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Harvey, Paris, Capital of Modernity(2003), 2. Dreaming the Body Politic

서: 개관
이 책의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도시라는 공간적 구조의 변모에 따른 산업 구조, 노동 방식, 거주민들의 (근본적/구조적)변모일 터이고, 이러한 변화는 ‘근대성’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이를 잘 드러내는 도시가 ‘파리’이고 (사실 최근 서울의 변모도 못지않게 드라마틱하다. ‘우리식 근대’의 상징 불도저/현대건설과 이명박/박정희) 당대의 도시와 그 속의 인물들의 내면풍경을 잘 드러내 주는 발자크, 플로베르의 작품들, 당대 시사만화격인 도미에의 삽화들1), 실제 파리의 변모를 보여주는 사진들을 통해서 이 책은 통합적으로 ‘파리’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부는 책 전체의 서론격으로 1848-1870년에 이러난 파리의 ‘근대적’ 변모의 전시기, 즉 proto-modern을 다룬다. 시기적으로 1830-1848로 1830혁명2) 이후의 7월 왕정으로 부르주아 세력이 집권한 시기에 이루어진 사상적(특히 도시에 대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견해)변화를 서술하고 있다. 서론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근대’가 ‘단절’이라는 것은 신화라고 단정하며 ‘근대성’이 파리라는 도시에서 확고하게 드러나기 이전에 있었던 움직임에 소위 ‘근대의 맹아’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보이는 장이 바로 이 1장이다.


사실 이러한 맹아/기원 논쟁은 어떤 의도로 역사를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판단될 문제로, 어떠한 역사적 시기도 그 이전 시기에 있었던 일들 때문에 그 이후에 있는 일이 발생한다는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점을 부각시킨다면 ‘혁명’이나 ‘단절’과도 같은 개념은 비학문적인 과장에 그치게 된다. ‘역사학자’의 임무 중 하나가 결국 필연적 원인-결과를 잡아내는 것이라면 이러한 접근태도는 논리적으로 당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하비는 1장에서는 발자크의 묘사를 통해서 당대 도시 거주민들의 내면풍경을 드러내며, 도미에의 비판적 시각(하비의 입맛에 맞는)으로 구성된 당대 파리의 시사적 문제들을 재구성하는 것을 통해서 입체적으로 당대 파리와 파리인들을 보여주고 있다.


(1970-80년대 조선의 ‘자생적 근대화론’은 이와는 조금 다른 문제점을 갖고 있다. 조선의 ‘근대’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외부’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기에 30년대 태생 한반도의 학자들은 한반도 자체를 ‘독립변수’화 시키기 위해 ‘자생론’을 내세운다. 물론 동아시아, 나아가 당대 국제정세에서 ‘일정이상’ 벗어나있는 독립변수로서의 한반도라는 것이 지금도 물론이지만 그 때도 말이 안 되는 설정임은 분명하다. 결국 이는 하나의 가정으로 ‘독립변수’라고 가정한 다음에 설명할 수 있나 한번 보자라는 식으로 될 수밖에 없다.)
2장 ‘신체정치’에서는 당시 파리/프랑스/유럽에서 도시-근대성이라는 주제에 관련된 지적흐름을 좇으며 이를 통해 앞으로 본격적으로 서술될 2부에서 파리를 ‘근대적 구조’를 가진 구성체로 만든 ‘오스망’ (이명박?)이라는 관료의 사상/정책/행동이 ‘획시기적’인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본: 2. Dreaming The Body Politic
a. Body Politic
Body Politic이라는 것은 옮긴이의 말에 따르자면 “자연적 신체의 은유를 사용하며, 도시 개조 논리에 활용되는 유기체적 순환이라는 개념과도 관련된다. 신체가 조화를 이루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듯이 신체정치란 구성원들의 행복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집단적 기획을 통해 공통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이상은 많은 사회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각자의 유토피아 사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529-530)
1840년대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여성운동가, 개혁가들은 도시를 미래의 좋은 사회가 되어야 할 어떤 것의 기반이 되는 하나의 정치적ㆍ사회적ㆍ물질적 유기체 형태-하나의 신체정치-로 보고 관심을 가졌다. (98)


사실 이 자체가 ‘기계적 세계관’=‘근대성’(대표적으로 합리론의 데카르트-경험론의 베이컨 등)과는 유리가 있다. 그래서 나중에 서술되지만 1848년 이후 오스망 시대는 proto-오스망과는 다르게 이러한 시각을 잃어버린다. 어쨌든 body politic같은 개념이 나오면 우리는 거의 즉시 ‘푸코’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와는 별반 상관없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푸코 이야기가 중간에 한 번 나오기는 하지만 상관없는 문맥이다.

b. 2장의 질문
2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쓰여졌다. (앞서는 전체적 책의 입장에서의 2장의 역할/이 부분은 2장 자체적인 목적)
특히 진보진영의 사람들은 1848년 이전에는 이 도시와 사회를 어떤 것으로 보았고 상상했는가? 그들은 장래에서 어떤 가능성을 예견했는가? 제국이 맞서서 분투해야 하는 이 모든 것들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가?(93)
c. 오스망-이전과 오스망
서론에서 누차 언급한 것처럼 오스망-이전(proto-오스망)과 오스망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최근에 부각되는 장면 내각-박정희의 새마을운동/근대화의 연속성을 떠올리게 한다. 위정자/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단절/혁명성/새로움’을 부각시키려고, 차이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수구/보수마저도. 박정희나 사후 박정희 추종자들이 그의 ‘혁명적 업적’으로서의 근대화를 강조하는 것이나 오스망-보나파라트가 자신들의 혁명적 업적으로서의 근대화를 강조하는 것이 겹친다. 그 이유와 목적 또한.
콩시데랑, 페리몽, 메이나디에, 심지어 랑케탱까지도 설령 생시몽주의와 푸리에의 이상 덕분에 그들의 사상이 활기를 얻었다 할지라도, 유토피아적 이상보다는 실용적인 계획을 세웠다. 오스망이 실제로 행한 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우리는 이런 온갖 사상들이 그 배경에서 들끊고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는 무無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며, 이러한 개척자적 사상(그가 달리의 <르뷔>를 읽은 것은 확실하다)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그가 가진 문제는 이러한 발상들이 여러 측면에서 보나파르트주의를 증오하는 정치적 전제와 유토피아적 꿈에서 생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오스망이 철저한 단절을 전파했다는 신화는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그가 행한 일의 대부분이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이미 배아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서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1848년 이후 근대성이 새롭고도 특별한 단계에 들어섰으며 오스망이 이 새로운 형태의 근대성이 다듬어지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단느 사실의 가치가 훼손되지는 않는다. (129)
d 1848년 이전-이후
1848년의 붕괴 이후 온갖 종류의 결과가 나타났다. 만약 사회공화국의 개념이 탄압받는다면 하나의 신체정치로서 공화국과 도시 사이의 강력한 연합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감정을 가진 존재이자 하나의 신체정치라는 지위가 부정된다면 도시는 도대체 무엇으로 표현될 수 있겠는가? 그 결과는 표상의 위기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1848년의 혁명은 도시를 표현하는 급격히 상이한 방식들을 분리시키는 결정적인 인자였다. 이것은 오스망과 그의 선배들인 베르제르와 랑뷔토와의 차이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그 차이는 도시가 발자크와 플로베르의 작품에서 재현되는 방식을 통해서도 추적될 수 있다.(131)


표상의 위기와 혁명의 관련성.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기원> 등. 68혁명 이후 강조되는 ‘표상/이데올로기’ 결국 진정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물질적 제반 조건/관계를 변화시키며 이에 따라(인과라기보다는 알튀세식으로 ‘최종심급’으로서) 표상의 변모도 ‘함께’ 일어나는 것. 그런데 정말 이 하비라는 학자는 이러한 부분에서는 아우어바흐의 전통을 잇는 것 같은 세밀한 관찰을 보여준다.

옳건 그르건 간에 발자크와 당대의 다른 많은 사람들(그 도시의 적절한 재건설을 추구했던 유토피아 사상가나 도시 이론가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소유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며, 그것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사회 질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개조할 수는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1848년이 지난 뒤, 그 도시를 소유하고 그것을 자기들만의 특별한 이익과 목적에 맞추어 개조하면서 대중에게는 상실감과 허탈감만 남겨준 것은 오스망과 개발업자, 투기꾼, 자금주, 시장의 힘이었다. 적어도 플로베르는 이러한 여건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감정을 가진 존재” 혹은 “신체정치”는 커녕 하나의 전체로서의 도시에 대한 단일한 정의도 없다. 플로베르는 그 도시를 하나의 무대장치로 환원시켰다. 아무리 아름답게 건설되고 고상하게 꾸며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속에서, 또 그 위에서 진행되는 인간 행동의 배경 구실을 할 뿐이다. 도시는 죽은 대상이 되었다(오스망의 계획에서 대체로 그렇듯이). 오스망이 업무를 완수한 뒤인 1869년에 출판된 감정교육은 그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생명 없는 사물에 대한 정교한(그리고 아주 뛰어난) 묘사가 풍부하다. 그 도시는 우리의 감각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파악되지만 “감정을 가진 존재”나 “신체정치”로서의 성격은 완전히 잃어버린다. (...) 1848년에 확실히 잃어버린 것은 도미에의 판화에서 상징되었듯이, 젖먹이는 국가로서의 신체정치라는 발상이었다. (133~134)

결국 ‘아름다웠던’ 시절에의 꿈 속에서는 ‘소외’가 일어나지 않았던 셈. 생산수단과 생산주체의 분리와 노동과정에서의 소외가 도시와 대중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온전히 자본주의-근대-기계적 세계관이 ‘파리’에 정착되는 시점으로서의 1848년으로 볼 수 있을까?
ps. 당시 파리의 ‘조합주의’운동과 식민지 조선의 조합주의 운동


114 생시몽주의자들에게 근본적인 이념은 산업인들의 생산조합이었지만 이것은 두 가지 구별되는 차원으로 운영되었다. 신체정치 내부에서의 차별화된 이익(특히 기능이나 노동의 분업에서 발생하는)은 그러한 이익을 표출하는 생산조합으로서 조직될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자와 예술가는 그들만의 심의회 조직을 갖게된다. 하지만 이러한 생산조합들은 공동의 선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산업인들 간의 계급적 연대와 자원의 공동출자와 생산성과 재능에 따른 지급에 의존하는 "일반 생산조합"에 소속되어야 했다.
115 노동자 자신들이 결성한 독립적 생산조합이라는 발상은 오랜 역사를 갖는다. 그 생각은 혁명 뒤에 억압을 받았다가 1830년의 혁명기에 강력하게 다시 등장했고, 생시몽주의 내의 반대론자인 뷔쉐Buchez에게서 즉각적인 지지를 받았다. 뷔쉐는 보편적 생산조합의 원칙이 제시하는 하향식 관점에 반대하며 노동자들을 임금 체제에서 해방시키고 경쟁의 불공정한 겨로가에 대해 그들을 보호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생산자들의 상향식 생산조합을 주장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공장 소유주와 고용주들은 귀족이나 지주와 마찬가지로 기생적 존재들이었다.
116~117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생산조합을 결성할 수 있다는 발상은 여러 종류의 직업에서 바탕이 되었고 점점 더 큰 인기를 모았다. 그것은 공화주의자와 노동자들이 주로 읽는 간행물에서 다루어지는 논의의 중심 의제가 되었다. 주된 차이는 노동 규율과 기술 혁신을 보장하기 위해 생산조합들 간의 경쟁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쪽과 업계 전체에 대한 궁극적으로 독점적 통제권을 갖고자 하는 쪽 사이에 있었다. 이 운동은 1849년에 작성된 생산조합연합l'union des Associations을 위한 정관(대체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잔 드로앵Jeanne Deroin의 노력으로 작성된)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 정관이 막 발효되려는 찰나에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운동은 탄압되었다. 그 당시 파리에는 최대 120개의 직업에서 일하는 5만 명의 구성원을 거느린, 거의 300개의 사회주의 생산조합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반 이상이 1851년의 쿠데타까지 살아남았다가 그 이후에 탄압되었다.
1920년 1930년 조선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조합주의' 운동이 광범위 전개되었던 흔적과 마주치게 된다. 이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되어진 것은, 당대 공산주의/사회주의 필자들이 이에 별반 관심이 없었다는 것.
자생적 움직임이었을까. 19세기 초중반 파리의 상황과는 어떠한 연관이 있었을까. 거진 와해되었던 조선의 아나키 세력들. 또는 공산주의 세력들의 분파들과의 연관성. 내지는 '자발성'에 대한 질문들.
자료를 더 보고, 생시몽, 푸리에, 푸르동을 공부하면서 생각해볼 문제다. 외국의 역사/이론서를 보면 조선의 상황과 비슷한 점만이 눈에 띄는데, 결국 이 비슷한 점에서 시작해서 차이점 또한 밝혀내야 한다는 주문/혹은 강압
1) 유용한 방법으로 한국에서는 김승옥의 시사만화를 토대로 4.19혁명 이후 남한 사회의 총체적 모습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천정환 외(2005)에 의해 이루어진 바 있다. 시사만화라는 것은 그 ‘시사성’과 전방위성 때문에 당대 사회를 특정 시각을 통해 구성/재구성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2)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자유주의자 및 혁명주의자들이 보수적 군주와 정부에 맞서 일으킨 봉기(1830~32)를 통틀어 일컫는 말. 혁명의 움직임은 1830년 7월 26일, 프랑스에서 샤를 10세가 3가지 법령을 공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즉 하원을 해산하고 언론의 자유를 폐지했으며 선거법을 개정해 유권자의 3/4이 선거권을 상실했다. 파업과 항의가 일어났고 뒤이어 무장충돌이 벌어졌다. 왕정군은 이 반란을 억누를 수 없었고 7월 27~29일의 3일간에 걸친 싸움이 끝나자 샤를은 영국으로 도망쳤다. 급진파들은 공화정을 세우고자 했고 귀족주의자들은 샤를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중산층은 1792년에 프랑스 공화정을 위해 싸운 경력이 있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에게 왕관을 넘겨주자는 자신들의 결정을 관철시켰다. 루이는 '프랑스 국민의 왕'이 되겠다고 승낙했다. 이 '7월혁명'이 끝난 뒤 상원은 세습제 기구에서 선출제 기구로 바뀌었고 특별재판소는 폐지되었으며 국왕과 교회와의 동맹관계도 끝이 났다. 그리고 부르봉 왕가의 백색기 대신에 삼색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용기를 얻은 전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전면적인 해방전쟁을 바랐으나 대부분의 상황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루이 필리프는 전쟁을 바라지 않았으며 기대와는 반대로, 러시아 차르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킨 폴란드인들을 지원하지도 않았다. 결국 폴란드 봉기는 잔인하게 진압되었고 폴란드는 러시아 제국으로 합병되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여러 왕국에서 일어난 봉기도 실패했다. 그러나 벨기에는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1831년 독립국가로 승인받았다.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전쟁을 치렀으며, 마침내 1832년에 유럽 강대국들로부터 독립주권국가로 승인받았다. (empas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