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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에 대한 여러 악평들을 보았다. 물론 심사위원들의 수상평도 보았고. 김미현 교수는 '반성하고 자학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고 만족하는 주인공을 이제 우리 한국 소설에서도 갖게 되었다'라고 심사하였지만, 김화영 선생은 '가끔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 엿보이는 깊은 수렁, 그것이 허무인지 무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꾹꾹 눌러서 억제한 어떤 절규일지도 모른다.'라고 평하였다.
결론부터 말하기 전에, 다시 맨 처음부터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책에 대해서는 심사위원들 마저도 이처럼 극과 극으로 평가하고 있다. '자족하는 주인공'과 '억제한 어떤 절규'사이의 심연. <백수생활백서>라는 작품의 진동이 그만큼 크다는 것은 (독자들이 제대로 꼼꼼히 읽었다고 가정할 때) 그 만큼 여백이 많은 작품이라는 것, 독자가 읽으면서 많은 것을 끼워넣어야 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때문에, 맨 처음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제목. <백수생활백서> 백수라는 것과, 생활백서라는 것. 예전에 개그콘서트라는 코메디 프로에서 '청년백서'라는 프로가 있기도 해서일까, 이 제목은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준다. '백수'라는 존재와 '생활백서'가 합해졌기 때문. 사전을 찾아보면 '백서'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정부가 정치, 외교, 경제 따위의 각 분야에 대하여 현상을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여 그 내용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하여 만든 보고서. 예)교육 백서/대외 정책 백서 (국립국어원 참조)
즉. ‘정부가 각 분야에 대하여 현상을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여 그 내용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하여 만든 보고서’라는 것. 그런데 이 소설은 한 백수의 1인칭 자전적 고백담. 국어사전의 ‘백서’의 뜻과 책 내용 사이의 또 다른 심연. 정부와 백수라는 것. 청년실업 몇 백만이라는 소리들. 구조조정. 사오정 등.
얼핏 보면 주인공은 이에 무관한 사람이다. 음식점으로 성공해서 넉넉한 아버지 밑에서 30에 가까운 화자 ‘나’는 학생 시절부터 책 읽는 것을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로 삼아온 여성. ‘스스로를 사랑하고 만족하는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만족하려는 주인공’이라고 일컫는 것이 옳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전략..) 나도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은 지금이 기다려야 할 때인지 가야 할 때인지조차도 모르겠다. 나는 미래에 대한 어떠한 약속도 기대도 갖지 않은 채로 비교적 잘 살아왔다. 점점 더 내가 남들과 비슷한 인생을 살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워지고 있다.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갖고 그렇고 그런 인생 말이다. 점점 더 당연한 것들이 내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붉은 해파리들이 떠난 바다는 아주 멀고 넓을 것이다. 내가 떠날 수 있는 가장 먼 곳은 어디일까. (171)
남들과 같은 콘베이 벨트를 타는 대신에, 남들은 사춘기 시절 하는 고민을 끊임없이 지속하는 주인공.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주인공.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책을 읽는 일일 뿐.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이미 삶이 권태롭고 허무했다. 그 권태와 허무를 이겨내기 위해 책을 읽었다. 섣불리 남들의 환호에 현혹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알고 앞으로 나아갈 바가 조금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는, 단번에 무엇이 확 바뀌는 그런 건 없다는 것을 알 만한 나이가 나에게는 아주 일찍 와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 그것은 지상에는 없는 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나이이다. (183)
이러한 대목을 보자면, 이 소설은 사춘기 소녀의 성장소설을 그대로 20대 후반 ‘백수 여성’으로 옮겨왔을 뿐이다. sex와 사랑이 빠지고, 대신 삶에 대한 물음이 증폭되었다. 친한 친구나 잘 생긴 오빠가 빠지고, 두툼한 책들이 들어와 있다. 와타야 리사가 17살에 쓴 <인스톨>에서 ‘넌 인생의 목표가 없어’라는 대목을 인용하며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어져 있는 밑줄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면서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이 소설의 열일곱 살 소녀는 그때의 우리랑 닮았다. 그리고 더 끔찍한 건 지금의 우리랑도 닮았다는 사실이다. (195면)
이 정도만 보아도, ‘스스로를 사랑하고 만족하는 주인공’이라는 김미현 교수의 평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삶 앞에서의 절망. 콘베이어 벨트를 따라가지 않으니, 허무와 권태만이 남았다. 이를 쉽게 쁘띠-부르주아 여성 계급 세계관의 한계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 소설이 인기를 끈 이유를 생각해본다. 이 소설과 비슷한 소재를 차용한 많은 소설들, 대중가요들을 떠올려본다. 신해철이 노래한 ‘돈, 큰집, 빠른차, 여자/남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우리들의 행복이 있을까’나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등.
이들보다, 그래도 박주영의 이 소설이 깊이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1인칭 화자로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억제한 어떤 절규’를 간직하면서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긍정하려고’ 노력하는 자세 때문이 아닐까. ‘느린 삶’을 노래하기는 쉽다. 그러나 치열한 반성을 거친 후에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케 하는 의문들을 담아내면서도, 묵묵히 계속 나아가려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백수생활백서’. ‘백수’라면, 남들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이라면,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