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메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1
조반니 보카치오 지음, 박상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본 순간 400쪽이 훨씬 넘는 두꺼운 책이 3권이라는 점,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로 보이는 한 인물의 초상화가 눈에 띄었다. 3권의 표지는 전부 같고 제목 주변의 표시만 1권은 살구색, 2권은 푸른색, 3권은 초록색으로 다르다. 그림에 관심이 생겨서 찾아봤더니 피렌체 화파에 속했던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안드레아 디 바르톨로 디 바르질라, 1418~1457경)의 작품이라고 한다. 레그나이아에 있는 빌라 카르두치로부터 주문받은 ‘남녀 명사들 연작’의 일부로, 총 아홉 점의 초상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세 명의 피렌체 군 지휘관(파리나타 델리 우베르티, 피포 스파노, 니콜로 아치아이우올리), 세 명의 여성 명사들(쿠마이의 시빌레, 에스더 여왕, 토미리스 여왕), 세 명의 토스카나 시인(단테 알리기에리,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조반니 보카치오)이라고 한다. ‘데카메론’의 저자인 이탈리아의 시인 겸 학자였던 보카치오는 이 프레스코 연작 중 맨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죽 표지로 된 책을 들고 옆에 있는 페트라르카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으로 재현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페트라르카와 꾸준히 교류했고 평생 단테를 존경했다고 이 책의 표지 바로 뒤의 책날개에 설명되어 있는 그의 삶을 충실히 반영한 작품인 것 같다. 이 작품의 엄숙한 인물들은 관람자들에게 르네상스 인간이 원했던 자질(육체적 힘, 도덕적 미덕, 날카로운 지성)을 보여준다고 하며, 벽기둥으로 구별된 대리석 니치 안에 들어가 있는 각 인물들은 마치 살아있는 인물상처럼 모두 서로를 쳐다보고 손짓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천장과 벽의 정교한 건축 장식이 돋보인다고 하는데 이런 작품을 실제로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이 작품은 1449년에 의뢰되었다고 하는데 이 무렵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질 정도로 보카치오의 위상이 대단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이미 데카메론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도 청소년 필독 도서가 이렇게나 선정적일 수 있는지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었고, 비슷한 두께로 두 권의 책으로 되어 있어서 당연히 민음사 판도 두 권일 줄 알았는데 한 권이 더 있다고 하니 고등학교 때 읽었던 다른 출판사의 데카메론에서 빠졌던 부분이 어떤 부분일까 하고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당연히 가공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대부분 실제 보카치오가 살았던 시대에 있었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서문 시작 전 보카치오가 직접 그린, 일곱 명의 여자와 세 명의 남자가 둥글게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림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떤 우연한 일로 이러한 심상을 먼저 떠올리고, 그에 맞추어서 페스트를 피해 지방으로 피신한 젊은이들의 열흘간의 이야기들을 생각해 낸 것일까? 그런데 그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매번의 날의 시작마다 데 그레고리 출판사의 데카메론 삽화(1492) 가 나왔고, 책 곳곳에 무려 컬러로(!) 데카메론과 관련이 있는 그림이 나왔다. 이 그림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는데, 예를 들어서 집과 집 사이에 널빤지를 걸쳐 놓은 변소에 대한 설명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는데, 그림을 보니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첫 번째 날
데카메론의 첫 번째 날이 시작된다.
먼저 작가가 나서서 뒤에 나오는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지 설명한 다음, 팜피네아가 인도하는 대로 각자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번째 날에서 작가의 말이 길게 이어지는데, 당시 유행했던 페스트로 인해 도시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유럽 전체 인구의 1/3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예전에 세계사 시간에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지금 시점에서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나니 소름이 끼친다. 아침에 같이 식사를 했던 내 가족과 동료와 친구가 이미 그날 저녁에는 죽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무서운 상황. 도덕도 윤리도 땅에 떨어지고 하루하루를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즐기는 사람이 넘쳐나는 무법천지의 상황. 자세히는 모르지만 제 1, 2차 세계 대전 후 유럽의 지성인들이 문명의 몰락을 보고 절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마 이 때의 유럽 상황도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첫 번째 날 첫 번째 이야기
체파렐로 씨는 거짓으로 고해성사를 하여 고명한 수도사를 속이고 죽는다. 그는 살아서는 악질이었지만 죽어서는 성인으로 추앙되고 성 차펠레토라고 불린다.

첫 번째 날 두 번째 이야기
유대인 아브라함은 잔노토 디 치비니가 부추기는 바람에 로마 교황청에 간다. 거기서 성직자들의 뷔페를 목격하고 파리로 돌아와 오히려 기독교인이 된다.

첫 번째 날 세 번째 이야기
유대인 멜키세덱은 세 개의 반지에 관한 이야기로 살라디노가 꾸민 위험에서 빠져나온다.

첫 번째 날 네 번째 이야기
어느 수도사가 죄를 지어 엄벌을 받을 상황에 놓였는데, 같은 죄를 저지른 수도원장을 교묘한 방법으로 궁지에 몰아넣어 처벌을 면한다.

첫 번째 날 다섯 번째 이야기
몬페라토 후작 부인은 암탉 요리에 우아한 격언을 곁들여 프랑스 왕의 부질없는 욕정을 따끔하게 꼬집는다.

첫 번째 날 여섯 번째 이야기
어느 꾀 많은 사람이 교묘한 말로 성직자들의 비뚤어진 위선을 폭로한다.

첫 번째 날 일곱 번째 이야기
베르가미노는 갑자기 탐욕스러워진 카네 델라 스칼라를 프리맛소와 클뤼니 수도원장의 이야기에 비유해 나무란다.

첫 번째 날 여덟 번째 이야기
굴리엘보 보르시에레는 탐욕스러운 에르미노 데 그리말디 씨를 재치 있는 말로 꾸짖는다.

첫 번째 날 아홉 번째 이야기
키프로스 왕이 가스코뉴의 어느 부인에게 모욕을 당하고 나서 소심함을 벗어 버리고 용감한 왕이 된다.

첫 번째 날 열 번째 이야기
볼로냐의 알베르토 선생은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에게 망신을 주려 하자 이를 정중히 되받아친다.

두 번째 날
데카메론의 두 번째 날이 시작된다.
이 날은 필로메나가 관장하는 가운데, 갖가지 일로 인생의 쓴맛을 많이 보았지만 마지막에 기대 이상의 달콤한 결실을 얻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두 번째 날 첫 번째 이야기
마르텔리노는 불구자 행세를 하다가 성 하인리히의 시신 앞에서 몸이 낫는 척한다. 사기 행각이 드러나 얻어맞고 감옥에 갇히지만 교수형을 받기 직전에 위험에서 벗어난다.

두 번째 날 두 번째 이야기
리날도 다스티는 강도를 만난 후 카스텔 굴리엘모에 도착해 어느 과부의 집에 묵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빼앗긴 물건을 모두 되찾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다.

두 번째 날 세 번째 이야기
방탕한 세 형제가 재산을 탕진하고 가난뱅이가 된다. 그들의 조카가 그에 좌절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어느 수도원장과 동행하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수도원장은 영국 왕의 딸이었다. 공주는 그 조카를 남편으로 맞아들이고, 남편의 아저씨들이 재산을 되찾아 다시 지체 높은 신분으로 돌아가도록 돕는다.

두 번째 날 네 번째 이야기
파산한 란돌포 루폴로는 해적이 되었다가 제노바인들에게 붙잡힌다. 그런데 그들이 탄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그는 값진 보석이 든 궤짝을 타고 도망친다. 그리고 코르푸에서 어느 아낙네의 도움을 받아 부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간다.

두 번째 날 다섯 번째 이야기
페루자의 안드레우초는 말을 사러 나폴리에 갔다가 하룻밤 사이에 세 차례나 큰 봉변을 당하지만, 세 번 모두 잘 피하고 루비 반지를 손에 넣어 집으로 돌아온다.

두 번째 날 여섯 번째 이야기
두 아들을 잃어버린 베리톨라 부인은 어느 섬에서 사슴 두 마리를 키우며 살다가 루니지아나로 간다. 그곳에서 아들 중 하나가 베리톨라 부인이 모시는 주인의 하인으로 들어왔다가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져 감옥에 갖힌다. 시칠리아가 샤를 왕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켰을 때, 감옥에 갇혀 있던 이 하인이 베리톨라 부인의 아들임이 밝혀져 주인의 딸과 결혼한다. 그리도 다른 아들도 만나게 되어 모두 높은 지위로 돌아온다.

두 번째 날 일곱 번째 이야기
바빌론의 술탄이 자기 딸을 알가르베의 왕과 결혼시키려 떠나보낸다. 딸은 온갖 재난을 만나 사 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러 장소에서 아홉 남자의 손을 거친다. 그리고 마침내 숫처녀로 아버지에게 돌아와 원래대로 알가르베 왕의 부인이 될 준비를 한다.

두 번째 날 여덟 번째 이야기
억울하게 누명을 쓴 안궤르사의 백작이 영국으로 망명하여 두 자녀를 각기 다른 곳에 맡긴다. 나중에 백작은 신분을 감추고 돌아와서 자녀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다음 프랑스 왕의 군대에 마부로 들어간다. 그리고 누명을 벗고 원래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두 번째 날 아홉 번째 이야기
제노바의 베르바노는 암브로주올로에게 속아 재산을 날리고 죄없는 아내를 죽이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아내는 도망쳐서 남자로 변장하고는 술탄을 섬기게 된다. 그리고 남편을 속인 자를 찾아내고, 남편을 알렉산드리아로 부른다. 거기서 암브로주올로는 벌을 받고 아내는 변장을 거둔다. 그리고 부부는 함께 제노바로 돌아가 부귀영화를 누린다.

두 번째 날 열 번째 이야기
모나코의 파가니노는 리차르도 디 킨치카 씨의 아내를 빼앗는다. 아내가 있는 곳을 알아낸 리차르도 씨는 파가니노와 친해진 다음 그에게 아내를 돌려 달라고 부탁한다. 파가니노는 그녀의 동의를 얻으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한다. 그런데 아내는 리차르도 씨에게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 파가니노의 아내가 된다.

세 번째 날
데카메론의 두 번째 날이 끝나고 세 번째 날이 시작된다.
세 번째 날은 네이필레의 주도 아래, 무척 열망하던 것을 교묘한 수법으로 손에 넣거나,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세 번째 날 첫 번째 이야기
람포레키오의 마세토는 벙어리 행세를 하며 어느 수녀원의 정원사가 된다. 수녀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그와 자려 한다.

세 번째 날 두 번째 이야기
어느 마부가 영주 아질룰프의 아내와 동침한다. 아질룰프는 이를 눈치채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마부의 머리카락을 잘라 놓는다. 머리카락이 잘린 마부는 다른 마부들의 머리카락도 잘라 불행한 운명을 피한다.

세 번째 날 세 번째 이야기
젊은 남자를 사랑하게 된 어느 부인이 고해성사를 하는 척하면서, 또 대단히 순진한 척하면서 엄숙한 수사를 현혹하여 그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자신의 욕망을 완벽하게 실현한다.

세 번째 날 네 번째 이야기
돈 펠리체가 프라테 푸초에게 고행을 통해 축복을 받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푸초가 고행을 하는 동안 돈 펠리체는 푸초의 부인과 좋은 시간을 보낸다.

세 번째 날 다섯 번째 이야기
치마는 프란체스코 베르젤레시 씨에게 말을 한 필 선물하고, 그 대가로 그의 아내와 대화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그런데 여자가 침묵을 지키는 바람에 자신이 대신 대답을 한다. 이후 치마의 대답대로 일이 진행된다.

세 번째 날 여섯 번째 이야기
리차르도 미누톨로는 필리펠로 시기놀포의 아내를 사랑한다. 리차르도는 그녀가 질투심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자기 아내가 다음 날 필리펠로와 목욕탕에서 만나기로 했다면서 그녀를 그리로 보낸다. 결국 자기 남편과 함께 있는 줄 알았던 여자는 리차르도와 함께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세 번째 날 일곱 번째 이야기
연인과 사이가 틀어진 테달도는 피렌체를 떠난다. 얼마 후에 순례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연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 후 살인 혐의를 받고 있던 그녀의 남편을 죽음에서 구한다. 그리고 남편과 자기 형제들을 중재하고 이후로 조심스럽게 연인과 사랑을 즐긴다.

세 번째 날 여덟 번째 이야기
페론도는 어떤 가루약을 먹고 나서 죽은 사람으로 땅속에 묻힌다. 그 사이에 수도원장은 페론도의 아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그를 무덤에서 꺼내 지하실에 갖다 둔다. 그러고는 페론도가 연옥에 있다고 믿게 만든다. 다시 살아난 페론도는 아내가 낳은 수도원장의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키운다.

세 번째 날 아홉 번째 이야기
네르보나 출신의 질레타는 프랑스 왕의 누공을 고쳐 주고, 로실리오네 출신의 벨트라모를 남편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벨트라모는 자기 의사와 달리 결혼을 강요당한 데 화가 나서 피렌체로 떠나 버린다. 거기서 어떤 처녀를 연모하는데, 질레타는 그 처녀로 꾸미고서 벨트라모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두 아이를 가진다. 그러는 동안 벨트라모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아내로 받아들인다.

세 번째 날 열 번째 이야기
은자가 된 알리베크는 수도사 루스티코로부터 악마를 지옥에 몰아넣는 법을 배운다. 결국 알리베크는 그곳을 떠나 네르발레의 부인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극장 앞에 서 있는 입센의 동상을 봤던 기억과, 중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일부만 봤던 인형의 집에 대한 기억이 합쳐져 이 책을 읽게 되었다. 100 여년 전의 희곡에서는 여성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것이 맞았겠지만 현대에서는 인간 전체로 확대하여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사회적 가치, 다른 사람들의 시선, 내가 속한 문화로부터 독립하여 참 '나'에 도달한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의 성만의 문제는 아니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관객모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6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보지도 않은 이 연극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는 것은 2005년 양동근이 공연하는 연극을 보러 간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하던 한 친구 때문이었다. 관객 모독이라는 독특한 제목과 양동근 때문에 이 연극을 기억하게 되었다. 사람의 기억이란 얼마나 오묘한지. 현재 그 친구와는 아주 오래 전에 연락이 완전히 끊긴 상태인데도 이 연극을 보러 간다고 말했던 그 친구의 얼굴, 그리고 보고 와서 정말 좋았다고 이야기하던 그 친구의 얼굴은 기억이 난다. 당시 양동근은 학교-광끼-뉴논스톱-네 멋대로 해라 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핫한 청춘 스타였다. 그 시기에 찍었던 영화를 내가 영화관에 가서 본 적은 없으나 늘 주연이었던 것은 기억한다. 그랬던 그가 한동안 뜸해지는 것 같았는데(철저히 나의 기준에서, 분명히 열심히 활동은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다시 여러 방송에서 보이는 것 같아 반갑다. 한 때 나에게 참 매력적이었던, 세상과 반목하거나 심드렁하던 그 반항적인 청춘의 느낌은 더 이상 아니지만, 한 집안의 가장으로 현실에 발을 붙인 성실한 모습을 보면 요즘 마음이 따뜻하고 든든해진다. 어쩌면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변한 것은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솔직히 나는 10여 년 전 연극을 보러 와서 자랑스레 이야기하던 그 친구를 보며 ‘쟤가 뭘 알고 그러는 걸까?’ 하는 다소 삐딱한 시선으로 보았던 기억이 선명한데, 아마도 당시 내 처지에서 편하게 공연을 보러 다닐 수 없었던 데다가, 또래에게 갖게 되는 묘한 경쟁심이나 시샘이 있었던 것 같다. 요즘에야 드는 생각은, 기존의 연극에 도전하는 듯한 이 연극이야말로 당시 어렸던 그 친구나, 역시 한창 젊었던 배우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미리 이해하고 가지 않아도 가슴으로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연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새삼 그 친구가 부러워졌다. 시샘이 아닌 온전한 부러움. 10여 년 전 이 연극을 봤더라면 그 시간이 얼마나 풍요로워졌을 것이며, 어떤 방향으로든 나에게 영향을 조금은 주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그러고 보면 질투나 시기심만 걷어 낸다면, 상대를 순수하게 부러워할 수 있다면 얼마나 내 삶이 더 가벼워지고 더 촉촉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에게 지기 싫다는 마음이 안으로 차곡차곡 쌓여서 괜히 힘들었던 시기에 대한 생각도 들었고.

이 연극은 말 그대로 관객을 모독한다. 여러분이라고 불리던 관객은 나중에 배우의 욕을 들어야 하고, 원작에는 없지만 물을 끼얹기도 한다. 초연 당시에는 관객들이 분노해서 무대로 의자를 집어던졌다는데, 요즘은 다 찾아보고 와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1966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이뤄진 공연 영상을 보는데 독일어라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어 아쉽지만 관객들이 감탄하고 웃고 휘파람을 부는 것이 보인다. 아마 내가 이제 와서 이 연극을 보러 간다고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지는 않을 테고 즐기면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의 원제는 Publikumsbeschimpfung (독일어) 이다. 영어로는 Offending the Audience 라는데 한 단어로 똑 떨어지는 맛이 없다. 아마 여러 나라로 번역을 거치면서 언어유희는 죄다 덜어내거나 의역을 했으리라. 내가 인생 영화로 꼽는 <베를린 천사의 시>의 각본을 쓴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그러고 보니 이 영화의 원제인 <베를린의 하늘>을 잘 의역한 제목이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졌다. 1960년대 <관객 모독>의 냉소와 1980년대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의 연민이 어떻게 한 사람에게서 공존할 수 있을까, 이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의 여주인공인 블랑쉬 두보아는 막상 옆에 있으면 지치게 되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이는 인물이다. 연극은 물론이고 말론 브란도와 비비안 리가 출연한 영화가 현재까지 회자될 정도로 인기였으며 2013년 우디 앨런 감독이 만든 작품 <블루 재스민>처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도 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에야 극락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일까. 주인공의 비극적인 삶, 남부 상류사회가 쇠퇴하고 급격한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미국 사회, 블랑쉬와 스탠리가 각각 상징하는 가치의 충돌 등등 이 영화를 여러모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유명하지만 한번도 읽어보지 않는 희곡을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연극성 성격장애의 예시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관심이 갔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걸작을 단순화해서 이해하는 것이 다소 김빠질 수는 있겠지만 사람마다 고전이 와 닿는 부분은 다를 테니까. 읽으면서 내내 이렇게 극적인 인물을 창조해 내었다는 것은 작가로서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되었다.

-----------------------------------------------------------------------------

자신이 관심의 중심에 있지 않는 상황을 불편해함
다른 사람과의 관계 행동이 자주 외모나 행동에서 부적절하게 성적, 유혹적 내지 자극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짐
감정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피상적으로 표현됨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외모를 사용함
지나치게 인상적이고 세밀함이 결여된 형태의 언어 사용
자기극화, 연극성 그리고 과장된 감정의 표현을 보임
피암시적임. 즉,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의해 쉽게 영향을 받음
실제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로 생각함

연극성 성격장애의 주요한 특징은 만연하고 과도한 감정성과 주의를 끄는 행동이다. 이 양상은 청년기에 시작되고 여러 상황에서 나타난다.
이 환자들은 자신이 관심의 중심에 있지 못하는 것을 불편해하거나 자신이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느낀다(진단기준 1 자신이 관심의 중심에 있지 않는 상황을 불편해함). 적극적이고 극적으로 자신에게 관심이 모이도록 하고 처음에는 열정적이고 개방적이고 혹은 교태를 부리는 행동으로 새로 만난 사람을 매혹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의 매력은 사라진다. 그들은 ‘모임의 활력소’ 역할을 스스로 떠맡는다. 만약 관심의 중심이 되지 못하면 그들은 어떤 극적인 행동(예,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장면을 연출한다)을 해서 관심이 자신에게 집중되게 한다. 그들의 욕구는 임상의와의 관계에서는 매우 명확하게 나타난다(예, 아첨을 하거나 선물을 가져오고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신체적, 심리적 증상에 대한 극적인 묘사를 늘어놓는다).

제부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은 신사고 나를 존중해줘요. (흥분해서 말을 만들어 내며)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내가 친구로 함께 있는 거예요. 재산이 많다는 게 때로는 사람을 외롭게 만들거든요! 세련되고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자는 남자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죠, 한없이 말이죠! 나는 그런 것들을 제공할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육체적 아름다움은 사라지죠. 순간적이죠. 하지만 마음의 아름다움과 영혼의 풍요로움 그리고 가슴속 부드러움은..... 나는 그런 것들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더 증폭되죠! 세월이 가면 갈수록이요! 내가 가난한 여자라고 불려야만 하다니 정말 이상하죠! 내 가슴속에 이런 보물들이 간직되어 있는데요. (목이 멘 흐느낌이 흘러나온다.) 나는 나 자신을 매우 부유한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어리석었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다니!

연극성 성격장애 환자의 외모와 행동은 부적절하게 성적으로 유혹적이거나 자극적이다(진단기준 2 다른 사람과의 관계 행동이 자주 외모나 행동에서 부적절하게 성적, 유혹적 내지 자극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짐). 이러한 행동은 환자가 성적 혹은 연애적 감정을 느끼는 대상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고 다양한 사회적, 직업적 그리고 전문가적 관계에서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사회적 맥락에서 적절한 수위를 벗어난 것이다.

'그래요 나는 낯선 사람들과 관계를 가졌어요. 앨런이 죽고 난 뒤...... 낯선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만이 내 텅빈 가슴을 채울 수 있는 전부인 것 같았어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보호 받으려 했던 것은 공포, 공포 때문이었죠. 여기 저기, 생각해서도 안될 곳까지, 마침내는 열일곱 살짜리 소년에게까지도, 하지만 누군가가 교장에게 편지를 썼죠...... " 저 여자는 교사직에 적합하지 않아!"라고.' (흐느끼듯이 발작적으로 웃던 블랑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헐떡거리다 술을 마신다.) 맞느냐구요? 그래요, 내 생각에도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서, 어쨌거나...... 그래서 여기에 온 거예요. 다른 곳이 없더라구요. 나는 진이 다 빠져 버렸어요. 진이 다 빠져 버렸다는 말 알아요? 내 젊음이 갑자기 배수구로 사라지고, 그리고 당신을 만났어요.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당신이 말했지요. 그래요. 나도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당신을 만난 것을 하느님께 감사했어요. 당신은 신사같이 보였기 때문이죠...... 바위 덩어리 같은 이 세상에서 내가 숨을 수 있는 틈새 같은 존재죠! 하지만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군요! 키파버와 스탠리와 쇼가 연꼬리에 낡은 깡통을 매달아 시끄럽게 만들었네요.

감정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피상적으로 표현된다(진단기준 3 감정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피상적으로 표현됨).

블랑시 최악의 악몽 속에서도 결코, 결코, 결코 그려본 적이 없는, 그래, 포만이! 오직 에드거 앨런 포만이 제대로 묘사할 수 있을 거야. 저 밖에는 시체를 뜯어먹는 귀신들이 나오는 위어의 숲이 있을 거고!(웃어 댄다)
스텔라 아니, 언니, 저건 L&N 기찻길이야.
블랑시 아니, 이제 농담은 집어치우고, 진지하게 말하자. 너 왜 말하지 않았니, 왜 편지쓰지 않았어. 왜 나한테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
스텔라 (조심스럽게 자신의 잔을 채우면서) 뭘 말이야?
블랑시 네가 이 지경으로 살아야 했다는 것 말이야!
스텔라 언니 너무 지나친 것 아니야? 여기 그렇게 나쁘지 않아! 뉴올리언스는 다른 도시랑은 다르다고.
블랑시 이건 뉴올리언스랑은 상관은 없어. 말해 보라니까. 미안해, 스텔라!(갑자기 말을 끊는다.) 이 얘기는 그만 하자!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외모를 사용한다(진단기준 4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외모를 사용함). 그들은 자신들의 외모로 다른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를 원하고 옷이나 외모를 가꾸는 데 지나친 시간과 열정, 돈을 사용한다. 외모에 대해서 ‘칭찬을 받고 싶어’하고 외모나 사진에 대해서 칭찬하는 말이 아닌 비판적인 평을 들으면 지나치게 화를 낸다.

블랑시의 모습은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다. 앞부분에 털이 달린 흰정장을 입고,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 흰 장갑과 모자로 우아하게 차린 모습이 마치 교외 주택가에서 열리는 여름철 다과회나 칵테일파티에 온 것 같다.

이 환자들은 지나치게 인상주의적이고 세밀함이 결여된 형태의 언어를 구사한다(진단기준 5 지나치게 인상적이고 세밀함이 결여된 형태의 언어 사용). 극적인 재능으로 확고한 의견을 이야기하지만 기저의 논리는 모호하고 산만하며 뒷받침할 만한 사실이나 정보가 없다(예, 연극성 성격장애 환자는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지만, 이러한 의견을 뒷받침할 장점을 세세히 나열하지는 못한다).

예술같은 것들, 시나 음악 같은, 그런 새로운 광채가 그 이후로 이 세상에 들어왔거든! 어떤 사람들 안에서는 부드러운 광채가 싹트기 시작했다고! 그걸 우리는 키워야 해. 그리고 매달려서 우리의 깃발로 삼고 지켜야해. 짐승들과 함께 뒤쳐져선 안돼.

이 환자들은 자기극화self-dramatization, 연극성, 과장된 감정 표현이 특징적이다(진단기준 6 자기극화, 연극성 그리고 과장된 감정의 표현을 보임). 지나치게 공공연한 감정 표현으로 친구와 지인들을 당황스럽게 한다(예, 일상적인 만남에서 과도한 찬사를 늘어놓으며 포옹을 하거나, 사소한 감상적인 상황에서 통제가 안 되게 울기도 하고 분노발작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은 너무 빨리 사그라져서 깊게 느낄 수가 없고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환자들이 이러한 감정을 꾸며내는 것이라고 비난하게 된다.

아니, 나중에, 나중에 목욕하고 좀 쉬고 나면! 저 위 불 좀 꺼라! 저 불을 꺼! 저 무자비한 불빛 아래서 날 보일 수는 없지! 이제 이리로 와 봐! 아, 내 동생! 스텔라, 별을 닮은 스텔라! (블랑시는 스텔라를 다시 껴안는다) 난 네가 이 끔찍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좋은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음, 참 편리한 위치에 있구나 뭐 이런 말이지, 하 하 하! 소중한 내동생!

연극성 성격장애 환자는 피암시적이다(진단기준 7 피암시적임. 즉,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의해 쉽게 영향을 받음). 의견이나 느낌이 다른 사람이나 현재의 유행에 의해 쉽게 영향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을 지나치게 믿는데, 특히 그들의 문제를 마술적으로 해결하는 강한 권위적 인물에 대해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육감을 사용하고 신념을 빨리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바다 공기 냄새가 나네. 내 여생을 바닷가에서 보내고 싶어. 그리고 죽을 때, 바다 위에서 죽을 거야. 내가 어떻게 죽을지 알아요? 어느 날 바다 한가운데서 씻지 않은 포도를 먹고 죽을 거예요. 난 죽을 거예요. 선박의 잘생긴 담당 의사, 자그마한 금빛 콧수염과 커다란 은시계를 찬 아주 젊은 남자의 손에 내 손을 맡긴 채. 사람들은 말할 거야. "불쌍한 부인, 키니네도 소용없군. 씻지 않은 포도가 그녀를 천국으로 보냈어."라고. 그리고 나는 깨끗하고 하얀 자루에 싸여 바다에 잠길 거야. 한낮, 여름 햇살 속에서, 내 첫사랑의 눈동자처럼 푸른 바다 속으로 떨어져!

환자들은 관계를 실제보다도 더 가깝다고 생각해서 거의 모든 지인을 ‘나의 친애하고 친애하는 친구’라고 표현하거나 공적인 자리에서 한두 번 만난 의사를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진단기준 8 실제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로 생각함)

당신이 누구든 난 항상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솝 우화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4
이솝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어 읽어보니 손자병법이나 처세서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수천년이 흘러도 아직도 유효한 이야기들. 어린이였을때 읽은 이 우화 중 일부의 이야기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 안에 씨앗이 떨어지듯 박히고 점점 자라나 꽃이 피고 지며 나름의 열매를 맺었을 것이다. 아니 다시 읽는 지금도 계속 꽃이 피고 지는 중일 수도 있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