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7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살구빛의 책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시작부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화려한 비극이 일어나고, 거기에 대해서 대체 어떻게 결론을 낼 것인지 예측하기도 어렵게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마지막에 사건의 해결에 다다르게 되면 아! 하고 감탄하게 된다. 다른 그 어떤 이야기보다 결말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은 프롤로그에 암시된 바처럼 (알고 보면) 극히 단순한 사건을 소재로 하면서도, 그 전개 방식과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에서 매우 참신하고 아기자기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제목 자체가 수수께끼인 이 당돌한 작품은 한마디로 '착각과 오해가 한바탕 소동을 부리는 요지경 극(劇)'이라고 말하고 싶으며, 아르센 뤼팽의 익살과 여유, 밉살맞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재치가 다른 어느 에피소드보다 더 톡톡 튀는 작품이다. 사건의 해결을, 전혀 상상치 못할 매듭에서 풀어내는 모리스 르블랑의 짓궂은 버릇(?)은 이제 이 능청맞은 작가가 아예 작정하고 독자의 뒤통수 때리기에 재미 붙인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대담하고 한편으로는 허탈하기조차 하다. 모험의 치열함과 격렬함에서는 다소 미진하다는 평이 있기도 하지만, 늘 우리 무릎을 치게 만드는 뤼팽만의 매력에 민감한 뤼피니앵들에게는 결코 빠트릴 수 없는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하겠다. 이번 해설에서는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거울로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가 가지는 특징과 의미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기로 한다.

 

1. 프롤로그: 기이한 상처

단 이쯤에서 한 가지 기억해둘 것은 당시 그 상황은 완벽히 안전한 상태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 장면이 계속 진행되지 못하고, 중간에서 끊어질 어떠한 이유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화잉었다. 정말이지 느닷없이, 덜컥 발생한 사건이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각자 느낀 바는 제각각일지 몰라도, 분명 목격한 것을 확신하는 내용만큼은 하나같이 똑같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한마디로 전혀 예측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었던 사건이 마치 폭탄이 터지듯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는 사실!(실제로 나중 목격자들의 진술에는 그와 같은 과격한 표현이 공통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일단 살인이 일어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물론 그것에 사용된 흉기라든가 총알 혹은 살인 용의자가 발견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이 일어났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모두 합해 마흔두 명에 이르는 참석자들 중 다섯 명이 어디선가 번쩍 하는 섬광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그 다섯 명 모두 섬광이 비친 장소나 방향에 대해서는 엇갈린 증언을 하고 있었다. 반면 나머지 서른일곱 명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심지어 세 명은 뭔가 둔탁한 폭발음을 들었다고 증언한 데 반해, 나머지 서른아홉 명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2. 금발의 클라라

꺽다리 폴의 정부(情婦)이자, '금발의 클라라'로 알려진 여인이 15시 47분 리지외발(發) 368호 열차에서 목격되었음. 고르주레 형사반장을 즉시 급파할 것. 열차가 도착하기 전, 구인영장은 따로 인편을 통해 생-라자르 역에서 그에게 전달될 것임.

여자의 인상착의는 다음과 같음.

웨이브 진 금발을 양 갈래로 늘어뜨렸고, 눈동자는 푸른색. 20에서 25세 정도. 예쁜 얼굴에 옷차림은 수수한 편. 전체적으로 우아한 자태임.

 
3. 중이층에 사는 신사

그가 거하는 장소는 관리인 숙소 바로 위이자, 후작의 개인비서가 사용하는 방들 바로 밑이었다. 처음 어두컴컴한 현관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거실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고, 오른쪽으로 돌면 방 하나, 왼쪽으로는 목욕탕이 구비되어 있었다.


4. 2층에 사는 남자
후작은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머리 속으로는 프랑스 한복판의 온천도시에서 그토록 흥겹게 시작되었던 감미로운 연애사건이 몽실몽실 떠오르는 것이었다. 당시 테레즈는 가정교사의 자격으로 어떤 영국인 가족을 수행하고 있었다. 장 데를르몽에게 그때 일은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난 일종의 변덕스런 장난질에 불과했다. 워낙 무사태평하고 이기적인 성격이었던 젊은 귀족은 자신한테 몸과 마음을 다해 순정을 바쳐오는 여자를 진지한 관심으로 대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따라서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라고 해봐야 고작 몇 시간의 희미한 추억거리가 전부였다. 그런데 테레즈에게는 그 일이 보다 심각하고, 평생을 떠나지 않을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단 말인가? 아무 말도 없이 갑작스레 단행된 이별이 정녕 고통의 씨앗을 남긴 거란 말인가? 하나의 떨어져나온 생명, 바로 이 아이를 말이다......


5. 불법침입

"다시 말해 후작 주변을 염탐하고 있었단 얘기로군요?...... 당신과 같은 이유로 말입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한번은 내 앞에서 후작에 대한 치명적인 원한에 사무쳐 있다는 얘길 한 적이 있긴 해요."

"이유가 뭐랍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그 자의 부하들에 대해서도 아는 게 있나요?"

"아라비안이라는 사람만 조금......"

"그 자는 어딜 가면 볼 수 있습니까?"

"몰라요. 혹시 몽마르트르의 술집에 가면...... 언젠가 들릴 듯 말 듯 그 술집 이름을 중얼거리는 걸 들은 적이 있거든요......"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나요?"

"네...... 에크레비스라고......"

남자는 그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날은 여자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6. 최초의 격돌

"만약 당신이 나라는 사람을 알게 된다면, 내 곁에 있는 한 위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될 겁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요. 손에 온기(溫氣)가 감돌고 나면, 당신이 얼마나 안전하고 용기를 가져도 되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부여잡은 채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몇 분이 지난 뒤, 다소 안정을 되찾은 여자가 말했다.

"이제 가요."

남자는 관리인 숙소 문을 두드려 대문을 열게 했고, 여자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7. 성채 경매

"네 이놈, 당장 나오지 못할까!"

순간 권총을 쥐고 있던 손이 쓱 사라졌다. 고르주레가 기둥 모퉁이를 돌아들었을 때는 그뒤로 이쪽 아치에서 저쪽 아치까지 쭈글쭈글 드리워진 송악의 장막밖에는 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형사반장은 분명 있던 적이 연기처럼 사라졌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 추격 속도를 늦추지 않았가. 그런데 이번에는 그 장막처럼 드리워진 송악으로부터 권총 대신 무쇠 같은 주먹을 내세운 팔 한 짝이 덜컥 튀어나와 달려드는 고르주레의 턱주가리를 정통으로 명중시키는 게 아닌가!


8. 이상한 협력자

"...... 지금 이 얘기를 하는 건, 그 문제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고, 내 관심을 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이 죽임을 당하고 보석을 도난당했습니다. 즉각 그에 대한 조사가 단행되었죠. 다른 모든 목격자와 마찬가지로 당신에게도 취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당신은 죽은 여자와 당신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또 무슨 이유로 이 성채를 매입한 걸까요? 별도로 무슨 조사라도 해본 겁니까? 그 당시 신문에서 내가 읽은 사실들말고 더 아는 건 없나요? 볼니크의 비극과 당신이 도둑맞은 유산 사이에 모종의 관계라도 있는 겁니까? 두 개의 사건이 같은 근원과 같은 전개양상 그리고 같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벌어지기라도 한 겁니까? 이상이 내가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정확한 답을 필요로 하는 의문점들입니다."


9. 꺽다리 폴을 쫓아서

아무튼 라울은 그 여자를 생각할 때마다 자기도 깜짝 놀랄 정도로 온몸이 달아올랐다. 그가 머리 속에 떠올리는 여자의 모습은 볼니크 성에서 라울 자신이 자꾸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던 불안해보이고 애매모호한 분위기의 앙토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떤 숙명의 법칙에 이끌리듯, 후작의 서재에 잠입해 떳떳치 못한 어둠의 작업에 여념이 없던 음험하고 번민에 찬 앙토닌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의 뇌리에 각인된 여자의 모습은 처음 보았을 때, 즉 중이층 비밀장치의 화면에 떠오른 귀엽고도 매혹적인 앙토닌이었다. 얼떨결에 잘못 찾아든 방문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 앙토닌은 삶의 행복과 희망에 들떠 있는, 천진하면서 아리따운 아가씨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매섭고 혹독한 운명 속에서 덧없이 스쳐지나간 순간이었지만, 정말이지 감미롭고도 상큼한 흥분에 흠뻑 취할 수 있었던 순간이기도 했다.

"다만-사실 이건 요즘 들어 라울의 머리 속에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출몰해온 난감한 문제였는데-다만 그 몇몇 수수께끼 같은 행동들의 이유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어떤 비밀스런 계획이 있기에 후작의 신임을 얻으려고 그 앞에서 알짱댄 것일까? 혹시 그가 자기 아버지라는 걸 눈치챈 건 아닐까? 어머니의 복수를 하려는 걸까? 아니면 재산을 노리는 것일까?"


10. 에크레비스 술집

에크레비스 술집은 다분히 수상쩍은 인간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낙오한 그림쟁이나 기자들, 실직했으되 딱히 일자리를 원치도 않는 근로자들, 얄궂은 복장을 한 창백한 젊은이들, 깃털 장식 모자와 화려한 빛깔의 블라우스를 걸친 여자들로 언제나 북적댔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얌전히 술만 마시는 분위기였다. 그것말고 만약 좀더 다채롭고 특별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바깥의 막다를 골목을 택해 들어가, 뒷방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맨 먼저, 푹 꺼진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은 어느 뚱뚱보 남자, 즉 이 술집의 주인이 손님 하나하나 들어서는 모습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곳으로 말이다.


11. 카지노 블루

여자는 한동안 지극히 멋진 자태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올이 매우 섬세한 황금빛 천이 머리와 얼굴 일부를 살짝 덮고 있었다. 물론 그 틈으로는 경탄할 만한 가냘픈 금발 타래가 살며시 비어져 나와 있었고......

"맙소사!"

갑자기 라울이 악다문 어금니 사이로 내뱉었다.

"뭔데 그러나?"

어느새 그의 곁에 와 있던 고르주레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12. 두 개의 미소

"그렇지...... 두 여자가 서로 싸우고 있어...... 그러다 이따금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철저히 따돌리고 말이야...... 결코 같은 미소를 공유할 수 없는 두 여자의 존재라...... 왜냐하면 당신이 가진 두 가지 이미지를 구별해주는 게 바로 그 서로 다른 미소이거든...... 하나가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면서 순박하고 어린 티가 나는 미소라면...... 다른 하나는 보다 음울하면서 어딘지 환멸을 담은 미소라고나 할까......"


13. 함정

마드모아젤, 주인님께서 부상당한 채 층계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지금은 중이층 서재에 누워 계십니다. 상태는 좋아지고 있습니다만, 주인님께서 마드모아젤을 보고 싶어하시는군요. 그럼 이만.

쿠르빌

 

쿠르빌의 필채를 잘 아는 하인마저도 혹할 만큼 잘 위조된 글씨들이었다. 그만하면 더 이상 클라라를 만류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긴, 설사 만류한다 해도 어찌 그게 가능하겠는가?


14. 대결

"참 바보 같은 질문이로군. 데를르몽 후작이야 거기 초대된 손님들 중 하나였을 뿐 아닌가?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게 전부이지."

"그건 경찰에서 내세운 얘기이고, 현실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지."

"그래, 그 현실이 어떤 건데?"

"엘리자벳은 다른 아닌 데를르몽 후작에 의해 살해되고 도난당했어."


15. 살인

그제서야 쿠르빌은 호주머니 속에서 신문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을 낚아 채 읽자마자 라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신문 제 1면 1단 기사가 굵은 활자로 다음과 같이 게재되어 있었다.

 

꺽다리 폴 살해되다! 그의 옛 정부였던 금발의 클라라는 범행현장에서 형사반장 고르주레의 손에 체포되었다. 경찰은 그녀를 살인 용의자로 확신하고 있으며, 아울러 카지노 블루에서 그녀를 납치했던 해로운 애인 라울 씨도 이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이 공범은 종적을 감춘 상태이다.


16. 조조트

워낙 감당하기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인 고르주레로서는, 만약 마담 고르주레가 붉은 머리채 풍성한 육감적이고 매혹적인 여인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남편에 대해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지지 못했다면, 그만큼 오래 가지 못했을 연애결혼이었다. 탁월한 살림꾼이면서도 다소 가벼운 데가 있고, 남자들 앞에서 애교도 심한 편인 아내는 고르주레 씨의 체면에는 별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동네 댄스홀을 자주 드나드는 편이었다. 그러면서 이 문제 자체에 대한 남편의 잔소리 시도는 일절 용납치 않는 것이었다. 대신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남편이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적절히 받아줄 줄 아는 여자였다.


17. 불안

나중 얘기지만, 그러던 어느 한순간, 지극히 단순하고 자연스런 현실에 맞닥뜨리고, 그때까지의 수수께끼가 깔끔한 해결책을 동반한 채 뒤통수를 때리자, 라울은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을 오히려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다. 라울 스스로 생각해봐도, 실재하는 무엇이라면 적어도 삶이 매일같이 제공하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상처럼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어 있는 법, 만져보고 감지할 수 있는 인간적인 진실 파악 능력만 제대로 활용해도, 어떤 사태이든 상황에 휩쓸리다가 마지못해 납득하기 훨씬 전부터 대번에 그 정곡을 꿰뚫을 수 있어야 옳았다. 자고로, 사방 백일하에 그 전모가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도록 문제가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18. 두 개의 미소에 얽힌 사연

라울의 삶-즉 아르센 뤼팽의 인생-은 분명 모든 논리적인 현실과는 상반되는 놀랍고도 예기치 못한 사건들과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인 사태들, 도무지 불가사의한 현상들과 충격적인 상황들로 북적대는, 그런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훗날 아르센 뤼팽이 고백한 바에 따르면-그 날 금발의 클라라가 전혀 예상치 못하게 눈앞에 나타났던 일이야말로 그의 가장 깊은 내면부터 뒤흔들어버린 최고의 충격적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19. 고르주레, 광분하다

고르주레 부부간의 대화는 마치 폭풍우를 연상시켰다. 다분히 허구적인 인물에 대해서 남편이 공연한 질투심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조조트는 세련되고 예의 바르며 행동거지가 무척이나 섬세한, 그야말로 재치만점의 매혹적인 신사가 가질 수 있는 온갖 장점들을 끌어다가 심술궂게도 그 인물을 잔뜩 치장했다.


20. 승리냐? 패배냐?

"아하! 그렇게 말해주다니 정말 황공하구만그래! 정말로 당신 그 여자가 날 좋아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어쩌라구? 내가 좀 거부할 수 없는 존재여야 말이지! 앙토닌도 날 좋아하고, 올가도 날 좋아하고, 조조트도 날 좋아하고, 쿠르빌도 날 좋아하고, 고르주레도 날 좋아하고......"


21. 라울의 맹활약

"......너 혹시 「몽테-크리스토 백작」읽어보았니? 그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어떤 식으로 등장했는지 기억나? 세상 곳곳에서 그를 알았던 몇몇 사람들이 함께 점심을 들기 위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 수개월 전 정확히 그 날 정오에 나타날 거라 약속을 한 건데, 여행 길이 불확실한 데도 불구하고 주인은 반드시 정확한 시각에 그가 나타날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정오의 종소리가 울렸더랬지. 마침내 마지막 종소리가 울리는 순간, 주인이 이렇게 말했단다. '여러분, 몽테-크리스토 백작님이십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지금 그와 같은 믿음과 불안감을 함께 간직하면서 기다리는 듯하구나......"


22. 페르세우스 성좌(星座)의 범행
"......이 돌멩이는 분명 사건 수사 시 경찰의 눈에도 띄었을 것입니다만, 아무도 특별하게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들 총알이라든가,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뭔가를 찾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내 눈에는 이 돌이 여기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강력한 현길의 증거로 보였답니다. 물론 이것말고 다른 증거들도 있지요. 우선 사건이 일어난 시기 말입니다. 8월 13일. 지구가 문제의 유성군 아래를 지나가는 시기죠. 솔직히 말해서 이 8월 13일이라는 날짜가 내 정신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격이었습니다...... 그 다음 또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있는데, 이건 그저 논리적인 추론을 돕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과학적인 증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제 나는 이 돌멩이를 비시에 소재한 한 화학 및 생물학 실험실로 가져갔습니다. 거기서, 새카맣게 탄 인간의 신체조직 일부가 옻칠로 표면 처리된 상태에 있는 걸 보게 되었죠...... 네, 불붙은 화구(火球)에 맞아 새카맣게 타버린 생체로부터 피부와 모발이 포함된 상태 그대로 떨어져나간 조직 덩어리였습니다. 한데 그 돌조각에 아예 찰싹 달라붙어서 세월이 지나도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하여튼 그 적출물(摘出物)은 화학자의 손에 의해 잘 보관되어서 공식적인 연구논문의 소재가 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무슈 데를르몽이나 고르주레 선생이 원하기만 하면 아마 언제든 제출 받아 검토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해설: 아르센 뤼팽의 작품론 3

-시대상의 반영, 아르센 뤼팽 시리즈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단순한 추리 모험소설이라는 장르를 뛰어넘어 당대의 사회상과 시대적 조류를 충실히 담아낸 풍속소설로서도 뜻깊게 읽혀질 수 있다. 실제 작품이 쓰여진 연대로 보자면 1900년대에서 1910년, 1920년, 1930년대로 널리 분포되어 있지만, 웬일인지 모리스 르블랑은 아르센 뤼팽의 모험담 대부분을 1900년대에서 제1차세계대전 전까지의 소위 벨 에포크(Belle Epoque)라고 불리는 '좋은 시절'에 할애하고 있다.

 

이처럼 뤼팽의 모험담이 애써 위치하고자 한 시대는 20세기로 들어선 파리라는 대도시가 그 이전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였으며, 이를 향수 어린 마음으로 추억하는 후대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붙인 별칭이 바로 벨 에포크인 것이다. 코르셋을 과감히 떨쳐버린 여성들의 맵시 있는 패션과 러시아 발레단의 전위적인 무용, 큐비즘으로 대표되는 혁신적인 예술 운동, 온갖 대중 잡지의 폭발적인 발간, 사진과 영화의 대중화, 그리고 엑스선과 무선 전신, 자동차, 비행기 등, 나날이 현대의 기적을 일신하는 과학문명...... 가히 벨 에포크는 모든 것이 놀랄 만한 속도로 변화하는 긍정과 모험의 자유분방한 시절이었다.

아르센 뤼팽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1905년 당시 체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무정부주의자이자 도둑인 알렉상드르 자콥을 모델로 했다는 설도 잇고, 실제로 그 당시 사교계의 살롱마다 우아한 취향의 사기꾼이 심심치 않게 출몰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지고 하지만, 무엇보다 인생에 얽매인 그 무엇도 없이 자유와 방황, 미녀와 예술품, 삶의 희열을 찾아 끝없는 모험을 계속하는 아르센 뤼팽 자신의 운명이야말로 벨 에포크라는 시대의 산물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시대예찬이든, 시대유감이든, 아르센 뤼팽은 시대를 무대로 해서 한바탕 운명의 도박을 펼쳐가는 당대의 주인공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뇌리에 아직까지도 아르센 뤼팽의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깊이 각인되어 잇는 레오 퐁탕의 삽화 속 모습 역시 단연 벨 에포크의 하이클래스 신사복장이다. 실제로 소설 속 뤼팽이 그와 같은 복장을 갖춘 일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복장 자체에 대한 묘사도 중구난방이지만 어느새 뤼팽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버린 시르햇에 외알 안경, 흰 장갑에 말쑥한 지팡이, 검은색 프록코트 차림새는 사실 그 당시 부르주아 신사들의 보편적인 전유물인 것이다.

어디까지나 동시대의 파리지앵들을 주요 독자로 발행된 잡지에 연재를 통해서 탄생된 뤼팽 시리즈가 그 시대의 사회 분위기와 정서를 가장 민감하게 대변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종종 실제 사건들이나 인물들, 심지어 그 당시 유행어 등이 불쑥불쑥 언급되면서 뤼팽이라는 허구의 인물은 더없이 강력한 현실성을 부여받곤 한다.

 

이처럼 단편적이고 재치 만점의 테크닉들은 어쩌면 대중 문학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경쾌한 자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뤼팽 시리즈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다루어지는 사건 자체를 동시대의 가장 화제가 되었던 사건들에서 직접 가져와 시대적 상황을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데에 앞장선다.

 

그런가 하면 「수정마개」의 사건이 세계사적으로도 너무 유명한 '파나마 운하 스캔들'을 모델로 한 것임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경향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더더욱 적극성을 띠게 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아직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813의 비밀」에서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일명 카이저)의 모습이 그나마 위엄을 갖춘 군주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데에 반해서, 이미 전쟁이 터지고 난 후인「포탄 파편」에서 그려지는 황제는 그저 허세로 가득 찬 적군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는 모습이다. 이와 같은 이미지의 변화야말로 경쟁국가의 원수에서 침략군의 수뇌로 그 대상이 변함에 따라 함께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쪽의 정서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와 맥락은 다르지만 아르센 뤼팽에 등장하는 영국인에 대한 혐오감 내지 경멸 어린 태도 또한 그 당시로는 확실한 이유가 있는 정서를 밑바탕으로 한 것이다.

 

뤼팽 시리즈를 읽는 현대 독자들의 눈에는(더구나 이방인으로서!) 이처럼 지나치게 애국주의적이다 못해, 국수주의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이 다소 불만일 수는 있으나, 어디까지나 당대의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 결과라는 데에 먼저 공감을 하는 것이 참다운 뤼팽 시리즈 감상을 위한 순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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