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바 / 에메랄드 반지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6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바리바'란 'Barre-y-va'라고 쓰며, Barre는 '만조 때 강어귀로 밀려드는 높은 파도', 'y va' 는 '그곳에 가 닿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즉 붙여서 읽으면 바리바로 읽히는 것이다. 사실 이 제목만 안다고 해서 소설의 트릭을 전부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핵심 키워드가 어디쯤 숨겨져 있는지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함께 실린 단편 '에메랄드 반지'가 더 재미있었다.
 
 
이번에 감상하게 되는 「바리바」와 단편 「에메랄드 반지」는 국내에 최초로 번역 소개되는 작품들이다. 「바리바」에서는 센 강 하류 계곡지대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자연현상을 둘러싼 서스펜스가 뤼팽 특유의 화통하면서도 세련된 재치와 결합되어 독자의 상상력을 쉴새없이 소용돌이치게 만든다. 수수께끼적인 요소가 대거 등장하면서, 오랜만에 암호문을 실마리로 삼은 추리의 과정도 만끽할 수 있으며, 작품 후반에 이르기까지 범인을 베일 속에 가려두는 수법도 「호랑이 이빨」 이후 오래간만에 즐길 수 있는 테크닉이다. 저자의 ‘추리소설론(「기암성」해설 참조)’에서도 독특한 작가의 입장을 확인했지만, 「에메랄드 반지」라는 제목의 단편작품은 아마 추리문학에서 모리스 르블랑의 독창적인 입장을 가장 훌륭하게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애당초 본격 심리주의 작가가 꿈이었던 르블랑은 이 세련된 단편을 통해서 추리의 범주를 무의식이라는 영역으로까지 확대, 심화하는 비기(秘技)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활용된 참신한 기법과 테마를 간략히 살펴보고 그 선구적인 가치를 가늠해본다.
 
 
바리바
1. 밤의 방문객
 
극장의 저녁 공연이 끝난 뒤, 라울 다브낙은 집으로 돌아와 현관의 거울 앞에 멈춰 섰다. 거기에서 그는 우아한 실루엣과 떡 벌어진 어깨, 셔츠 가슴받이를 힘차게 부풀리고 있는 당당한 가슴팍 등, 고급 재봉사의 솜씨가 고스란히 밴 의복 차림의 멋진 몸매를 한동안 뿌듯한 기분으로 들여다보았다.
 
 
"세상 참! 하긴 당신이 너무도 매력적이라,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용건으로 찾아와주셨다는 게 못내 아쉬울 정도랍니다! 그러니까 마치 사람들이 셜록 홈스를 찾아 베이커 스트리트의 그의 집을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이곳을 찾아온 거라 이 말씀이죠? 알겠습니다. 이제 필요한 모든 얘기를 차분히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마드모아젤. 성심껏 도와드리도록 하지요. 자, 어서 말씀해보십시오."
 
남자는 먼저 의자부터 정중히 권했다. 그런데 라울의 예의 바르고 상냥한 태도 덕분에 많이 안정을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안색이 상당히 창백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처럼 싱싱하면서 우아한 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까지 이따금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다만 그 가운데에서도 눈빛만큼은 차분한 신뢰감을 담고 있었다.
 
 
2. 테오도르 베슈의 자초지종
 
"좋아, 그럼 이제 내가 자네의 이야기를 대신 풀어내줄까? 만약 내가 틀리거든 그때그때 잡아내도록 하게. 물론 전혀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이야. 아주 기초적인 얘기야. 지금부터 잘 들어보게나. 바리바의 장원은 옛날에 바슴가(家)의 영지에 속했었는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르 아브르의 어떤 선주(船主)한테 매각된 곳이지. 그의 아들인 미셸 몽테시외는 바로 거기에서 성장해 결혼도 했지만, 아내와 딸을 차례차례 여의고 나서, 결국 베르트랑드와 카트린이라는 손녀 두 명과 더불어 독신으로 살았다네. 지금 자네가 얘기한 두 명의 자매가 바로 그들인 셈이지. 할아버지는 마음 둘 곳을 못 찾아서 그런지 파리로 이사해 정착해보았지만, 1년에 두 번씩은 항상 이곳을 찾는다고 하네. 부활절을 즈음해서 한 달 정도, 그리고 사냥철이 되어 또 한달을 머물다 간다는 거야. 손녀들 중에서 맏이인 베르트랑드는 비교적 일찍 결혼을 했는데, 상대는 무슈 게르생이라고, 파리에 터를 잡은 실업가이면서, 미국에서도 대규모 사업을 운영한다더구만. 어때, 여기까지 동의하나?"
 
 
"한편 어린 카트린은 미셸 몽테시외와, 또 하나,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주인한테 매우 충직한 하인 아르놀드-자기들끼리는 무슈 아르놀드라고 부른다는구만-이렇게 셋이서 살았다네. 한데 그녀는 자라나면서 공부는 그럭저럭만 하는 대신, 워낙 성품 자체가 구속을 싫어하고 자유분방한 데다, 약간은 몽상적이고 황당무계하며, 운동과 독서에 열광하는 타입이라더군. 그래서 그런지 오직 바리바 같은 곳에서만 마음을 활짝 펴는가 하면, 오렐천(川)의 차가운 물 속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나서 풀숲, 사과나무 고목 아래에 벌러덩 드러누워 몸을 말리는 게 유일한 낙이어싿고 하네. 할아버지는 그런 손녀를 무척 사랑하셨다는데, 그 양반 역시 성격이 보통 과묵하고 괴팍한 게 아니라서, 평소에는 화학이나 심지어 연금술 같은 신비주의 학문에만 몰두했다는 거야. 어때, 내 얘기 따라오기는 하는 건가?"
 
 
"그러던 중, 벌써 스무 달이나 된 애기인데, 그때가 9월 말 정도였다고 하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그 무렵이면 한번씩 머물다 오는 노르망디에서 떠나던 날 저녁, 몽테시외 할아버지가 그만 파리의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 거야. 그 당시 언니인 베르트랑드는 남편과 함께 보르도에 있었지. 하지만 즉시 돌아와서, 그때부터 두 자매가 함께 살고 있다는군. 할아버지는 생각보다 적은 유산을 물려주었고, 별다른 유언 한마디 남기지 않았지. 결국 바리바 영지는 그때부터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거야. 장원의 철책들과 정문은 열쇠로 단단히 걸어 잠가둔 상태로 말이야. 아무도 더는 그곳을 드나들 수가 없게 된 거지."
 
 
"그런데 올해 들어와 갑자기 두 자매는 여름을 그곳에서 보내기로 작정했어. 베르트랑드의 남편인 무슈 게르생마저 프랑스로 돌아온 다음 다시 떠났다가, 또 이번에 돌아와서 두 자매와 상봉을 하게 되어 있었다네. 두 자매는 그곳으로 가면서 무슈 아르놀드는 물론, 베르트랑드를 지난 수년간 시중 들어온 요리사 겸 하녀 한 명도 함께 데려가기로 했지. 뿐만 아니라, 마을에 들러 임시로 두 명의 현지 소녀를 더 고용해, 이 참에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저택 청소와 정원 다듬기에 나섰던 거야. 그 결과 장원 일대가 그야말로 진짜 파라두도 저리 가라가 된 거라네!(파라두[Paradou]는 에밀 졸라[1840-1902]의 소설 「무레 신부의 과오(La faute de l'abbe Mouret)」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정원 이름이다. 모리스 르블랑은 이 자연주의 소설의 대가가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하여 저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J'accuse]!'를 발표했을 때 열광적인 편지를 보냈을 정도로 졸라를 흠모했다/역주) 어떤가, 내 얘기에 동의하나?"
 
 
"그런데 카트린은 얼마 전에 속을 발칵 뒤집어놓은 일련의 심각한 사태 때문에 여전히 우울한 기분이었을 텐데도 의외로 밝게 웃곤 하더군. 그 날 나는 밤 10시 30분 정도에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네. 물론 밤새 별다른 일은 없었고 말이야. 무엇인가 수상쩍은 소리 하나 없었지 그런데 해가 중천에 뜬 정오가 되어서야, 베르트랑드 카트린의 시중을 드는 샤를로트가 헐레벌떡 달려와 이렇게 외치는 게 아니겠나! '마드모아젤이 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개천에 빠지신 것 같아요......'"
 
 
"자살이라도 했다는 건가?"
 
 
"아들이 그처럼 돈도 없고 신분도 별볼일 없는 여자와 결혼하는 걸 백작의 어머니가 싫어하셨지. 그러던 중 어제 아침 피에르 드 바슴의 편지가 카트린에게 배달된 거였네. 우리가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자기는 곧 떠날 예정이라는 내용이더군. 자기 어머니가 억지로 6개월간의 장기 여행을 명하셧다는 거야......잔뜩 의기소침해서 떠나긴 떠나지만, 제발 자기를 잊지 말고 꼭 기다려달라고 카트린에게 간청을 하는 편지였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즉 아침 열 시, 카트린은 집을 나섰고 그 후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거야."
 
 
3. 살인사건
 
"방금의 대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나눈 것입니다, 예심판사님. 나는 저가 있는 저 강철의자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무슈 게르생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만하면 장소나 거리에 대해 충분히 납득을 하시겠지요? 아마도 여기 테라스에서 저 다리 초입까지 직선 거리가 기껏해야 80미터 정도 될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실제로 확인해보시면 알 겁니다-이 테라스에 서 있는 어떤 사람도 저기 다리의 첫째 아치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물론이요, 그 너머로 걸쳐 있는 두번째 아치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든가, 작은 섬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뚜렷하게 바라볼 수가 있다는 얘기이지요."
 
 
"섬의 땅바닥 일대는 온통 가시덤불과 쐐기풀 따위의 덩굴 식물들로 북새통을 이루어서 계단까지 거의 뒤덮인 상황인데, 무슨 이유로 무슈 게르생이 굳이 비둘기 집으로 향하는 건지, 나는 계속 의아해하며 바라보고 있었지요. 마드모아젤 카트린이 그곳에 피신해 있을 가능성은 전무한데 말입니다. 과연 왜였을까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을까요?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아무튼 무슈 게르생은 문에서 한 서너 발짝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습니다. 저기 문 또렷이 보이시죠? 우리와 바로 정면에서 마주보고 있지요. 큼직한 석재 토대 위에 둥그스름한 벽이 올라가고, 그 안에 나지막한 아치형으로 말입니다. 맹꽁이 자물쇠 하나하고 두 개의 넉넉한 빗장으로 문이 채워져 있을 겁니다. 무슈 게르생은 허리를 수그려 맹꽁이 자물쇠를 쉽게 풀어냈답니다. 그 이유야 나중에 직접 확인해보면 아시겠지만 무척 간단하지요. 꼬챙이 중 하나가 쉽사리 빠져나오거든요. 남은 건 두개의 빗장인 셈이죠. 무슈 게르생은 위의 것과 아래 것을 차례차례 손보았습니다. 이내, 그는 걸쇠를 부여잡더니 문짝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더군요. 바로 그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팔을 들어 막거나 뒷걸음질로 피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아니 심지어 그런 도발이 일어나는 걸 분간할 틈도 없이, 난데없는 총탄이 발사된 것입니다! 총성과 함께 맥없이 뒹구는 무슈 게르생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4. 습격
 
'모든 게 명확해지는군. 백작부인은 아들에게서 여행을 떠나겠다는 약속을 받아놓은 상태. 두 연인간의 약속은 그대로 공중에 뜬 격이었겠지. 그러다 난데없이 어제 아침 젊은이의 작별 편지가 카트린에게 배달되었고, 기겁을 한 카트린은 바리바를 벗어나, 평상시 밀회를 나누던 장소로 무턱대고 달려온 거야. 물론 피에르 드 바슴 백작은 그곳에 있을 리가 없었지......'
 
 
5. '버으나우 셋'
 
"하지만 워낙 외롭게 지낸 어린 시절부터 내게는 일부러 무얼 숨긴다기보다는 무슨 일이든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거나 좀 과묵하게 넘어가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답니다. 꽤 기분이 괜찮을 때조차도 오로지 내 안에서, 나 자신만을 위한 기분에 그쳤지요. 그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전보다 훨씬 더 내성적으로 되어버렸답니다. 언니를 무척이나 따랐었지만, 그마저 결혼을 해서 떠나버렸지요. 나중에 언니가 돌아와서 그나마 많이 나아졌는데, 더군다나 이곳으로 함께 와 살게 되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답니다. 하지만 서로 애정을 품으면서도, 우리 사이에는 그때도 지금도 뭔가 서로 함께 해서 행복하다거나, 느긋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완벽한 친밀감이 느껴지지는 않아요. 물론 그 날못은 나한테 있지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는 약혼을 한 몸입니다. 피에르 드 바슴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그 역시 나를 극진히 사랑하고요. 하지만 그런 우리 둘 사이에도 역시 일종의 장벽이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속 시원히 드러내길 꺼려하고, 모든 충동적이고 활달한 태도를 공연히 경계하는 나의 이 천성에서 비롯된 결과죠."
 
 
"......이처럼 소극적인 태도는 보통 여성적인 은밀한 감정에 한해서는 그런 대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일상 생활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특히 그 중에서도 다소 비정상적이고, 특별한 문제에 부닥쳤을 경우에는, 아주 괴상하게 보이기 마련이랍니다. 내가 바리바에 도착한 이후 벌어진 상황이 바로 그런 식이었어요. 정상대로라면 나를 후려쳤던 괴이한 사건들에 관해 일찌감치 얘기를 털어놓아야 했겠죠.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답니다. 실제 벌어진 일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걸 혼자만 간직하고 있느라, 정작 남들한테는 어딘지 정신이 이상하고 불균형한 여자처럼 비치게 되고 만 것이죠. 결국 그러다보니 나 자신 불안에 찌들다 못해 신경질적이 되어버리고, 심지어 거친 여자로 변해버렸습니다. 내 주위 사람들과 나누기는 싫은 이 고통과 공포의 짐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하면서 말이죠."
 
 
6. 보셸 할멈
 
"......그렇다면 정녕 내가 미쳐버린 걸까요? 언덕 위애 있는 걸로 늘 알고 있던 나무들인데...... 불과 2년 전에도 거기 있는 걸 보았었고...... 한데도 이미 그땐 그곳에 있지 않았었다는 얘기잖아요?...... 이 지도는 할아버지와 내가 5년 전에 만들어놓은 것이니 말이에요...... 내 머리가 어떻게 이런 착각에 휘말릴 수가 있는 거죠? 그동안 정말 엄연한 사실적 증거에 대항해서 싸워왔어요. 차라리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나무들이 옮겨 심어진 거라 믿고도 싶었죠. 그러던 중, 여기 이렇게 지도가 내 눈이나 기억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나선 거예요. 매 순간 내가 엄청난 착각을 했다는 걸 인정해야 할 판이니, 어떻게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가 있었겠어요? 내 전 인생이 그만 허깨비처럼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모든 과거가 한낱 허상과 거짓으로 점철된 악몽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에요......"
 
 
7. 공증인 사무소의 서기
 
매일 저녁 그렇듯, 덧문은 둘 다 닫힌 상태. 라울이 얼른 걸쇠를 벗겨냈지만, 알고 보니 그것들 모두 밖으로부터 잠겨져 있었다. 제 아무리 격렬하게 뒤흔들어보아도 전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라울은 이내 포기하고 옆 방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미 시간을 너무 지체했는지 정원 쪽으로 의심 갈 만한 징후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힐끗 살펴보아도 당구실 밖 덧문에 큼직한 빗장이 가로질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경 적이 퇴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전날 밤 미리 장치해둔 것이 분명했다.
 
 
8. 유언장
 
아래 서명한 나 미셸 몽테시외는 예순여덟 살의 나이에 신체와 정신이 모두 건강한 사람으로, 충분한 숙고를 거친 소견과 더불어 합법적이고 도덕적으로 내게 주어진 모든 권한에 따라 나의 두 손녀들에게 예전엔 그래도 꽃이 만발했던 바리바 영지 주변의 조촐한 땅을 (분할하지는 말되, 그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수익의 각각 절반씩을 차지하는 형식으로) 물려주는 바이다.
 
영지에 한해서는 개천의 줄기에 거의 준해서 서로 다른 크기의 두 부분으로 나눌 작정이다. 그중 개천 우측 부분, 즉 장원을 비롯해서, 내가 죽는 시점에 그 안에 포함될 모든 것을 다 합한 구역은 카트린의 소유가 될 것이다. 확신하건대, 그 애는 이 할아비와 둘이서 그랬듯이, 그곳에 둥지를 틀고 살면서 잘 가꾸어나갈 것이다. 나머지 다른 한쪽 땅은 베르트랑드의 소유가 될 것인데, 결혼해서 종종 그곳을 비울게 분명한 그 애도, 아마 거기 낡은 사냥용 별장 정도라면 가끔 들러 쉴 곳으로 흡족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에 더해서, 거길 수리하고 가구도 제법 갖추게 하기 위해, 또 두 유산의 불균형을 상쇄하는 뜻에서, 내가 죽거든 베르트랑드에게 3만5,000프랑어치의 금가루를 별도로 유증하기로 한다. 그것은 내가 직접 만들어낸 것으로, 유언 추가서에 그 정확한 소재지를 밝혀놓을 것이다. 아울러 떄가 도래하면 그 비할 바 없는 보물을 만들어낸 비법 또한 공개할 것이다. 보물의 진실성에 관해서는 언젠가 내가 그중 몇 그램 정도를 보여준 적이 있는 베르나르 선생만이 유일하게 보증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나는 두 손녀들이 내 의지를 준수하는 데 서로간 하등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걸 지금까지 그 애들을 비추어봐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둘 중 하나는 결혼을 했고, 나머지 하나 역시 조만간 하게 될 것인 바, 둘 사이 여하한 오해를 초래할 만한 해석상의 오류도 철저히 차단키 위해, 나는 영지의 지형을 묘사한 도면을 작성해서 내 책상 오른쪽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것을 보면 결코 어떤 혼동도 없을 만큼 확실한 방법으로 표시를 해두었음을 알 것이다. 즉 영지 내부의 두 소유지 경계선은 카트린이 즐겨 숨어들었던 세 그루의 버드나무 중 가운데 놈에서 출발하여, 곧장 정원의 정문 철책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들 중 맨 서쪽 기둥에까지 도달할 것이다. 아울러 쥐똥나무 생울타리라든가, 아니면 말뚝 울타리로 경계선을 표시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 아무튼 각자 아무런 불만 없이 편안할 일이며, 오로지 그 원칙에 입각하여 이 유언의 규정들을 정하는 바이다.
 
 
9. 용의자 두 명
 
"알아요...... 그러지 않아도 엄청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린 돈이 너무도 궁했고, 카트린에 비해 터무니없는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 그 금가루 얘기가 남편의 정신을 돌게 만든 겁니다.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가 황금 제조의 비법을 발견했으며, 장원과 더불어 개천 우측 땅덩어리를 몽땅 카트린한테 넘기면서, 무한정한 보물 역시 물려주려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렇다 해도 카트린은 분명 당신과 그것을 나누었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워낙 남편 고집이 강한지라, 난 어찌 할 도리가 없었어요. 나약하기도 했고, 비겁하기도 한 거죠...... 때로는 울컥하는 심정도 없진 않았고요.; 정말이지 그때 생각으로는 너무도 부당하고......심한 처사라 여겨졋습니다!......"
 
 
"사실 그쯤 되자 나도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카트린에게 죄다 일러바치겟다고 위협했거든요. 게다가 우린 점점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기도 했고요. 사실 올해 동생 결혼을 앞두고 카트린과 함께 이곳에 머물기로 했을 때만 해도, 이걸로 영영 갈라서게 되는구나 싶었답니다. 그런데 두 달 후 남편이 불쑥 찾아와서 난 굉장히 놀랐지요. 남편은 파므롱과의 일에 관해선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 도무지 누가 그이를 죽였고, 또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고 있답니다."
 
 
10. 큰 모자를 쓴 사나이
 
"아, 이제야말로 독안에 든 쥐다, 이 놈!"
 
그런데 이에 맞서 귓가에 들려온 것은 처량하게 애걸하는 나약한 목소리였다.
 
"아, 이런...... 대체 왜 이러나? 이거 놓지 못해?"
 
베슈의 목소리였다.
 
라울로서는 길길이 날뛸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이 시간에 하필 이런 데서 잠을 청하긴가? 젠장, 멍청하기는! 그래, 누구와 함께 있었던 거야?"
 
하지만 베슈 역시 보통 화가 나 있는 게 아니었고, 이번에는 자기 차례라는 듯 바짝 뻗대면서 엄청난 괴력으로 라울의 몸을 흔들어댔다.
 
"멍청한 게 누군데 이래? 지금 자네가 어떤 와중에 끼어든 건지 알기나 하나? 도대체 왜 우리를 방해하는 거야?"
 
"우리라니, 그게 누군데?"
 
"당연히 그 여자지! 제기랄! 이제 막 입을 맞추려던 참이었단 말이야! 처음으로 여자가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당장 입을 맞추려는데, 자네가 모조리 틀어놨다구! 이 답답한 친구 같으니라구!"
 
화도 났고 한편 허탈하기도 했지만, 라울은 그가 망쳐놓은 유혹의 장면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는, 허리가 끊어져라 폭소에 또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하하하하...... 요리사였어!...... 요리사!...... 베슈가 드디어 요리사를 품어보려고 했다 이거야!...... 세상에, 내가 그 알량한 예식을 중단시켜버리다니...... 오, 하느님 맙소사! 이런 포복절도할 일이 있나! 베슈가 요리사에게 입을 맞추려 하다니! 돈 후안이 따로 없구만그래!"
 
 
11. 함정에 빠지다
 
아침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정오가 되었을 텐데, 그 어떤 탈 것 이동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필경 두 자매는 전보를 받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라디카텔을 떠났을 것이다. 릴르본에서 기차를 잡아타야 할 테니까.
 
하지만 이런 라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성당 종소리가 오후 한 시를 규칙적으로 알리는 가운데, 그리 멀지 않는 느낌의 외침소리가 이렇게 들려온 것이다.
 
“라울! 라울!”
 
영락없는 카트린의 목소리였다.
 
아울러 베르트랑드의 목소리도 섞여 들려왔다.
 
“라울! 라울!”
 
라울은 여자들의 이름을 번갈아 고래고래 외쳐댔다. 하지만 반응은 없었다.
 
두 젊은 여자는 그밖에도 여러 차례 라울의 이름을 불러주었지만, 어쩐지 점점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적막......
 
 
12. 복수
 
“혹시 파리로부터 당신들한테 전보 온 것 있습니까?”
 
대답은 베슈가 대신했다.
 
“그렇다네. 첫 기차로 자네한테 와달라는 내용이었어. 자네 집에서 만나자고 말이야.”
 
“그런데 왜 가지 않은 거지?”
 
“난 그러자고 했지. 한데 여자들이 원치 않더구만.”
 
“이유는?”
 
“의심이 간다는 거야. 자네가 그런 식으로 자기들을 떠날 리가 없다는 거지. 그래서 우리 모두 나서서 자넬 찾아보기로 했다네...... 우선 바깥 숲부터 뒤졌지. 그런데 얼마 안 가 우리도 갈피를 못 잡겠더군. 도대체 자네가 떠난 건지 아닌지부터가 말이야. 영문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시간만 흘러갔지. 그뒤론 잠도 한숨 못 잤다네.”
 
 
13. 논고(論告)
 
“천만에, 베슈! 그래서 자넨 늘 안 되는 거야. 아르놀드는 살인을 하지 않았네.”
 
 
“모두가 장원을 떠나게 하자는 거였지.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황금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장원에 사람이 죄다 빠져나가서 아무도 보는 눈이 없어야만 황금을 손에 넣기 위한 작업을 벌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지. 그것도 9월 12일이라는 정해진 날짜가 도래하기 전까지 몽땅 빠져나가야만 했어.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두 자매가 기겁을 해서 떠날 결심을 할 만큼, 무시무시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할 수밖에 없었지. 원체 사람 죽일 천성은 못 되기에, 살인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고 말이야. 하지만 반드시 여기서 내쫓기는 해야만 할 일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는 카트린의 침실 창문으로 잠입해 들어와, 여자의 목을 다짜고짜 조르기 시작했지. 자네가 보기엔 진짜로 공격을 한 거라 볼 수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저 그런 시늉만 했을 뿐이라네. 목을 조르되, 죽을 만큼은 아니었으니까. 충분히 살해할 시간여유는 있었어. 하지만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겠나? 어차피 죽일 목적은 전혀 아닌 것을 말이야. 그래서 적당히 해두고 냅다 도망쳐버린 거라네.”
 
 
“그녀는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아르놀드의 공범이라네.”
 
“아니지, 그녀가 자네를 구해낸걸?”
 
“회한이 들었던 게지! 지금까지는 아르놀드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의 행태에 적극 협조해온 게 사실이라네. 다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자, 이따위 범죄행각이 더는 싫어졌고, 적어도 아르놀드가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거지.”
 
“아니, 그건 또 왜? 그가 무슨 중요한 사람이라도 되나?”
 
“정녕 알고 싶은가?”
 
“그렇네.”
 
“아르놀드가 범죄자가 되는 걸 그녀가 왜 못마땅해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그렇다니까!”
 
“그야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지.”
 
“뭐, 뭐라구? 지금 뭐라고 했나? 감히 뭐라고 지껄인 거야?”
 
“나는 샤를로트가 아르놀드의 정부(情婦)라고 말하는 것이네.”
 
순간, 베슈는 주먹을 한껏 치켜들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야!”
 
 
14. 황금
 
진짜로 라울이 지목한 곳을 보니 동그란 쇠틀에 체의 그것과 똑같은 촘촘한 쇠망이 자리한 사내끼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떤가, 베슈, 설마 개천에 들어가는 게 낫다는 생각은 아니겠지? 싫어? 그럼, 가만히 낚기나 하다가, 체를 따라 바닥을 죽 긁어오게.”
 
“상류 쪽으로 말이지?”
 
“그래, 개천이 원래 방향으로 흐르면서 황금가루들을 운반해와, 결국 체에서 걸러지니까 말이야.”
 
베슈는 즉시 시킨 대로 했다. 사내끼의 손잡이가 긴 편이어서, 기슭의 큼직한 돌멩이에 올라선 채로도 개천의 4분의 3까지 미칠 수가 있었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숙한 시간이었다. 라울이 예견한 바가 과연 옳을 것인가? 정말 저 수초들과 섬세한 조약돌들이 즐비한 개천 바닥에서 몽테시외 씨는 자신의 더없이 소중한 황금가루를 거두어들였던 것일까?
 
드디어 베슈가 일을 끝내고서 사내끼를 들어올렸다.
 
금속 망 속에는 조약돌과 얼기설기 수초들이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뭔가 반짝거리는 점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분명 황금가루와 그 조각들이었다.
 
 
15. 집정관의 재산
 
아직 젖은 상태인 나무뿌리와 가시덤불이 맨 먼저 제거되었고, 파묻혀 있던 오솔길이 복구되었다. 이어서 원형의 공간이 드러났고, 그 기저를 이루는 자갈층에 곡괭이질이 가해졌다.
 
하나의 장애물이 무너지자 또다른 장애물이 나타났고, 거기에는 보다 섬세한 작업이 필요해 보였다. 모자이크의 흔적과 더불어 역시 조각상 같은 게 세워 올려졌을 다른 토대가 드러났는데, 이제 두남자의 발굴작업은 바로 그 지점에 집중되는 것이었다.
 
사방으로부터 물이 스며들어 적당히 고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개천 쪽을 향해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 내리친 곡괭이가 석벽을 그대로 뚫고 텅 빈 공간으로 쑥 빠져들었다. 부지런히 구멍 넓히는 작업에 들어갔고, 잠시 후 라울이 램프 불을 켜 확장된 구멍 속으로 들이밀었다.
 
과연 예견했던 대로, 사람이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동굴이 휑하니 열려 있는데, 아마도 장례실로 쓰이던 공간 같았다. 중앙에 뻗은 기둥 하나가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고, 그 주위로는 유약 바른 흙으로 구운 투박스럽고 뚱뚱한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놓여 있었다. 지금도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흔히 보는 기름 보관용 단지들과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었다. 그중 네 번째 항아리에서 떨어져나간 파편들이 끈적끈적한 훍바닥에 흐트러져 있었고, 황금빛의 반짝거리는 가루가 그 가운데 섞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16. 에필로그: 둘 중 누구를?
 
“나는 당신 둘 다 사랑합니다......”
 
“바로 그게 문제예요! 둘 다라는 말...... 둘 다 고만고만할지언정, 둘 중 누굴 더 사랑하는 건 아니죠!”
 
여자의 말에 라울이 발끈하는 제스처를 취하자, 다시 또 여자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아니에요! 인정할 건 인정하세요...... 어차피 베르트랑드나 나나, 우리 둘의 감정은 당신이 모를 리가 없을 겁니다...... 한데도 당신은 우리 둘 다를 향한 감정으로만 그에 응하고 있어요...... 장원에서도 당신은 우리 둘 다를 위해, 그야말로 공동의 선(善)을 위해 싸우셨지, 그 두 사람을 따로따로 분리해 대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여겼어요. 그러다보니 이제는 당신한테 우리 두 사람 다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린 거예요. 하지만 자고로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는 그렇게 되어선 곤란하죠...... 이곳 파리에 돌아온 이래, 당신은 하루 건너 번갈아 우리 두 사람을 제각기 따로 보러 왔어요. 그러는 동안 우린 헛된 자존심 반, 질투 반의 심정으로 당신의 결단이 내려지기만을 고대해왔죠. 그런데 이제는 당신이 결코 결단을 내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당신은 언제까지나 우리 두 자매를 똑같이 사랑하려고만 들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뭡니까?”
 
라울은 목이 멘 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대신 우리가 내린 결정을 말씀드리려고 이렇게 온 거예요. 당신은 결정을 내리지 못할 테니까 말이에요.”
 
“그래, 어떤 결정을 내렸나요?”
 
“떠나기로 했어요.”
 
라울은 펄쩍 뛰었다.
 
 
 
에메랄드 반지
 
“마담, 당신은 필경 어떤 의혹 섞인 동작, 경계하는 행동을 실행에 옮겼을 겁니다. 비록 그 상황에 논리적으로 맞지도 않고, 당신의 성향에도 배치되는 짓이지만, 원하지도 않고 의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냥 저지르고 만 것이죠. 왜냐하면 무슈 데르비놀의 이름이 어떻든 간에, 덮어높고 그를 에메랄드 반지를 능히 훔칠 수 있는 자로 본다는 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울화가 치밀더군요. 나는 길길이 소리를 질러댔죠.
 
‘내가요? 내가 그런 생각을 한 단 말입니까? 그런 파렴치한 의심을 했다구요?’
 
데느리스 남작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아, 물론 그런 건 아니죠. 대만, 당신의 무의식이란 놈이 수작을 부려, 마치 당신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몰아간 겁니다. 그 놈은 당신의 시선과 사고가 닿지 않는 곳에서 몰래 장난을 쳤답니다. 흔히 끼고 다니는 모조보석 반지들과 무려 8만 프랑에 달하는 진짜 에메랄드 보석 반지 사이에서 재빠른 선택을 하게 만든 거지요. 즉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선택이 이루어졌고, 반지들이 우르르 외발 원탁 위에 놓여졌을 때, 당신은 비할 데 없이 소중한 에메랄드 반지를 역시 무의식 중에 모든 의심스런 시도로부터 차단한 겁니다.’
 
그때만 해도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만한 모함이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요.
 
‘말도 안 되는 얘기에요! 그랬다면 내가 까마득히 모르고 있을 리가 없죠!’
 
‘한데 까마득히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자체가 바로 증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에메랄드 반지가 내 수중에 있어야 하잖아요!’
 
‘아니죠. 그건 당신이 놓아둔 곳에 얌전히 있습니다.’
 
‘내가 놓아둔 곳이라뇨?’
 
‘바로 외발 원탁 위 말입니다.’
 
‘거긴 없어요. 없다는 건 당신도 보고 있잖아요?’
 
‘있습니다.’
 
‘뭐요? 보시다시피 저긴 내 손가방밖에는 없어요!’
 
‘그러게요! 그러니 반지는 당신 손가방 안에 있는 겁니다, 마담.’
 
 
“어쨌든 올가 당신은 반지를 지켜냈고, 데르비놀은 자기 돈을 간수한 셈이로군요. 결국 아무것도 빼앗긴 물건이 없으니, 당신 얘기대로 일을 해주고 알아서 챙기는 게 능사인 바르네트의 원칙에는 정면으로 위배된 경우라 하겠어요. 스스로 손가방 안을 뒤져서 에메랄드 반지를 충분히 후무릴 수가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거예요. 그건 틀림없이 반지보다 더 좋은 걸 바란다는 뜻이겠죠. 그러고 보니 누군가 해준 얘기 하나가 생각나네요. 한번은 그가 일을 해준 뒤 아무 보상도 청구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채무자의 여자를 슬쩍 빼돌려 함께 유람여행을 떠났다고 하죠! 어때요, 올가, 정말 보상 청구치고는 아주 멋들어진 방법 아닌가요? 당신이 지금까지 들려준 그 남자의 모습이나 성향에 정말 잘 어울리는 수법인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올가?”
 
 
 
해설: 아르센 뤼팽의 작품론 2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독창적인 테마들
 
① 이중적인 캐릭터
 
두말할 것도 없이 ‘괴도+신사’라는 아르센 뤼팽의 정체성이야말로 문학에서 최고 수준의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이중적 캐릭터’라고 할 것이다. 특히 시리즈가 횟수를 거듭함에 따라 도둑에서 탐정으로 점차 변모되어가는 이중적 혹은 분열적 주인공의 양상은 아르센 뤼팽이라는 존재의 정체성 자체를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제시함으로써 스토리를 더욱 긴장감 있게 이끌어나가는 동인(動因)이 된다. 처음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에서 완전한 도둑으로 출발한 뤼팽의 정체성은 대작 「813의 비밀」에 이르면서부터 출발점과 완벽한 대극을 이루는 경찰(혹은 탐정)의 이미지로 둔갑을 하며 독자의 정신을 어지럽게 한다. 「813의 비밀」에서부터 현란하게 선보이는 이름 철자 바꾸기(anagramme) 기술과 이전부터도 워낙 유명한 변장능력은 뤼팽의 이중적 정체성을 지탱하는 정교한 테크닉이다. ‘범죄자는 곧 경찰이 될 수 있다’는 고전적인 명제는 누구보다도 버도크(1775-1857)라는 실존인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레미제라블」[1862])과 발자크의 보트랭(「고리오영감」[1834-1835])이 바로 그를 모델로 해서 태어나는가 하면, 급기야 20세기 초 아르센 뤼팽에 이르러 그 가장 완벽한 전형이 탄생한 셈이다. 요컨대, 「813의 비밀」에 등장하는 르노르망 치안국장과 폴 세르닌의 1인 2역 드라마는 선과 악의 이중적 캐릭터가 추리문학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형상화된 최초의 케이스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당연히 이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는 그 당시부터 수많은 추종세력을 불려나갔고, 양상은 좀 다르지만 팡토마스2)라든지 사이먼 템플러3)처럼 한층 발전된 또 하나의 범죄자 유형으로 그 화려한 명맥을 이어간다. 뤼팽 연구가들의 연구 결과, 엘러리 퀸의 「그리스 관(棺)의 비밀」(1932) 같은 수작 역시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영향권 안에서 가능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실정이다.
 
② 암호화된 전언에 의해서 진행되는 범죄의 테마
 
예컨대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서 희생자가 정해진다든다, 기존의 문서에 나타난 단서대로 범죄의 장소나 시기가 결정된다는 식의 설정 역시 뤼팽 시리즈에서 큰 효과를 본 추리적 장치이다. 「서른 개의 관」을 보면 노스트라다무스 스타일의 아리송한 시구 철자 하나하나에까지 집착하면서 광기 어린 살인극을 저지르는 광인 보르스키가 등장한다. 중세의 한 수사가 그저 운을 맞추기 위해 끄적여놓은 시구 하나하나가 범행의 시기와 희생자의 수를 결정하는 운명적인 예언이 되고 만다.
 
이처럼 암호화된 코드나 언어적 단서가 범죄 자체를 성립시킨다는 테마는 반 다인의 「비솝 살인사건」(1929)이라든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1940)5) 그리고 엘러리 퀸의 「더블, 더블」(1950)6)보다 한 발 앞서서 활용되었다. 「서른 개의 관」과 더불어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 중 “도끼를 든 귀부인” 역시 수수께끼 같은 언어유희에 의거해서 범죄가 엮어지는 테마로 스토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③ 복제된 장소의 테마
 
어떤 하나의 장소가 제시되고, 마치 복제된 듯 그것과 똑같은 장소가 새롭게 범죄에 활용됨으로써,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알리바이가 가능해딘다는 테마는 뤼팽 시리즈 중 「불가사의한 저택」의 주요 테마이다. 이는 분명 「엘러리 퀸의 새로운 모험」(1939)이라든가 프레데릭 다르의 「기중기」(1961)보다 10년 이상 앞선 선례라고 할 수 있다.
 
④ 그밖의 테마와 기법들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 추리적 관점에서 참신한 기법과 테마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은 역시 장편보다는 단편들에서 찾을 수가 있다. 즉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와 「바르네트 탐정사무소」 그리고 「아르센 뤼팽의 고백」 같은 단편 모음집 안의 주옥같은 작품들에서 독자들은 보다 많은 추리적 장치들이 빛을 발하는 것을 느낀다. 미국 출신의 유명한 추리문학 전문가인 하워드 헤이크 래프트7)는 특히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를 두고, 추리소설의 줄거리 얼개 면에서 최고 수준의 작품성을 지닌 걸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테레즈와 제르맨”에서의 밀실 변사체, “눈 위의 발자국”에서의 조작된 발자국 등의 테마는 그 방면의 고전적 전범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영화 속의 단서”에서 현실이 허구를 그대로 모방한다는 테마는 체스터턴류의 발상이 앞서 나간 예로 지목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바르네트 탐정사무소」의 단편들 중 “흰 장갑...... 하얀 각반......”에서 선보인 눈에 보이면서도 목격되지 않는 용의자의 테마나 “바카라 게임”에서 알리바이가 형성되는 수법 등도 당시로서는 매우 독창적인 추리적 기법으로 평가받았다. 한편, 「아르센 뤼팽의 고백」 중 “백조의 자태를 지닌 여인”에서, 별개의 두 사람으로 등장했던 사람이 결국 동일인물이었다는 식의 발상은 「브라운 신부의 지혜」를 통해서 체스터턴이 그보다 1년 뒤에야 본격적으로 천착한 테마이기도 하다.
 
 
2) 피에르 수베스트르(Pierre Souvestre)와 마르셀 알랭(Marcel Allain)의 공저로 이루어진 범죄 소설 시리즈의 백미로서, 「팡토마스(Rantomass)」(1911)를 시작으로 「팡토마스의 최후(La Fin de Fantomass)」(1913)에 이르기까지, 단기간에 총 32편이라는 경이로운 시리즈가 선을 보였다.
 
3) 소위 ‘세인트(Saint)’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레슬리 차터리스(Leslie Charteris, 1907-1993)가 창조한 20세기형 로빈후드라고 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점에서 아르센 뤼팽으로부터 직접적인 영감을 얻어 창조된 캐릭터이다. 1928년 「호랑이와 맞서라(Meet the Tiger)!」로부터 시작해 작가 본인이 직접 집필한 시리즈만 총 19편에 달한다. 프랑스에서의 인기도 대단해, 번역본말고도 수십 여 편에 이르는 모작 시리즈가 프랑스어로 집필, 출판도기도 했다.
 
5) 국내에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6) 국내에는 「일곱 번의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7) 「즐거움을 위한 살인, 탐벙 스토리의 생명과 시간(Murder for Pleasure: The Life and Times of the Detective Story)」(1941)이라는 저서에서, 일반 추리소설 팬들이 추리문학 감상의 주춧돌로 삼을 만한 명작 리스트(1841-1938 출간)를 70여편 이상 추려 제시한 바가 있는데, 그 중 뤼팽 시리즈의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가 당당히 올라 있다.
 
 
(http://home.comcast.net/~dwtaylor1/haycraft.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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