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적 개인주의, 아방가르드 영역

난 신도 믿고, 과학도 믿고, 그리고 일요일 저녁 약속이 있을 거란 것도 믿어. 하지만, 내가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칙 따윈 믿지 못하겠군.” - 길 그리썸, CSI 라스베가스

 

이곳은 격식과 통념에서 벗어난,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탈적인 비주류를 위한 곳입니다. 고답적인 창작자,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의 예술과 문화의 성역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규율과 질서를 숭상하는 엄숙주의자, 국민 정서와 사회 정화를 믿는 검열주의자,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당장 사라져 주시기 바랍니다.

 

이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문화 예술 애호가. 문화 예술에 대한 평론가 수준의 심미안과 감별력을 소유했을 가능성도 있음.

  • (문화 예술 애호가가 아닐 경우) 경험과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닌, 선천적인 감각을 가졌음.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을 알아보는 타고난 감각
     
  • 다듬어지지 않은 자신감과 솔직함, 진실을 존중함
     
  • 극단적 개인주의, 전위적 창의력을 장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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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6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6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코그라피 - 텔레비전에 관하여
자크 데리다. 베르나르 스티글러 지음, 김재희 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구판절판


독특성 singularite은 구조주의 이후의 프랑스 철학자들(알튀세, 라캉, 들뢰즈, 데리다, 바디우, 장-뤽 낭시 등)에 의해 가장 널리, 그리고 가장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 개념 중 하나이며, 따라서 구조주의 이후 프랑스 철학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줄 수 있는 개념 중 하나이다.
일상 어법에서 singularite나 singulier는 다른 것들과 구분되는 어떤 개체의 고유한 특성을 가리키거나 평범한 것과 구분되는 유별난 것, 특이한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데, 데리다는 독특성을 기원의 부재, 따라서 원초적 동일성의 부재라는 그의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통찰에 의거하여 이해하고 있다. 데리다 철학에서 기원 내지 원초적 동일성은, 자신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서 타자에 의한 매개작용을 항상 이미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이해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파생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원은 매개에 의해, 선험적인 것은 후험적인 것, 초월론적인 것은 경험적인 것, 현전은 부재에 의해 항상 이미 오염되어 있다. 이러한 원초적 오염/혼합의 사태는 모든 고유성/독특성에 대한 해체적 효과를 낳는다.-24쪽

(1) 따라서 만약 도특성이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특이한>이나 <고유한>으로 이해된다면, 데리다 철학에서 독특성을 위한 자리는 남지 않게 도니다. 특이성이나 고유성이 그것 자체로 확인되고 인정되기 위해서는 특이성이나 고유성은 항상 일반성으로 포섭 내지는 번역되어야 하며, 이는 그 고유성의 해소, 환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4쪽

(2) 하지만 만약 이러한 해소, 환원의 위험을 피해 독특성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번역과 해석, (재)전유의 시도를 포기한다면, 독특성은 일체의 가지성(可知性)을 박탈당하게 되며, 이는 결국 독특성의 이론적, 실천적 가능성을 봉쇄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이 경우 독특성은 합리성으로부터 근원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예견과 계산 속에서 통제된 사건들, 즉 모의물들뿐일 것이다).-24쪽

(3) 따라서 독특성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기입과 전송, 번역 (재)전유의 불가피성을 긍정함녀서도 동시에 이러한 (재)전유 속에서 환원 불가능한 독특성이 가능하고, 항상 이미 발생한다는 것, 또는 오히려 기입과 전송, 번역, (재)전유가 환원 불가능한 독특성의 (불)가능서으이 조건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24쪽

이런 조건들에 따라 이해된 독특성은 분-유되는 것, 즉 스스로를 전달하고 드러낼 수 있기 위해 스스로를 (독특성과 일반성으로) 분할하고 차이화하는 것, 이처럼 분할됨으로써만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독특성에 관한 뛰어난 노의에서 새뮤얼 웨버는 벤야민의 <아우라>를 이런 의미에서의 독특성의 한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Samuel Weber, "Goings On," Mass Mediauras: Form, Technics, Media[Stanford UP, 1996] 참조-25쪽

본문에서 데리다가 말하고 있는 <죽음의 독특성>은 데리다의 <<죽음의 선사 Donner la mort>>(1992)의 논의에 의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죽음의 독특성은 어느 누구도 <나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즉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죽음은 모든 경우마다 나 자신의 것>이라는 데서 비롯되며, 이러한 대체 불가능성이 바로 자아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 절대적 독특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죽음을 떠맡는 데 바로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책임>이 존재한다. 그런데 하이데거를 비판하며서 레비나스가 말하듯이 이 책임은 타자의 죽음에 직면하여 생겨나는 것이지, 본래적 현존재의 기투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가 생각하듯 이 죽음은 단순한 <사멸> 내지는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이보다 훨씬 근원적인 체험으로써 <타자의 죽음>, <타자를 위한 죽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책임 responsabilite은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타자의 부름에 대한 <응답 reponse>의 가능성과 다름없다.-25쪽

singularite는 국내에서는 주로 <특이성>이나 <단독성>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전자는 수학적, 물리학적 용어법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지만, 개념적 내용만이 아니라 어법상으로도 singularite의 역어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 후자는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용어법을 차용하고 있는데, 데리다의 (최근) 철학에서 실존주의에 대한 성찰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리가 있는 역어이지만, singularite의 차원을 <인간 실존>의 차원에 국한시킨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singularite는 일반적인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개념적 의의가 충분히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기존의 역어 대신 <독특성>이라는 용어를 singularite의 역어로 사용한다.-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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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9-03-04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드릭 제임슨의 A Singular Modernity 번역때 참고할 것.

람혼 2009-03-04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ingularity'가 '독특성'으로 주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도 아마 이 <에코그라피>의 국역본이 출간된 이후인 듯합니다.

기인 2009-03-04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람혼님 안녕하세요^^
좋은 역주인 것 같아요 ㅎㅎ

릴케 현상 2009-03-0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의 흔적들이 팍팍 올라오고 있군요^^저는 이제 엑셀에 좀 익숙해져야 할 것 같네요~
 
에코그라피 - 텔레비전에 관하여
자크 데리다. 베르나르 스티글러 지음, 김재희 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구판절판


프로이트에게 빌려와 알튀세가 사용한 <과잉규정 surdetermination> 개념은 원래는 마르크스의 예상과는 달리 20세기 초반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한 이유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목적하에 고안된 개념이었다. 역사유물론의 일반적인 문제설정에서 보자면 이 개념은 역사적 인과관계의 복합성을 해명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 이래의 진화주의적 경제주의와 헤겔주의적 목적론 양자를 넘어서려는 목표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개념은 처음에느 토대에 대한 상부구조의 반작용(또는 역규정)이나 사회적 심급들의 (상대적) 자율성을 해명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였으며, 이런 의미에서는 <다원규정>, <중첩규정>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20쪽

하지만 이후 과소규정 sousdetermination 개념과의 불가분한 연관성이 명시되면서, 이 개념은 훨씬 <해체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즉 두 가지 개념이 상호연관되어 쓰일 경우 과잉규정은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정세적 조건>으로, 과소규정은 <이행을 불가능하게 하는 정세적 조건>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이 양자가 동시에 작용한다는 점이며, 이는 이행의 아포리아적 성격을 부각시킨다. 따라서 이는 어떤 체계의 간으성의 근거는 동시에 그 체계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한다는 데리다의 의사-초월론적 quasi-transcendental 문제설정과 <유사한> 개념적 함의를 가진다(이는 복합적이면서도 중요한 쟁점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논의하기는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데리다가 알튀세의 여러 개념 중 과잉규정 개념을 가장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이 개념은 보통 <과잉결정>이라고 번역되지만, 데리다가 결정 decision과 규정 determination을 체계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용어적 일관성을 위해 <과잉규정>으로 번역한다.-2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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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의 글을 다시 훑어보고, 이 글이 실린 New Left Review에 바디우가 영어로 썼다는 것을 상기하고 나니, 텍스트에 내재된 욕망이 읽힌다. 

우선 French라는 국적/언어로 철학을 한정해서, 이를 네가지 기준으로 간명하게 설명한 것이 함의하는 것. 이것의 효과는, '프랑스 철학'을 하나의 system이나 champ으로 파악/규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 와중에 '독일 철학'의 전유나 '프로이트'와의 대화같은 부분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들을 타자로 삼아 '프랑스 철학'이라는 것을 규정-설명 하고 싶어한다. 

이를 자신의 사유언어인 불어로 쓴 이후에 번역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영어로 썼다는 것(바디우의 '직접적' 소통의 열망?/영어라는 국제어에 '프랑스 철학'을 기입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이 글이 실린 공간이 New Left Review(좌파 비교적 대중지)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gender/class/등으로 철학을 나누지 않고,(예를 들면 여성철학자들의 사유 체계나 중산층 지식인들의 사유체계의 흐름 등) nationality나 language로 현대철학을 구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이는 또 어떤 전제하에서 작동되고 어떠한 신비화에 기여하는가.  

New Left Review가 바디우에게 최근 'French Philosophy'의 동향에 대해 써주세요 라고 부탁했다고 하더라도, 이 French라는 것을 사유해야 하는 의무가 있지 않을까. 폴드만(폴드만은 '미국'철학인가?)이나 푸코나 알튀세나 사이드라면 어떻게 썼을까. (New Left Review는 말그대로 '좌파'잡지이지만 맑스주의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좌파와 국적이라...)

글을 읽으면서 이것이 못내 걸리고 또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사실 푸코보다는 이에 대한 본격적인 글을 써보고도 싶다.)  

 사르트르에서 들뢰즈까지(바슐라르, 메를리 퐁띠, 레비스트로스, 알튀세, 푸코, 데리다, 라깡, 그리고 바디우 자신까지)의 사상적 지형도, 그 풍성함.  

'우리'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 그리고 이를 '한국현대철학의 지형'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언제나 민족(주의)를 벗어났다고 말하고 있지만, 언어나 나를 둘러싼 제반환경은 언제나 나를 민족(주의)적 주체로 호명하고는 한다. 이번에는 바디우의 '프랑스 철학'이라는 것이 나를 '한국인'으로 호명했다.  

영문과 수업과 영문과 친구들이 나를 다른 방식으로 호명되게 하는데 도움되기를 :) 

푸코의 What is an Author을 읽기 전에,  

What is an French Philosophy?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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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in Badiou, 'The Adventure of French Philosophy', New Left Review 35, Sept Oct 2005. 

요즘 번역이나, 관련 서론 때문에 논의가 많이 되고 있는 New Left Review지에 실린 (이 글은 번역되지 않았다) 글이다. 매우 평이하고 간결하게 20세기 프랑스철학의 흐름들을 정리해 놓았다. 폴드만을 읽고 읽어서 그런지, 바디우 완전 친절하다. 물론 대상 독자도, New Left Review를 읽는 일반독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 같다.  

바디우는 사르트르에서 들뢰즈까지(바슐라르, 메를리 퐁띠, 레비스트로스, 알튀세, 푸코, 데리다, 라깡, 자신)이라는 풍성한 20세기 프랑스철학의 역사적, 지성사적 통일적 배경을  

1. 기원/ 2. 철학적 작업의 원칙/ 3. 문학과의 관계/ 4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끊임없는 논의 

라는 네가지 부분으로 살펴본다. 사실 이렇게 네가지를 나열하고 난 직후에, 20세기 프랑스철학의 지도를 바디우가 어떻게 그려내려고 하는지, 매우 분명하게 나타난다. 

기원은 인간 주체에 관련된 문제들을, 삶과 개념과의 관계에서 논한 것이며(베르그송과 Brunschvicg) 

두번째 철학적 작업의 원칙은 개념과 그 외부적 환경을 논한 것(존재, 사상, 행동, 형식의 움직임) 

세번째 문학과의 관계는, 철학이 형식에 물음을 던지면서 자신의 언어 또한 새로운 형식으로 제출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네번째 주체를 중심 문제로 삼으면서 정신분석학과 대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이 책이 떠오른다. 홍준기 선생님 잘 계시는지..) 

 

 

이처럼 간명한 지도는, 나에게 다시 '주체'라는 문제 그리고 지젝이라는 '작가'와 만나게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역시 나는 남들보다는 항상 5~6년 정도는 느린 것 같다...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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