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성 singularite은 구조주의 이후의 프랑스 철학자들(알튀세, 라캉, 들뢰즈, 데리다, 바디우, 장-뤽 낭시 등)에 의해 가장 널리, 그리고 가장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 개념 중 하나이며, 따라서 구조주의 이후 프랑스 철학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줄 수 있는 개념 중 하나이다. 일상 어법에서 singularite나 singulier는 다른 것들과 구분되는 어떤 개체의 고유한 특성을 가리키거나 평범한 것과 구분되는 유별난 것, 특이한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데, 데리다는 독특성을 기원의 부재, 따라서 원초적 동일성의 부재라는 그의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통찰에 의거하여 이해하고 있다. 데리다 철학에서 기원 내지 원초적 동일성은, 자신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서 타자에 의한 매개작용을 항상 이미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이해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파생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원은 매개에 의해, 선험적인 것은 후험적인 것, 초월론적인 것은 경험적인 것, 현전은 부재에 의해 항상 이미 오염되어 있다. 이러한 원초적 오염/혼합의 사태는 모든 고유성/독특성에 대한 해체적 효과를 낳는다.-24쪽
(1) 따라서 만약 도특성이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특이한>이나 <고유한>으로 이해된다면, 데리다 철학에서 독특성을 위한 자리는 남지 않게 도니다. 특이성이나 고유성이 그것 자체로 확인되고 인정되기 위해서는 특이성이나 고유성은 항상 일반성으로 포섭 내지는 번역되어야 하며, 이는 그 고유성의 해소, 환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4쪽
(2) 하지만 만약 이러한 해소, 환원의 위험을 피해 독특성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번역과 해석, (재)전유의 시도를 포기한다면, 독특성은 일체의 가지성(可知性)을 박탈당하게 되며, 이는 결국 독특성의 이론적, 실천적 가능성을 봉쇄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이 경우 독특성은 합리성으로부터 근원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예견과 계산 속에서 통제된 사건들, 즉 모의물들뿐일 것이다).-24쪽
(3) 따라서 독특성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기입과 전송, 번역 (재)전유의 불가피성을 긍정함녀서도 동시에 이러한 (재)전유 속에서 환원 불가능한 독특성이 가능하고, 항상 이미 발생한다는 것, 또는 오히려 기입과 전송, 번역, (재)전유가 환원 불가능한 독특성의 (불)가능서으이 조건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24쪽
이런 조건들에 따라 이해된 독특성은 분-유되는 것, 즉 스스로를 전달하고 드러낼 수 있기 위해 스스로를 (독특성과 일반성으로) 분할하고 차이화하는 것, 이처럼 분할됨으로써만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독특성에 관한 뛰어난 노의에서 새뮤얼 웨버는 벤야민의 <아우라>를 이런 의미에서의 독특성의 한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Samuel Weber, "Goings On," Mass Mediauras: Form, Technics, Media[Stanford UP, 1996] 참조-25쪽
본문에서 데리다가 말하고 있는 <죽음의 독특성>은 데리다의 <<죽음의 선사 Donner la mort>>(1992)의 논의에 의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죽음의 독특성은 어느 누구도 <나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즉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죽음은 모든 경우마다 나 자신의 것>이라는 데서 비롯되며, 이러한 대체 불가능성이 바로 자아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 절대적 독특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죽음을 떠맡는 데 바로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책임>이 존재한다. 그런데 하이데거를 비판하며서 레비나스가 말하듯이 이 책임은 타자의 죽음에 직면하여 생겨나는 것이지, 본래적 현존재의 기투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가 생각하듯 이 죽음은 단순한 <사멸> 내지는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이보다 훨씬 근원적인 체험으로써 <타자의 죽음>, <타자를 위한 죽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책임 responsabilite은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타자의 부름에 대한 <응답 reponse>의 가능성과 다름없다.-25쪽
singularite는 국내에서는 주로 <특이성>이나 <단독성>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전자는 수학적, 물리학적 용어법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지만, 개념적 내용만이 아니라 어법상으로도 singularite의 역어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 후자는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용어법을 차용하고 있는데, 데리다의 (최근) 철학에서 실존주의에 대한 성찰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리가 있는 역어이지만, singularite의 차원을 <인간 실존>의 차원에 국한시킨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singularite는 일반적인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개념적 의의가 충분히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기존의 역어 대신 <독특성>이라는 용어를 singularite의 역어로 사용한다.-2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