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few people really know what a past is: There can in fact be no past without a powerful present, a present achieved by the disjunction [of our past] from ourselves. That person incapable of confronting his or her own past antagonistically really can be said to have no past; or better still, he never gets out of his own past, and lives perpetually within it still. (pp24~25) 

'과거'와 대면하게 되는 순간, 이는 과거로 정립되며 동시에 현재를 부각한다. 얼마전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선배로서 미안했었다는 이야기를 해서, 나를 당혹하게 했다. 너는 국문과에 들어오지 않았어야 했는데라는 말.

박사논문에,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 아비로 산다는 것에, 그 밖의 이런저런 일상의 피곤함들에, 과거는 잊혀진 채 있었다. 선배로서, 선배가 해주었어야 했지만 아무것도 못해주었다는 그의 발언은, 내가 방기하고 있었던 많은 기억들을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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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근대와 일본
윤상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품절


나쓰메는 여순의 러시아군이 항복을 선언하던 1905년 1월, 문예지 <<호토토기스>>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하며 작가의 길에 들어섰으며 러일전쟁의 승리로 처음으로 세계를 향해 일본의 자기주장을 관철한 군인에 이어, 문학자도 나서야 한다는 평소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하기라도 한 듯 봇물이 터진 것처럼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이렇게 볼 때 나쓰메는 일본의 자기본위의 입지가 확보됨과 동시에 작가의 길로 접어든 셈이며, 그 탄생의 배경에는 러일전쟁 이후 고양된 국가주의가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156쪽

거의 전 생애를 메이지 시대와 함께한 나쓰메가 가장 절실하게 추구한 것은 '탈서양'을 통한 '자기본위'의 확립이었다. 따라서 나쓰메의 문명 비평의 핵심에 자리하는 것은 '일본/서양'의 이원론적 체계이거니와, 이러한 서양과의 대결구도는 자연스럽게 아시아의 존재를 괄호 안에 넣게 됨으로써 급기야는 인근 아시아 제국을 향한 제국주의적 침탈에 대한 도덕적 무감각을 초래하게 되었다.-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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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sn't sure that it would not be rude to argue in Sora's facebook so I came here to discuss things about 강호순 and recent incident. I say incident because I mean to focus on how mass media reacts to these kinds of sexual violence.
People get more furious when they hear that children were victim of sexual violence than adults. Especially mass media tend to make issues about it, say they are 'demon'. I agree that sexual violence should be regarded as 'evil' behavior and we have to protect whomever can be victiomized.
But, what do we assume, when we regard someone with certain characteristics should be more protected. Regardless of sex, gender, sexuality, age, race, class they all have rights to be protected from others doing harm to them. Do they have more right, if they are female or if they are rich? That can be sexists.
Same thing goes with age. Victim's age can not be the barometer for how evil the attacker are. Because in that way we are regarding, someone is lesser than others.
Ofcourse generally we should regard child with special care. No one can deny that.
But situations like rape, we shoul regard everyone being raped to be, equally powerless and hurt. If you regard adult victim is lesser hurt. Or even worse, if you unconscious feel more sorry for children because they were more vulnerable. It means that you regard adult victims of rape as, less vulnerable. Which might means that unconsicously you fell that adults victims was little bit responsible for the incident.
And IT IS NOT. When rape happens, we can not point fingers at victim. Even if they are older than 30, if they were raped, it is not their falut. You may think that it is somewhat their falut, that they should known better to not to go to dark place after 10 or, not date a men who drives a motorcycle etc... But those kinds of things are not the victims fault. It goes same with, blaming the victim that she wore too short skirts.

But mass media tend to have those kinds of premises. If you are underage, you didn't have any method to get away. But if you are an adult, you should known better. It sounds harsh, but if you exaggerate a bit, mass media is saying same as that.

I'll going to have a baby daughter this October, and I too really hate that guy who rape a 8 years old. But I equally hate anyone who rapes other people, and equally feel guilt that I could or did not do anything to prevent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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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10-06-10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mmm. I should've written in Korean. I can't control my nuances well; Sorry if it affended anyone;;;;; Plz write any comments if it is not appropriate or too much ^^; I certainly have to improve my English;;;;

LAYLA 2010-06-11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대 이상 피해자라고 해서 '덜'피해자라고 간주받아야 하느냐? 하면 분명 아니란 점에서 기인님 의견에 동의합니다만 일반 대중들이 어린이 강간에 대해 더 분노하는 건 어린이 피해자가 '더'피해자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적으로 따지자면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어린이가 '더'피해자란 말이 어른은 '덜'피해자란 말과 일치한다고 생각치는 않거든요. 제가 매스미디어에게 짜증나는 부분은 이런 성폭력 사건을 정말 하나의 이슈로서만 이용한다는 점이에요. 가해자 얼굴을 그냥 공개해버린다던지 하는 식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면서 타이틀은 악마같은 가해자가 어쩌구 저쩌구 지네들이 무슨 공익수호자라도 되는냥..

돈케빈 2011-02-13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론의 출처가 어딘가요??

기인 2011-02-16 22:29   좋아요 0 | URL
아 개인 블로그라서 밝히기는 어렵네요 ^^;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제 논리는 너무 관념적인 것만 같네요.
 

인문학도와 가난  

인문학도에게 가난은
자발적이며 필연적인 것
담론으로 가난을 견뎌내는 건
인문학도로서 큰 즐거움
  

 -> 자기네들이 붙인 소제목;; 흙흙. 완전 어이상실로, 요상하게 핵심을 뽑았어요;; 이 글은 자기조롱 내지는 자기 성찰이 핵심인데...

이제 서른이 된, 한 회사원 친구가 오랜 꿈이었던 문학 공부에의 열망 때문에 주위의 만류에도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고 나를 찾아왔다. 그가 가장 궁금해했던 것은 최근 문학 연구의 풍조나 내가 생각하는 문학의 본질 ‘따위’는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어떻게 가난을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어봤다.

사실 서른이 넘은 대학원생들끼리는우리는 ‘사람’ 노릇 못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우리사회’에서 서른이 넘은 ‘사람’이라면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돈 드는)일을 해야할 터인데, 이를 못하니까 ‘사람’ 노릇을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우리’끼리 만나서 하는 이야기 중에서 인문학을 뺀다면, 나머지 대부분은 요즘 밥은 어떻게 먹고 다니느냐가 주된 화제거리일 정도이다. 그럼에도, 인문학도는, 그것도 서른이 넘은 대학원생은 ‘어떻게 가난을 견디는가’라는 질문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러하다. 첫째, ‘우리’는 정말 ‘가난’한가? 둘째, 만약 우리가 처해있는 형편을 ‘가난’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이는 ‘견뎌’야 할 종류의 상태인가? 2010년 한국의 1인 가구 최저생계비는 50만 4,344원이라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인문학 대학원생들 중에는 이 최저생계비 언저리 정도의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이 많다. 사실 저 최저생계비라도 꼬박꼬박 나온다면, 행복하겠다는 친구들도 있다. 이는 분명 서른 넘은 회사원인 친구가 보기에는 ‘가난’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견뎌야’ 할 상태인 것일까?

법정스님은 『무소유』에서 간디의 ‘내게 소유는 범죄처럼 생각된다’라는 말씀을 소개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도 소개된 ‘프리건족’ 또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현재 지구의 환경파괴와 불행한 삶을 초래한다고 보고 자본주의 경제시스템 외부에서 살아가는 운동가 집단이다. 이러한 생각은 본질적으로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이 내 행복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이를 방해할 뿐이라는 깨달음, 더 나아가 부를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비윤리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주위의 인문학도들은 이러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고 있다. 프리건족처럼 적극적으로, 법정스님처럼 종교적 깨달음까지 미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남보다 많은 ‘부’가 타인에게, 또 지구에 비윤리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불필요한 소비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선택’한 것이 인문학도의 삶이라 생각한다. 특히 문학의 본질이, 타자에 대한 공감과 이를 매개로 한 ‘우리’의 복원이며, 한국문학의 핵심적 주제가 약자에 대한 이해와 연대였다고 한다면 문학도는 마땅히 가난과 친숙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사회의 비판적 지식인을 길러내고,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과 실험이 이루어졌던 장소인 대학이,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인문학이 더욱 외면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플루엔자』라는 책의 저자 올리버 제임스는 ‘부자병’을 풍요로울수록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현대인의 탐욕이 만들어낸 질병이라고 하며 이것이 전염병임을 강조했다. 지금까지의 기나긴 설명으로 ‘인문학도는 어떻게 가난을 견디는지’에 대해 나는 한 시간 가까이 그 친구에게 열변을 토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친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얻었을지도 모른다. 인문학도는 담론으로, 가난을 견딘다고. 그래도, ‘부자병’에 마비돼 삶을 견디어내는 사람보다는, 담론으로 삶을 건너보려 하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겠는가.

 

 

우아아앙 짜증난다. 마음대로 소제목을 붙여서, 원래 의도와 100% 상반되는 글로 탈바꿈 시켜버렸다;;;;  

 내가 단 댓글 -_-;

아; 또 제 의도와는 소통되지 못했네요 ㅜㅠ
음.. 이번에도 역시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이 글의 핵심은 일종의 자기조롱 같은 거인데요. 제 의도는 말이죠 ^^; '담론으로 가난을 견뎌내는 건 인문학도로서 큰 즐거움' 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미쳤거나 위선이죠. 오히려 이 글은, 이렇게 장광설로 떠들었는데, 결국은 '인문학도'는 '담론'으로 '가난을 견디는 것'은 아닌가라는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것도 또한
 

흙흙;
부자병에 걸려서 삶에서 눈감아버리는 것보다는 괜찮지 않은가 라고 말걸고 싶었습니다.
몇년 전에 아크로의 시선에 썼던 글도 마지막 문장이 삭제되어서 원래 의도와 상반되는 글로 실렸었는데;; 이번에는 안 그럴줄 알았는데, 소제목을 제 의도와 정반대로 뽑아주셔서 당혹스럽네요 ㅜㅠ 이거 신문도 이 소제목으로 뽑혀서 나갔나요? ㅡ.ㅡ;;; 으으 부끄러워라;;
 

아 그리고 저는 박사과정이라는;;;
국문과 박사과정인디요;; 3~4년 전에 '국문과 석사과정'으로 아크로의 시선에 썼었는데;;;;;;
 

 

아쒸. 글을 쫌 재미있게 써보려고 했더니... 역시 글 안에서 반전은 쓰면 안되는 듯;;;;  

아이구 부끄러. 대학신문에 전화해서 항의해야 겠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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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0-03-1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기들이잖아요...^^

바라 2010-03-17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멋있으시던데요 ㅎㅎ 이미 신문은 나온거 같은데 나중에 정정이 되나 모르겠네요~

기인 2010-03-17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ㅋㅋ 정정 안된데요 ^^; 역시 이번기회로 언론의 무서움을 배웠습니당 -_-;

릴케 현상 2010-04-01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론은 인문학도의 섬세함을 이해해주지 않아용^^ 기인님 힘내세요
 

여러가지 가난이 있다. 매운 것, 짜디짠 것, 또는 싱거운 것. 혹은 시린 것, 효도르에게 턱에 한방 맞은 것 같이 급성적이고 충격적인 것, 어느새 돌아보니 한 것은 없는데 서른이 다되었더라 같이 누적적이고 만성적인 것. 내가 이렇게 가난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은, 서른이 넘은 한 회사원 친구가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와서 문학을 전공하고 싶다고하며 만나서, 그가 말로만 듣던 인문학도의 '가난'에 대해서 물어왔기 때문이다. 즉, 견딜만한지를 묻고 싶었던 터. 

사실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서른이 넘은 대학원생들끼리는, 일단은 '사람'노릇 못한다는 이야기를 서로 많이 한다. '우리사회'에서 서른이 넘은 '사람'이라면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돈 드는)일은 해야될 터인데, 이를 못하니까 '사람'노릇을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때문에 간혹 가난이 너무도 짜디짠 것이 되어,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러나 여러가지 가난이 있다고 말을 꺼내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부자되세요'가 여러 광고들에서 주된 카피였었는데, 이런 욕망들이 빚어낸 세계적 금융위기와 그 후폭풍인 재정위기로 인해, 그러한 소리들은 쏙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 '부자되세요' 소리가 꽤나 불편했었는데, 부자가 된다는 것은, 항상 상대적인 것으로서, '남'들보다 부자인 셈.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되었든 많이 가져야 하는 것. 

구태의연하게, 부자가 곳간 걱정을 더 해야되서 발을 못 펴고 잔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었다. 결국 문학을 전공하겠다거나, 인문학을 업으로 하겠다는 소리는, 인간에 대한 이해, 진리에 대한 열정을 목표로 삼겠다는 소리다. 물론 이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도 마찬가지겠지만, 문학 만의 특징이 있다면, 문학을 매개로 인간에 대한 경험적 공감과 이해를 추구한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절대다수인 약한자들의 삶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길은, 자신 또한 그들 중 일부임을 깨닫는 것이며, 또 일부가 되는 길일 터이다.  

가난은 인문학도가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고 사유하고 배고파 하며 연대하기 위해 필수적인 동지인 것이 아닐까. 

 *흠 대학신문에 투고해야 되서 써본 것인데, 역시 항상 생각과 글은 차이가 나네요; 제한된 글자수에 하고 싶은 말을 써야하니 생각이 이래저래 많습니다. 우선은 초고고 생각나는대로 고쳐볼 예정입니다. 여러 의견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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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2-09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TV에서 모증권관련업종에서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을 병산서원에서 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코웃음을 쳤던 기억이 납니다. 취지는 좋았죠. 조선시대 선비의 기계과 정기를 배우고자하는 취지였지만, 글쎄요 조선시대로 말하면 증권은 말그대로 장똘뱅이로써 진짜 선비들이 가장 경계하고 천하게 봤던 물질적 직종이 아니었던가요.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가 가치우선이 되는 건 부인할 순 없는 사실인데...그 앞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 붙으면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오곤 하더라고요. 그리고..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말도 의미가 없어진 것 같아 보입니다. 요즘 시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배부른 소크라테스라는 사실은 이제 특별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으니까요....^^

마늘빵 2010-02-09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공부를 더 하지 않은 건, 그릇이 작다고 생각해서이거나 꾸준하게 공부에만 집중할 자신이 없어서라거나 하는 이유도 있지만, '지독한 가난'을 버틸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했습니다. ^^ 어린 대학생 시절에 공부 년수를 계산해보니 이건 뭐,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학벌도 재산도 없는 제가 무턱대고 뛰어들 만한 강물이 아니었던 거죠.

바라 2010-02-12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크로의 시선에 쓰시는건가요 ㅎ 첫 호에 실리게 되겠군요. 그런데 가난의 여러 가지 종류를 말씀하시면서 '맛'의 비유를 하신 이유나 계기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다소 이색적인 거 같기도 하구요~

기인 2010-02-12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완전 다시 써야 될 것 같아요 ㅋㅋ 새벽에 그냥 쓴 거라서, 뭔가 웃기게 쓰고 싶은데 쓰다보니 진지와 웃음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 -_-;

기인 2010-02-12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맛의 비유는, 보통 인문학도가 가난을 '견뎌야' 한다고 말할 때의 가난은 '심심한 맛', 그러니까 싱거운 거 같은 거라는 거죠. 뭔가 더 있음 좋은데 없는 것. 하지만 짜거나 매운 것은 무언가가 너무 더 들어간 것. 그런 가난은 견디기 더 힘들죠... 다시 정리해봐야겠어요 ㅎㅎ 읽어주신분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