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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 1
제라르 모르디야 지음, 정혜용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노동자 중심주의와 레닌. 맑스와 러시아. 전태일과 근로기준법. 87년이후 남한의 노동운동과 FTA반대 투쟁.
앞의 단어와 뒤의 단어는 미묘한 관계이다. 닮은 것 같으면서, 영향을 받았거나 주었거나 했으면서도, 닮지 않고 서로 극명한 차이들을 간직하고 있는.
그리고 내가 고민했었던 문제들. 어쩌면 '고민'만 했던 문제들. 1920년대, 1930년대 식민지시기 '한국어'문학을 공부하면서, KAPF라는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위한 목적문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문제들.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맑스주의를 공부하면서 느꼈던 문제들. 혹은 모순점들?
그 중 핵심은, '노동자의 힘'이란 과연 무엇인가와 '지식인의 역할'은 그럼 무엇인가로 압축되었다. 노동자의 문화, 노동자의 힘, 노동자라는 세 글자 자체를 신성시했던 선배들과 현실에서 느끼는 괴리감. 노동자 중심성이라는 테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지식인'으로서 남으려했던 움직임 등.
역사적으로 식민지 조선에서는 1920년대에 본격적인 공산주의 사상가, 활동가들이 활동을 시작했고, 30년대에 꽃(?)을 피웠으며 40년에는 지하에 들어갔다가 '도둑처럼' 해방이와서 분단이 되었다. 특히 KAPF라는 청년들은 문학/문화 활동, 시나 소설 '나부랭이'를 쓰는 것을 통해 반식민지 반제국주의 투쟁을 하려 했다는 어처구니 없는(?)사실을 어떻게 우리는 해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그렇게 강조했던 노동자들은 그들의 책을 읽지 않았고, 문맹도 많았던 시절. 노동자-농민 연대를 주장했지만, 농민들의 문맹률은 더욱 심각했던 시절. 그 시절에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당 중심성을 토대로 혁명가에 의해 부여된 이데올로기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고, 1920-30년대를 공부할 수록, 정말 그 방법 밖에는 없었나 싶게 된다.
쉽게 말해, 혁명 후 본격적인 사상, 설득 작업이랄까. 어이없게도 공산주의 혁명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소외'되는 형태로 될 수 밖에 없다는 지독한 아이러니. 1920-30년대에 만약 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이런 방법 외에는 떠올릴 수 없었고 어쩌면 이는 필연적으로 관료적인 당 독재 형태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레닌 사후 스탈린의 소비에트-중심주의를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고 있던 나는, 네그리-하트가 말하는 '다중'의 긍정적인 에너지도 구체적 투쟁 기반을 거의 상실한 지식인의 헛된 꿈이라고 간주하였고, 이미 실패한 '실험'은 정말 '이미' 실패한 실험이라고 어느새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골방 학삐리의 퇴락과정이랄까..)
이러한 회의에 작은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과 이 책, 그리고 2002년 월드컵과 반FTA시위의 가속화에 있다. 이 중, 이는 이 책의 리뷰임으로 이 책에 한정해서 더 이야기해보겠다. (서론이 길다...)
1920-30년대 조선의 상황에서 '리얼리즘' 소설에서 처리해야 될 중요한 현실적 문제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1. 지식인의 역할(이는 곧 노농대중의 역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2. 노동자-농민의 역할(역할 배분? 등)
당대 조선현실은 KAPF 지식인들이 파악하기에, 노동자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으로는 무엇도 조직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고군분투하여 어떻게든 조직적인 저항을 하는 것으로 그려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지식인'이 준-신적인 존재(마치 deux ex machina처럼)로 나타나서는 별다른 내적 갈등 없는 혁명 영웅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당에의해 교육받고 정보를 획득한 것?) 열정적 에너지에 넘치며 노동자-농민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식민지 시기 리얼리즘 소설의 최고봉이라는 이기영의 '고향'은 그런 의미에서 등장하는 지식인이 '현실적'인 존재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나마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 '지식인'이 없으면 아무런 변화도 없이 자본가-지주(일본인)에게 픽박과 착취를 당하며 노동자-농민은 살아가야 했을 것이라는 전제가 너무나도 당연히 깔려있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농민의 역할이란 이런 '지식인'에게 잘 배워서 투사가 되어서 자기 확장하는 것. 그리고 이는 당대 조선 노동자-농민을 바라보는 지식인의 우월적 시각이 짙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식민지 시기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시각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의 시각도 은연중 이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태일 평전을 보라. 그리고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노동자 대중의 삶을 보라. 이 책에서도 주인공인 문제적 인물 루디가 각성하는 것은 선배 노동자 로르켕에 의해서이다. 로르켕은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에도, 아니 '자본주의 시대'라는 것 자체가 노동자는 노예임을 의미할 뿐이라고 역설한다.
아마 언젠가는 정말로 노동자 없는 공장이 생겨날 거야!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이 원하는 건, 그건 노예들, 꾸역꾸역 군말 없이 일해주는 노예들이지."
(...)
“첫째, 자넨 가진 게 아무것도 없네. 자네 집, 그건 은행 소유지. 단수(斷水)해버리면 자넨 거리로 나앉게 되지. 둘째, 이론적으론 자넨 가고 싶은 데로 갈 수가 있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땡전 한 푼 없으니 지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고! 휴가 때 어디로 가냐고 자네에게 묻지 않겠네. 답을 아니까. 여기, 집에 처박혀 있겠지. 셋째, 자네가 일해서 버는 돈은 그저 근근이 먹고 살 정도지 그 이상은 아니야. 그리고 만약 자네가 생각을 고쳐먹고 불평을 늘어놓기라도 할라치면, 버릇을 가르치겠다고 그나마 자네가 갖고 있는 그 얼마 안 되는 것까지 빼앗아가겠지. 그러니 입 다물어야지. 집, 마누라, 아이들이 있으니...... 자네는 채찍질 당하지 않았고, 노예 시장의 매물이 되지도 않았고, 투표권을 갖고 있고, 자네에게 일어난 일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라 부아지의 독자란에 투고할 수도 있는 표현의 자유가 자네에게 있다는 것엔 동의하네! 하지만 그 자유가 어떤 자유인가? 만약 자네가 진정한 자네 생각을 적어서 보낸다면, 그건 자네가 공개적으로 국영취업알선소에 자네 이름을 등록한 거나 진배없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지. 내 말을 믿게나. 가까이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네 삶은 토끼 방귀만큼의 가치도 없고, 자넨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그들이 말하듯, 자네는 그저 한 명의 생산 조작자지. 수레를 끄는 짐승과 기계부품 사이의 그 어디쯤에 위치한....”(1권: 312~313)
이러한 '루디'는 단순한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집단을 체화한 문제적 인물로 서술된다. 감동적인 다음부분을 보자.
루디는 달린다. 두 눈이 불타는 것 같다. 그는 망자들과 함께 달린다. 양아버지 모리스의 청소년기를 함께 했던 그들과 함께. 피의 일주일을 겪었던 파리코뮌 가담자들과 함께. 군 기강 확립을 위해 본보기 처형을 당했던 일차대전 참전군인들과 함께.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기를 거부하며 1919년 흑해에서 선상반란을 일으켰던 수병들과 함께. 1936년의 전국적 파업에 가담했던 노동자들과 함께.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이민 노동자들과 그들을 이끈 마누쉬앙과 함께. 세상이 존재한 이래로 정의를 요구하는 그 모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절대로 이들을 망각해서는 안 됐다. 여기, 루디의 손에, 루디의 다리에, 그의 신발이 아스팔트를 차며 내는 소리에, 그들이 있다. 그들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격려하지 않는가.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으리!” (2권: 355)
감동적인 순간. 공권력과 투쟁하며, 개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던지는 장면. 정의를 위해 투쟁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역사의 한 흐름이 되고, 비로소 ‘우리’가 된다. 비로소 ‘민중’의 일원이 된다.
이러한 노동자, 민중에 비해 이 책에서 지식인은 등장해도 노동자를 조직하는 역할이 아니라, 노동자 곁에 사는 어떤 이일 뿐이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노동자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는 이로 실질적인 직업(의사, 변호사)로 등장한다. 이러한 지식인에 의해서 사상 교육되고 조직화되어 투쟁하는 노동자 상이 아니라, 노동자들 끼리의 의식화와 조직이 자연스러운 것은, 그만큼 우리사회 노동자들의 의식수준에 대한 내 기대감도 은연중에 그만큼 높아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일 뿐이고, 이렇게 1000페이지나 되는 소설의 대부분은 노동자들의 '대화'로 가득차 있다. 노동자 출신이며 영화감독 출신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되었겠지만, 이러한 대화중심은 서술자(작가)가 교조적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을 지양한다. 또 특이한 점은 서술이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 서술적 반과거 형태로 상황을 지배하는 시선도 피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 현란한 대화의 장 속에 던져져, 지금 눈 앞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을 그대로 묵묵히 촬영(서사)하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노동자들의 일상과 투쟁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서술은 다국적기업이라는 배경 속에서 더 이상 80년대 남한 노동소설 처럼 자본가-노동자라는 이분구도와 자본가는 뚱뚱한 돼지이자 파렴치한 적이라는 구호로 무장하고 있지 않다. 물론 자본가는 나쁜 놈이라고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보여지지만, 그들 또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더 큰 문제는 '다국적기업'이라는 시스템으로 실질적 고용주/자본가와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관계 자체가 부재하는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박노해 시에서도 자주 들어나듯, 80년대 노동자들에게 있어 공장장은, 자본가는 바로 저 앞에서 숨쉬고 먹고 있는 자였고, 적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이 소설에서처럼, 사장은 외국에 있는 어떤 기업이라고 하고, 공장장은 단지 그에 의해 고용된 자일 뿐이고, 복잡한 M&A나 국가관계나 법들 때문에 이제는 누가 실질적으로 우리를 고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버리고 말았다.
누가 우리를 착취하는가? 시스템!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흥미로운 것은 노동자들의 노조 대표, 노조에서 파견나온 중앙 간부들이 모두 나름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으로 나옴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분출하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를 물으며 동시에, 통제되거나 대표될 수 없는 민중 개개인의 의견과 힘을 보여주고 있다.
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는 시장은 선거를 위해 노동자 편에 서지만, 도지사, 장관들의 반대 등.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러한 총체적 면모들이 너무나도 꼼꼼하고도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거의 전율에 가깝게 읽어나갔었다. 사실 외국 노동소설은 처음 접해 본 것이지만, 이렇게 훌륭하다니 가슴이 벅차다!
이 다음에는 책의 내용자체가 아니라 책을 만든 현대문학과 번역자에 대한 이야기를 쫌 해 보겠다. 전체적으로 번역은 정말 훌륭해서 한국어로 매우 잘 읽혔다.
ps.
오타지적.
1 권 296p 아래서 3번째 줄 루디와 달라스는 살을 에는 발바람을 맞으면 -> 맞으며
493p 가운데 부분 "별 거 아니야." 달라스가 대답한다. -> 달라스가 아니라 '바르다'
2 권 268p 가운데 고딕체로 끝까지 갑시다! 두번 반복 된 후 한줄 띄어야 되는데 안 띄었음.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은 표지 뒷면의 추천사다. '추천사 수록은 가나다순'이라고 명시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김정남/김주영/박원순/정몽준/손학규/신경숙 순서이다.
아니 정몽준은 왜 손학규와 신경숙의 앞일까?
이것은 사소한 실수라고 해도, 정몽준과 손학규의 추천사는 이 사람들이 (또는 이 사람들의 비서가) 이 책을 읽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책 소개를 대충 받고 아무렇게나 씨부린건지 알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후자 같다.
정몽준은 '이 책이 노사 관계 발전에 좋은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하는데, 혁명을 이야기하는 책이 어떻게 '노사 관계 발전'에 '좋은 기여'를 할 수 있겠는가?
손학규는 '노동의 신성함, 일자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했는데, 개뿔 무슨 노동의 신성함이냐? 나는 노동의 신성함을 논하는 자들을 믿지 못한다. 여기서 그려지고 있는 노동 또한 밥 벌어먹기 위해 해야되는 지겨운 곤욕으로 그려질 뿐...
도대체 왜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사를 부탁한 것인지, 현대문학 출판사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들의 네임밸류는 물론 엄청나다. 그런데 노동소설에 손학규/정몽준 이라니!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