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아영엄마 > 알라딘 & 유니세프 캠페인..

알라딘이 작년에는 몰래 산타를 했었는데 올해에는 유니세프랑 캠페인을 벌이는군요.
12일부터 시작했던데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 하여... ^^

가난했던 시절, 우리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젠 우리가 도울 차례입니다. 유니셰프는 인종 국적 종교적 차별 없는 구호라는 슬로건을 내건 유엔기구입니다.
1만원 : 영양실조 치료우유 2일분
중증영양실조어린이가 1주일간 마시면 대부분 건강을 회복합니다.

2만원 : 고단백 비스켓 8kg

한달 1만원으로도 값진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국내에는 13만명의 유니세프 후원자가 있으며 2005년에는 168 억원의 기금이 조성되었습니다.
알라딘은 기업활동을 통한 수익을 어려운 이들과 나누며 알라딘 고객 여러분과 함께 나눔의 기부문화를 만드는데 힘쓰겠습니다.
sonia 방금 후원자 가입했습니다... 2006.12.12 17:37
 
- 알라딘,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와 사회공헌 협약 체결
- 알라딘, 유니세프 후원자 모집 캠페인 시작 (12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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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정검 칠살도 1 칠정검 칠살도 시리즈 1
조진행 지음 / 자음과모음 / 2002년 3월
평점 :
품절


1류 무협과 2류 무협의 차이는 무엇으로 판가름할 수 있을까. 1,2,3류라는 것을 분류한다는 것이 웃기기도 하지만, 무협지에서 매일 하는 짓이 바로 '초고수' '고수' '2류' '3류'를 나누는 일이기에, 그 분류를 무협지에도 적용시켜 보자.

나는 무협지를 보고 감동과 전율을 느끼기도 하는 열혈(?)독자이지만, 딴에 보는 눈은 제법 까다롭다. 그도 그럴것이 국문과 밥을 먹은지 어언 6년, 나름 박사과정에 적을 두고 있으니 소위 '문학'이라 하는 것들을 제법 읽었겠으니 말이다. 물론 내 주위에서 '무협'을 문학으로 취급하는 이들이 적고, 이의 즐거움, 이의 감동을 아는이 적으니 오호 통재라!

무협이라 해서 어찌 감동이 없고, 어찌 민중의 애환이 담기지 않으며, 어찌 양성평등,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 아름다운 문체와 절묘한 비유, 파격적인 스토리-라인과 개성적인 캐릭터가 없을소냐 말이다!

그런데 사실, 대다수의 무협이 천편일률적인 캐릭터와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기에, 대다수의 문학비평가들이 이를 외면하고 있다. 이에 팔 걷고 나서서 1류, 2류, 3류 무협을 구분하는 기준을 마련해보기로 한다... 라기 보다는 이 조진행의 <칠정검 칠살도>에 대한 서평을 쓰는 와중에 그런 이야기를 쫌 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기존 무협들은 아래와 같은 세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시키느냐에 따라서 1류로 분류될 수 있다. 물론 이 세 기준 중에 하나만이라도 특출라게 뛰어나다면 1류에 족하다고 할 수 있다.

1. 등장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 있는가의 문제 -예) 김용. 한백림.

대부분의 무협지는 주인공에 대한 서술에만 집중하고, 주인공을 '나름' 개성적 인물로 만드려는데에 너무 큰 공을 쓰는 반면, 조연급들은 그야말로 '전형적 인물'로 나온다. 이들은 주인공의 개성을 살려주기 위한 엑스트라에 불과해서, 스토리 자체가 와닿지 않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물론 무협의 기본 스토리-라인은 고전 소설의 영웅담을 모방한 것이다.

영웅의 탄생(비범한 태생 또는 기이한 연에 의해서 비범해지는 영웅) - 영웅의 좌절 (부모/사문의 몰락 또는 무공을 쉽게 익히지 못하는 신체적/심적 변형) -영웅의 또 다른 기연을 통해 무공의 급상승 - 적과의 대치 후 승리 - 또는 다시 좌절로 돌아가서 다시 기연으로 반복하는 루트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승리.

이런 스토리-라인을 거부할 수 없다 해도, 그 와중에 만나는 친구/동문/스승/적들이 '천편일률'이라면 이것은 절대 1류 무협이 되지 못한다. 김용과 한백림의 무협은 이런 점에서 뛰어난 무협의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김용이야 워낙 유명하니 두말할 필요 없지만, 한백림의 무협은 좀 논란의 소지가 있다. 그의 무협 한 시리즈 한 시리즈만 보면 '천편일률'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지만, 그의 무협의 특이성은 이 시리즈들이 하나의 거대한 시리즈를 이루며 각 시리즈 마다의 주인공이 다른 시리즈에 조금씩 등장한다는 것이다.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버금가는 <무협영웅담>이 되겠다. 이런 한백림의 거대 시도에는 칭찬을 보내는 바이며, 그의 시리즈 면면도 점차 나아지다가, 마침내는 각 시리즈의 인물들이 한데 모여서 천하무림대회 비슷한 것을 열면 이는 우리 한국 무협사에 있어서 기리 기억될만한 작품이 될 것이다.

2. 주인공 외에 캐릭터가 너무도 뻔한 전형적 인물이라 정이 안 가더라도, 독특한 무공, 분위기, 스토리-라인을 형성하고 있는가. (좌백, <비뢰도>, <묵향>, 이 저자의 <기문둔갑> 등)

1번과 같은 무협은 정말 힘이 들 수 있다. 기실 김용의 <영웅문>과 한백림의 시리즈의 특성은 각 등장인물들이 다음 시리즈에도 부분적으로 등장하면서 각 등장인물을 만드는데 드는 작가의 노력이 무협지의 권수와 쪽수로 보상을 받는다는데에 있다. 우리가 무협지 작가들의 물적 조건을 생각해본다면, 정말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리 많은 노력을 들이겠는가. 사실 무협지에서 캐릭터 창조가 거진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토리-라인이나 소재의 특이성을 추구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무협계에 특출난 작가는 좌백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간결하고 힘있는 문체,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 철저한 고증과 방대한 자료를 통한 무공의 깊이와 리얼리티, 창의적인 스토리 등에서 좌백의 가능성과 재능은 현 집필작가 중 한국 무협계에 '본좌'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 좌백의 무협들이 나오는 속도가 너무 뜸해져서 혹 슬럼프를 격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게임계 쪽으로 아예 몸을 돌린 것인지 걱정이 된다. 그를 기다리는 독자들이 많다!

그리고 특출난 스토리-라인으로 인기를 모은 <묵향>이나 초절정 강하거나 특이한 주인공으로 인기를 모은 <비뢰도>, <극악서생> 등을 들 수 있다. <묵향>은 수많은 그의 아류작들을 생성해낸 무림계 태풍의 핵이다. 환무지, 무환지라는 신종 개념을 양성해내면서 환타지의 인물이 무협지로 '뿅'하니 건너가서 마법으로 무공을 상대한다던지, 무공으로 마법을 상대한다든지 같은 동도서기론인지 치즈김치인지 비스무리한 것이 초유행을 하게 된 것도, 이 <묵향>의 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몇년째 연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로보트를 타고 다니면서 마법을 쓰는 '파이브스타-스토리'와 '건담'과 '에바'를 합쳐놓은 듯한 환타지편이 끝나고, 용을 아빠로 둔 무협계 최강자를 주인공으로 한 무협지 편이 연재되고 있다.

이러한 <묵향>의 매력 중 하나는,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무소불위'의 주인공에 있다. 기존 '정통'무협이 인의예지를 중시하며 고강하기는 하지만 최강자가 되기까지 뼈를 깎는 수련과 자기와 대등한 상대들과의 피터지고 긴장되는 대결을 보여주었는데, 이제 <묵향>의 주인공은 막나간다. 마교의 교주이니 인의예지 따위는 개에게 줄래도 없고, 무공도 남들은 따라오지 못할 만큼 강하니 지 맘대로다 완전히. 이러한 교주의 좌충우돌 남들 개무시를 통해서 독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러한 '초강함'과 막무가네의 주인공은 <비뢰도>에도 이어져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극악서생>은 이와 비슷하면서도 무공은 못하는데 머리는 천재고, 또 '현재'에서 와서 '과거이자 다른세계'인 무협으로 떨어진 주인공이라는 개념을 히트시키며 이 또한 인기를 끌었다.

이것의 인기는 이를테면, 특수부대 출신 주인공이 K-2소총을 과거 세계에 만들어서 무공에 대항해서 쏜다던가, 시를 논할 때 GOD의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로 뭍 여인들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든가하는 지꺼리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웃음을 준다는 데에 있다.

어쨌든 이런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문장은 되어 있고, 나름의 세계관은 있는가.

가 마지막으로 정말 '쓰레기 무협'과 그래도 쓴 사람을 생각해서 울며 겨자먹는 무협으로 넘어가게 된다.

여기까지 길게 이야기했는데, 나는 이 '조진행'이라는 작가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의 <기문둔갑>은 3번째와 2번째 항목에 해당되며, 특히 2번째 항목에서 정말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그야말로 '기문둔갑'으로 무공의 최고수가 된 문사가 주인공인 것이다. 이 얼마나 '무협'이라는 단어를 무색하게 하는 '무협지'인가!

이 <기문둔갑>안에 들어있는 도가적, 불가적 사상의 심오함도 기대이상이었다. 그래서 이 <기문둔갑>의 전작인 <칠살검 칠살도>를 집어들었는데....

역시 이 작가는 작품마다 크게 '진화'하고 있는 작가라는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이 작품은 <기문둔갑>을 위한 맹아라고 밖에는 평가할 수 없다. 주인공의 성격도 비슷하고,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천편일률적이며 등장하는 도가적, 불가적 사상 또한 유사하다. 주인공이 무공이 없지만 '영기선검'을 통해 초절정 고수로 되고 마침내는 무공을 초월하게 되는 것도 <기문둔갑>과 유사하지만 훨씬 덜 특이해 평범하다.

아으. 그래도 계속 좋아지고 있으니 다행이다. 이제 <칠정검 칠살도>의 전작인 <천사지인>을 읽고 있는데 또 비슷한 주인공인 것 같아서 살짝쿵 실망이 된다.

조진행 선생, 캐릭터 줌 개발해 보세요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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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12-14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사지인은 처음 보고 반해버렸던 작품이였는데...

기인 2006-12-15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읽다보니 재미있더라고요~ 근데 쫌 식상하기는 해요.
같은 작가의 <기문둔갑> 강추에요. ㅎ

가넷 2006-12-15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문둔갑도 좋았어요. 두번째로 낸 이 칠정검은 별로 였었는데..근데 생각보다 무협도 많이 읽으시는 것 같네요.^^ 묵향은... 제가 중학교1학년때 쯤에 9권인가 10권이가 나왔던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10년은 넘은것 같네요. 앞에 무협편4권 은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던 느낌인데. 그리고 좌백 다음에 <비뢰도>를 적어 놓아서 어라? 비뢰도라는 제목의 책도 내셨던가? 싶었네요 ^^; 그러고 보니 무협을 처음 보았던게 와룡강(--;) 작품이였는데... 보고 충격을(?) 받았더랬죠.ㅎㅎ;; 그런걸 빌려주다니; 참.ㅋㅋ; 아니 잘 나간다고 추천해주는 건 또 뭔가 싶더라구요.ㅋㅋ;

가넷 2006-12-15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천사지인이 2부가 나왔었네요. 어쩐지 2부를 낼것 같이 끝내더라니...- -; 당장에 대여점에 가보아야겠어요.ㅎㅎ;;

기인 2006-12-15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네^^ 칠정검칠살도도 2부가 나올 것처럼 끝냈는데,
작가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느니만큼, 발전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ㅎ

가넷 2006-12-15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선인지로요? 그거 1권만 나오고 그 이후로는 깜깜무소식..- -;

기인 2006-12-15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게 선인지로에요? ㅎ 작가가 이것저것 바쁘나보네요. 몇개 벌려놓고 인기 좋고 잘 써지는거 쓰나봐요. 저도 언젠가는 무협다운 무협을 한번 써보고 싶어요 ㅎ :)
 

 

David Harvey, Paris, Capital of Modernity(2003), 2. Dreaming the Body Politic


 

서: 개관

   이 책의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도시라는 공간적 구조의 변모에 따른 산업 구조, 노동 방식, 거주민들의 (근본적/구조적)변모일 터이고, 이러한 변화는 ‘근대성’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이를 잘 드러내는 도시가 ‘파리’이고 (사실 최근 서울의 변모도 못지않게 드라마틱하다. ‘우리식 근대’의 상징 불도저/현대건설과 이명박/박정희) 당대의 도시와 그 속의 인물들의 내면풍경을 잘 드러내 주는 발자크, 플로베르의 작품들, 당대 시사만화격인 도미에의 삽화들1), 실제 파리의 변모를 보여주는 사진들을 통해서 이 책은 통합적으로 ‘파리’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부는 책 전체의 서론격으로 1848-1870년에 이러난 파리의 ‘근대적’ 변모의 전시기, 즉 proto-modern을 다룬다. 시기적으로 1830-1848로 1830혁명2) 이후의 7월 왕정으로 부르주아 세력이 집권한 시기에 이루어진 사상적(특히 도시에 대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견해)변화를 서술하고 있다. 서론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근대’가 ‘단절’이라는 것은 신화라고 단정하며 ‘근대성’이 파리라는 도시에서 확고하게 드러나기 이전에 있었던 움직임에 소위 ‘근대의 맹아’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보이는 장이 바로 이 1장이다.

   사실 이러한 맹아/기원 논쟁은 어떤 의도로 역사를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판단될 문제로, 어떠한 역사적 시기도 그 이전 시기에 있었던 일들 때문에 그 이후에 있는 일이 발생한다는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점을 부각시킨다면 ‘혁명’이나 ‘단절’과도 같은 개념은 비학문적인 과장에 그치게 된다. ‘역사학자’의 임무 중 하나가 결국 필연적 원인-결과를 잡아내는 것이라면 이러한 접근태도는 논리적으로 당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하비는 1장에서는 발자크의 묘사를 통해서 당대 도시 거주민들의 내면풍경을 드러내며, 도미에의 비판적 시각(하비의 입맛에 맞는)으로 구성된 당대 파리의 시사적 문제들을 재구성하는 것을 통해서 입체적으로 당대 파리와 파리인들을 보여주고 있다.

   (1970-80년대 조선의 ‘자생적 근대화론’은 이와는 조금 다른 문제점을 갖고 있다. 조선의 ‘근대’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외부’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기에 30년대 태생 한반도의 학자들은 한반도 자체를 ‘독립변수’화 시키기 위해 ‘자생론’을 내세운다. 물론 동아시아, 나아가 당대 국제정세에서 ‘일정이상’ 벗어나있는 독립변수로서의 한반도라는 것이 지금도 물론이지만 그 때도 말이 안 되는 설정임은 분명하다. 결국 이는 하나의 가정으로 ‘독립변수’라고 가정한 다음에 설명할 수 있나 한번 보자라는 식으로 될 수밖에 없다.)

   2장 ‘신체정치’에서는 당시 파리/프랑스/유럽에서 도시-근대성이라는 주제에 관련된 지적흐름을 좇으며 이를 통해 앞으로 본격적으로 서술될 2부에서 파리를 ‘근대적 구조’를 가진 구성체로 만든 ‘오스망’ (이명박?)이라는 관료의 사상/정책/행동이 ‘획시기적’인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본: 2. Dreaming The Body Politic

a. Body Politic

Body Politic이라는 것은 옮긴이의 말에 따르자면 “자연적 신체의 은유를 사용하며, 도시 개조 논리에 활용되는 유기체적 순환이라는 개념과도 관련된다. 신체가 조화를 이루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듯이 신체정치란 구성원들의 행복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집단적 기획을 통해 공통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이상은 많은 사회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각자의 유토피아 사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529-530)

 

  1840년대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여성운동가, 개혁가들은 도시를 미래의 좋은 사회가 되어야 할 어떤 것의 기반이 되는 하나의 정치적ㆍ사회적ㆍ물질적 유기체 형태-하나의 신체정치-로 보고 관심을 가졌다. (98)

  사실 이 자체가 ‘기계적 세계관’=‘근대성’(대표적으로 합리론의 데카르트-경험론의 베이컨 등)과는 유리가 있다. 그래서 나중에 서술되지만 1848년 이후 오스망 시대는 proto-오스망과는 다르게 이러한 시각을 잃어버린다. 어쨌든 body politic같은 개념이 나오면 우리는 거의 즉시 ‘푸코’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와는 별반 상관없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푸코 이야기가 중간에 한 번 나오기는 하지만 상관없는 문맥이다.

b. 2장의 질문

2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쓰여졌다. (앞서는 전체적 책의 입장에서의 2장의 역할/이 부분은 2장 자체적인 목적)

특히 진보진영의 사람들은 1848년 이전에는 이 도시와 사회를 어떤 것으로 보았고 상상했는가? 그들은 장래에서 어떤 가능성을 예견했는가? 제국이 맞서서 분투해야 하는 이 모든 것들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가?(93)


c. 오스망-이전과 오스망

서론에서 누차 언급한 것처럼 오스망-이전(proto-오스망)과 오스망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최근에 부각되는 장면 내각-박정희의 새마을운동/근대화의 연속성을 떠올리게 한다. 위정자/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단절/혁명성/새로움’을 부각시키려고, 차이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수구/보수마저도. 박정희나 사후 박정희 추종자들이 그의 ‘혁명적 업적’으로서의 근대화를 강조하는 것이나 오스망-보나파라트가 자신들의 혁명적 업적으로서의 근대화를 강조하는 것이 겹친다. 그 이유와 목적 또한.

 

콩시데랑, 페리몽, 메이나디에, 심지어 랑케탱까지도 설령 생시몽주의와 푸리에의 이상 덕분에 그들의 사상이 활기를 얻었다 할지라도, 유토피아적 이상보다는 실용적인 계획을 세웠다. 오스망이 실제로 행한 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우리는 이런 온갖 사상들이 그 배경에서 들끊고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는 무無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며, 이러한 개척자적 사상(그가 달리의 <르뷔>를 읽은 것은 확실하다)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그가 가진 문제는 이러한 발상들이 여러 측면에서 보나파르트주의를 증오하는 정치적 전제와 유토피아적 꿈에서 생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오스망이 철저한 단절을 전파했다는 신화는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그가 행한 일의 대부분이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이미 배아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서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1848년 이후 근대성이 새롭고도 특별한 단계에 들어섰으며 오스망이 이 새로운 형태의 근대성이 다듬어지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단느 사실의 가치가 훼손되지는 않는다. (129)


d 1848년 이전-이후

1848년의 붕괴 이후 온갖 종류의 결과가 나타났다. 만약 사회공화국의 개념이 탄압받는다면 하나의 신체정치로서 공화국과 도시 사이의 강력한 연합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감정을 가진 존재이자 하나의 신체정치라는 지위가 부정된다면 도시는 도대체 무엇으로 표현될 수 있겠는가? 그 결과는 표상의 위기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1848년의 혁명은 도시를 표현하는 급격히 상이한 방식들을 분리시키는 결정적인 인자였다. 이것은 오스망과 그의 선배들인 베르제르와 랑뷔토와의 차이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그 차이는 도시가 발자크와 플로베르의 작품에서 재현되는 방식을 통해서도 추적될 수 있다.(131)

표상의 위기와 혁명의 관련성.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기원> 등. 68혁명 이후 강조되는 ‘표상/이데올로기’ 결국 진정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물질적 제반 조건/관계를 변화시키며 이에 따라(인과라기보다는 알튀세식으로 ‘최종심급’으로서) 표상의 변모도 ‘함께’ 일어나는 것. 그런데 정말 이 하비라는 학자는 이러한 부분에서는 아우어바흐의 전통을 잇는 것 같은 세밀한 관찰을 보여준다.


옳건 그르건 간에 발자크와 당대의 다른 많은 사람들(그 도시의 적절한 재건설을 추구했던 유토피아 사상가나 도시 이론가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소유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며, 그것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사회 질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개조할 수는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1848년이 지난 뒤, 그 도시를 소유하고 그것을 자기들만의 특별한 이익과 목적에 맞추어 개조하면서 대중에게는 상실감과 허탈감만 남겨준 것은 오스망과 개발업자, 투기꾼, 자금주, 시장의 힘이었다. 적어도 플로베르는 이러한 여건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감정을 가진 존재” 혹은 “신체정치”는 커녕 하나의 전체로서의 도시에 대한 단일한 정의도 없다. 플로베르는 그 도시를 하나의 무대장치로 환원시켰다. 아무리 아름답게 건설되고 고상하게 꾸며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속에서, 또 그 위에서 진행되는 인간 행동의 배경 구실을 할 뿐이다. 도시는 죽은 대상이 되었다(오스망의 계획에서 대체로 그렇듯이). 오스망이 업무를 완수한 뒤인 1869년에 출판된 󰡔감정교육󰡕은 그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생명 없는 사물에 대한 정교한(그리고 아주 뛰어난) 묘사가 풍부하다. 그 도시는 우리의 감각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파악되지만 “감정을 가진 존재”나 “신체정치”로서의 성격은 완전히 잃어버린다. (...) 1848년에 확실히 잃어버린 것은 도미에의 판화에서 상징되었듯이, 젖먹이는 국가로서의 신체정치라는 발상이었다. (133~134)

 

결국 ‘아름다웠던’ 시절에의 꿈 속에서는 ‘소외’가 일어나지 않았던 셈. 생산수단과 생산주체의 분리와 노동과정에서의 소외가 도시와 대중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온전히 자본주의-근대-기계적 세계관이 ‘파리’에 정착되는 시점으로서의 1848년으로 볼 수 있을까?



ps. 당시 파리의 ‘조합주의’운동과 식민지 조선의 조합주의 운동


114 생시몽주의자들에게 근본적인 이념은 산업인들의 생산조합이었지만 이것은 두 가지 구별되는 차원으로 운영되었다. 신체정치 내부에서의 차별화된 이익(특히 기능이나 노동의 분업에서 발생하는)은 그러한 이익을 표출하는 생산조합으로서 조직될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자와 예술가는 그들만의 심의회 조직을 갖게된다. 하지만 이러한 생산조합들은 공동의 선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산업인들 간의 계급적 연대와 자원의 공동출자와 생산성과 재능에 따른 지급에 의존하는 "일반 생산조합"에 소속되어야 했다.

115 노동자 자신들이 결성한 독립적 생산조합이라는 발상은 오랜 역사를 갖는다. 그 생각은 혁명 뒤에 억압을 받았다가 1830년의 혁명기에 강력하게 다시 등장했고, 생시몽주의 내의 반대론자인 뷔쉐Buchez에게서 즉각적인 지지를 받았다. 뷔쉐는 보편적 생산조합의 원칙이 제시하는 하향식 관점에 반대하며 노동자들을 임금 체제에서 해방시키고 경쟁의 불공정한 겨로가에 대해 그들을 보호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생산자들의 상향식 생산조합을 주장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공장 소유주와 고용주들은 귀족이나 지주와 마찬가지로 기생적 존재들이었다.

116~117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생산조합을 결성할 수 있다는 발상은 여러 종류의 직업에서 바탕이 되었고 점점 더 큰 인기를 모았다. 그것은 공화주의자와 노동자들이 주로 읽는 간행물에서 다루어지는 논의의 중심 의제가 되었다. 주된 차이는 노동 규율과 기술 혁신을 보장하기 위해 생산조합들 간의 경쟁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쪽과 업계 전체에 대한 궁극적으로 독점적 통제권을 갖고자 하는 쪽 사이에 있었다. 이 운동은 1849년에 작성된 생산조합연합l'union des Associations을 위한 정관(대체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잔 드로앵Jeanne Deroin의 노력으로 작성된)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 정관이 막 발효되려는 찰나에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운동은 탄압되었다. 그 당시 파리에는 최대 120개의 직업에서 일하는 5만 명의 구성원을 거느린, 거의 300개의 사회주의 생산조합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반 이상이 1851년의 쿠데타까지 살아남았다가 그 이후에 탄압되었다.

 

1920년 1930년 조선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조합주의' 운동이 광범위 전개되었던 흔적과 마주치게 된다. 이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되어진 것은, 당대 공산주의/사회주의 필자들이 이에 별반 관심이 없었다는 것.

자생적 움직임이었을까. 19세기 초중반 파리의 상황과는 어떠한 연관이 있었을까. 거진 와해되었던 조선의 아나키 세력들. 또는 공산주의 세력들의 분파들과의 연관성. 내지는 '자발성'에 대한 질문들.

자료를 더 보고, 생시몽, 푸리에, 푸르동을 공부하면서 생각해볼 문제다. 외국의 역사/이론서를 보면 조선의 상황과 비슷한 점만이 눈에 띄는데, 결국 이 비슷한 점에서 시작해서 차이점 또한 밝혀내야 한다는 주문/혹은 강압

 

1) 유용한 방법으로 한국에서는 김승옥의 시사만화를 토대로 4.19혁명 이후 남한 사회의 총체적 모습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천정환 외(2005)에 의해 이루어진 바 있다. 시사만화라는 것은 그 ‘시사성’과 전방위성 때문에 당대 사회를 특정 시각을 통해 구성/재구성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2)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자유주의자 및 혁명주의자들이 보수적 군주와 정부에 맞서 일으킨 봉기(1830~32)를 통틀어 일컫는 말. 혁명의 움직임은 1830년 7월 26일, 프랑스에서 샤를 10세가 3가지 법령을 공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즉 하원을 해산하고 언론의 자유를 폐지했으며 선거법을 개정해 유권자의 3/4이 선거권을 상실했다. 파업과 항의가 일어났고 뒤이어 무장충돌이 벌어졌다. 왕정군은 이 반란을 억누를 수 없었고 7월 27~29일의 3일간에 걸친 싸움이 끝나자 샤를은 영국으로 도망쳤다. 급진파들은 공화정을 세우고자 했고 귀족주의자들은 샤를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중산층은 1792년에 프랑스 공화정을 위해 싸운 경력이 있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에게 왕관을 넘겨주자는 자신들의 결정을 관철시켰다. 루이는 '프랑스 국민의 왕'이 되겠다고 승낙했다. 이 '7월혁명'이 끝난 뒤 상원은 세습제 기구에서 선출제 기구로 바뀌었고 특별재판소는 폐지되었으며 국왕과 교회와의 동맹관계도 끝이 났다. 그리고 부르봉 왕가의 백색기 대신에 삼색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용기를 얻은 전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전면적인 해방전쟁을 바랐으나 대부분의 상황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루이 필리프는 전쟁을 바라지 않았으며 기대와는 반대로, 러시아 차르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킨 폴란드인들을 지원하지도 않았다. 결국 폴란드 봉기는 잔인하게 진압되었고 폴란드는 러시아 제국으로 합병되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여러 왕국에서 일어난 봉기도 실패했다. 그러나 벨기에는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1831년 독립국가로 승인받았다.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전쟁을 치렀으며, 마침내 1832년에 유럽 강대국들로부터 독립주권국가로 승인받았다. (empas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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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cnunc 2006-12-1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아주 잘 읽고 도움 받고 갑니다. 관악구민을 위해
고생 많이 한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아참, 각주 1의 책은 06년이 아니라 05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기인 2006-12-16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 ㅎㅎ 근데 누구신지 잘 모르겠어요~ ^^;;
천정환 선생님이신 것도 같고 아뒤가 어디서 많이 본 건데;;

기인 2006-12-16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2월
구판절판


생시몽주의자들에게 근본적인 이념은 산업인들의 생산조합이었지만 이것은 두 가지 구별되는 차원으로 운영되었다. 신체정치 내부에서의 차별화된 이익(특히 기능이나 노동의 분업에서 발생하는)은 그러한 이익을 표출하는 생산조합으로서 조직될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자와 예술가는 그들만의 심의회 조직을 갖게된다. 하지만 이러한 생산조합들은 공동의 선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산업인들 간의 계급적 연대와 자원의 공동출자와 생산성과 재능에 따른 지급에 의존하는 "일반 생산조합"에 소속되어야 했다.-114쪽

노동자 자신들이 결성한 독립적 생산조합이라는 발상은 오랜 역사를 갖는다. 그 생각은 혁명 뒤에 억압을 받았다가 1830년의 혁명기에 강력하게 다시 등장했고, 생시몽주의 내의 반대론자인 뷔쉐Buchez에게서 즉각적인 지지를 받았다. 뷔쉐는 보편적 생산조합의 원칙이 제시하는 하향식 관점에 반대하며 노동자들을 임금 체제에서 해방시키고 경쟁의 불공정한 겨로가에 대해 그들을 보호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생산자들의 상향식 생산조합을 주장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공장 소유주와 고용주들은 귀족이나 지주와 마찬가지로 기생적 존재들이었다.-115쪽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생산조합을 결성할 수 있다는 발상은 여러 종류의 직업에서 바탕이 되었고 점점 더 큰 인기를 모았다. 그것은 공화주의자와 노동자들이 주로 읽는 간행물에서 다루어지는 논의의 중심 의제가 되었다. 주된 차이는 노동 규율과 기술 혁신을 보장하기 위해 생산조합들 간의 경쟁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쪽과 업계 전체에 대한 궁극적으로 독점적 통제권을 갖고자 하는 쪽 사이에 있었다. 이 운동은 1849년에 작성된 생산조합연합l'union des Associations을 위한 정관(대체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잔 드로앵Jeanne Deroin의 노력으로 작성된)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 정관이 막 발효되려는 찰나에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운동은 탄압되었다. 그 당시 파리에는 최대 120개의 직업에서 일하는 5만 명의 구성원을 거느린, 거의 300개의 사회주의 생산조합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반 이상이 1851년의 쿠데타까지 살아남았다가 그 이후에 탄압되었다.-116~117쪽

프루동은 1848년의 경험에서 이와 아주 다른 결론을 끌어냈다. 그는 봉기 운동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하나의 억압적인 정권을 다른 하나의 정복 정권으로 갈아치우는 것뿐이라고 느꼈다. 노동 문제는 정치적 채널을 통해 해결될 수 없다. 국가는 누가 주도하든 간에 적이었다. 이 때문에 프루동은 블랑키주의자와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정치적 공화국이 사회 변화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전주곡이라고 여긴 모든 사람들과 입장이 어긋나게 되었다. 노동자를 해방하려는 투쟁은 유토피아적 기획보다는 작업장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계획을 이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협동조합과 상호부조주의는 노동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노동자 민주주의 개념을 의미했으며, 상호신용과 금융, 상호 보험과 상호부조협회, 주거협동조합기획 등의 지원을 받게 된다. 그러한 프로그램의 장점은 국가의 개입이 배제되며 국가 소멸의 기초를 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실은 거기에서는 작업장 내에서의 계급 대결이 없으며, 소장인들(경쟁, 신용 및 시장의 변화하는 여건에 위협받고 있는)을 이 명분 아래 집결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403-404쪽

1920년 1930년 조선의 상황을 들여보다 보면, '조합주의' 운동이 광범위 전개되었던 흔적과 마주치게 된다. 이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되어진 것은, 당대 공산주의/사회주의 필자들이 이에 별반 관심이 없었다는 것.
자생적 움직임이었을까. 19세기 초중반 파리의 상황과는 어떠한 연관이 있었을까. 거진 와해되었던 조선의 아나키 세력들. 또는 공산주의 세력들의 분파들과의 연관성. 내지는 '자발성'에 대한 질문들.
자료를 더 보고, 생시몽, 푸리에, 푸르동을 공부하면서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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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 1
제라르 모르디야 지음, 정혜용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노동자 중심주의와 레닌. 맑스와 러시아. 전태일과 근로기준법. 87년이후 남한의 노동운동과 FTA반대 투쟁.

 

앞의 단어와 뒤의 단어는 미묘한 관계이다. 닮은 것 같으면서, 영향을 받았거나 주었거나 했으면서도, 닮지 않고 서로 극명한 차이들을 간직하고 있는.


그리고 내가 고민했었던 문제들. 어쩌면 '고민'만 했던 문제들. 1920년대, 1930년대 식민지시기 '한국어'문학을 공부하면서, KAPF라는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위한 목적문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문제들.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맑스주의를 공부하면서 느꼈던 문제들. 혹은 모순점들?

 

그 중 핵심은, '노동자의 힘'이란 과연 무엇인가와 '지식인의 역할'은 그럼 무엇인가로 압축되었다. 노동자의 문화, 노동자의 힘, 노동자라는 세 글자 자체를 신성시했던 선배들과 현실에서 느끼는 괴리감. 노동자 중심성이라는 테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지식인'으로서 남으려했던 움직임 등.


역사적으로 식민지 조선에서는 1920년대에 본격적인 공산주의 사상가, 활동가들이 활동을 시작했고, 30년대에 꽃(?)을 피웠으며 40년에는 지하에 들어갔다가 '도둑처럼' 해방이와서 분단이 되었다. 특히 KAPF라는 청년들은 문학/문화 활동, 시나 소설 '나부랭이'를 쓰는 것을 통해 반식민지 반제국주의 투쟁을 하려 했다는 어처구니 없는(?)사실을 어떻게 우리는 해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그렇게 강조했던 노동자들은 그들의 책을 읽지 않았고, 문맹도 많았던 시절. 노동자-농민 연대를 주장했지만, 농민들의 문맹률은 더욱 심각했던 시절. 그 시절에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당 중심성을 토대로 혁명가에 의해 부여된 이데올로기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고, 1920-30년대를 공부할 수록, 정말 그 방법 밖에는 없었나 싶게 된다.


쉽게 말해, 혁명 후 본격적인 사상, 설득 작업이랄까. 어이없게도 공산주의 혁명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소외'되는 형태로 될 수 밖에 없다는 지독한 아이러니. 1920-30년대에 만약 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이런 방법 외에는 떠올릴 수 없었고 어쩌면 이는 필연적으로 관료적인 당 독재 형태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레닌 사후 스탈린의 소비에트-중심주의를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고 있던 나는, 네그리-하트가 말하는 '다중'의 긍정적인 에너지도 구체적 투쟁 기반을 거의 상실한 지식인의 헛된 꿈이라고 간주하였고, 이미 실패한 '실험'은 정말 '이미' 실패한 실험이라고 어느새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골방 학삐리의 퇴락과정이랄까..)


이러한 회의에 작은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과 이 책, 그리고 2002년 월드컵과 반FTA시위의 가속화에 있다. 이 중, 이는 이 책의 리뷰임으로 이 책에 한정해서 더 이야기해보겠다. (서론이 길다...)


1920-30년대 조선의 상황에서 '리얼리즘' 소설에서 처리해야 될 중요한 현실적 문제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1. 지식인의 역할(이는 곧 노농대중의 역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2. 노동자-농민의 역할(역할 배분? 등)


당대 조선현실은 KAPF 지식인들이 파악하기에, 노동자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으로는 무엇도 조직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고군분투하여 어떻게든 조직적인 저항을 하는 것으로 그려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지식인'이 준-신적인 존재(마치 deux ex machina처럼)로 나타나서는 별다른 내적 갈등 없는 혁명 영웅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당에의해 교육받고 정보를 획득한 것?) 열정적 에너지에 넘치며 노동자-농민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식민지 시기 리얼리즘 소설의 최고봉이라는 이기영의 '고향'은 그런 의미에서 등장하는 지식인이 '현실적'인 존재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나마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 '지식인'이 없으면 아무런 변화도 없이 자본가-지주(일본인)에게 픽박과 착취를 당하며 노동자-농민은 살아가야 했을 것이라는 전제가 너무나도 당연히 깔려있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농민의 역할이란 이런 '지식인'에게 잘 배워서 투사가 되어서 자기 확장하는 것. 그리고 이는 당대 조선 노동자-농민을 바라보는 지식인의 우월적 시각이 짙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식민지 시기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시각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의 시각도 은연중 이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태일 평전을 보라. 그리고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노동자 대중의 삶을 보라. 이 책에서도 주인공인 문제적 인물 루디가 각성하는 것은 선배 노동자 로르켕에 의해서이다. 로르켕은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에도, 아니 '자본주의 시대'라는 것 자체가 노동자는 노예임을 의미할 뿐이라고 역설한다.


아마 언젠가는 정말로 노동자 없는 공장이 생겨날 거야!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이 원하는 건, 그건 노예들, 꾸역꾸역 군말 없이 일해주는 노예들이지."

(...)

“첫째, 자넨 가진 게 아무것도 없네. 자네 집, 그건 은행 소유지. 단수(斷水)해버리면 자넨 거리로 나앉게 되지. 둘째, 이론적으론 자넨 가고 싶은 데로 갈 수가 있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땡전 한 푼 없으니 지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고! 휴가 때 어디로 가냐고 자네에게 묻지 않겠네. 답을 아니까. 여기, 집에 처박혀 있겠지. 셋째, 자네가 일해서 버는 돈은 그저 근근이 먹고 살 정도지 그 이상은 아니야. 그리고 만약 자네가 생각을 고쳐먹고 불평을 늘어놓기라도 할라치면, 버릇을 가르치겠다고 그나마 자네가 갖고 있는 그 얼마 안 되는 것까지 빼앗아가겠지. 그러니 입 다물어야지. 집, 마누라, 아이들이 있으니...... 자네는 채찍질 당하지 않았고, 노예 시장의 매물이 되지도 않았고, 투표권을 갖고 있고, 자네에게 일어난 일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라 부아지의 독자란에 투고할 수도 있는 표현의 자유가 자네에게 있다는 것엔 동의하네! 하지만 그 자유가 어떤 자유인가? 만약 자네가 진정한 자네 생각을 적어서 보낸다면, 그건 자네가 공개적으로 국영취업알선소에 자네 이름을 등록한 거나 진배없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지. 내 말을 믿게나. 가까이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네 삶은 토끼 방귀만큼의 가치도 없고, 자넨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그들이 말하듯, 자네는 그저 한 명의 생산 조작자지. 수레를 끄는 짐승과 기계부품 사이의 그 어디쯤에 위치한....”(1권: 312~313)


이러한 '루디'는 단순한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집단을 체화한 문제적 인물로 서술된다. 감동적인 다음부분을 보자.


루디는 달린다. 두 눈이 불타는 것 같다. 그는 망자들과 함께 달린다. 양아버지 모리스의 청소년기를 함께 했던 그들과 함께. 피의 일주일을 겪었던 파리코뮌 가담자들과 함께. 군 기강 확립을 위해 본보기 처형을 당했던 일차대전 참전군인들과 함께.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기를 거부하며 1919년 흑해에서 선상반란을 일으켰던 수병들과 함께. 1936년의 전국적 파업에 가담했던 노동자들과 함께.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이민 노동자들과 그들을 이끈 마누쉬앙과 함께. 세상이 존재한 이래로 정의를 요구하는 그 모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절대로 이들을 망각해서는 안 됐다. 여기, 루디의 손에, 루디의 다리에, 그의 신발이 아스팔트를 차며 내는 소리에, 그들이 있다. 그들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격려하지 않는가.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으리!” (2권: 355)


감동적인 순간. 공권력과 투쟁하며, 개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던지는 장면. 정의를 위해 투쟁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역사의 한 흐름이 되고, 비로소 ‘우리’가 된다. 비로소 ‘민중’의 일원이 된다.

 

이러한 노동자, 민중에 비해 이 책에서 지식인은 등장해도 노동자를 조직하는 역할이 아니라, 노동자 곁에 사는 어떤 이일 뿐이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노동자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는 이로 실질적인 직업(의사, 변호사)로 등장한다. 이러한 지식인에 의해서 사상 교육되고 조직화되어 투쟁하는 노동자 상이 아니라, 노동자들 끼리의 의식화와 조직이 자연스러운 것은, 그만큼 우리사회 노동자들의 의식수준에 대한 내 기대감도 은연중에 그만큼 높아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일 뿐이고, 이렇게 1000페이지나 되는 소설의 대부분은 노동자들의 '대화'로 가득차 있다. 노동자 출신이며 영화감독 출신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되었겠지만, 이러한 대화중심은 서술자(작가)가 교조적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을 지양한다. 또 특이한 점은 서술이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 서술적 반과거 형태로 상황을 지배하는 시선도 피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 현란한 대화의 장 속에 던져져, 지금 눈 앞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을 그대로 묵묵히 촬영(서사)하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노동자들의 일상과 투쟁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서술은 다국적기업이라는 배경 속에서 더 이상 80년대 남한 노동소설 처럼 자본가-노동자라는 이분구도와 자본가는 뚱뚱한 돼지이자 파렴치한 적이라는 구호로 무장하고 있지 않다. 물론 자본가는 나쁜 놈이라고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보여지지만, 그들 또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더 큰 문제는 '다국적기업'이라는 시스템으로 실질적 고용주/자본가와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관계 자체가 부재하는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박노해 시에서도 자주 들어나듯, 80년대 노동자들에게 있어 공장장은, 자본가는 바로 저 앞에서 숨쉬고 먹고 있는 자였고, 적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이 소설에서처럼, 사장은 외국에 있는 어떤 기업이라고 하고, 공장장은 단지 그에 의해 고용된 자일 뿐이고, 복잡한 M&A나 국가관계나 법들 때문에 이제는 누가 실질적으로 우리를 고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버리고 말았다.


누가 우리를 착취하는가? 시스템!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흥미로운 것은 노동자들의 노조 대표, 노조에서 파견나온 중앙 간부들이 모두 나름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으로 나옴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분출하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를 물으며 동시에, 통제되거나 대표될 수 없는 민중 개개인의 의견과 힘을 보여주고 있다.


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는 시장은 선거를 위해 노동자 편에 서지만, 도지사, 장관들의 반대 등.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러한 총체적 면모들이 너무나도 꼼꼼하고도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거의 전율에 가깝게 읽어나갔었다. 사실 외국 노동소설은 처음 접해 본 것이지만, 이렇게 훌륭하다니 가슴이 벅차다!


이 다음에는 책의 내용자체가 아니라 책을 만든 현대문학과 번역자에 대한 이야기를 쫌 해 보겠다. 전체적으로 번역은 정말 훌륭해서 한국어로 매우 잘 읽혔다.


ps.

오타지적.

1 권 296p 아래서 3번째 줄 루디와 달라스는 살을 에는 발바람을 맞으면 -> 맞으며

493p 가운데 부분 "별 거 아니야." 달라스가 대답한다. -> 달라스가 아니라 '바르다'

 

2 권 268p 가운데 고딕체로 끝까지 갑시다! 두번 반복 된 후 한줄 띄어야 되는데 안 띄었음.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은 표지 뒷면의 추천사다. '추천사 수록은 가나다순'이라고 명시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김정남/김주영/박원순/정몽준/손학규/신경숙 순서이다.

아니 정몽준은 왜 손학규와 신경숙의 앞일까?

 

이것은 사소한 실수라고 해도, 정몽준과 손학규의 추천사는 이 사람들이 (또는 이 사람들의 비서가) 이 책을 읽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책 소개를 대충 받고 아무렇게나 씨부린건지 알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후자 같다.

 

정몽준은 '이 책이 노사 관계 발전에 좋은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하는데, 혁명을 이야기하는 책이 어떻게 '노사 관계 발전'에 '좋은 기여'를 할 수 있겠는가?

손학규는 '노동의 신성함, 일자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했는데, 개뿔 무슨 노동의 신성함이냐? 나는 노동의 신성함을 논하는 자들을 믿지 못한다. 여기서 그려지고 있는 노동 또한 밥 벌어먹기 위해 해야되는 지겨운 곤욕으로 그려질 뿐...

 

도대체 왜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사를 부탁한 것인지, 현대문학 출판사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들의 네임밸류는 물론 엄청나다. 그런데 노동소설에 손학규/정몽준 이라니!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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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cka 2006-12-29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책 빌려됴요^^

기인 2006-12-29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옹~ 집에 있는데 가져다 줄께요~ ^^*

2007-03-01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06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