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2월
구판절판


생시몽주의자들에게 근본적인 이념은 산업인들의 생산조합이었지만 이것은 두 가지 구별되는 차원으로 운영되었다. 신체정치 내부에서의 차별화된 이익(특히 기능이나 노동의 분업에서 발생하는)은 그러한 이익을 표출하는 생산조합으로서 조직될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자와 예술가는 그들만의 심의회 조직을 갖게된다. 하지만 이러한 생산조합들은 공동의 선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산업인들 간의 계급적 연대와 자원의 공동출자와 생산성과 재능에 따른 지급에 의존하는 "일반 생산조합"에 소속되어야 했다.-114쪽

노동자 자신들이 결성한 독립적 생산조합이라는 발상은 오랜 역사를 갖는다. 그 생각은 혁명 뒤에 억압을 받았다가 1830년의 혁명기에 강력하게 다시 등장했고, 생시몽주의 내의 반대론자인 뷔쉐Buchez에게서 즉각적인 지지를 받았다. 뷔쉐는 보편적 생산조합의 원칙이 제시하는 하향식 관점에 반대하며 노동자들을 임금 체제에서 해방시키고 경쟁의 불공정한 겨로가에 대해 그들을 보호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생산자들의 상향식 생산조합을 주장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공장 소유주와 고용주들은 귀족이나 지주와 마찬가지로 기생적 존재들이었다.-115쪽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생산조합을 결성할 수 있다는 발상은 여러 종류의 직업에서 바탕이 되었고 점점 더 큰 인기를 모았다. 그것은 공화주의자와 노동자들이 주로 읽는 간행물에서 다루어지는 논의의 중심 의제가 되었다. 주된 차이는 노동 규율과 기술 혁신을 보장하기 위해 생산조합들 간의 경쟁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쪽과 업계 전체에 대한 궁극적으로 독점적 통제권을 갖고자 하는 쪽 사이에 있었다. 이 운동은 1849년에 작성된 생산조합연합l'union des Associations을 위한 정관(대체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잔 드로앵Jeanne Deroin의 노력으로 작성된)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 정관이 막 발효되려는 찰나에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운동은 탄압되었다. 그 당시 파리에는 최대 120개의 직업에서 일하는 5만 명의 구성원을 거느린, 거의 300개의 사회주의 생산조합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반 이상이 1851년의 쿠데타까지 살아남았다가 그 이후에 탄압되었다.-116~117쪽

프루동은 1848년의 경험에서 이와 아주 다른 결론을 끌어냈다. 그는 봉기 운동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하나의 억압적인 정권을 다른 하나의 정복 정권으로 갈아치우는 것뿐이라고 느꼈다. 노동 문제는 정치적 채널을 통해 해결될 수 없다. 국가는 누가 주도하든 간에 적이었다. 이 때문에 프루동은 블랑키주의자와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정치적 공화국이 사회 변화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전주곡이라고 여긴 모든 사람들과 입장이 어긋나게 되었다. 노동자를 해방하려는 투쟁은 유토피아적 기획보다는 작업장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계획을 이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협동조합과 상호부조주의는 노동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노동자 민주주의 개념을 의미했으며, 상호신용과 금융, 상호 보험과 상호부조협회, 주거협동조합기획 등의 지원을 받게 된다. 그러한 프로그램의 장점은 국가의 개입이 배제되며 국가 소멸의 기초를 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실은 거기에서는 작업장 내에서의 계급 대결이 없으며, 소장인들(경쟁, 신용 및 시장의 변화하는 여건에 위협받고 있는)을 이 명분 아래 집결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403-404쪽

1920년 1930년 조선의 상황을 들여보다 보면, '조합주의' 운동이 광범위 전개되었던 흔적과 마주치게 된다. 이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되어진 것은, 당대 공산주의/사회주의 필자들이 이에 별반 관심이 없었다는 것.
자생적 움직임이었을까. 19세기 초중반 파리의 상황과는 어떠한 연관이 있었을까. 거진 와해되었던 조선의 아나키 세력들. 또는 공산주의 세력들의 분파들과의 연관성. 내지는 '자발성'에 대한 질문들.
자료를 더 보고, 생시몽, 푸리에, 푸르동을 공부하면서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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