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닉네임을뭐라하지 > [퍼온글] 무라카미 하루키

 

[조선인터뷰] "당신이 진정 구원 받으려면 홀로 어

둠의 끝까지 가 봐야"

아무도 모르게 한국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
젊음 비결은 넥타이·출퇴근·회의·상사없는것
일본적인 것? 그게 무엇인지 난 잘 모르겠다

▲ 조선일보와 독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쓰고 있는 하루키씨.
‘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 ‘어둠의 저편’ 등으로 국내에도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57)씨는 도쿄 중심 미나토구에 사무실을 갖고 있다. 26일 오전 11시, 덴마크하우스란 빌딩의 꼭대기층(6층)에 올라가니 가로 세로 1m쯤 되는 심플한 나무책상이 있었고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맞았다. TV 출연·신문 인터뷰를 한사코 사양해온 그였다. 미국·유럽·아시아를 넘나들며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였지만 소탈한 차림이었다. 그는 1979년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후 수십 권의 작품들이 31개국에 번역돼 있다. 국내에는 90년대 장편 ‘상실의 시대’로 이른바 하루키 신드롬을 불러일으켰고 2006년 ‘도쿄기담집’에 이르기까지 80권의 책(중복출간 포함)이 나왔다. 다음달에는 장편 ‘국경의 남쪽’, 그리고 음악 에세이집 ‘의미가 없으면 스윙도 없다’가 출간될 예정이다.

―독자들은 왜 당신 작품을 좋아할까.

“어려운 질문이다. 난 쓰고 싶은 내용을 쓰고 싶은 대로 쓸 뿐이다.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세계 각지 독자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중독’이라고 한다. 마치 바늘에 찔린 것처럼.”

―당신은 일본과 아시아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평가된다. 하지만 당신은 일본적인 세계관에 근거한 작품을 쓴 적이 별로 없다.

“‘일본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하나도 모르겠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라고, 일본어로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으로, 그 이상 어떻게 하면 ‘일본적’이 되는 것인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인가?”

―일본을 느끼게 한다기보다 보편적인, 국적 없는 현대인을 느끼게 한다고 할까.

“지난 월드컵을 보자. 한국·일본·브라질 같은 각 팀은 전략·스타일이 다 달랐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골을 넣는 것이다. 나에게 골은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的)’, ‘~적(的)’ 하는 것은 의미 없다.”

―한국의 최대 인터넷 서점인 ‘예스 24’가 금년 여름 휴가를 앞두고 설문조사를 했다. ‘여름휴가 때 추천하고 싶은 책’ 1위로 당신의 ‘해변의 카프카’가 꼽혔다. 당신 작품들은 감성에 바탕을 둔 인생담론과 서정이 넘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독자를 압도하는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레이먼드 챈들러, 혹은 폴 오스터 같은 다소 하드보일드한 리얼리즘 쪽 작가를 칭찬한다. 이 격차는 왜 생기는가.

“독서는 독서고, 집필은 집필이다. 두 가지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에서, 아주 많은 것들을 배워왔다.”

―거의 모든 작품을 통해 당신은 소외된 현대의 군상에 주목해왔다. 그러나 고독과 상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전망을 테마로 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은 혹시 비관적 허무주의가 문학적 형상화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 기본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다. ‘허무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척 놀라곤 한다. 내 소설의 주인공 대부분은 혼란이나 고독, 상실을 헤쳐가고 있지만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그들이 구원받는 광경이 아니라, 구원받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을 이루는 광경이다. 사람이 진정으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홀로 어둠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게임의 룰이다.”

―당신은 이번 인터뷰에 응하면서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조건을 달았다. 왜 그랬는가.

“조건이 아니라 희망이었다.(웃음) 사실은 옛날에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이 곤란한 문제가 됐다. 물론 나는 정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생목소리를 내기보다 소설 속에 넣어서 쓰고자 한다.”

―당신은 정치적으로 진보주의자인가 보수주의자인가.

“나는 리버럴리스트다. 진보주의를 신봉한다.”

―왜 그런가.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왔다. 정치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마찬가지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일본의 사회현상이 우익화하는 것을 경계한다. 때로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보수다 진보다 갈등이 있지 않은가?”

―보수 대 진보, 그리고 자유를 현실 정치에서 인식하는 상황이 일본과는 많이 다르지만, 물론 갈등은 있다.

“일본에서도 그런 경향이 있고, 내가 비판의 표적이 됐던 적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가능하면 물러서 있다.”

―당신 작품에는 언제나 음악이 흐르고 술 냄새가 피어오른다. 비법을 조금만 공개해달라.

“노하우는 없다. 다만 내가 맥주를 묘사할 때, 나는 독자들이 ‘아, 맥주 마시고 싶어’라고 생각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맥주를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조차 그런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뿐이다.”

―와세다 대학을 1968년에 졸업한 후 당신은 재즈 바 ‘피터 캣’을 경영했다. 문학과 재즈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 〈조선일보와 독자 여러분을 위하여〉
한국의 독자 여러분이 제 책을 열심히 읽어 주시는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음 소설을 즐겁게 기다려 주십시오.

(무라카미 하루키. 2006년 7월 26일)
“나는 레코드를 1만 장 정도 샀고 현재 6천 장쯤 가지고 있다. 나는 소설 쓰는 법의 상당 부분을 재즈에서 배웠다. 리듬, 하모니, 즉흥성에서 공통점이 많다.”

―한국의 문학평론가 유종호 교수가 월간 ‘현대문학’ 6월호에서 ‘노르웨이의 숲’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쓰여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교제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라고….

“그 소설이 ‘읽기 쉽게 쓰여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저 ‘읽기 쉽게 쓰여 있는’ 것을 혐오하는 비평가는 세상에 많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읽기도 쉽고, 내용도 깊이 있는 소설’이다. 반대로 가장 싫은 것은 ‘읽기도 어렵고 내용도 빈약한 소설’이다.”

―당신 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글도 많은가.

“일본에서는 그런 비평은 산처럼 쌓여 있다. 몇 년 전 독일 TV에는 독자토론 형식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국경의 남쪽’에 대해 토론을 벌이던 중 너무 뜨거워져 싸움이 났고, 프로그램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웃음)”

―당신은 남성들에게 주부로 살아보는 경험을 옹호하는 수필을 쓴 적이 있다. 왜 그런가.

“나도 실제로 가정주부처럼 지낸 적이 있다. 꽤 좋은 공부가 됐다. 요리·청소·빨래 같은 현실 생활에서 자립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마라톤 대회에 왜 자주 나가는가.

“나는 풀 코스 마라톤을 26번 완주했다. 보스턴 마라톤에만 7번 나갔다. 100킬로미터 마라톤에도 참가했으며, 철인3종 경기에도 몇 번 나갔다. 모두 신체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그래야 집중력과 지속력을 높일 수 있고, 보다 우수하고 장대한 소설을 쓸 수 있다. 물론 경기 후에 마시는 한잔 맥주가 맛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항상 심플한 차림인가.

“보통은 반바지를 입는 때도 많다. 오늘은 중요한 인터뷰가 있기 때문에 긴바지를 입었다. 내가 넥타이를 매는 건 1년에 2번 정도다. 내가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을 4가지 말할 수 있다. 넥타이를 안 매는 것, 출퇴근이 없는 것, 회의(會議)가 없는 것, 상사가 없는 것.”

▲ 무라카미 하루키씨가 도쿄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옥상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사진 찍는 일은 언제나 쑥스럽고 어색하다고 했다. /도쿄=김광일기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레코드 6000장… 한때 재즈바도 운영해

마라톤 26회 완주… 1년중 넉달 해외여행

“여행을 많이 하다 보니 인터뷰 요청에 쉽게 대답 못했습니다.”

응접실에 들어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씨는 단단하면서도 서글서글한 인상이다. 그는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 자신의 신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오늘날 세계인이 공감하는 보편성과 감성을 가진 작가가 되고자 미리 작정이라도 하듯 젊은 날을 살아왔다. 효고현에서 출생한 그는 중학교 때 러시아 문학과 재즈에 심취했고, 고등학교 때는 미국 소설 원서를 끼고 살았으며, 와세대 대학에는 연극과에 들어갔다. 졸업 후에는 ‘피터 캣’이라는 재즈 바를 운영하며 음악과 사람 보는 법을 공부했다.

그는 마라톤과 재즈에서 프로 뺨치는 수준이고, 위스키와 요리에 대해서도 책을 낸 바 있다. 틈이 나면 미국 현대문학에 대한 번역도 열심이다. 1년 중 3분의 1 정도는 해외 여행을 다닌다. 하지만 어디에 있든 집필을 멈추지 않고 전방위적 장르에 왕성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그에 대한 번역과 비평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하버드대의 제이 루빈 교수는 하루키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버렸을 정도다. 아사히 신문은 새 밀레니엄을 맞으며 지난 천년 동안 가장 탁월한 문인을 묻는 여론조사를 했는데, 하루키씨는 살아 있는 작가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35년 전 대학 때 만난 현 부인과 결혼했다. 아이는 없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꼭 가보고 싶지만, 아무도 모르게 가고 싶다”고 말했다.

도쿄=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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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8-0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였는데, 학부때나 학부졸업 이후에는 한 번도 들춰본적 없네요 ^^;

어린왕자_ 2006-08-04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한창 빠져있는 작가에요.. ^^..
 
 전출처 : balmas > 연예인들의 사채 광고

 


 

 
맨위에부터 한명씩 얘길하죠.
최민식 - 대단한 배우죠. 요번에 리드코프 얼굴마담으로 나섰더군요.
한채영 -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한채영이 아니라 사채영이라고 한다더군요.
             한채영으로 인해 러쉬앤캐시 매출이 급성장했다더군요.
             늘 자랑하는 저 늘씬한 다리 각선미..저 각선미가 아깝죠?
이영범, 권성현 - 윈캐싱 광고하고 있습니다. 강남역에 가면 윈캐싱의 벽면 대형 광고도 보입니다.
            이영범과는 달리 여직원으로 등장하는게 권성현이라고 하더군요.
여운계 - 저번엔 한국대출정보인가에서 얼굴팔더니 이젠 론크레디트라는 곳에서 광고하고 있더군요.
이용식 - 이용식은 한꺼번에 두군데 론플러스와 유니어드라고 하는 곳에 얼굴 마담 하더군요.
            인터넷에서 카드 연체대납..어쩌고 하며 자주 얼굴 비췄죠?
            아마 제기억으로 처음 사채광고에 얼굴 들이민 연예인이라 생각되는데..
최자혜 - 글세 유명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지하철에도 마우스론이라고 떠뜰면서 광고 붙어있던데..
            위드캐피탈 광고모델이죠.
 
 
이제 어떻게 광고들 하는지 한번 직접 보시죠.
그게 훨씬 빠를겁니다.
 
 


 

 


 

 
 


 

 


 

 


 

 


 

 

 

[이코노 카페]‘대출의 미소’
[동아일보 2006-06-01 03:17]

 

[동아일보]

《화장실 벽에 붙어 있던 ‘대출’ 광고가 때 빽 광 내고 TV에까지 나왔습니다.

“급전 필요하면 전화하세요.”

그러나 조심! 자칫 신용불량자로 오인받기 쉽습니다. 은행 정보망에 ‘대부업체에 기웃’이라고 낙인 찍히거든요. 정말 급하세요? 가능하면 돌아가세요.》

“지금 전화하세요.”

탤런트 한채영 씨가 TV 광고에서 눈웃음을 지으면서 전화하라고 권유하는 곳은 대부업체 ‘러시앤캐시’입니다.

이 광고는 지상파 방송 3사와 EBS, 케이블TV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생활정보지나 공중 화장실에 ‘대출’이란 두 글자와 휴대전화 번호가 있는 스티커 광고를 주로 하던 대부업체가 지상파까지 진출한 것입니다.

대부업체 리드코프도 영화배우 최민식 씨를 모델로 4, 5월 지상파에, 유아이크레디트, 위드캐피탈, 산와머니 등은 케이블TV에 광고를 했습니다.

대부업체의 ‘방송 진출’은 정부의 대부업 양성화 정책과 업체 간 경쟁이 맞물리면서 생긴 현상입니다. 매출도 늘리고 회사 이미지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한국방송광고공사에 따르면 러시앤캐시는 올해 들어 5월까지 지상파 광고비로 19억6000만 원을, 리드코프는 두 달간 9억 원 이상을 썼습니다.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지상파 방송 광고가 자칫 우량 금융소비자의 신용을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부 은행은 대부업체에 신용조회를 한 사람에 대해 최소 1년간 대출을 안 해줍니다. ‘얼마나 급했기에 대부업체를 기웃거렸느냐’는 겁니다.

현재 금융회사들이 신용정보를 공유하지만 대부업체에서 얼마를 빌렸는지는 파악이 안 됩니다. 그러나 대부업체가 신용조회를 한 기록은 공유합니다.

한 씨의 미소에 혹해 전화했다가는 한동안 연 66%의 이자를 물리는 대부업체 외에 일반 금융회사는 이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더군요.

‘23세 직장 여성입니다. 리드코프가 사금융인지도 모르고 300만 원을 대출받았는데요. 사금융이란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리드코프의 돈을 빨리 갚으려고 다른 회사에 문의도 해봤는데 대출이 안 된다고 하네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정말 급합니다.’

금융감독 당국은 이런 문제점을 알지만 대부업체의 광고를 제한할 근거가 없어 고심하고 있습니다.

황진영 기자 buddy@donga.com

 

 

대출 조건 솔깃하긴 한데…
기업형 대부업체 케이블 TV에도 광고 … 급전 필요할 땐 ‘한국이지론’ 먼저 두드려야
반준환/ 머니투데이 금융부 기자 abcd@moneytoday.co.kr
 

소규모 대부업체는 생활정보지를 이용해 광고하기도 한다.

“대출이 필요하세요? 보증도 담보도 필요 없어요. 하루 이자 1800원이면 100만원을 빌릴 수 있어요. 러시앤캐시.”

지난해부터 텔레비전에 등장하기 시작한 한 업체의 대출상품 광고 문구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귀가 솔깃할 법한데, 도대체 누가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돈을 빌려준다는 것일까. 그러나 텔레비전 화면을 유심히 봐도 러시앤캐시라는 브랜드만 볼 수 있을 뿐 업체명이 나오지 않는다.

이 업체는 국내 1위 대부업체인 아프로파이낸셜(APLO FINANCIAL)그룹이며, 러시앤캐시는 이 업체가 운영하고 있는 대출 브랜드 이름이다. 케이블 방송 광고에 등장하는 대부업체는 이 업체 외에도 산와머니, 리드코프, 원캐싱, 위드캐피탈 등 5개 업체에 달한다.

최고 연 66% 이자 요구 합법 업체

대부업체는 고객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업체로, 사채업자로 통칭되는 불법 사금융과는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대부업체는 최고 연 66%의 이자를 받고, 사금융은 그 이상 받는다는 것이다.

대부업체는 2002년 10월부터 시행된 대부업의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대부업법)에 따라 등록된 업체들이다. 이 법은 뒷골목 사채업자들이 양지에서 떳떳하게 영업을 할 수 있게 하는 대신, 소비자 보호라는 의무를 이행하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지난해 말 기준 등록 대부업체는 1만4000여 곳, 무허가 대부업체는 4만~5만여 곳으로 추산된다.

대부업법 시행 3년여가 지나자 합법 대부업체 가운데서도 자금력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기업형으로 발전한 곳이 많아졌다. 이들은 다양한 광고 활동을 통해 고객층을 확보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광고 수준으로 대부업체의 업계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최소 100억원 이상의 대출잔액을 기록하고 있는 대형사들은 케이블 TV 광고를 마케팅 수단으로 삼고 있다. 현재 케이블 TV에 등장하는 곳은 5곳으로, 이들은 브랜드 관리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국내 업체로는 코스닥 상장기업인 리드코프와 위드캐피탈이 있다. 지난해 말 양사의 대출잔액은 각각 200억, 100억원이다. 일본계도 산와머니, 원캐싱 두 곳이 있으며 대출잔액은 각각 2000억, 300억원이다. 아프로파이낸셜은 재일교포들이 주주로 4500억원의 잔액을 기록하고 있다.

케이블 TV 광고는 유명 연예인이 대거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단기간에 브랜드 이미지를 올리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아프로파이낸셜의 광고에는 탤런트 한채영이 등장하고, 원캐싱은 대덕대 초빙교수로 활동한 이영범과 권성현이 모델로 나온다. 위드캐피탈은 ‘대장금’ ‘굳세어라 금순아’에 나왔던 최자혜를 내세우고 있다. 산와머니는 귀여운 캐릭터가 등장하는 3D 애니매이션으로 눈길을 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무보증·무담보에 전화 한 통으로 대출 가능 여부까지 확인할 수 있다는 편리함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즉 은행의 높은 문턱 앞에서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내세운다. 최근에는 TV 홈쇼핑에서도 이들의 대출 상품을 판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급적 규모 큰 곳 찾아야 피해 없어

대형 대부업체들은 지하철도 주요 마케팅 장소로 활용하고 있는데, 역 구내 벽면뿐 아니라 무료신문, 차량 내부에서까지 이들 업체의 광고를 볼 수 있다. 유동인구가 많아 광고 노출 효과가 크다는 점을 이들 업체가 잘 알기 때문이다.

소형 대부업체도 케이블 TV나 지하철 광고의 효과를 부러워하고 있지만 아직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광고 비용도 만만치 않거니와 밀려드는 대출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간지에 광고를 게재할 수 있는 업체는 자영업자나 최소한 중간 규모의 업체, 중소기업에 대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금력이 있는 업체로 보면 된다. 대출잔액은 10억~50억원가량이다.

가장 규모가 작은 대부업체 광고 마케팅에는 전단지, 플래카드, 생활정보지 등이 동원된다. 비용이 적어 대출잔액 1억~10억원대의 소형사들에게 인기다. 주로 저소득층이 애용하는 생활정보지는 급전 수요층에 노출 빈도가 높다는 점에서 대부업체들이 선호하는 광고 수단이지만, 막상 이들 대부업체를 찾아가면 대출 가능액이 적은 경우가 많다. 특히 일부 불법 사채업자나 카드깡 업자도 이런 매체를 애용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대부업체는 이자율이 높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선택해야 한다. 특히 최근에는 금융기관들이 고객 신용도를 공유하고 있어 대부업체에서 대출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향후 금융거래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대부업체를 찾을 때는 가급적 규모가 크고 인지도가 높은 곳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텔레비전 광고를 하는 곳은 상위 대부업체들로 불법 피해사례가 거의 없는 곳이라고 봐도 된다. 등록 대부업체들의 모임인 사단법인 한국대부소비자금융협회(kfu.or.kr)를 방문해 상담받는 것도 좋다.

급전이 필요한 경우 대부업체보다 먼저 문을 두드려야 할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정부가 후원하는 대출 사이트 한국이지론(www.egloan.co.kr)이 바로 그곳이다. 한국이지론은 불법 사채업자들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금융감독원이 주도해 설립한 통합 대출사이트로 시중은행, 저축은행, 신협, 새마을금고, 대부업체 등 모든 대출기관 상품을 포함하고 있다. 신상정보를 입력하면 개인 신용도에 따라 적합한 대출상품이 제시되니 이곳저곳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 편하다.

 

 

대부업체와 거래 시 유의사항
연락처는 물론 이자율·계약서 반드시 챙겨야


한 대부업체의 대출 창구.
1. 등록 대부업체 여부 확인: 대출을 받으려는 업체가 해당 시·도에 등록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은 필수. 확인은 업체 주소지 관할 시·도 대부업 담당부서에서 할 수 있다.

2. 연락처 확인: 단순히 휴대전화 번호만 있는 경우에는 해당 시·도에 등록된 전화번호를 확인한 뒤 그 번호로 거래하는 것이 안전하다.

3. 중개수수료 또는 ‘작업비’는 불법: 중개수수료는 현행법상 금지되어 있으며, ‘대출을 위한 작업비’ 명목으로 선입금을 요구하는 경우는 사기일 가능성이 크다.

4. 이자율 확인: 대부업법의 이자율 한도 66%에는 대출 신청인이 내는 수수료, 사례금, 할인금 등이 모두 포함돼 있다. 따라서 대출금에 대한 이자와 기타 비용을 합해 66%를 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상은 불법이다.

5. 계약내용 확인 및 계약서 챙기기: 대출계약 시 계약서는 반드시 교부하도록 돼 있다. 계약서 내용이 자신이 대출받기로 한 조건과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계약서를 한 부 받아서 보관해야 한다. 계약서는 만약의 경우 생길지도 모를 분쟁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채권추심 관련 유의사항

1. 연체로 독촉 전화가 오면 피하지 말고 현재 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연락이 두절될 경우 채권자는 채무자가 잠적한 것으로 판단해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

2. 채무자 본인이나 보증인 외 가족·직장동료 등에게 대신 채무의 상환을 강요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들에게 채무 사실을 알리는 것도 불법이다. 엽서로 채무변제 요구 등을 보내 대출 사실을 알리는 것도 안 된다. 하지만 채무자가 연락을 끊었다면 주변인들에게 소재를 묻는 것은 가능하다.

3. 연체 독촉 시 담당자가 소속 및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불법이다.

4. 이런 사실이 있을 경우 녹음 등의 방법으로 증거를 갖추고 수사기관(각 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 또는 금융감독원 사금융피해신고센터에 신고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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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주소에서 퍼옵니다. 원래 사진들  윗부분에 있던 내용은 삭제했습니다.

http://cafe.naver.com/godislove4.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4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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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와서, 논문의 결론을 다시 수정 보완하였다. 생각을 한참 하다가, 다시 썼던 글들을 지웠다. 결국 오늘 저녁 한 일이란, 논문을 고쳤다가 다시 예전으로 되돌려 놓은 것. 2년 동안, 학부까지 합하면 6년동안의 공부가 물질화해서 나오는 것인 만큼 생각보다 초라해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장점이 커보이기도 하고 그렇다. '최선을 다 했으니 후회는 없다'라는 말은 결과론적 이야기이고, 나는 누구도 '최선을 다 했으니' 따위의 말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시 나는 후회를 안 하는 타입의 인간이다...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너무 욕심을 부린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반면에 너무 욕심을 안 부린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제도의 힘이라는 것은 역시 무서운 것이라서, 논문이 나의 연구, 나의 글이라는 생각에 앞서, 이 제도를 통과하는 시험으로서의 논문에 익숙해져 버리고 만다. 정해진 논문의 틀과, 심사과정, 문장의 모범, 교수들의 이론과 이데올로기들.

논문을 쓰면서 많이 지치기도 했는데, 마무리를 하면서는 다시 의욕도 생긴다. 다시 제도에 도전을 하고, 이번에는 더 치열하게 더욱 반성적으로, 더 생각하고 덜 회의하며, 더 노력하되 더 즐겁게. 그런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나의 글' '나의 연구'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심지어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능할 것 같은 분야인 '국문과'에서도 말이다. 아니면 오히려 '국문과'라는 것의 특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여, 독자들을 설득시키는 일. 그것. 어찌보면 쉬운 일. 그 와중에 교수들, 선배들, 동기 및 심지어 후배들 눈치를 보고. 참고문헌의 길이와 각주의 양으로 논문을 치장하고. 쓸 필요도 없는 당연한 주장을 반복하는 일은. 정말 생명을 쓸데 없이 죽이는 일이다. 나의 생명도 그렇고, 나무들의 생명도.

다음 학위논문을 쓰기 전까지는 긴 시간이 될 것이다. 그 때는 이러한 반성을 보고, 힘을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마 7~8년 후나 되어야 하겠지.  의욕적으로 '나의 글'을 쓰고 있을 그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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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8-03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힘든 일 해내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처음 뵙죠? 꽤 오래된 눈팅독자랍니다.^^

기인 2006-08-03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깊고 고요한 밤에 뵈니 더욱 반갑습니다 ^^;

프레이야 2006-08-03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길고 힘든 작업이셨을텐데 마무리하신다니 축하드려요.^^ 저도 '나의 글'을 쓰고 계실 '그'를 기대합니다. 홧팅^^

기인 2006-08-03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다. :) ㅎㅎ

Mephistopheles 2006-08-03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욕적으로 '나의 글'을 쓰고 있을 그를 기대해본다.-
같이 기대해도 되겠죠..??^^

기인 2006-08-03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유쾌한 글 쓰시는 메피스토님 :)
 

요즘 몇일간 술을 마셨다. 그렇게 많이 마신 것은 아니지만, 역시 몸무게에 반영이 된다 ^^;

오랜만에 한 4년 만에 -_-; 사촌동생을 보고 술을 마셨다. 어렸을 때부터 대학 올 때까지 줄곧 마산에 살던 동생이라서 지금까지 총 본 횟수가 10번을 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워낙 내가 무심한지라, 서울로 대학왔을 때 1번 보고, 어제 두번째로 본 것. 쩝.

나는 사촌들이 많다. 우선 친가쪽으로는 3명. 이정도는 물론 약소하다. 그러나 이제 외가쪽으로 넘어가면 문제가 다르다. 16명. (+- 1에서 2명 정도;;; ) 그러면, 친외가 다 해서 20명 정도. 제일 연세가 많은 사촌형님께서는 45 정도시고 가장 어린 사촌동생은 초등학생이다. 흐음...

그래도 생각해보면 '사촌'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혈연적으로 유전적으로 가까운 사이인 듯 하다. 한쪽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공유' (?) 하는 것이니 만큼.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그리고 인생을 통틀어 ^^; 10번도 안 본 (그것도 잠깐잠깐씩) 사촌동생, 여대를 다니고 있고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다시 말해서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나가고 있는. 사촌동생과 이야기가 잘 풀리고, 무언가 저 친구랑 나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 사촌의 부모님 (나에게 외삼촌 외숙모), 나의 부모님 (사촌에게는 고모, 고모부) 이야기를 하니 그렇지...

뭐. 그냥 신기한 경험이라는 것. 20여명의 사촌들을 탐방이나 해야겠다. ㅋㅋ 얼마나 우리가 서로 다르면서도 또 같은지 알아보는 것은 유쾌하면서도 미묘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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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02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사촌 오라버니 연세는 예순하나십니다^^;;;

기인 2006-08-02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
 
 전출처 : 바람구두 > 한홍구 - 대원군이 노무현보다 나은 이유

대원군이 노무현보다 나은 이유
[한겨레21 2006-08-01 08:03]    

[한겨레] 무작정 열어젖히면 된다는 한미 FTA 추진파의 ‘쇄국망국론’에 답한다 … 개화파의 대표격인 김옥균이 왜 대원군을 구하려 했는지 생각해보라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한미 FTA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뜨겁다. 정부를 비롯해 한미 FTA에 목을 건 사람들이 즐겨 내세우는 주장이 쇄국론이다. 노무현 대통령부터 “개방하고 교류했던 나라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지만, 개방 않고 교류하지 않은 나라 중에는 흥한 나라가 없다”고 ‘쇄국망국론’을 폈다고 한다. 노대통령은 지난 6월12일 인터넷 포털 사이트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대원군의 쇄국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데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를 실제 잘 몰랐다”면서 “과단성 있는 쇄신정치가 통쾌하게만 보였지, 그것이 우리를 망치는 데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정치를 한창 할 때까지 그 점에 대해서 판단이 잘 없었다”며 역사의 인과관계에 대한 정확한 시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개화는 자주요 독립이었다

진보 진영의 많은 논객들은 한미 FTA 반대론을 쇄국론으로 몰아붙이는 것을 ‘수준 이하’의 주장이라며 제쳐두고 지나간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역사 공부가 업이고, 또 이 뜬금없는 쇄국망국론이 일반인에게 나름대로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노무현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가 현재 반FTA의 선봉에 서 있는 정태인은 한미 FTA 반대론자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이완용이나 박제순에 비유하는 건 “아무리 봐도 지나친 감이 있다”며, “특히 노 대통령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개혁 의지를 생각해보면 김옥균에 비유해야 더 잘 어울린다”고까지 주장한다.

21세기의 벽두를 살아가는 ‘개화파’들은 한미 FTA에 반대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쇄국정책을 편 수구파로 몰고 있다. 그런데 당시 개화파의 대표 격인 김옥균이 정작 쇄국정책의 집행자인 대원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에는 좀더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1884년 김옥균 일파가 궁정 쿠데타인 갑신정변을 감행했을 때 그들이 내건 14개조의 정강에서 제1항은 “대원군을 곧 모셔오도록 할 것”이었다. 당시의 복잡한 상황은 좀 설명이 필요하다.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시해온 대원군은 위정척사파의 대표 격인 최익현의 탄핵을 받고 1873년 물러나게 되고, 명성황후의 일족인 민씨를 중심으로 한 정권이 들어서게 되어 대외통상을 위한 단서가 열리게 되었고, 마침내 1876년 강제적인 문호 개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개항 이후의 정치적·경제적·심리적 동요와 민씨 정권의 부패와 무능 속에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은 근 10년 만에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대원군의 복귀는 조선의 문호를 군사력을 동원해 억지로 열어젖힌 일본에 큰 위협이 되었고, 일본은 출병을 준비했다. 일본의 출병 소동에 자극을 받은 청은 선수를 쳐서 “종주국으로서 속방을 보호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다. 조선왕조 개창 이래 500년 가까이 지속돼온 ‘조공(朝貢)’ 체제에서 중국이 직접 군대를 보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청군은 민씨 정권 요인들의 요청에 따라 대원군을 임오군란의 책임자로 납치해 중국으로 끌고 갔다.

일본 쪽의 한 기록(<복택유길전>(福澤諭吉傳))에 의하면 김옥균은 “개인적으로는 대원군과 원수에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조선 자주의 권(權)이 이미 상실되었다고 비통함을 금치 못하였으며, 죽음으로써 자국의 자주권을 회복해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던 쇄국의 화신 대원군이 제거되면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던 김옥균 일파가 대원군 납치에 격분해하는 것을 보고 이들을 표리부동하고 믿을 수 없는 인간들로 생각했다. 김옥균은 개화에 목숨을 걸었지만, 그들에게 개화란 단순히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 아니라 자주요 독립이었다. 그러니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 개화를 내세운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뱃속이 맞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이념에 따라 일렬로 세운다면 오른쪽 맨 끝에서 기준 잡으실 백범 김구가 끝내 세계 반공의 대부 미국으로부터 배척받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김옥균이 “대원군을 곧 모셔오도록 할 것”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이광린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김옥균 등은 “대원군이야말로 쇄국에 대한 생각만 바꾸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김옥균 등을 키워낸 박규수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고종의 리더십에 실망한 박규수는 고종이 군주로서의 리더십을 키우는 것보다는 쇄국과 개화에 대한 대원군의 견해를 바꾸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울 때의 평양감사가 바로 박규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박규수는 쇄국정책에서 매우 상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그의 사랑방은 개화파들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했다. 개화파들의 고뇌가 잘 들어나 있는 <근세조선정감>에도 대원군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쇄국이 가능하기도 했지만, 대원군이 아니면, 즉 대원군 같은 과단성이 없다면 뒤에 쇄국에서 개화로 나아가기를 바랄 수 없다고 쓰여있다. 어쩌면 김옥균 자신이 직접 썼을지도 모른다고 추정되는 <흥선대원군략전>은 대원군의 군제개혁과 군비확충 등 국방개혁을 높이 평가했다.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의 결합?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한미 FTA 추진론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개방하고 교류했던 나라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지만, 개방 않고 교류하지 않은 나라 중에는 흥한 나라가 없다”는 말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문 걸어잠그고 있으면 잘될 수 없다. 그런데 금방 들어먹지는 않는다.


개방하고 교류한 나라 중에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이렇게 열면 금방 쫄딱 망한다는 점이다. 김옥균이 오죽하면 대원군을 업으려 했겠는가? 김옥균은 민씨 정권을 사대수구당으로 몰아붙였지만, 김윤식·어윤중 등 청의 개입과 대원군의 납치를 요청한 인물들은 온건개화파 내지는 대외통상파였다. 이들이 주장한 ‘동도서기’(東道西器)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실제 이들 방식으로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서구의 과학기술을 도입하려면 서구의 과학기술이 뿌리내릴 수 있는 사회를 같이 만들어야 했다. 과학기술자들이 천시받는 사회, 엘리트의 절대 다수가 ‘공자 왈 맹자 왈’을 외어야 하는 사회에서 기계 몇 점 들여온다고 ‘서기’가 잘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문은 열었으되 시간은 그렇게 흘러버린 것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며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무라이들의 어떤 사고방식과 물적 토대를 갖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쇄국을 하는 동안 일본은 난학(蘭學)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서 메이지유신이 가능했는가? 너무 단순한 해석이다.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무라이들이 집권하기까지 사용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언사는 대원군의 척화비나 위정척사파의 말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중국의 신사(紳士), 조선의 양반(兩班)에 비해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었다. 사무라이들은 전통사회의 엘리트였지만, 중국의 신사나 조선의 양반과는 달리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다. 생각을 바꿨을 때 자기의 발목을 잡아버리는 기득권이 그만큼 적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여된 특권을 타파했다.

대원군이 정권을 실각한 것은 1873년으로, 1867년의 메이지유신과 시간상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보다 조금 늦긴 했지만, 마감을 넘긴 것은 아니었다. 1873년 대원군의 실각에서부터, 또는 1876년의 개항으로부터 나라를 일본에 완전히 빼앗기는 1910년까지는 한 세대가 넘는 기간으로 한 학기 강의를 해도 다 끝내지 못할 만큼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난 시기였다. 갑신정변도 있고, 동학농민운동도 있고, 갑오개혁도 있고, 독립협회도 있고, 의병전쟁도 있고, 광무개혁도 있고, 애국계몽운동도 있었다. 근본적인 개혁 대신 땜빵으로 일관한 민씨 정권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망해가는 나라를 팔아 잡수신 친일파들도 있었다. 요컨대 대원군 한 사람에게 쇄국이란 이름으로 ‘독박’ 씌워도 될 만큼 역사란 게 간단치는 않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잘한 거냐고 굳이 묻는다면, 지금처럼 대책 없이 문 열어주는 것보다는 백번 잘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심술이 나서일까?

정태인의 글을 보니 정부 쪽 사람들 중에 정말 엉뚱하게 “신미양요 때 미국과 잘 협상했더라면 우리는 이미 선진국이 되었을 것”이란 말을 버젓이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정태인은 앞서 얘기한 대로 노무현 대통령을 김옥균에 비교하면서 한미 FTA 반대론자들은 동학혁명군에 가까운 느낌이라며, 기왕에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보려면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의 결합 같은 좀 멋진 그림을 꿈꾸지 하필이면 신미양요 타령이냐고 꾸짖은 바 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다. 왜냐하면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은 만나지 못했어도, 노무현과 젊은 영화인들은 2002년 대통령 선거와 2004년에 이미 뜨겁게 만났었는데, 2006년에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대치하고 있다. 어디 영화인뿐인가!

교훈 얻으려면 방곡령 사건을 보라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의 결합, 또는 김옥균과 대원군의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아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더니, 21세기의 벽두에는 참으로 고약하고 괴이한 결합이 ‘낯선 식민지’(한미 FTA 반대론의 기수 이해영 교수의 책 제목이다)를 불러오고 있다. 김옥균이 대원군에게서 가장 높이 산 것은 역시 과단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 마땅히 책임을 지고 개혁됐어야 할 관료집단과 재벌들이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살아남아 노무현을 등에 업고 정신없이 한미 FTA를 몰아붙이고 있다. 19세기 말의 개국론자 김옥균은 대원군의 과단성을 사서 자주 독립을 강화할 기회를 갖지 못했는데, 21세기의 신자유주의자들은 노무현의 화끈함을 사서 ‘낯선 식민지’로 우리를 몰아간다.

한미 FTA의 문제점이야 내가 여기서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겠지만, 역사의 관점에서 꼭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투자자-국가소송’ 제도다. 미국인(또는 법인) 투자자가 한국의 공공정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인데, 이런 이의를 한국의 사법기구에 제기하는 것이라면야 당연한 것이지만, 문제는 한미 FTA가 이루어지면 “미국 투자자가 한국의 사법심사 절차 대신, 한국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국제중재기관(Tribunal)에 회부할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민변에 따르면 이렇게 될 경우, “한국의 중앙정부, 국회,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이 미국인 투자자의 투자 활동에 영향을 미칠 공공정책의 경우, 미국 투자자의 국제 중재 회부에 따라, 한국의 행정부와 입법부는 한국의 사법심사를 통해 그 정책의 적법성을 확인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되며, “한국 사법부의 입장에서는 그 정책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권한을 상실하는 것”이다. 미국이 멕시코와 캐나다 등과 체결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11조에서 이미 현실로 나타나는 문제다.

정부 쪽 사람들이 정말 한미 FTA와 관련해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엉뚱하게 쇄국-개화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방곡령 사건을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 문제는 청일전쟁 전야인 1889년부터 1893년까지 조선의 외무대신 격인 독판교섭통상사무(督判交涉通商事務)를 3번, 주한 일본공사를 3번 갈아치운 사건으로, 투자자-국가소송 제도와 관련해서 심각한 교훈을 준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한국을 식량 공급지로 삼고자 했기 때문에 쌀과 콩 등 미곡의 일본으로의 유출이 크게 증가했고, 이는 국내의 미곡 부족과 그에 따른 곡가 상승, 국내 유통시장의 붕괴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83년 7월 ‘조일 통상장정’(1876년 체결)을 개정해 일정 지역에서 곡물의 유출을 금하는 방곡령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하여 법적 근거를 마련했는데, 유일한 단서 조항은 조선 정부 또는 지방관이 방곡령 실시 1개월 전에 사전 예고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예고이지 외국의 동의를 요하는 사항은 아니었다.

IMF와 탄핵, 개혁 기회를 날리다


방곡령은 1884년부터 1904년까지 모두 100여 회 단행됐는데, 그중 가장 말썽이 난 것이 1889년 함경감사 조병식이 선포한 방곡령이었다. 조병식은 단순한 지방관이 아니고, 함경감사로 부임하기 이전에 독판교섭통상사무(외무대신)을 지낸 인물로서 독판 재임 당시 경상도 지방의 방곡령 사건을 처리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는 1889년 10월 관내의 식량 부족을 이유로 방곡령을 준비하면서 통상장정 37조의 규정에 의거하여 시행 1개월 전에 외국공사관에 통보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통리아문 쪽의 실수로 조병식이 예정한 10월24일 1개월 전에 통보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통리아문은 일방적으로 시행일을 1개월 늦춰 11월22일 이후로 하여 일본 쪽에 통보했는데, 정작 이 사실을 함경도의 조병식에게는 통보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조병식은 예정대로 10월24일부터 일본 상인들의 곡물 매매와 운반을 금지했다. 일본은 조병식의 ‘죄’를 물어 면직시킬 것을 요구했고, 민씨 정권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해 조병식을 3개월 감봉에 처했다가 결국 강원감사로 좌천성 인사를 단행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배상을 요구했고, 조선 정부는 일본 상인들이 곡물 투기에서 입은 손실과 미래의 수익까지 포함된 배상 요구에 굴복했다.

방곡령은 조선 정부의 주권에 관한 문제였다. 배상 문제가 제기된 조병식의 방곡령 등 4건의 사례는 김경태 교수에 따르면 조선 쪽에도 통고 수속상의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강한 압력에 방곡령을 철회했을 뿐 아니라, 방곡을 시행한 지방관을 해임하고 배상까지 해주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 신문이 “독립국이 국내에 방곡령을 발포하는 것은 결코 문책할 일이 아니며” 러시아도 흉작으로 곡물 수출을 금지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일본 상인들의 배상 요구에 대해서도 외무성의 방곡령 사건 담당 이시이는 “조선은 국내에 방곡령을 발할 권리가 있으므로, 이에 따라 생기는 손해는 법률상 자연의 결과로 이는 배상의 책임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배상은 이루어졌다.

방곡령 때는 조약에 명기된 권리를 지키지 못한 것인데, 한미 FTA 1차 협상에서 합의한 투자자-국가소송 제도는 아예 퍼주기로 작심을 하고 그렇게 협상(?)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누구는 한미 FTA가 체결되면 IMF 사태가 7개 분야에서 터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제2의 한일합방이 이뤄지는 꼴이라고 말한다. 후보 시절 “반미면 좀 어때?”를 외치던 노무현 대통령 밑에서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경이 되었을까?

IMF 사태는 위기였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은 이를 개혁의 기회로 보지 않고, 위기 탈출만 모색해 신용카드 남발 등 인위적 경기 부양을 통해 조기 졸업을 선언했다. IMF 위기를 불러온 재벌과 관료는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무기를 통해 시장만능주의와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의 전도사로 부활했다. 김대중 정권이 위기 상황에서 강요받은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이 땅에 든든한 뿌리를 내렸고, 노무현 정권이 반환점을 돌면서 정권 내에서 부족한 대로 균형을 잡아주던 인물들이 사라진 뒤 드디어 노무현을 지배하면서 한미 FTA를 추진하고 있다. IMF와 탄핵 사태라는 두 차례의 진정한 개혁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보낸 한국 사회는 지금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 ‘낯선 식민지’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김대중이 IMF 사태라는 개혁 기회를 날렸다 하더라도, 그는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냈고, 또 노무현 정권이 들어설 수 있는 토양을 일궈냈다. 그러면 노무현 정권은? 대북송금 특검으로 6·15 공동선언의 성과를 이어나가지 못하게 손발을 묶고, 앞장서서 이라크에 파병하고, 그리고 한미 FTA에 올인하고 있다. 김대중은 누가 뭐라고 해도 6·15 공동선언을 만든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가 IMF 사태 직후의 기회를 상실한 것은 참 아깝지만 다음 주자가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는 문제다.

그가 과거청산의 법정에 나오지 않기를…

노무현은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 것인가? 그가 남은 임기 중에 사회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요, 하루아침에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노무현의 남은 임기 중에 그가 모든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 ‘대연정’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요, 지역 감정이 해소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대학입시 문제가 해결되거나 부동산 문제가 잡힐까?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역사를 다시금 ‘낯선 식민지’로 이끌어간 대통령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 나는 노무현이 과거 청산을 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 5년 임기의 대통령이 남길 수 있는 엄청난 업적이다. 그리고 요즘 신자유주의식으로 이야기하면 노무현이 가장 경쟁력 있는 분야가 바로 과거 청산 아니겠는가? 과거 청산 작업에 누구보다 깊숙이 발을 담그고 느낀 것이지만, 아무리 과거 청산을 잘한다 해도 처음부터 청산 대상이 될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에는 새까맣게 미치지 못한다. 노무현이 과거 청산을 잘한 대통령으로 남아야지, 한미 FTA가 이대로 실현되면 우리 후손이 반드시 열 과거 청산의 어두운 법정에 그가 주범으로 불려나오는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다.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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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책을 읽다가 본 것인데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한 사회의 시급한 과제가 여럿 있을 때, 가장 중요한 과제를 처결하지 않고 그것만큼 시급하지는 않지만 덜 중요한 다른 과제에 열중할 때 본의아니게 사회의 중요한 개혁 에너지에 손상을 입히게 된다고 한다.

노무현 정권(나는 더이상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를 정부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의 집권 기간 동안을 통틀어 되돌아보면 위에서 했던 말의 반복인 듯 싶다. 나에게 노무현 정권은 그때그때 사회적으로 처리해야할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는 늘 젖혀두고 다른 일들로 사고친 정권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번 FTA도 스스로 나서서 병살타를 친 격이지 않은가? 과연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내부 구조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아무리 공부를 하고 열심히 쫓아가도 상식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내적 논리에 의해 운영되는 나라란 생각이 든다.

생각하기도 힘든 무서운 생각이지만, 설마 나만 모르고 있는 우리나라의 내적 진실이 그것일까? 우리나라는 원래부터 미국의 식민지였고, 그들은 미 제국의 총독과 총독부 관리들이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면 논리가 형성된다. 상식적으로도 이해되고... 그러면 삼성은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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