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님과 이매지님의 2007년 계획, 올리신 것을 보니, 새삼 이제 2007년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새해이니까 마음을 다 잡아야지.

올해 고민해 볼 문제, 그리고 실행할 일은.

역시 문학이란 무엇이고, 왜 쓰는 것인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왜 읽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

왜 읽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는 석사논문을 쓰면서 어느정도 나름의 대답을 마련하고 있지만, 이제 왜 쓰는 것인가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는, 실상 써보지 않으면 안 된다.

쓰자. 2007년은 습작의 해. 다시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써보기로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다독과 다작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항상 읽고 쓰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하겠다. 학부 1학년때 처럼. :)

그리고 다시 왜, 어떻게 읽어야 하는 문제는 맑스 원전과 새로운 맑스주의를 꼼꼼히 독해하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한다. 일주일에 4일 정도는 공부, 나머지 3일은 습작.

읽고 쓰고, 또 읽고 쓰면, 어딘가로는 갈 수 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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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7-01-01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새해에도 가정에 행운과 건강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기인 2007-01-01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감사합니다. 전호인님 :)
전호인님도 새해에는 더욱 보람차고 즐거운 일들 만들어 나가길~ ^^

해적오리 2007-01-02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은 참 열심히 공부를 하시는군요..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학문을 하는 분들을 보면 참 존경스럽답니다. 전 대학원 다니면서도 논문도 안쓰고 졸업했거든요.. 논문 학점만큼 더 수업듣고서요.. 가끔 논문을 쓸껄하는 후회도 하구요...

해적오리 2007-01-02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기인 2007-01-02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난쟁이 해적님/ 논문 쓸때는 정말 힘들지만, 쓰고 나서 남는 것^^; 이 있어서 그건 좋은 것 같아요. 해적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용 :)

산사춘 2007-01-02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왜 여직 먹구수료생이라죠? 논문안쓰고 머하고 자빠졌다죠?
기인님을 본받아 저도 열심히!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고민과 노력과 수확이 더 풍부해지시길 기원합니다.

기인 2007-01-03 0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 논문은 생활과 밀접히 관련되면서도 흥미로운 논문이 나올 것 같아요 ^^ 기대합니당~ 여성학이나 사회학 쪽 전공이시죠? ㅎ 제 추측이 맞으려나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2007년 멋있는 논문 쓰세용~
 

사실 우리나라 공익제도 라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공익은 취직을 못하는데, 시급은 300원 준다. 교통비 식비 합하면 한달에 15만원 정도.

잘 곳도 없고, 식비는 점심값만 나오니, 아침-점심 값과 묵을 곳은 어떻게 해결 하란 말인가?

결국 대답은 '부모님 댁'이라는 것. 이 전제는 공익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부모님에게 기생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 '부모님'이라는 존재는 경제적으로 '공익'을 데리고 살 수 있다는 전제이다.

물론, 부양가족이 3인 이상이며 이 가족들의 재산이 일정 이하면 군면제가 된다.

그런데, 이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에게 기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는 무엇일까.

내 판단에 따르면 성인이라면 당연히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 (아니라면 '성인'이라는 용어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그러한 판단하에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대학원 다닐때는 그래도 최소한으로 먹고 살수는 있게 학교 장학금과 학진 연구보조 (말은 그럴듯 하지만 노가다;; )로 나름 안정적(?)인 정규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공익을 하면서 정말 언제 짤릴지 모르는 비정규직도 아닌, 쓰다 버리는! 알바로 연명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공익으로서 먹고 살 기가 너무 힘들다. 한 달 방비, 식생활비를 합하면 최소 80은 나오는데.....

막막하다. 2년을 버틸 생각을 하니... 노무현 정권이 군복무 단축을 '적극' 고려한다고 하는데, 형평성상 공익도 근무단축을 해줄 것 같다. 그러면 일년 반 정도.. 남은 듯..

그 동안 최대한 (돈을) 안 쓰면서, 최대한 (글을) 써야 겠다.

동기가 경향신문에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했다! 정말 축하할만한 일이고, 나도 하면 되겠구나라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줬다. 일단은 많이 얻어먹어야 겠다. 상금이 몇백만원이라던데!!!

그리고 그래도 아직, 문예지에 글 쓰면 20만원 정도는 준다. 오오!!! 우선 등단을 목표로!

(등단해서 먹고 살려는 이 깜찍한 꿈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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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2-30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기인님 문예지에 글도 쓰세요? 어디에 쓰나욤?

엔리꼬 2006-12-30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공익의 비애군요.. 저도 공익의 전신(?)인 단기사병 출신인데, 그땐 퇴근하고 몰래 아르바이트 뛰던 집안 어려운 친구들이 많았어요.. 근데 제가 다니는 직장의 공익들은 차를 끌고 다니더군요.. 기관장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공익도 있었다는 .. 공익의 양극화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싸게 인력을 부리려는 국가의 속셈이 무리가 있군요.. 그리고 등단하시면 이벤트 아시죠?

야클 2006-12-30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림님처럼 단기사병(일명 ,방위 -_-+)출신인데 퇴근후에 과외알바했던 기억이 납니다. 추운데 고생이 많군요. ^^

기인 2006-12-31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ㅎㅎ 아니 이제 등단해서 문예지에 글 써서 먹고 살아보겠다는;; 깜찍한 꿈이었습니다 ^^;
서림님/ 등단하면 물론 이벤트죠! ㅋㅋ 2007부터 열심히 쓰겠습니다. ㅎ
음.. 공익의 양극화. 흑. 어디나 양극화가 문제에요 진짜!
야클님/ 오! 방위도 과외를~ ^^ ㅎㅎ 아으~ 저는 또 자취해서 더 힘든 것 같아요 ㅜㅠ

2006-12-31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1-0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L님/ ㅎ 사실 부모님 여력이 되시면, 학부 때는 돈을 벌기보다는 여러일들 경험해 보는 것이 더 좋은 면도 있는 것 같아요 :) 저도 학부때는 학비는 부모님이 지원해주셨고, 또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어요. 학부 때부터 완전 독립했다면 진짜 힘들었을 거에요 ^^;
 
 전출처 : 바람구두 > 진보는 신영복을 다시 사색하라

진보는 신영복을 다시 사색하라


그가 구체적 대안이나 ‘래디컬함’이 없다고 비판하는 건 옳은가…편가르기에 사로잡힌 진보 진영에 신뢰와 성찰의 필요를 역설하다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과

신영복에 대한 오해가 만만치 않다. 신영복에 대한 일부 개혁·진보 인사들의 부정적·소극적 평가는 ‘진보’에 대한 편협한 정의와 상황·여건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건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하고자 한다. <교수신문> 2006년 9월26일치에 실린 ‘탈이념 시대의 진보 신화’라는 기사에 소개된 익명의 평가 5개를 인용하겠다. 내용이 다소 중복되기도 하는 긴 인용이 되겠지만, 신영복에 대한 오해를 넘어서야 참된 진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의 중요성을 감안해 꼼꼼하게 검토해주시기 바란다.

신뢰가 죽은 사회에서 진보는?

(평가 1) “신영복 교수는 진보가 아니다. 신 교수의 저작 내용이 현재 KTX 여승무원 문제, 한-미 FTA에 대한 ‘진보’ 입장과 크게 입장을 달리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에 대한 구체적 입장이나 답안이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누가 신 교수의 저작을 읽고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을 느끼겠냐.”

(평가 2) “신영복 교수는 ‘진보적 상징’이라기보다는 ‘어른’이다. 그가 학계나 대중에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각박하고 경쟁 위주인 현실에서 한숨 돌리면서 사색할 수 있는 사색의 인도자, 지혜로운 어른 정도다. 그렇기에 그의 저작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

(평가 3) “사실 신영복 교수의 학문적 연구성과라는 것은 사회과학적 맥락에서 보면 전혀 없지만 이는 신 교수가 살았던 시대, 한국 현대사가 만들어낸 우리 ‘지식인의 초상’이기 때문에 그런 시대를 살아낸 ‘어른’에 대한 경외감은 필요하다. 그러나 실제 ‘그러한 것’보다 신비화되는 측면은 있고 이는 경계할 부분이다.”

(평가 4) “신 교수의 이론을 실제 사회 대안으로서 적용하려면, 그래서 낮은 사람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도록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주장이자 사상들이다. 현실은 감옥 속의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나은 상황과 평균적 이해와 속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복잡한 사회인데, 선생님께서 감옥이라는 현실과 동질성이 떨어지는 곳에 오래 머물렀다는 점, 또 학교라는, 사회와는 다른 세계에 오래 있어서 현실적 대안과 구체적 답을 원하는 이들에게 적절한 답을 줄 수는 없다.”

(평가 5) “나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의 말씀이 조금씩 추상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선생님의 ‘관계론’이 소통되는 방식은 좀 ‘존재론’적으로 느껴졌다고, 그래서 선생님의 사상이 ‘고통의 바깥자리’에서 교양의 한 자락으로 변모돼가는 것을 느꼈다고, 세상의 악한들에게도 열려 있는 선생님의 너른 품이 속 좁은 내게는 문득 안타깝기도 했다고, 나는 그렇게 고백하고 싶다.”

위에서도 지적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영복에겐 ‘구체적 입장이나 답안’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 ‘현실적 대안과 구체적 답’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을 생각을 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한국의 지도층 인사나 엘리트 계급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는 늘 한 자릿수와 10%대를 오락가락한다. 진보건 보수건 민중은 ‘출세’한 그들을 믿지 않는 것이다. 공적 신뢰가 무너진 세상이다. 그런데 일부 진보파는 신영복에게 ‘구체적 입장이나 답안’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이 없다고 불평한다.

신뢰가 죽은 사회에서 진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보수에게 타격을 입힐 대안을 강구하는 것인가? 민중이 믿지 않는데도 진보의 비전과 대안을 역설하는 사람이어야 하는가? 신뢰의 문제를 외면하고 벌이는 그런 ‘대안 노름’은 문자 그대로 사상누각(沙上樓閣)은 아닐까? 신영복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신뢰받는 집단이 있습니까. 대학? 대학교수? 전혀 신뢰받지 못합니다. 문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 안 끼는 곳이 없어요. …정치권, 종교계, 법조계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신뢰집단이 되려고 하는 이들이 보이는 모습이 어떤 것이지요. 상대방을 흠집 내서 자신이 신뢰받으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엄청난 내부 소모를 겪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이끈단 말인가


진보파는 그런 ‘내부 소모’를 필요악으로 본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필승’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진보적 지식인의 역할은 그런 ‘필승’을 위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아우성친다. 물론 그 덕분에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탄생했다고 볼 수도 있으니, 그게 무조건 잘못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두 정권이 보인 한계에 대해 아무런 성찰도 없이 또 한 번 무조건 ‘필승’해야 한다고 외치는 모습이다.

‘신뢰’와 ‘성찰’의 미덕을 강조하는 신영복은 가급적 비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신영복의 그런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역할 분담’으로 이해하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다. 한 사람에게 모든 걸 기대하려는 ‘영웅 만들기’ 게임의 유혹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지금 정작 하려는 말은 그건 아니고, 그런 신영복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땐 행간의 의미를 읽는 게 필요하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다.

“196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굉장히 능력 있고 진보적인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제가 그들과 헤어져 감옥에 있는 동안 내내 그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참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출소한 직후에 제일 먼저 물어본 게 그 친구들의 근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가 하나도 없더군요. 다들 출세했더군요. 그 대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예전에 별 능력 없어 보였던 친구들, 사명감이 아니라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참여했던 이들, 그런 사람들이 남아 있더라고요. 제게는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이끌고 나가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큰 잘못입니다.”

내 나름의 직설법으로 해석해보겠다. 신영복은 ‘진보의 사유화·이권화’를 지적한 것이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농민운동가 천규석의 독설을 빌리자면, “지나고 보니, 60~80년대까지의 그 풍성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들도 잘난 놈들에게는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동시에 거두어갈 기회로 활용되었다.” 물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까지 훼손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민주화운동 세력이 2번 또는 3번의 집권을 했지만 민중에겐 큰 실망을 안겨준 게 분명한 이상, (평가 1)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이야말로 이미 현실 적합성을 잃어버린 옛날 이야기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진보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가 되었으며, 그 전제는 ‘성찰’과 ‘신뢰’라는 게 바로 신영복표 진보의 핵심이다. 누가 이 중요한 문제를 신영복만큼 일관되고 끈질기게 역설했는가?

신영복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각박하고 경쟁 위주인 현실에서 한숨 돌리면서 사색할 수 있는 사색의 인도자, 지혜로운 어른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란 (평가 2)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선 안 된다. 그 ‘사색’에 담겨 있는 진보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모색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진보를 ‘이끄는’ 입장에서만 말할 뿐 ‘이끌림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다. 상투적인 민중예찬과 실질적인 민중모독을 범하면서도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의 문제를 외면한 진보는 허구라는 게 신영복의 주장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가장 절실한 아픔과 기쁨은 모두 사람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관대한 사람과 오만한 사람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관대한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입니다. 오만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오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은 자신보다 강한 이들에게는 결코 오만하지 않습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관대한 사람인지 오만한 사람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보다 약한 이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우리 사회는 고집이 센 사회”


지금 신영복은 ‘오만한 진보’는 원초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보수’의 구도 이전에 ‘오만-관대’의 구도가 진보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더 적절하다는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진보’로 출세한 이들에게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눈물이 있는가? 공감과 눈물은 사회과학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무시해야 하는가? 진보의 ‘진영 강화’라는 명분을 앞세워 끼리끼리 뜯어먹는 데만 골몰했던 건 아닌가?

(평가 3)은 신영복의 학문적 연구성과라는 것은 사회과학적 맥락에서 보면 전혀 없다고 했는데, 그 이전에 학문이건 진보적 실천이건 그걸 지배하는 기존 사회과학의 틀을 의심해볼 수는 없을까? 그 사회과학이란 것도 수입품이거나 보세가공품 아닌가. 신영복이 이런 문제 제기를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단지 ‘어른’에 대한 경외감으로만 그를 대해야 하는가? 오히려 ‘신비화’를 걱정할 필요조차 없이 ‘어른’에 대한 경외감을 아예 버리고, 신영복을 대담한 도발자로 보는 게 더 옳지 않을까?

신영복이 겪은 20년20일간의 감옥 생활이 갖는 한계를 지적한 (평가 4)에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발상의 전환일 것이다. 위 평가들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건 ‘전투적 일상에 매몰돼버린 진보’의 모습이다. 근본과 더불어 크게 보는 법을 놓쳐버린 타성의 정치일 수 있다. 신영복의 이론은 실제 사회 대안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대안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지적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토대 없는 대안에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평가 5)는 “세상의 악한들에게도 열려 있는 선생님의 너른 품이 속 좁은 내게는 문득 안타깝기도 했다”고 고백했는데, 이는 “대립과 갈등만 있을 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라는 신영복의 고민을 비켜간 고백은 아닐까? ‘세상의 악한’을 무력하게 만들거나 소외시키는 게 진보일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그건 옳기 때문에 무조건 실천해야 할 그런 일인가?

그런 의문에 대해 신영복은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쌓아온 역사의 결론”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사회는 흔히 말하는 것처럼 ‘젊은 사회’가 아니라 ‘굉장히 나이 많은 사회’라고 했다.

“지난 세월 동안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아온 사회거든요.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를 지고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지요. 이렇게 나이 많은 사회라서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셉니다. 우리 사회가 처한 대립과 갈등의 문제를 풀어가려면 이런 전제, 즉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센 사회다’라는 것을 먼저 수긍하는 태도가 우선 필요하다고 봅니다.”

위와 같은 진단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악한’에 대해 무조건 이기는 게 좋은지 그것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게 신영복의 문제의식이다. 그는 “한쪽에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쪽에 어린 시절 강가에서 코피를 씻던 나처럼 좌절하는 사람도 있으니까”라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노 정권 사람들 간의 이전투구를 보라


이런 말이 현실과 동떨어진, ‘고통의 바깥자리’에서 교양의 한 자락으로 변모돼가는 담론으로 여겨진다면, 정작 현실과 동떨어진 건 바로 그런 생각일 수 있다는 반론을 펴고 싶다. 민중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던 노무현 정권은 한 자릿수 지지를 받는 ‘식물 정권’으로 전락한 가운데 민중은 노 정권에 대한 환멸과 반감을 한나라당과 ‘박정희 신드롬’을 껴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과연 민중이 생각하는 ‘세상의 악한’은 누구인가?

신영복은 ‘승자 독식주의’ 진보를 공격한 것이며, 그 내용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편 가르기’와 ‘적에 대한 증오’ 등과 같은 진영 의식에 사로잡혀 늘 ‘남 탓’만 하면서 외쳐대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는 그의 메시지가 현실적이지 않으면 무엇이 현실적이란 말인가? 문제는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교양’으로만 간주하거나 소비하려 든 우리 모두에게 있는 건 아닐까? 한때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끈끈하게 보였던 노 정권 사람들 간의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보라. 늘 사람을 강조해온 신영복에게 ‘사람 얘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비판이야말로 비현실적인 게 아니었을까? 지금 우리는 신영복을 제대로 ‘소비’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출처 : http://h21.hani.co.kr/section-021128000/2006/12/0211280002006122806410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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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신영복 선생님을 오다가다 엘리베이터에서도 마주치게 되는 학교를 다닙니다.
올해는 당신의 정년퇴임도 있었고, 몇 차례 걸쳐 이런저런 강연도 들어본 바 있고, 취재차 몇 차례 뵌 적도
있습니다. 물론 당신이 절 기억할리 없겠지만 신영복 선생님을 뵐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강준만 교수의 이런 지적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신영복 선생에 대해 제기된 평가들은 사실 신영복 선생이 홀로 감당할 몫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과거 우리에겐 함석헌 선생이 계셨고, 장준하 선생이 계셨고, 계훈제 선생이 계셨고, 리영희 선생이 계셨고, 백기완 선생이 계셨고, 김진균 선생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존경을 많이 잃었으나 김수환 추기경도 계셨었지요.

70~80년대를 거치며 우리 주변의 어른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수명이 다해 스러진 분들도 계시지만, 그보다는 우리 사회가 존경할 만한 어른을 만들어내지 못한 사회라 그러한 측면도 강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신영복 선생이 중요한 고비마다 나서서 한 마디씩 무게실린 말씀을 해주시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 대담의 형태나 에세이 형태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중요한 사안들이 우리 사회는 연일 속출하고 있지만, 당신이 그와 같은 사회적 발언을 한다고는 여겨지지 않으며, 그것이 후학으로서 언제나 아쉬움으로 남곤 했습니다.

학교의 분위기에 어울리게, 또 어울리지 않게 - 지금 가장 진보적인 대학이라 평가받는 성공회대학의 학풍을 만든 가장 중요한 분이 당신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쏟아지는 존경은 당연하지만, 마찬가지로 가장 진보적인 대학이기 때문에 가끔 너무 동양적인 존경의 태도가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 지나치게 당신 앞에서 교수님들이 몸을 낮춘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신영복 선생에 대한 어떤 평가들의 실질적인 내용이 현재 우리 사회의 진보 수준을 보여준다는 강준만 교수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좌우의 날개로 날지 못하는 상황인데, 현재는 그나마 미약하게라도 퍼덕이던 좌측 날개가 완전히 꺽이고, 소실되어가는 상황이란 점에서 발생합니다. 저는 그 추락의 근본원인은 무엇보다 잘못된 정세 파악과 원인 분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이 현재의 위기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지만, 저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현재 드러난 외부적 상황, 즉 다시 말해서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고 봅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원인으로 파악하는 동안엔 절대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극복해낼 대안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지식인들이 혹은 진보세력이 동서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역할을 다한다고 여기는 동안 자본은 거센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들 스스로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의 변화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포디즘에 기반한 미국의 흥성이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들의 성장으로 위협받는 과정에서 자본의 이윤율이 저하되고, 그것을 극복하는 다른 방식으로 출현한 것이 포스트 포디즘 혹은 우리가 오늘날 지식정보산업이라 부르는 것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과거 진보의 전유물이라 여겨지던 혁신은 더이상 진보나 좌파의 미덕이 아니라 자본의 미덕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자본은 도처에 혁신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경영혁신, 품질혁신에서 자기혁신에 이르는 변화의 과정에서 진보는, 특히 대한민국의 진보는 과거에 안주하고,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스스로를 구출해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신영복 선생의 안온한 미소가 대안의 모든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만, 당신이 진보의 한 얼굴과 중요한 이미지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혁신과 창조라는 중요한 미덕을 빼앗긴 진보의 마지막 덕목은 포용과 연대이니까 말입니다. 결국 지금의 진보가 다시 출발해야 할 땅은 자본에게 빼앗긴 창조나 혁신이 아니라 포용과 연대입니다. 포용과 연대의 땅에서 가장 큰 창조와 혁신이 일어날 때, 비로소 이 땅의 진보는 거듭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 가운데 한 몫 단단히 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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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왜 러시아 혁명인가?

지난달인가 MBC에서 창사특집 다큐멘터러로 '러시아 혁명' 편을 방송한다는 얘기를 후배로부터 들었지만 결국 한번도 보지 못했다. 강의자료로도 요긴할 듯싶어서 녹화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냥 흐지부지됐다. 오마이뉴스에 이 다큐를 직접 제작한 한홍석 PD와의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었길래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특집다큐는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려보든가 해야겠다. 다큐에서 공개된 아래 사진은 박헌영과 그의 딸 박비비안나라고.  

오마이뉴스(06. 12. 28) "왜 러시아 혁명이냐고? 분단국이니까"

2006년이 저무는 시간, 지나간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올해도 TV의 위력은 대한민국에서 대단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고도 친숙한 매체로 TV는 자리했다. 온갖 종류의 드라마뿐 아니라 월드컵 축구 등을 전달한 TV는 여전히 사랑받은 매체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TV에서 어땠을까? 보통 야심한 밤에 편성되는 시간표가 웅변적으로 말해주듯,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소위 시사 교양물들은 우리나라 TV의 비인기 종목이다.

하지만 경제 성장과 함께 우리 문화적 역량의 지표로 다큐멘터리가 자리매김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한 예가 지난 11월 21일부터 12월 17일까지 근 한 달간 MBC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5부작 <세계를 뒤흔든 순간- 러시아 혁명(한홍석 연출)>이다. 이 다큐멘터리의 중심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1917년 혁명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 그리고 그 혁명이 다다른 곳까지를 객관적이고 다채롭게 담아냈다. 깊이와 재미는 물론이고, 충실한 자료화면, 고증을 통한 역사 재연, 4개국을 넘나들며 직접 따온 다양한 역사학자들의 해설 등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두루 갖춘 빼어난 수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러시아 혁명>의 진가는 우리의 시각으로 '러시아 혁명'을 조명했다는 데 있다. 19세기 말 몰락해가던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국가가 국민에게 가하는 끔찍한 테러가 만연하던 스탈린 시대까지, 그 먼 북구의 땅에도 '우리'는 있었다. 우리 선조들은 독립의 꿈을 꾸며 192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대회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또 소련의 각 지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우리 동포들이 스탈린 숙청의 희생물로 스러졌다. 박헌영의 딸은 아직도 그곳에 살며 아버지를 추억한다.

그런데 소련이 사라진 지금, 신자유시대를 사는 21세기의 우리에게 '러시아 혁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대미문의 노동자 혁명이었던 '러시아 혁명'의 이상은 본산지에서조차 실패했는데 말이다. 재미있고 내용도 알찬 이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러시아 혁명'의 교훈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신자유경제 체제와 분단 체제라는 두 짐을 걸머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1년간의 기획, 세 대륙을 돌며 100일에 걸쳐 진행한 촬영, 그리고 지난 두 달 반을 '노가다' 모드로 편집실에 틀어박혀 다큐멘터리를 완성한 주인공, 한홍석 PD를 지난 12월 19일 오후 서울 남산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러시아 혁명>이 종영되고 이틀 후다. 다음은 한홍석 PD와 나눈 일문일답.

- 대장정을 끝낸 소회는?
"아직도 끝났다는 실감이 안 난다. 너무 큰 주제를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 맡았다는 생각이 든다. 반응도 아직 잘 모르겠다. 편집실에서만 두 달 반을 지내서 시청자들 반응은커녕 동료들의 반응도 아직 모른다."

- 이 다큐멘터리를 자평한다면.
"정치사적 흐름을 어느 정도 정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시청자들에 대한 서비스라 생각한다. 이걸 보고 이 주제에 흥미를 느껴 전문적인 관심까지 두게 된다면 좋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구성상 빠진 부분들이 안타깝다. 정말 많이 촬영했는데…. 러시아 문화·사회 문제 쪽으로도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시간 제약 때문에, 그리고 현실의 제약 때문에 완성본에 결국 포함하지 못한 것들이 안타깝다."

- 이 작품을 기획하며 세웠던 목표나 의도는 무엇인가?
"이전에 내가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는 한국 현대사를 다뤘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러시아 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이제까지 미국 이야기만 너무 많이 했다. 우리의 분단 체제를 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40~50대 시청자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그들은 젊은 시절 러시아 혁명에 대해 많이 듣고 읽었다.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책으로만 읽었던 트로츠키가 이렇게 생겼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이런 사건이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40~50대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생각한다(웃음). 실제로 <러시아 혁명>을 40~50대들이 많이 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재미'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역사는 재미있는데, 이제 '재미'가 뭔지도 헷갈리지 않은가. 역사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발전시키고자 '장르 실험'을 했다. 러시아 현지 배우들을 출연시켜 역사를 재연했다. 역사를 좀 더 생생하고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것이 이제까지 전 세계적으로 아무도 해보지 않은 실험적 형식은 아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현지 배우들을 고용해 다큐멘터리를 찍은 것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역사상 처음이다."

- <러시아 혁명>을 만들기 전과 만든 후, 러시아 혁명에 대해 다르게 이해하게 된 지점이 있는지.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다. 다양한 가치는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아직도 효용성이 있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를 보완할 수 있는 가치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스탈린 체제하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은 몰락했지만 사회주의 이상이나 평등에 대한 이상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러시아 혁명이 실패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지고지선의 가치는 아니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생각이다. 지금 러시아에서 아직도 구소련 체제를 그리워하고 그 때의 좋은 점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단순히 그들이 반동적이어서가 아니다."

- 매편 폭넓은 학자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러시아·영국·미국 학자들 수십 명이 등장했는데.
"섭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연락을 취하면 그쪽에서 놀라고는 했다. '왜 한국에서 러시아 혁명을?'이라며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면 나는 항상 설명했다. '우리는 아직 분단국이다.' 그러면 그쪽에서는 금방 이해하고 인터뷰에 응했다.

방송국 게시판에 보면 '왜 러시아 혁명을 다루면서 러시아 학자들보다 영미 학자들이 더 많으냐'고 불평하는 의견들이 있었다. 이유는 이렇다. 러시아는 소련 체제를 거치며 자국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관변학풍이 심했다. 그에 비하면 영미 학계에서는 지난 몇십 년간 광범위하게 축적된 객관적, 역사적 학문 전통이 있다. 대가도 그쪽에 분포되어 있고. 그들은 우리와 인터뷰를 아주 즐겼다. 소련이 붕괴한 후 영미권에서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줄어 요즘 침체해 있었던 터라 우리와 인터뷰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던 것 같다."

- 그 학자들을 전부 다 직접 만났나?
"그렇다. 미국 학자들의 경우는 미국 전역에 퍼져있는 학자들을 만나느라 미국을 횡단했다.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가 보스턴으로 나왔다. 미국 학자들은 쉬웠다. 연락만 되면 스케줄이 허락하는 한 쉽게 인터뷰에 응했다. 도리어 러시아 학자들 중에 인터뷰를 거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미국 학자들은 인터뷰를 즐기면서 진행했다. 그들은 말을 시키면 자기가 즐거워서 마구 말을 하는데 보고 있으면 흥이 날 정도였다."



- 박헌영의 딸이 구소련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서야 알았다. 어떻게 찾아냈나?
"사실 박헌영 딸에 대한 소식은 몇 년 전 국내 일간지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래서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외에도 스탈린 딸을 만나 인터뷰를 하려고 무척 노력했다. 연락처까지 알아내 다섯 번인가 부탁을 했지만, 아무리 설득을 해도 안 됐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라 우리와 인터뷰하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 않았다."

- 총5부 중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평하는 부분은.
"개인적으로 4부가 가장 인상적이다. 관심도 가장 많았고. 4부는 러시아 혁명 후 진행된 소련의 산업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국가와 노동자 간의 갈등은 그치지 않았다. 그 부분이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다."

- 차기 작품도 기대된다. 어떤 걸 구상하는지.
"구소련과 한국 전쟁을 묶어서 다뤄보고 싶다. 가제는 '스탈린과 한국전쟁: 1945-1953'. 러시아에서 한국 전쟁 관련 비밀문서들이 요즘 많이 공개되고 있다. 이걸 바탕으로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시청자 요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나는 요구한다!). MBC가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그것이 사회 공익에 얼마나 기여 하는가도 보지만 시청률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요즘은 시청자가 원하지 않으면 만들지 않는 시대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드라마 왕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드라마가 강세고 세계사 시리즈 같은 교양물은 점점 위축되고 약화하여가는 상황이다. 시청자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윤새라-조경국 기자)

06. 12. 29.





 

 

P.S. 인터뷰의 마지막 대목이 흥미를 끈다. '스탈린과 한국전쟁'에 관한 다큐를 만들고 싶다는 것. 시청자의 요구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요구해줄 수 있다. 러시아쪽 자료들이 다수 공개되고 있는 걸로 알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의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된다(재작년 러시아 체류시에는 러시아 TV에서 제작한 '한국전쟁'에 관한 다큐를 잠시 볼 수 있었다. 김일성 정권의 성립과정에 러시아가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지를 생존하고 있는 고위 관계자들 인터뷰와 함께 자세히 보여주었었다).

한편, 러시아 혁명에 관한 자료/도서들은 얼마간 나와 있다. 트로츠키의 <러시아혁명사>(풀무질, 2003-4)를 아직 갖고 있지 않은데, 그게 좀 아쉽군. 거기에다 따져보니까 러시아쪽 시각의 혁명사 소개는 빈곤한 듯하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러시아혁명과 스탈린시대에 대한 관련서들은 러시아나 영미권에서 차고 넘친다. 가장 정평있는 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어권 저작으론 <공산주의>(을유문화사, 2006)의 저자인 저명한 러시아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 교수의 <러시아 혁명사> 같은 책들이 기본서로 번역/소개되면 좋겠다('간략한 역사'라고는 하지만 430쪽이 넘는 분량이다). 왜냐고? 우린 아직 분단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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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예술철학 트리오

철학자 박이문 선생의 <예술철학>(문학과지성사, 2006) 개정판이 출간됐다. 지난 1983년 초판을 찍은 이후에 20쇄를 거듭 찍었다고 하는 이 책은 예술철학에 관한 국내서로서는 단연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초판이 나온 지 벌써 23년이 넘었고, 그동안 예술계에도 다른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크고 다양한 변화가 있었지만, 내용에 있어서 책의 후기에 실은 최근의 논문 '양상론적 예술의 정의'를 원래의 내용을 새롭게 요약하는 의미에서 추가한 것 이외에는 개정판의 내용이 초판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적어도 예술의 개념의 철학적 정의에 관한 한 나의 생각에는 핵심적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동일한 건 아니어서 한자들은 모두 한글로 바뀌었고 도판들도 (비록 흑백이긴 하지만) 더 보충되었다. 게다가 별첨된 논문(27쪽)까지 보태져서 분량은 100쪽 가량 늘어났다. 10년도 더 전에 이미 두번쯤 읽은 책이지만 이번에 덧붙여진 논문에 대한 흥미도 있고 해서 나는 책을 다시 구입했다(이전에 갖고 있던 책은 박스 보관도서이다). '양상론적 예술의 정의'라고 제목이 붙어 있긴 하나 그 부제는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의 개념'이며, <예술의 종말 이후>는 지난 봄에 열심히 읽은 바 있는 아서 단토의 바로 그 책이다. 그리고 그 '단토'란 이름은 박이문 예술철학의 '기원'과도 연관되는 이름이다. 저자는 초판 서문에 이렇게 적었었다.

"예술이 갖는 신비한 힘은 무엇일까? 예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나는 지난 약 10여 년 간 예술철학에 대해서 생각하고 가르쳐왔다. 이런 물음에 대해 하나의 일관성 있고 통일된 대답을 찾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1977년 여름 '인문학국가연구비'를 받고, 단토의 주도하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열렸던 12명의 예술철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들의 두달 간의 세미나에 참석하고 난 후였다. 여기서 나는 처음으로 단토나 디키의 새로운 이론에 접하게 되었고 그후 대충 그런 테두리에서 예술에 대한 총괄적인 대답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왔다."(개정판, 10쪽)

그러니까 여기서 그려지는 것은 '박이문-단토-디키'의 삼각형이다('트리오'라고 부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박이문 예술철학은 미국의 두 현대 예술철학자의 영향/압력하에 그들과의 이론적 긴장/대결을 자양분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해서 나의 생각으로 <예술철학>을 읽는 중요한 독법은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와 조지 디키의 <예술사회> 등과 같이 읽는 것이다(예술제도론자인 디키 또한 그 책에서 단토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애쓴 바 있다). 이론은 언제나 그것이 상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감지하고 있을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미학 연구자' 진중권은 뒷표지에 새겨진 글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예술철학>은 단토의 생각에서 출발하되 '양상 논리'의 관점에서 예술을 그와는 다르게 정의하려는 시도다. 텍스트는 자기의 삶을 산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예술의 정의로 제시하는 '가능세계'란 말 속에서 '가능성'을 '잠재성'으로 살짝 옮겨놓으면, 20년 전에 쓰인 책이 디지털 문화 속에서 새로이 풀어놓는 의미에 문득 놀라게 될 것이다." 

예술철학에 초면인 독자들도 이 분야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평이하고 명쾌한 언어로 씌어진 이 입문서의 일독을 권한다.

06. 12. 28.

P.S. 개정판의 서문에는 출간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많은 이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는데, 멋쩍게도 '아서 단토Arthru Danto'라고 병기된 영어 이름에서 오타가 났다('Arthur Danto'이다). 이런 걸 '삑사리'라고 부르던가. 학술지 편집에 오래 관여하다 보니 책을 펼치면 오문/오타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건 또 '삐딱이'라고 불러야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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