으로 '측'을 의식하고, '측'은 필연적으로 '평'을 의식하는 상호의존적, 상호불가결적인 관계인 것이다.


평측의 대우는 운율상의 배열방법으로 '평평 측측' 또는 '측측 평평'이라는 '평평'과 '측측' 각 2자를 소단위로 한 대우적 배열을 기본으로 한다. 이는 한어의 기초리듬인 '이음절 일박'의 절주단위가 '평측'이라는 성조단위와 결합하여 한시의 음악성을 제고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오언 근체시의 평측에는 '평평평 측측' '평평측측평' '측측측평평' '측측평평측'이 있다.

이는 측기식 수구불입운(측측평평측)

측기식 수구입운(측측측평평)

평기식 수구불입운(평평평측측)

평기식 수구입운(평평측평평)이 있다.

칠언 근체시는 이에 더 붙인 것 뿐이다.


한시는 2음절(2개자)이 1박자를 이루고 있다. 즉 사언시는 매구 2박자의 시이고, 오언시는 구말에 반박자분의 휴지부가 있는 것으로 보아 3박자의 시가 되며, 7언시 역시 구말에 반박자분의 휴지부를 인정하여 4박자의 시로 보고 있다. 5언구는 안정감을 느끼게 하고 7언구는 율동감을 표현한다. 오언시와 칠언시의 절주 단위는 매구의 의미단위와도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나 일치하지 않은 경우도 흔히 있다. -_-; 그러나 절주단위와 의미단위가 불일치하는 경우에도 이를 음영할 때는 절주단위에 맞추어 음영한다. 오언은 2:3 칠언은 4:3으로 한다.


근체시를 일명 율체라 하고 고체시는 비율체라 한다. 근체시를 율체라 할 때 율체를 이루는 운율의 핵심이 바로 평측의 율격이다.


각 절주단위의 명칭은 오언구 제 1,2,자를 두절, 제 3,4자를 복절, 제 5자를 각절이라 부르고, 칠언구는 오언구 앞에 2개자가 첨가된 것으로 보아 이를 항절이라 칭한다. 즉 오언구는 두절 복절 각절 등 3개의 절주단위로 이루어져 있고, 칠언구는 항절 두절 복절 각절등 4개의 절주단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말 즉 각절을 제외한 모든 절은 2개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 2개자의 중심은 매절의 둘째 자에 있으므로 각절을 제외한 각 절의 제 2자를 그 절의 절주점이라 한다.

한 구 속에서의 평측은 한 절이 평성박자이면 다음 절은 측성박자이고 또 그 다음 절은 평성박자로 매 박자의 평측이 서로 사이를 두고 계속 바뀌는 것이 원칙이며, 이를 구중평측상간이라 한다.


시를 지을 때 매구 매자를 모두 평측의 율격에 맞추어 짓도록 요구하는 것은 시인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속박이 된다. 이에 절주점에 해당하는 곳은 평측의 율을 엄격히 준수하되 비절주점에 해당하는 곳은 평측의 제약을 가하지 않는다.


한 연을 이루는 2개의 구 가운데 상구를 출구라 하고 하구를 대구라 칭하는 바, 출구와 대구의 평측은 동일한 위치에 있는 모든 자들이 서로 반대가 되는 것 즉 자자상대가 원칙이다.

매연 출구와 대구 제 2자의 성조는 반드시 서로 반대가 되도록 해야 하는 평측 격률을 대법 또는 반법이라 하며, 근체시에서는 이 격률을 위반한 실대를 시병으로 보아 크게 꺼리는 바이다.


점이란 상련 대구 제 2자와 하련 출구 제 2자의 성조가 일치하여야 함을 말한다.


근체시 가운데 어느 시가 평기식이냐, 입기식이냐를 따지거나 대 및 점을 따지는 기준이 되는 자가 모두 제 2자임은 매구의 제 1자는 평측을 불론해도 되는 자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금기사항은 고평과 삼평조이다. 고평은 평성 한 자가 양쪽의 측성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다. 이는 매우 크게 꺼린다.

삼평조는 오언구나 칠언구의 하반부 3자가 모두 평성이 된 것을 말한다.


내용이 음악성 보다 우선이기는 하지만, 음악성도 고려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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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라는 영화가 있다.
사실 '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가 원제임으로,
포스트맨은 항상 벨을 두번 울린다. 가 맞다.

또 지젝의 입문서이지만 전혀 입문서 스럽지 않은; (적어도 나에게는; )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 보면 '당신은 항상 두 번 죽는다'라는 장이 있다.
 
 
 
 
 
 
 
 

좋다.

그래서 나는 '발표문은 항상 두 번 쓰여진다'라는 제목을 써놓고 뿌듯했던 것이다.
실제 내 상황은 뿌듯과 거리가 멈에도 불구하고!

발표를 한 번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발표문을 쓰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첫번째 발표문을 쓸 때, 어렴풋이 느낀 것이지만. 두 번째 발표문을 쓰려니,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게 무엇이냐. 바로
'발표문은 항상 두 번 쓰여진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것은 항상 첫번째 것에 미치지 못한다.)

나의 논리와 방법론에 따르면 내 발표문은 우왕좌왕 좌충우돌 하면서 논리의 흐름을 지닌다. 방법론 자체가 골드만의 구조주의적 발생론이고 이는 그야말로 변증법적 사고의 틀이다. 즉 변증법적 논리의 흐름을 갖는다. 전체는 부분 속에서 의미를 갖고 부분은 전체 속에서 의미를 갖고 '의미 있는 구조'는 보다 큰 구조 속에 삽입되어지고 더 큰 구조는 작은 구조 속에 삽입되는 역동적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이해와 설명이 도출되어 지는 것이다. 그렇다.

그런데.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 과정에서 요구하는 발표문의 체계는 매우 합리주의적인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깔고 있다.
1. 연구사 검토.
2. 연구 방법론(혹은 연구의 시각)
3. 본론 1장
4. 본론 2장
5. 본론 3장
6. 결론.
참고문헌

이것이다. 위와 같은 체제는 글의 논리상 흐름을 과격하게 확정시킨다.
(이는 처음에는 아마도. 서술자의 편의를 위해서. 그의 논리성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체제였을 것이다.
지금은 분명. 독자의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놓은 구성으로 보인다. 혹은 제도의 힘.)

우선 매우 '합리주의적'으로. 마치 뉴튼 처럼. 거인의 어깨에 기를 쓰고 올라간 난장이의 형상을 만들어 놓는다.
(If I have seen farther than others, it is because I was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아 뉴튼 '경'..)

즉 나와 같은 석사 1학기 아해는. 김윤식 선생님. 오세영 선생님. 김용직 선생님. 등등의 거인들의 생각들을 쭈우욱 제시하고 그것의 의의와 한계를 일괄적으로 제시한 후에.

자아. 그러니까 저는 여기서 시작하지요. 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 좋다. 이는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식으로 사고를 진행하지 않는다. 사실 이 논리의 흐름 체제 자체는 나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국문학 연구에 '가능한' 시각에 대한 매우 폭넓고 비상한 시각이 연구자에게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물론 나는 그렇지 않다.

때문에 나는 텍스트와 우선 만난다. 물론 그 와중에 기존 연구사에 대한 지식이 어렴풋이(!) 녹아 있다. 그리고 텍스트에서 어떤 단초를 발견하고. 이에 본격적인 연구사 검토에 착수한다. 그리고 내가 주장하려는 바에까지 도달하기 위한 기존 연구들을 선별적으로 골라내어 연구사검토에 제시한다. 그리고 나서 중요한 연구사들을 무자비하게 정리한다. 그렇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가능하다. 더더욱 난점은 '연구방법론' 혹은 '연구의 시각'이다.

이것 때문에. 발표문은 항상 두 번 쓰여질 수 밖에 없다. 우선 내 주장과 논리를 나름의 단계까지 끌어올린다. 이것이 원본 발표문이다. 그 다음에 '발표문 체계'에 우겨넣는다.
여기서 긴장이 발생한다. 논리는 명제들의 배치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나의 논리는 나의 배치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배치를 해야 한다.. ㅜㅠ

또.. 문제는..연구의 시각에 도대체 어디까지 서술할 것인가. 라는 거다.

연구의 시각에서 전체 글의 결론이 발생하는 경우, 혹은 결론의 징후가 나타난다면. 이는 무언가 슬픈 장난처럼 보인다. 포퍼식의 '가설-반증 안됨'도 아니고.... 아니면 아예 '가설제시-본론에서 입증'이런 것인가..

순진하고도 솔직한 나는.;; 이렇게 못한다. 따라서 정말 '연구의 시각'만 작성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본문에서 또 문제가 생긴다. 본문이 텍스트 분석 뿐만 아니라, 연구 방법론에 대한 장황한 서술로 인해. 독자들의 집중을 떨어뜨리는 한편. 더구나 글의 흐름이 산만해 지게 되는 것이다. 흑.

그래도. 전작의 발표는 '작품론'이었기에 어느정도 절충이 가능했다.
본문의 1장을 '주요한과 그의 시대' (나름대로 유머였다. ㅎㅎ;; )
2장을 고독한 대화에서 현실적 대화로. (즉 '불노리'의 '이해' )
3장은 1장과 2장의 변증법적 종합으로 즉 '불노리'라는 작품의 '설명'으로 구성할 수 있었고.
내 나름의 논리적 흐름을 그나마 체계화 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 그런데. 이제 '작가론'이 되어버리니 난감해진다.

분명히. 발표문의 체계는 (부르주아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내 논리의 흐름은. 변증법이다...



어떤 몸부림

골드만이 옳다고 열라게 주장하다,
마침내 발표문을 쓰게 되다.

추석도 연구실에서 보낸 시절
고물 노트북 위에 서다.

어디다 논리를 꾸겨넣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발표문은 항상 두 번 쓰여지나 보다.


물론. 골드만의 방법론은 '보완'될 필요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옳다.
아으 다롱디리~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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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생각의나무 우리소설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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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의 노래. 지겹다. 그러나 다 읽고 나니. 울리는 것이 있다.


고등학교 때. 나는 줄곧 일본소설들을 읽었다. 하루키의 팬이었고, 무턱대고 읽었다. 심지어 하루키 여행 사진첩까지 읽었다. 맥주를 마시고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하고 핀볼을 하거나 야구를 보고 여행을 떠나도 좋았다. 그냥 그런 이야기였고, 갑자기 양인간이 나와서 어이없는 말들을 하고는 했다. 고등학교 모범생 삶 속에서, 짜여진 규율 속에서 하루하루 지워나가던 나는, 그러한 하루키의 하루키스러움이 마냥 좋았다.

 

일본어 번역투는 무언가 가벼운 면이 있다. 그래서 일본어 번역 소설들을 좋아했다. '아니, 그거 곤란한데' 따위의 대화가 천연덕스럽게 50대 남성 주인공의 입에서 나왔다. 곤란하다. 이런말을 좋아했다. 그러다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을 읽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그야말로 시다. 일식의 순간 주인공이 십자가에 묶여 화형당하기 직전 태양, 혹은 태양의 부재를 보며 사정한다. 십자가에 묶여 화형당하는 남성과, 일식의 순간 직립한 남성의 페니스에서 포물선을 그리면서 떨어져 내리는 하얀 정액들... 읽는 내내 재미있었지만, 그 순간은 눈물 겨웠다. 시였다.


학부 때. 나는 소설을 시로 읽는다는 말을 들었다. 소설을 시로 읽는다면, 꽤나 긴 시로 읽는 셈이다.

김승옥의 '서울 1964 겨울'을 읽고 내가 했던 주된 말은. 서울과 겨울. 그 울림의 동일함. 각운. 즉 서울 1964는 겨울이었다는 것. 이었고. 최인훈의 광장을 읽으면서는. 바다를 건너가는 '타고르'호에 대해서. 타고르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그러니. 소설 전공한 선생님께서는. 소설을 시로 읽는구나. 그랬다. 나는 그렇구나. 그랬다. 다행히도. 시를 소설로 읽는구나. 라고 한 선생님은 없었다.


현의 노래는 울림이 있다. 지겹게 지겨운데, 절정의 순간이 보인다. 김훈의 정치적 허무주의.

일흔의 신라 노장군과 일흔의 가야 노악사가 만난다.


이 변방 산성에까지 어떻게 왔느냐?

개포 나루 건너 귀국의 서부 전초에 의탁했소. 귀국의 사신이 그리 일러주었소.

데리고 온 자는 누구냐?

내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오.

귀부하는 뜻이 무엇이냐?

이제 신라 병부령께서 가야를 토멸하실 것이니, 다만 살아서 소리를 내려 하오.

그뿐이냐?

그뿐이오.

너는 가야의 녹을 받았느냐?

많지는 않았소.

가야의 악사는 무슨 일을 하느냐?

왕들이 죽으면, 무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금을 뜯으며, 소리를 베풀었소.

왕의 장례에 소리를 베풀며 녹을 받던 자가 적국으로 귀부함이 온당하냐?

귀국의 도끼에 맞아 죽는 것 또한 온당치 못할 것이오.

이사부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사부는 온몸을 흔들며 웃었다.

그렇겠구나. 세상에, 온당하기란 쉽지가 않구나.


돌연 삼국지가 생각난다. 멋있는 장수들은 모두. 내 목을 베어라 했다. 그러면 베는 이도 있었다.

졸장부들은 살려주시오. 했다. 그러면 베는 이도 있었다. 전자는 존경했고, 후자는 침을 뱉었다.

이런 것을 읽으면. 결국 전쟁에서 지면, 내 목을 베어라 한 다음에 죽는게 더 괜찮겠구나 하게 된다. 살려주시오. 하고 죽으면 좋을게 별로 없으니까. 알게 모르게 그런 생각이 굳어졌다.


그래서인지. 유쾌했다. 우륵은 다른 이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한다. 도끼에 맞아 죽는 것 또한 온당치 못하다.

마치. 전혀 곤란하지 않은 어투로. 양인간이 갑자기 찾아와서 맥주를 두 병쯤 비우고 나서.

우리 여행을 떠나야 되. 라고 했을때. 하루키가

'아 그것 참 곤란한데.'라고 하는 것이 떠오른다.


곤란하고 온당치 못하다. 하루키를 계속 읽다보면, 무언가 될대로 되라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될대로 되면 좋겠다 싶다. 김훈의 '칼의 노래' '현의 노래' '화장'을 읽었다. 화장은 꽤나 복잡하게 삼중으로 꼬여있는데. 하루키가 유쾌하고 쿨하게. 아 될대로 되라지. 라고 한다면.

김훈은 우울하고 침중하게. 아 될대로 되는거야. 라고 한다.


당대문학은 참 곤란하다.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상승하는 집단, 뚜렷한 중심 전선의 부재. 모선생의 재구된 리얼리즘론은 매우 깔끔했다. 이론이 깔끔하다는 것은 내가 최고의 장점으로 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이 명확한데, 그 이론을 이해하고 나서 세상이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만큼. 슬픈 일은 없다.


될 대로 되라. 뭐 이렇게 된다. 역시. 김훈과 하루키. 그만 읽어야 되지 않나 싶다.

다시 20~30년대에서 놀아야겠다. 지난 방학 때는 방현석을 읽고 베트남을 꼭 가야지 했다.

역시. '지금-여기'는 무리다. 이라크, 베트남, 1920~30년대. 임화는 왜 1940년대 돌연, 30년대 말의 우울한 현장비평에서 U턴을 해서 다시 문학사 쓰기로 돌아갔던가.

50년 후 친구들은 또 비웃겠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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