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이빨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0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우리 민족 고대신화가 떠올랐다. 이사금 이야기. 우리 나라에서 치아가 많은 사람이 덕이 많다고 했던 것은, 다분히 치위생이 존재하지도 않아 아마도 대부분 치아 건강이 좋지 못했을 고대 사회에서 치아가 썩지 않고 보존된다는 것은 남과는 다른 능력으로 간주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요즘 세상의 딱 벌어진 어깨, 늘씬한 다리, 작은 얼굴, 잡티 없는 피부와 같은 지위가 아니었을까? 참, 호랑이 이빨의 형태가 위와 아래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호랑이 이빨」은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 「813의 비밀」과 더불어 가장 분량이 많은 대작으로, 걷잡을 수 없이 거듭되는 반전은 물론,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논리와 영화화되어도 손색없을 극적(劇的)인 장면 전개가 압권이다. 전쟁 중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후(戰後)의 상황을 무대로 한 점이 이채롭고, 「813의 비밀」에서부터 「황금삼각형」「서른 개의 관」에 이르는 아르센 뤼팽의 행보가 수시로 환기되어, 일관된 삶의 궤적을 되짚어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엄청난 유산 상속권을 둘러싸고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음모의 회오리에 휩쓸리면서도 끝끝내 대의와 진실을 향한 큰 시야를 포기하지 않는 뤼팽의 모습 속에서, 어느덧 40대로 훌쩍 들어선 대협객의 완숙한 경지를 한껏 음미할 수 있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의 야심을 분석 해보기로 한다.

 

제1부 돈 루이스 페레나
1. 다르타냥, 포르토스, 몬테크리스토

"그렇습니다, 청장님. 동료들은 아르센 뤼팽이라고 부를지 모르나, 우리 상관들은 그를 그냥 '영웅'이라고 부르지요. 마치 다르타냥만큼 용맹하고, 포르토스처럼 강인하며......"

"몬테크리스토처럼 신비스럽겠지요......"

백작의 발끈하는 대꾸를 경찰청장은 히죽 웃으면서 재치 있게 받아넘겼다.

"......모든 사실들이 외인부대 제4연대로부터 입수한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더군요. 뭐 이자리에서 그 내용을 깡그리 소개할 필요까진 없으나, 불과 2년 사이에 전공 훈장과 레종도뇌르까지 수여받고, 전군(全軍)을 앞에 둔 일일명령 시 도합 일곱 번이나 모범용사로 지목될 마큼 미증유(未曾有)의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했습니다. 그리고 또 우연히 주목하게 된 사실은......"


2. 죽어야 할 자

붉은 껍질을 반구 형태로 뚫고 들어간 두 줄의 이빨 자국은 과육 속에까지 산뜻하고 가지런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위쪽에는 여섯 개의 이빨 자국 각각이 선명한 데 반해, 아래쪽에는 그냥 둥그스름한 곡선으로 딱 한 줄 뭉뚱그려져 있었다.

페레나는 그 두 줄의 자국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못한 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호랑이 이빨이로구만!...... 호랑이 이빨이라구! 베로 형사가 가지고 온 초콜릿에 찍혔던 것과 똑같은 자국이야! 우연의 일치치고는 정말 희한한 일이군그래! 정말로 우연일까? 베로 형사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며 경찰청으로 가져온 그 초콜릿의 이빨 자국과 이 능금에 찍힌 이빨 자국이 과연 동일인의 것이라고 믿어도 될까?"

그쯤에서 페레나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조사를 강행하기 위해 이 증거물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어야 할까? 아니면 사법당국에 얌전히 인도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중, 갑자기 손에 닿는 과육의 감촉 자체가 너무도 끔찍하고 거부감이 치밀어올라, 거의 반사적으로 원래 있던 덤불 속에다 훌쩍 내던지고 말았다.


3. 무광 터키석
4. 강철 셔터
5. 흑단 지팡이를 가진 사나이
6. 셰익스피어, 제8권
7. 헛간 속의 유골
8. 뤼팽의 분노
9. 소브랑의 해명
10. 파국

제2부 플로랑스의 비밀
1. 사람 살려!

나중에 아르센 뤼팽이 이 참혹한 모험의 에피소드를 나에게 들려줄 때는, 다소 뻐기는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 당시에도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도 충분히 놀랍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은, 그때 소브랑과 마리-안 포빌의 결백을 즉각적으로 수용해서 문제를 여지없이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는 사실일세. 내 장담하건대, 그거야말로 심리학적인 가치로나 범죄 해결의 관점으로 보거나,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명탐정의 가장 유명한 추리를 훌쩍 능가하는, 일류 솜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마리-안 포빌에 관해서는 이빨 자국 하나만 생각해도 움직일 수 없는 확신에 도달할 정도이니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빅토르 소브랑의 아들이자, 코스모 모닝톤 유산의 상속자가 되는 가가스통 소브랑은 결국 흑단 지팡이의 사나이면서 앙스니 경감의 살해자이니, 남편 살해범으로 밝혀진 마리-안 포빌의 죄목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셈이었지...... 한데, 과연 무엇이 내 안에서 그런 돌발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이겠냐구? 왜 그토록 명백한 증거들과 상반되는 발걸음을 내디뎠겠냐 이 말일세!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사실을 믿게 된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인정할 수 없는 일을 인정한 이유가 무어냔 말일세!......글쎄......아마도 그건, 정녕 소중한 진실이란 지극히 특수한 방식으로 마음을 두드려대기 떄문이 아닐까?"


2. 쉬셰 대로의 폭발사고
3. 증오의 화신
4. 베베르, 복수하다
5. 열려라, 참깨!
7. 황제, 아르센 1세
8. 함정을 조심하라, 뤼팽!
9. 플로랑스의 비밀
10. 루피너스의 장원

그와 플로랑스 르바셰르의 결혼으로 인해 얼마나 세간이 떠들썩했는지는 굳이 이 자리에서 되짚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다시 별의별 논쟁이 들쑤시듯 일어났고, 당장 아르센 뤼팽을 체포해야 한다는 요구도 몇몇 신문에서 제기되었다. 하지만 과연 누가 나설 수 있겠는가? 설사 이제는 그의 진짜 정체에 대해 의혹의 여지가 없고,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과 루이스 페레나라는 이름이 같은 글자들의 바꿔치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고 해도, 합법적으로 아르센 뤼팽은 사망했으며, 합법적으로 돈 루이스 페레나는 생존해 있는 상태. 이 세상 그 누구도 죽은 아르센 뤼팽을 살려낼 수 없고, 살아 있는 돈 루이스 페레나를 죽일 수는 없었다.

오늘날 그는 우아즈 강변으로 내리 뻗은 근사한 협곡들을 끼고 위치한 생-마클루라는 마을에 살고 있다. 화려한 꽃들이 만개한 정원 한 구석, 초록빛 덧창들로 예쁘장하게 장식된 그 장밋빛 아담한 집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일요일만 되면 사람들은 재미 삼아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혹시라도 딱총나무 생울타리 너머, 아니면 마을 광장에서라도 그 유명한 아르센 뤼팽이라는 자의 모습을 흘낏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는 것이다.

 

핍박받고, 희생당하고, 삶의 열정을 상실한 사회적 약자들......그들 모두에 대해 돈 루이스는 한결같이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명철한 지성과 자상한 조언, 경험과 힘을 그들과 함께 하고, 필요하다면 직접 시간을 할애해 자기 스스로 나서주기도 한다.

아울러 파리 시 경찰청의 밀사(密使)라든가 현지 경찰서 말단형사들이 종종 찾아와 도저히 골치만 아픈 사건을 맡기기도 한다. 물론 그 방면에서도 돈 루이스는 전혀 고갈되지 않은 정신력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오래 된 철학서적들에 둘러싸여 기분 좋은 독서삼매에 빠질 때를 제외하고는, 집 밖으로 나와 정원을 가꾸는 것도 빠트릴 수 없는 일과이다.

 

크뤽생스 루피너스('크뤽생스'라는 이름은 모리스 르블랑이 임의로 지어낸 이름이다/역주), 알록달록한 루피너스, 향기가 기막힌 루피너스 등등, 그야말로 모든 루피너스의 변이종이 총 집합했다고 볼 수 있는데, 뭐니뭐니 해도 최근에 개발해낸 뤼팽의 루피너스가 최고로 손꼽을 만하다(학명이 루피너스인 이 꽃은 일명 층층이부채꽃[lupin]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철자가 뤼팽[Lupin]의 철자와 동일한 데에서 착안한 장면이다/역주).

 

"나쁜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그를 그리스의 칠현(七賢)에 비유한다든가, 미래의 세대한테 일종의 귀감으로까지 추어올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에 관한 평가를 우리는 좀 더 관대하게 내려줘야 할 거라는 점만은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의 선행은 끝 간 데가 없는 데 반해, 악행이라고 해봐야 적당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도둑으로서 그가 자잘한 재주를 부릴 때 사람들은 기분 좋게 웃어제치지만, 용기 백배한 모습을 보이고, 과감하면서 위험을 모르는 모험정신을 과시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열광하는 것이지요. 냉정 침착하면서 명석한 사고력과 더불어 유머러스한 기질과 역발산(力拔山)의 호탕한 기개를 두루 갖추고,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활력 넘치는 미덕이 힘차게 들끓던 시대, 자동차와 비행기가 탄생한 영웅적인 시대, 전쟁 이전의 펄펄 살아 숨쉬는 시대(벨 에포크[Belle Epoque]/역주)를 종횡으로 주름잡은 화려한 모습에 우리는 아낌없는 박수를 쳤던 것이지요!"

그러자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과거의 그에 관해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오늘날 그의 모험은 이로써 일단락되었다는 애기인지요?"

"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르센 뤼팽에게 모험이란 삶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살아 있는 한, 그는 온갖 파란만장한 활극의 중심과 종착점에 서 있을 겁니다. 언젠가 그도 이렇게 말했었지요. '내 무덤 위에 이렇게 새겨 주길 바라네. 협객, 아르센 뤼팽, 이곳에 잠들다'(「813의 비밀」p.505 참조/역주). 그저 통 큰 소리 같지만 엄연한 진실입니다. 그는 정녕 모험의 대가라고 할 만하지요. 물론 옛날에는 모험이 그로 하여금 남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방향으로 너무 자주 몰아가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열심히 싸워 이긴 승자에게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영예를 안겨주는 치열한 전쟁터로 이끌어가기도 했지요. 바로 거기서 그는 자기 몫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장면에서 행동하고 분발하며 죽음과 운명마저 분연히 딛고 일어서는 그의 진짜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겁니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따금 경찰서장을 두들겨패고, 가끔은 예심판사의 시계를 슬쩍했던 그를 용서해주어야 하는 거죠......자, 이제 우리의 박력교수(迫力敎授)에게 너그러워져야 할 때가 된 겁니다."

그리고 나서 돈 루이스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결코 간과해선 안 될 그만의 미덕이 있지요. 지금처럼 침울한 시대에는 더더욱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부분인데, 바로 멋진 웃음 말입니다!"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5

 

-아르센 뤼팽의 야심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도둑, 즉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시작한 아르센 뤼팽의 경력이 813의 비밀, 포탄 파편, 황금삼각형, 서른 개의 관등을 거치면서, 점차 공익(公益)과 질서의 수호자적인 이미지로 옮겨가는 경향의 정점(頂點)을 보여준다는 사실일 것이다. 1920831일부터 이 소설을 연재하기로 한 르 주르날지는 하누 전인 830, 작가의 변() 삼아, ‘아르센 뤼팽의 도덕성(La Moralite d`Arsene Lupin)’이라는 제목으로 모리스 르블랑 자신의 글을 게재했는데, 그중 이와 같은 경향의 의미를 정확히 짚어낸 대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아르센 뤼팽)는 여전히 사회의 변방에서 법질서에 저항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가 법질서를 위반하는 경우란 오로지 사회를 이롭게 하고자 할 때뿐이다. 그는 또한 열렬한 애국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조국에 봉사하고 그 영광을 위해 헌신하므로, 원칙대로라면 범법자인 그를 잡아들여야 할 조국이 어쩔 수 없이 그 노고에 고마움을 표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만다. 근본적으로 그는 무공훈장이랄지 군모(軍帽)의 화려한 깃털장식 따위에 열광하는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측면이 많고, 지독한 반동세력에 속하면서 부르주아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보수주의자다운 데가 있다.

 

요컨대, 사회의 아웃사이더이자 그 사회의 수호자라는 모순된 정체성이야말로 현대적인 시각에서 우리 모두 진지하게 조명해볼 가치가 있는 아르센 뤼팽의 본령(本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와 같은 정체성은 멀리 로빈후드에서 가깝게는 배트맨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가 유구한 영웅의 계보에 속한다. 때로는 법이라든가 사회체제를 유린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보다 더 넓고 높은 차원의 도덕성을 추구하며, 테두리 내에 속박되지는 않되, 궁극적으로는 그 테두리 안에 속한 가치를 보호하는 영웅의 모습.

 

이 소설은 일단 연재발표가 끝난 다음, 1921액션과 모험소설총서에 두 권으로 분권되어 출간되었고, 1932년에는 물음표(le point d`interrogation)” 총서의 일환으로 재출간된 바 있는데, 이때는 마지막에 가서 뤼팽이 은둔생활을 때려치우는 것으로 수정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번 번역은 오리지날을 저본(底本)으로 했음을 밝혀둔다.

 

아르센 뤼팽은 사실 기암성이나 813의 비밀에서와 같은 엄청난 야심을 품기 이전, 그저 날렵한 도둑의 활약상을 보여줄 당시부터, 일반적인 도둑과는 구분되는 여러 가지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중 포탄 파편의 해설에서 다룬 바 있는 의적(義賊) 스타일의 행태를 제하고도 한 가지 뚜렷하게 드러나는 점은, 바로 도둑치고는 금전적인 이득에 대단히 관대하다는 점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또 한 가지 독특한 절도(竊盜) 행태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골동품과 고()미술품에 대한 집착이다.

 

이에 대해, 단순히 골동품의 물질적 가치 때문이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으나, 프랑시스 라카생 같은 뤼팽 전문가는 보다 심오한 차원에서 그 해석을 모색하는 입장이다.1) 유독 골동품과 고미술품에 집착하는 그의 태도 속에는 프랑스의 역사 자체, 그 세습권(世襲權)을 찬탈하려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결코 물질적 가치를 노리는 고가품 절도행위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무상(無常)한 현재를 사는 인간으로서 이른바 대문자(大文字)로 표현되는 역사(History) 속으로 걸어들어가 유구한 시간(Time) 안에 거한다는 것은, 지금 이곳이라는 시간적 한계를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영웅은 항상 자신의 개체적 능력과 존재의 한계성을 뛰어넘고, 끊임없이 현실을 초극하려는 야심의 주인공이다. 역사와 전통의 산물인 보물을 손에 넣음으로써 그와 같은 존재론적 변신을 꾀하는 아르센 뤼팽의 모습이 가장 시적(詩的)으로 형상화된 모험담이 바로 기암성이다. 여기에서는 아예 프랑스 역사가 지켜보아온 모든 보물이 에기유 크뢰즈라는 속이 빈 기암(奇巖) 속에 통째로 보관되어 있는데, 그 자체로 하나의 왕국이자, 전통(Tradition)이나 다름없는 아지트를 처음 발견했을 때를 두고 뤼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기암성p.259).

 

“(......)내가 제일 처음 이 버려진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날, 기분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아는가? 잊혀졌던 비밀을 되찾고, 그 주인, 그것도 유일한 주인으로서 이곳에 들어서는 그 기분이 과연 어땠겠는가 말이네! 보다시피 저 쟁쟁한 존재들의 뒤를 잇는 당당한 계승자로서 말이야! 제왕(諸王)의 뒤를 이어 기암성에 살게 되다니......!”

 

기암성의 왕() 뤼팽이 암벽에 새긴 찬란한 이름에 도취할 뿐, 보물을 뿌리며 통치하는 데에는 무관심했던 반면, 813의 비밀에서는 분명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둔 긴박한 국제관계에서 새로운 유럽의 재편(再編)이라는 현실적 전략이 엄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략 자체가 다소 황당하다고 할 정도로 원대한 인 만큼, 정작 중요한 건 아르센 뤼팽 본인의 고양된 자의식이라는 느낌을 역시 지울 수가 없다(p.499).

 

뭔가 다른 삶을 향한 열망이 가슴 한복판을 불 지피고 있었을 뿐, 하등의 구체적인 기도(企圖)가 전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개 도둑에서부터 하나의 왕국을 가진 절대자에 이르기까지 아르센 뤼팽을 지탱시켜오는 추진력과 야심은 이처럼 계산적이기보다는 본능적이고, 현실적이기보다는 운명적이다. 비록 황금삼각형서른 개의 관에서는 스케일은 여전히 원대하되, 야심의 지향점이 대단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변하기는 하지만(막대한 황금을 이탈리아의 대전 참전비용으로 충당한다든지, 신의 돌이라는 보물을 프랑스 국립연구소에 기증하는 등), 이는 세계대전 중이라는 극히 예외적인 시대상이 반영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요컨대 아르센 뤼팽에게 야심이란, 여하한 구체적 대상을 지향하기보다는, 한 개인의 개체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본능적 에네르기 자체를 의미한다. 이는 호랑이 이빨에서 그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듯, 끊임없이 모험과 더불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만의 운명이 가진 다른 이름이라고 할 것이다.

아르센 뤼팽에게 모험이란 삶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살아 있는 한, 그는 온갖 파란만장한 활극의 중심과 종착점에 서 있을 겁니다.”

 

1) Francis Lacassin, “프랑스 역사에 대한 절도(竊盜)의 예술(L`art de cambrioler I`histoire de France)”, Europe () 19798-9, 뤼팽 특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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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개의 관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9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벌써 한물간 유행어지만, '민폐 캐릭'이라는 말이 있었다. 주로 드라마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감정적으로 행동하여 일을 그르치거나, 여러 남자들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남자들을 위기로 빠뜨리면서도 정작 본인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여자 캐릭터를 의미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정작 대중문화 속 캐릭터는 예전 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불과 몇 년 전의 이야기이며, 이 경우 시대에 맞추어 변화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작가의 게으름에 대한 질타와, 작품 보는 눈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며 해당 배우에 대한 비웃음이 함께 동반되었다. 물론 지난 일이다. 요즘 이런 캐릭터를 내놓을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드라마 제작진도, 최종 허락을 해 줄 방송국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며 내내 느꼈던 불편함이 바로 이 부분이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 때문일까. 이 소설 속 베로니크는 내내 독자들로 하여금 답답함을 유발하고 끝내는 짜증이 나게 한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랑 어쩌다 보니 결혼, 헤어지고 수녀원에 들어가고 나서도 적응 못하고 나와버리는 모습, 평생 아들과 아버지를 그리워했다면서도 막상 대면의 순간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의 연속... 가장 나를 기함하게 만든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혼자 살아남은 가운데 이후에 일어날 일들이 두려워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배도 떠나보내고 섬에서의 고요함을 은근히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민폐의 총집합인데, 이런 캐릭터가 서브도 아니고 당당히 메인을 차지한 데다가 심지어 제 1부의 제목은 그녀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의 당돌하면서도 발랄한 여자 캐릭터들이 그리워졌다. 이런 식으로 남자 주인공의 인간적인면모를 돋보이기 위해 대상화된 여자 캐릭터들을 등장 시킬 바에는 차라리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처럼 여성을 혐오하여 아예 소설 속에 등장시키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소설은 여러 모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열개의 인디언 인형' 혹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시킨다. 굳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지 이야기하는 것은 입 아프다. 최근 크리스티의 소설이 또 영화화가 될 예정이며 여주인공으로는 안젤리나 졸리가 거론되고 있다는 뉴스가 있었다. 크리스티의 소설이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받은 이유는 단 한 번 등장하고 마는 인물이라도 작가가 그 인물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읽어도 재미있는 모리스 르블랑의 소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유는 소설 속 인물들이 그 시대에 박제된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겠지. 

 

어느 외딴 오두막. 한쪽 손목이 잘린 늙은이의 시신 옆에서 발견된 쪽지에는 브르타뉴 지방 특유의 양갈래 매듭이 늘어뜨려진 검은 벨벳 쓰개를 착용한 세 여자가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고, 나머지 한 여자는 바로 베로니크 자신의 얼굴. 14년 전, 남편 보르스키와 엄격한 아버지 데르즈몽의 납치극으로 가족 모두를 잃고 수도원으로 잠적한 베로니크는, 자신의 처녀적 성이 새겨진 표지를 따라 운명처럼 '서른 개의 관'이란 섬으로 이끌어진다.

 

<서른 개의 관>은 전작(前作) 두편과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어느 외딴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악몽과도 같은 모험담이 펼쳐진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중세의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시편들이 떠들썩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모리스 르블랑은 이런 종류의 시편에서 영감을 받아, 매우 섬뜩하고 피비린내 나는 한 편의 드라마를 구상한다. 역시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특히 프랑스 고대문명에 뿌리를 둔 유구한 전설과 그 신비주의적 분위기가 이색적이며, 극단적인 위기상황 속에서도 항상 경쾌한 기지를 잃지 않는 아르센 뤼팽의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가운데, 특히 막강한 '구원자'로서의 뤼팽 이미지가 완벽하게 부각되고 있다. 해설로는 아르센 뤼팽의 트레이드 마크인 아이러니를 분석해 본다.

 

1부 베로니크

프롤로그

1. 버려진 오두막

여자는 얼른 그것을 주워 펼쳐보았다. 그리고 미처 완전히 펼치기도 전에 손부터 부들부들 떨면서 이렇게 더듬대기 시작했다.

"아!......하, 하느님......맙소사!......아! 하느님! 맙소사!......"

여자는 안간힘을 다해 정신을 가다듬으려 했고, 눈을 부릅뜨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렇게 버틸 수 있던 것도 기껏해야 한 몇 초나 될까? 그나마 그 짧은 시간 동안 점점 더 두텁게 눈앞을 뒤덮으려 하는 안개 너머로 망막에 붉은 빛깔로 각인되어오는 것은 끔찍하게도 네 그루의 나무 줄기에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는 네 명의 여자 그림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면(前面) 중앙에 위치한 첫번째 여자는 베일에 가린 몸뚱어리가 이미 뻣뻣이 경직된 상태였고, 표정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맙소사! 그 얼굴이라는 것이 충분히 알아볼 만한 사람, 즉 자기 자신이 아닌가 말이다! 그랬다. 그것은 틀림없는 베로니크 데르즈몽 자신의 얼굴이었다.

게다가 머리 위, 나무줄기 꼭대기에는 고대 관습에 따라 카르투슈(꽃무늬 등으로 장식된 일종의 틀로서 그 안에 잠언, 가문[家紋] 따위를 새긴다/역주)가 걸려 있고, 그 안에 꼭꼭 눌러 쓴 필치로 처녀시절 베로니크의 서명 이니셜 세 글자와 장식 선이 선명하게 담겨 있는 것이었다. V. d`H. ......즉 베로니크 데르즈몽이라고 말이다!

 

2. 바닷가

3. 보르스키의 아들

4. 사레크 섬의 가엾은 사람들

5. 네 명의 여자가 십자가형을 당하리니...

"가만있자......셈이 맞아떨어지는군......혹시 배에 몇 사람이나 타고 있었는지 아시나요, 우리 세 자매 빼고 말이에요? 알고 있어요? 바로 스무 명이에요......그렇다면, 한번 세어보세요......스무 명에다가 첫번째로 죽은 마게녹이 있고......그 다음으로 무슈 앙투안이 죽었고......다음으로는 프랑수아 녀석과 무슈 스테판이 일단 행방불명이니, 죽은 걸로 치고......그 다음 오노린과 마리 르 고프가 죽었고......가만있자......한번 세어보자구"

 

어스름한 서광이 서서히 하늘 한곳에 번지고 있었다. 주변의 사물들도 그에 따라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현실적인 정체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아울러 다리 전체가 허물어져 깡그리 사라지고 난 뒤의 텅 빈 심연이 베로니크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양쪽 섬 지애 사이에는 50여 미터에 이르는 간격이 생겼고, 저 까마득한 아래에 들쭉날쭉 접근 불가능한 계속의 능선만 두 섬을 한 덩어리로 이어주고 있었다.

드디어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런데, 무심코 고개를 들어 맞은편 언덕을 바라보는 순간, 베로니크는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대(大)참나무 숲의 제일 전방에 위치한 세 그루의 나무가 낮은 가지들이 말끔히 제거된 채로 우뚝 솟아 있었고, 그 위에는 활짝 벌린 두 팔이 뒤로 젖혀지고 누더기 치마 아래로 두 다리가 꽁꽁 동여매인 채, 검은 머리쓰개의 띠로 반쯤 가려진 창백한 얼굴의 아르시냐 자매 세 명이 목에 밧줄이 친친 감긴 처참한 몰골로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었다!

 

6. --비앵

7. 프랑수아와 스테판

8. 일촉즉발

"당신도 아다시피, 이곳 사레크에는 잠수함 기지가 위장되어 있을 가능성을 타진하러, 군 장교들이랄지 공무원들 몇몇이 수차례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근에는 파트리스 벨발(「황금삼각형」참조/역주)대위라는 상이용사가 특별 대리인 자격으로 파리에서 급파되어 무슈 데르즈몽과 인간관계를 맺은 바 있지요. 그때 무슈 데르즈몽은 그에게 섬에 나도는 예의 그 전설들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모두가 느끼고 있는 걱정거리에 대해 귀띔해주었답니다(바로 마게녹이 떠난 다음날이었지요). 한데 벨발 대위는 유달리 그 얘기에 관심을 보이면서 한다는 말이, 파리에 사는 자기 친구 중에 에스파냐이던가 포르투갈이던가, 아무튼 그쪽 출신인 돈 루이스 페레나라는 신사가 있는데, 그에게 모든 얘기를 전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글쎄요, 보아하니 대단한 인물인가 싶던데, 이 세상 제아무리 복잡한 수수께끼도 척척 해결해내고, 엄청 위험하고 대범한 일들을 수행해나가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하더군요......아무튼 벨발 대위가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아 돈 루이스 페레나라는 이름으로 편지 한 장이 왔는데, 그게 바로 내가 얘기한 두번째 편지인 셈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무슈 데르즈몽은 우리에게 그 첫 대목만 읽어주었지요."

 

9. 죽음의 방

10. 탈출

2부 기적의 돌

11. 신의 재앙

"자, 마담......이제부터 우리가 나눠야 할 대화는 아마 길고도 곤혹스러운 내용이 될 거요. 그러니 일단 어디 좀 앉는 게 어떻겠소?"

그리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대답이 얼른 튀어나오지 않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한 태도로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 이 외발 원형탁자 위에 기운을 북돋을 만한 것도 준비되어 있으니......자, 비스킷하고 오래 된 포도주도 조금 있고, 샴페인도 한 잔쯤 나쁠 건 없겠지......"

그는 다소 과장된 예의를 차렸는데, 그것은 마치 반쯤 야만족이나 다름 없는 게르만인들이 우리도 문명의 섬세함을 갖출 만큼 갖췄다고 지레 내세우는 듯했고, 이미 정복자의 당연한 권리로 조금은 거칠게 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여성한테 어울리는 세련된 에티켓쯤 얼마든지 익숙한 처지라며 시위라도 하는 듯했다. 베로니크는 예전부터 바로 그와 같은 면면을 대할 때마다, 남편의 진짜 태생이 어디인지 더없이 생생하게 실감하곤 했었다.

 

12. 골고다 언덕

13.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14. 늙은 드루이드 사제

15. 격돌

16. 보헤미아 왕가의 판석

17. 운명이 점지한 잔인한 왕자

18. 신의 돌

"맞는 말입니다. 심지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일정한 영향을 줄 정도로 집요한 전설이니까요. 솔직히 우리 중 누구도 그 기적의 강박관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웬걸요? 적어도 나는 기적을 믿은 적은 없는 걸요!"

이번에는 대위가 발끈했고, 아이도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아닐걸요! 아마도 속으로는 어느 정도 믿고 있을 겁니다. 최소한 일말의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들 있지요. 만약 그렇지만 았았다면 필경 지금보다 훨씬 이전에 진실을 파헤칠 수 있었을 겁니다!"

 

"바로 맞췄다, 꼬마야! 라듐이지. 사실 방사능현상은 거의 모든 자연현상 속에서 감지된단다. 온천수의 효과에서도 느낄 수 있듯, 자연 전체에서 그런 현상이 확인된다고도 볼 수 있어. 하지만 라듐처럼 보다 극명한 방사능 물질은 좀더 노골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지. 예컨대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라듐에서 방사되어 나오는 성분은 마치 전류가 흐를 때 발생하는 것과 유사한 영향력을 식물체의 생장에 행사하게 된단다. 두 경우 다 영양 중추의 흥분을 가져와 식물체에 필숮거인 요소들의 화합을 보다 용이하게 해서, 결국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는 거란다......또 한 가지 확인된 사실은, 라듐의 방사가 일부 세포들을 파괴하거나 혹은 그 발달을 촉진함으로써, 때로는 진화의 양상까지 조절할 정도로, 생체조직에 확실한 생리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야. 소위 라듐 치료요법이라는 것도 다 그런 원리를 통해, 관절 류마티스라든가, 신경통, 궤양, 습진, 종양 등을 개선, 치유하는 것이지. 요컨대, 라듐이야말로 현실적으로 효험이 있는 치료 인자(因子)인 셈이란다."

 

"위대한 과학자 앙리 베크렐(1852-1908. 1903년에 퀴리 부부와 더불어 노벨 물리학상 수상. 여기 소개된 일화는 1901년 4월에 있었던 실화이다/역주)은 조끼 주머니에 극히 미세한 라듐 알갱이가 담긴 용기를 넣고 다녔다가, 단 며칠 만에 화농이 피부에 도지는 바람에 심한 고생을 한 경력이 있습니다. 이를 알게 된 퀴리는 실험 삼아 같은 행동을 했고, 결과는 마찬가지였지요. 마게녹의 경우는 직접 손에다 라듐 알갱이를 댔으니 이보다 훨씬 심각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아마 암종(癌腫) 모양의 상처가 났겠죠. 과학적인 지식이 있을 턱이 없는 그로서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삶 아니면 죽음을 준다'는 그 기적의 돌이 자기에게 지옥의 불길을 선사하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린 끝에, 그만 제 손목을 자르기에 이른 것이죠."

 

"하긴, 이처럼 아득한 가설을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자연의 오묘하고도 무궁무진한 수단들에 기대기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라듐 알갱이를 하나 온전히 만들어내기 위해서 과연 이 버찌 한 알, 이 장미꽃 한 송이......아니 여기 이 영리한 투-바-비앵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 이상의 뭔가 특별하고 기적 같은 자연의 비법이 반드시 필요했을까요?"

 

"우리의 켈트족 조상처럼 그 돌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종족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많아요. 실은 그 방면으로 내가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는 게 하나 있거든요. 그 돌이 있다면 매우 소중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호랑이 이빨」참조/역주). 한 몇 달 걸리는 사업인데, 다 끝나고 나면 신의 돌을 프랑스로 가지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설립 계획 중인 국립 연구소에 기증할 예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의 돌 때문에 저질러진 악행이 과학의 힘으로 순화되며, 사레크의 추악한 사건도 일거에 상쇄되는 셈이지요. 어떻습니까, 찬성하시는지요, 마담?"

 

"아, 정말이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추악한 사건이었지요! 세상 끔찍한 경험이란 경험은 기가 질릴 정도로 겪어온 몸이지만, 이번 것은 그 모두를 훨씬 능가합니다. 현실의 가능한 영역을 훌쩍 뛰어넘었고, 인간으로서 견딜 수 있는 고통을 저만치 따돌리는, 그런 사건이었어요. 단 한 명의 미치광이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지금처럼 광기와 방황이 지배하는 시기에 발생한 만큼, 너무나도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사건이었습니다......조용하기만 하던 섬에 한 괴물이 나타나 극악무도한 범죄를 구상하고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만약 평화시였다면 제아무리 괴물 같은 존재라고 해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끝까지 물고늘어질 여유가 없었을 거예요. 고립된 섬에서 오늘과 같은 혼란한 시대가 맞아떨어졌기에, 괴물에게 그토록 비정상적인 특수한 조건들이 거저 마련된 셈이지요......"

 

"어때, 멋쟁이 투-바-비앵, 우리 이제 그런 끔찍한 사건일랑 그만 얘기하자꾸나! 하지만 몇 가지 재미나고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은 기억해볼 만도 하지. 안 그러니, 투-바-비앵? 마게녹의 그 으리으리한 화원, 기억나니? 신의 돌에 얽힌 장대한 전설도 그렇지! 기적 같은 생명력으로 충만한 라듐이 그득하게 도사리고 있는 제왕(帝王)의 묘석과 더불어 세계를 방랑하던 켈트족의 대서사시! 정말이지 근사한 구석도 없진 않았지......안 그래? 이건 말이다, 투-바-비앵, 내가 만약 소설가가 되어서 서른 개의 관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 할 입장이라면 얘긴데, 난 결코 험악한 진실에 연연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투-바-비앵, 네 역할을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그려넣을 거라구. 물론 돈 루이스의 지루하기 그지없는 수다는 좀 줄이고 말이야. 대신 너를 과묵하고 용감한 구원자로 내세우겠어. 가증스런 괴물과 싸울 용사도 너이고, 괴물의 악랄한 흉계를 여지없이 분쇄하는 것도 바로 너 투-바-비앵이라구! 그러다 마침내 너의 기발한 본능으로 세상의 악을 벌하고 선에게 승리를 부여하는 거지......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근사할 거야. 왜냐하면 말이다, 삶이란 어떻게든 풀려나가기 마련이며, 결국에는 '모두 다 잘 될 것'이라는 진리를 어느 모로 보나 우리 똑똑하고 멋진 투-바-비앵보다 더 잘 가르쳐줄 만한 선생님이 내가 보기에는 없을 것 같거든......"

해설: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4

-아이러니의 천재, 아르센 뤼팽

 

서른 개의 관은 전작(前作) 두 편과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어느 외딴 섬을 배경으로 한 악몽과도 같은 모험담이 펼쳐진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중세의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시편들이 떠들썩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는데, 모리스 르블랑은 이런 종류의 시편에서 영감을 받아, 매우 섬뜩하고 피비린내 나는 한 편의 신비주의적 드라마를 구상한다. 1918년부터 이 작품에 착수하면서, 르블랑은 19세기 말 고대 프랑스 전문가인 퓌스텔 쿨랑주(1830-1889) 박사의 저작을 꼼꼼히 참조하여 드루이드교()와 켈트 문명에 관한 자료들을 치밀하게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토록 정성을 들인 이 작품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은 길을 걷게 된다. 그 해 5, 어느덧 150여 장에 달하게 된 원고를 소지한 채 탕카르빌의 별장으로 가던 도중, 그만 그 모두를 분실하고 만 것. 결국 전쟁이 끝난 19196월에 가서야 르 주르날지에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겨우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1011일 일단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다가, 19224월에는 상, 하 두 권으로 나뉘어 그 당시 매우 이름을 날리던 액션과 모험 소설(Les romans d`aventure et d`action)총서로 재간되기에 이른다. 역시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킨 이 환상적인 추리, 모험소설은 당대의 저명한 비평가 장-밥티스트 바로니앙에 의해서, “프랑스어로 쓰인 가장 열정적이고 매력적인 추리소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특히 프랑스 고대문명에 뿌리를 둔 유구한 전설과 그 신비주의적 분위기가 이색적이며, 극단적인 위기상황 속에서도 항상 경쾌한 기지(奇智)를 잃지 않는 아르센 뤼팽의 개성이 유감 없이 발휘되는 가운데, 특히 막강한 구원자로서의 뤼팽 이미지가 완벽하게 부각되고 있다.

 

우리가 아르센 뤼팽을 사랑하고 그의 활약에 열광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여유 만만한 유머 기질과 두둑한 배짱을 잃는 법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심할 경우 다소 수다스럽고 경박해 보일 정도인 그 모습은 당시까지만 해도 여타 추리소설의 히어로에게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파격적인 이미지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소 경직된 시선으로 보면 자칫 거부감마저 불러일으킬지 모르는 아르센 뤼팽의 그런 모습 속에는 철저하게 이성적인 전략(戰略)이 숨어 있다.

 

일반적으로 아이러니란 화자(話者)가 어떤 것을 생각하면서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이야기할 때발생한다.1) 이것을 좀더 전문적으로 설명하자면, 아이러니의 의미론적 특성이란 잠재적 기의(起義, signifie latent)와 표출된 기의(signifie manifeste) 사이의 반의적(反意的) 관계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화자가 일련의 의도나 뜻을 품고 말을 하지만, 정작 말하는 내용은 그 정반대로 나타난다는 이야기이다. 가장 쉬운 예로 어리석은 사람을 탓하면서 그래, 너 참 똑똑해!”라고 말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때, ‘똑똑하다라는 말은 일종의 아이러니로서, 사실과 다르다는 점에서는 거짓말이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거짓말과는 성격이 다르다. ‘거짓말이란 화자가 생각하는 것(A)과 반대의 내용(not A)을 말함으로써, 이야기의 상대, 즉 청자(聽者)로 하여금 결국 그 말을 있는 그대로(not A)받아들이게끔 하는 데에 반해서, ‘아이러니는 화자의 생각(A)과 반대의 이야기(not A)를 하지만, 그럼으로써 화자가 생각하는 바(A)를 더욱 실감나게 받아들이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위의 편지 내용에 담긴 뤼팽의 생각, 잠재적 기의상대가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고그래서 아늑한 벽난로 곁을 박차고 나와주기를 바라는마음이다. 하지만 정작 표출된 기의는 그 반대, 수모를 당하는 걸 두고 볼 수 없기에’ ‘아늑한 벽난로 곁에 머물러 계시기를 바라는것으로 제법 예의를 갖춰 치장되어 있다. 물론 셜록 홈스는 이 편지를 받자마자 곧장 뤼팽과의 일전(一戰)을 치르러 프랑스로 건너오게 된다. 아르센 뤼팽의 아이러니가 제대로 적중한 셈이다.

 

분명 은근한 미소를 동반했을 것이 틀림없는 이와 같은 아이러니는 빈정대는 듯한 가면 뒤의 합리적인 지성을 짐작케 하는 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아르센 뤼팽이 그저 툭 내뱉는 듯한 유머러스한 빈정거림 속에는 다분히 전략적(戰略的)인 기도(企圖)가 예리하게 도사리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이 괴상한 연극에도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가 왔나보군......배신자라도 처형하는 장면인가? 이젠 여배우의 연기를 감상할 차례인가보군......()의 여신께서 납셨어......거참 영광인걸!......마담 뒤그리발, 이왕이면 얼굴은 상하지 않게 처단해주시구려.

 

사실, 이와 같은 과감한 아이러니는 그 두둑한 배짱으로 상대를 주눅들게 하려는 전략과 더불어, 자기 내면으로 볼 때에도 무척 심오한 차원의 기도(企圖)를 동반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눈앞에 닥친 절체절명의 현실을 스스로 교묘히 비껴감으로써, 의지(意志)와 용기가 흔들리는 것을 미리부터 차단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 작금의 위협적인 상황을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치부하려는 듯한 태도야말로, 현실을 비현실로 치환(置換)해보려는 자세를 대변한다.

 

나쁘진 않군그래, 당신 아파트, 그런 대로 괜찮아...... 전기 불도 들어오고, 중앙난방장치에다 수세식 변기까지......한마디로 현대식 편의시설을 죄다 갖췄구만......이만하면 완벽해요......교도소장 나리! 이곳에 머물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답답한 감방이 통쾌한 아이러니의 힘을 통해서 안락한 아파트로 둔갑하고 만다. 물론 그렇다고 현실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에 대한 자아(自我)의 반응이 달라지며 이는 곧 그 현실에 도전하고 끝내는 초극(超克)해버리는 뤼팽 특유의 활극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자아의 나르시시즘이 극대화된 나머지 현실의 충격(traumastisme)을 덮어버리고2), 결국에는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열악한 상화에 부딪칠 때마다 자기 자신을 마치 삶이라는 연극의 연출자처럼 위치시킴으로써, 위협받고 상처받은 자아를 효과적으로 치유할 심리적 기제(機制)가 갖춰지는 셈이다. 아르센 뤼팽에게서 흔히 보는 호들갑스러운 수다와 익살은 현실적인 불안과 위협을 물리치고 나르시시즘을 극대화시키는 일종의 마법적 주문(呪文)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초자아(超自我)란 자아를 위로하고자 하며, 고통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를 바란다”3)는 프로이드의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온갖 수다 속에서 호들갑을 떠는 뤼팽은 곧 그 자신의 초자아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이때 뤼팽의 아이러니는 그 초자아의 언어적 체현(體現)이자 현실을 치고 나가는 효과적인 무기(武器)인 셈이다.

 

1) V. jankelevitch, 아이러니(Ironie), Flammarion, “Champs”, 64, p.76.

2) S. Freud,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Le Mot D`espirit et sa relation a l`inconscient), Gallimard, p.323

3) 같은 책,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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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삼각형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8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포탄 파편과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르다. 전시상황이 무대라는 점, 여자의 정체가 소설에서 미스터리로 작용한다는 점, 열렬히 사랑하지만 오해할 수 밖에 없는 두 남녀, 그리고 조력자로 등장하는 뤼팽. 결국 이 모든 일화는 단순히 뤼팽의 비범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는지. 뤼팽의 뛰어남과 두 남녀를 둘러싼 미스터리에서 방향을 다소 잃은 것 같은 이야기들이 아쉬웠다. 누가 봐도 파트리스는 뤼팽의 분신이었는데. 중반부를 지나서 더 이상 뤼팽이 아닌가? 하고 느낄 무렵부터 급속도로 판단력이 떨어지고 삽질(?)을 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약간 아쉬운 부분이었다. 역시 기암성의 소년 탐정만큼의 카리스마와 재치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황금삼각형은 전시상황을 똑같이 무대로 한 포탄 파편과는 달리 실제 전쟁이 소재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물론 애국심이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기는 하나, 어마어마한 황금의 향방을 둘러싼 복잡한 미스터리가 팽팽한 추리적 기법으로 전면에 걸쳐서 펼쳐진다. 연속적으로 독자의 허를 찌르는 기상천외한 범죄수법과 왜곡된 정염(情炎)의 파노라마가 작품 전반에 걸쳐서 음산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결국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뤼팽의 대역전극이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준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의 복합적인 퍼스낼리티를 파헤쳐본다.

 

 

1부 불똥비

코랄리 어멈

오른손과 왼쪽 다리

녹슨 열쇠

화염 앞에서

남편과 아내

오전 719

오후 1223

에사레스 베의 행적

파트리스와 코랄리

붉은 끈

심연 속으로

 

2부 아르센 뤼팽의 승리

공포의 도가니

음산한 못질

낯선 사나이

-엘렌호()

4()

시메옹, 좌충우돌하다

제라덱 박사

시메옹의 최후의 희생자

빛이여 비추시라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3

 

-아르센 뤼팽, 그 복합적인 퍼스낼리티(個性)

 

 

소설 속 아르센 뤼팽을 정신분석학적 시각에서 독특하게 분석한 바 있는 제라르 귀아슈는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의 미묘한 뉘앙스를 분석하면서

 

 

그 인물에 내재하는 복합성(complexite)을 재치 있게 논한 바 있다.* 즉 그리스어인 아르센(arsen)’남성(男性)’이나 남성적인 것’, 혹은 강인한 것을 의미한다는 전제하에, 그 단어를 연상시키는 이름 아르센(Arsene)과 더불어, 뤼팽(Lupin)이라는 성()에서 느껴지는 프랑스어 특유의 섬세하고 우아한 울림이 절묘하게 결합된 것부터가 우리의 영웅이 가지는 복합적인 개성을 반영한다는 이야기이다. 강한 것과 우아한 것의 조합이 이름에서부터 느껴진다는 이와 같은 지적은, 그만큼 아르센 뤼팽의 완벽성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한 인물 내부의 복잡한 이중성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신출귀몰한 솜씨를 자랑하는 괴도, 천하무적의 영웅으로서 불가능이 없어 보이는 아르센 뤼팽은 거의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이미지를 두르는 것이 다반사이나, 여인을 향한 애정에 곧잘 함몰하고, 스스로의 재치에 발목이 잡히는 모습에서는 다분히 인간적인 한계가 느겨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누구로도 둔갑할 수 있고 언제, 어디에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이 곧 인간적인 조건을 초월하여 무소불위의 능력을 휘두르는 신성(神性)의 특징인 것만은 틀림없으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뤼팽은 그 어느 인간보다도 존재의 불안정성에 혹독하게 시달린다.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는 걸. 거울을 보면서도 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니까......”

 

무한하게 모습을 바꿀 수 있기 떄문에 정작 자신의 본모습이 증발해버리고 마는 존재의 패러독스(paradox)......

 

누구로든 둔갑함으로써 존재의 영역을 무한하게 넓힐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이 궁극적으로는 존재에서 극단적인 무()의 상태와 겹쳐지는 셈이다. 이처럼 역설적인 이중성은 아르센 뤼팽의 가장 근간(根幹)이 되는 도둑이라는 정체성에 대해서 그 자신이 표명하는 서로 상반되는 견해를 통해서도 뚜렷이 짚어볼 수가 있다. 그는 작품 여기저기에서 도둑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과시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충만한 존재의식과 자긍심의 이면에 그와는 완전히 정반대인 어두운 자각(自覺)의 얼굴이 늘 고개를 숙인 채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의 뇌리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한아름 안고, 호주머니마다 불룩한 데다, 터질 듯 팽팽한 자루를 둘러맨 자신의 모습이 이 여인에게 어떤 인상을 주고 있을지 서서히 감이 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혼란이 그의 내부로 물밀 듯 밀려왔다. 영락없는 현행범으로 발각된 험상궂은 도둑놈의 모습......아르센 뤼팽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고 있었다.

 

 

마치 신이라도 된 듯 세계를 호령하던 대도(大盜)의 모습은 온데간데 찾아볼 수가 없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거의 신과 같은 확신과 자긍심이 이처럼 인간적인 수치심과 자괴감을 동반하고 있는 현상은 매우 특이하고 복잡한 개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자의식에는 거의 항상 흠모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일종의 중개자로 작용하지만, 뤼팽 본인의 내부에 잠재하는 이중적인 개성을 논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괴도신사(gentleman-cambrioleur)라는 그의 닉네임 자체가 이미 복합적인 개성을 표방하고 있다. 세련되고 우아한 사교계의 신사와 거칠고 험난한 암흑가의 범죄자가 한 인물 안에 공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르센 뤼팽의 이러한 복합적 개성이 그의 탄생배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서로 무척이나 대조적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출신성분에서도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르센 뤼팽의 젊은 시절을 다루고 있는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에는 뤼팽의 아버지에 관한 단서가 비교적 상세하게 암시되어 있다.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라울 당드레지, 즉 아르센 륖애은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다분히 부끄러운 태도를 보인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하층민 출신이며 욥처럼지독하게 가난했고, 복싱과 펜싱, 체조 등을 가르치는 일개 체육교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가 귀족가문의 여식이기에 그러한 면면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겠지만, 아버지의 그림자를 달가워하지 않은 데에는 귀족 출신이었던 어머니와의 태생적인 불균형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뤼팽의 어머니 쪽은 지금은 다소 빛이 바랬으나 원래 내로라하는 지방 귀족 가문이며(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p.19), 라울 당드레지라는 이름에서 당드레지(d`Andresy)라는 귀족의 성()도 바로 어머니의 성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그런 것을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난하고 별볼일 없는 하층민과 결혼한 데다, 그나마 일찍이 사별하여 온갖 고생을 해오며 자식을 길러낸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면서(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왕비의 목걸이참조), 어린 라울의 가슴 속에는 무책임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충분히 싹터 자랐을 수 있다. 결국 뤼팽은 귀족 출신의 연인 앞에서 자신의 진짜 이름(아르센 뤼팽)을 밝히기를 주저하는데, 그 이유는 뤼팽(Lupin)이라는 아버지의 성()에 대한 오랜 거부감 떄문이었다.

  

이처럼 아버지를 부정하는 뤼팽의 태도는 실제로 정신분석학적 견지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형적인 예로 여러 설명이 제기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위의 대사에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 속에는, 분명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근원적 이마고(imago)가 서로 갈등을 치르면서 운명적으로 인생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을 뤼팽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라울 당드레지는 아마 장군이다, 장관, 혹은 대사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아르센 뤼팽만 아니라면요(......) 라울 당드레지......아르센 뤼팽......하나의 조각상에 두 개의 얼굴이 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과연 이 세상의 태양이, 그 영광의 광채가 어느 쪽을 비춰줄까요?”

 

어려서부터 복싱을 비롯한 온갖 거칠고 남성적인 체육훈련을 전수해준 아버지와 귀족 가문으로서의 우아함과 예의 바른 기풍을 심어준 어머니......이 두 상반되는 운명적 인자(因子)는 어느 하나 완전히 말소되지 않은 채, 결국 괴도-신사라는 아르센 뤼팽의 정체성 안에 고스란히 농축되어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중 어느 하나에 전적으로 치중하지 않고, 그 모두를 아우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혁신해가는 뤼팽의 모습이다. 아르센 뤼팽의 어느 모험담에서나 일관되게 느낄 수 있는 사실은 그가 항상 거친 협객이자 괴도이면서 그와 동시에 우아하고 세련된 신사이기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해서, 괴도라는 정체성 안에서도, 정의의 가치에 대한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그와 동시에 사회의 규범을 무시하는 범법자의 모습이 한꺼번에 체현(體現)되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아버지와 어머니 어느 한쪽으로 정리되지 못하기에 항상 불안정한 내적 갈등에 시달리면서도, 그 상반되는 정체성으 요인들을 줄기찬 변신(變身)에의 탐닉 속에서 절묘하게 조절하고,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어가는 그의 모습은 가히 연금술사의 비기(秘技)를 연상시킨다. 괴도임과 동시에 신사이며, 신임과 동시에 인간이고, 천사임과 동시에 또한 악마이기도 한 아르센 뤼팽......그의 복합적인 개성은 결코 한 개인의 음울한 분열증이 아니라, 어쩜 우리 모두의 꿈과 욕망이 가장 찬란하고 화려하게 구현된 살아 있는 원형(原型, archetype)일 터이며, 바로 그렇기에 시대를 초월해 그토록 무수한 이들의 공감(sympathie)과 동화(identification)를 이끌어내는 것이라 하겠다.

 

 

  

 

 

 

 

 

 

 

*Gerard Guasch, 아르센 뤼팽, 디방에 누운 인물(Arsene Lupin, Un caractere sur le divan)L`Harmattan, 1997, P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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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 파편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7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이 대체 왜 뤼팽 전집에 속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물론 출판사 쪽에서도, 모리스 르블랑도 길게 설명을 해 놓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딱 하나다. 뤼팽 전집에 속하게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하려는 것, 혹은 이 책의 위치를 높여보겠다는 것. 결론부터 말하면 이때까지 읽은 뤼팽 전집 중에서는 재미도 집중도도 참신함도 가장 낮았다고 본다. 야심차게 준비했을 반전도 김이 빠지고 시시했다.

 

포탄 파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감을 받아 쓴 모리스 르블랑의 대작(大作)이다. 1915르 주르날지에 연재되기 시작한 이 소설은, 처음에는 뤼팽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었으나, 훗날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합류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례적으로 붙은 작가의 서문(번역서에서는 번역자의 "해설"에 삽입되어 있다)에서 모리스 르블랑은 유독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전쟁 중의 검열을 피해 현실의 지명과 인명을 부득이 변형시켰음을 명시하고 있다. 훗날 시리즈에 편입되었다고는 하나, 그 전체적인 분위기나 탄탄한 추리적 구성, 서스펜스의 묘미는 시리즈의 여타 작품들에 비교해 전혀 손색없는 박진감과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아울러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드라마 속에서 전쟁의 의미와 정의의 가치, 사랑과 신념의 위대함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까지 읽을 수 있어, 그 감상의 폭과 깊이가 만만치 않은 수작(秀作)이다. 그리고 제7권 해설에는, 아르센 뤼팽의 인물탐구 두번째 주제로, 뤼팽의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 도둑(cambrioleur)’이라는 타이틀을 분석해본다.

 

1

 

 

1. 살인이 일어났었다

 

2. 폐쇄된 방

 

3. 동원령

 

4. 엘리자벳의 편지

 

5. 코르비니의 아낙네

 

6. 오르느캥의 성에 남아 있는 것

 

상처 입은 채 몸부림을 치고 있는 아내의 이미지가 영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엘리자벳이 오르느캥 성을 떠나길 거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로 그 날 이후로, 그는 더 이상 발작적인 거부감이나 원한으로 마음 한구석 켕기는 일 없이, 절절한 심정으로 그녀를 생각해오고 있었다. 이제 더는 끔찍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아름다운 사랑의 감정이 서로 뒤섞이지를 않았다. 가증스런 어미를 생각하는 동안은 그 딸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 둘은 완전히 서로 다른 종족(種族)에 속해 있었고, 둘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의무를 위해 사지(死地)를 마다 않고 용감하게 버티고 있는 엘리자벳의 모습은 폴에게 더없이 숭고한 여인으로 비쳐졌다. 역시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고 아꼈으며, 지금도 여전히 흠모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7. H.E.R.M

 

8. 엘리자벳의 일기

 

9. 황제의 아들

 

10. 75밀리냐 155밀리냐?

 

2

 

1. 이제르...미제르

 

2. 헤르만 소령

 

3. 사공 휴게소

 

, 감히 어찌 그런 망발을! 그럼 내 아내가 자네 부친을 죽였단 말인가? 자네 돌았구만! 신과 이 세상 앞에서 성녀(聖女)나 다름없는 내 아내가? 감히 어떻게! ! 내가 왜 당장 자네 얼굴에 한방 날리지를 않는지 모르겠구만!”

폴은 거칠게 팔을 뿌리쳤다. 가뜩이나 소란스런 전투가 벌어지는 데다 안으로부터 복받치는 분노 역시 주체하기 어려운 판에, 점점 더 흥분할 수밖에 없어진 두 사람은, 총탄과 포탄이 요란스레 퍼붓는 가운데 서로 막 드잡이라도 할 태세였다.

또다시 벽의 한쪽 면이 와르르 무너졌다. 폴은 정신 없이 명령을 외쳐대면서도 머리 한 쪽으로는 그 무너진 벽 근처에 있는 헤르만 소령에 대한 생각와 더불어 당드빌 씨를, 마치 범죄자를 대질시키듯 그 앞에 데려가 세우고 싶은 욕심이 불쑥불쑥 치밀어올랐다.

 

4. '독일식 문명'의 걸작

 

이것 봐요, . 벌써부터 난 정신이 하나도 없는걸요! 그야말로 예언력과 투시력을 죄다 겸비하신 것 같아요! 두말 않고 곧장 파들어가야 할 곳을 지목하지를 않나,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술술 털어놓지를 않나......당최 모르는 것 하나 없이, 죄다 훤하게 내다보잖아요! 정말 그 정도이신 줄은 몰랐어요! 혹시 아르센 뤼팽을 사사(師事)라도 한 거 아니에요?”

 

“‘거기까지만 해두죠. 그 이상 세세한 행동지침까지 조언을 해주다간 오히려 당신 머리만 혼란스러워질 테니까요. 게다가 당신만한 인물에겐 구차하게 이것저것 챙겨줄 필요까진 없을 겁니다. 그럼 이만, 잘 있으시오, 중위! 아참, 그리고 내 이름은 아마 모르고 있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저 군의관이라고만 해두지요......, 하긴 내 이름을 굳이 지금 밝히지 않는다고 해도 어차피 나중에는 알게 될 테니......아르센 뤼팽이라고 하오!’......아무튼 그렇게 대차게 얘기를 늘어놓더니 그는 다정하게 인사를 꾸벅한 다음, 더는 아무 말 없이 나가버리는 거야. 그렇게 된 거라구......, 어떻게 생각하나, 베르나르?”

 

5. 콘라트 왕자의 잔치

 

6. 불가능한 싸움

 

7. 승자의 법칙

 

8. 132고지(高地)

 

9. 호엔촐레른

 

10. 두 번의 처형

 

해설: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2

-도둑, 그 매력적인 범죄자

 

포탄 파편에 대한 모리스 르블랑의 서문

전쟁 초기에 조프르 장군(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북동부 전선 최고사령관으로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을 저지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명장이다/역주)으로 하여금 위대한 승리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가능케 한 기막힌 후퇴작전에 대해서는, 아직 그 전모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그중에서도 더없이 심각하고 절박한 원인이 된 사건이 있었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국경 근처의 어느 한 요새가 어처구니없이 함락되어 프랑스 군의 거점이 일거에 박탈당함과 동시에, 적에게는 아주 훌륭한 침투로를 열어준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의 미스터리는 아직까지 전혀 밝혀진 바 없거나, 적어도 군 당국으로서는 그 일단의 진실을 알면서도 공개하기를 무척 꺼렸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저자 자신도 우연히 그 비밀을 엿보게 된 이 사건의 정확한 해명만큼은, 여태껏 그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냥 어둠 속에 남겨두는 것이 현재로서는 옳다는 판단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당시 사건과 연루된 주요 실존인물의 이름과 관련 지명들을 부득이 변경했음을 밝혀둔다. 하지만 언젠가, 저 야만인들이 안전하게 묻어두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실들을 어둠 속에서 과감히 끌어낼 날이 오면, 그때 역사는 저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독자 여러분이 읽을 이 이상하고도 엄청난 모험담의 전모를 제대로 자리매김해주어야만 할 것이다.

 

일단 도둑으로서 아르센 뤼팽의 가장 독특한 점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스스로 공개한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도둑질이 발생했을 때, 아르센 뤼팽에게까지 혐의를 두는 경우, 그것은 결코 범죄행위 자체가 서툴렀다거나 증거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나 완벽하게 처리된 범죄행위는 엉뚱하게도 뤼팽 자신이 그 장본인으로 자처하고 나섬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일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렇게 뤼팽 자신이 스스로 공개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실 우리는 그의 범행을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절도행각에는 다음과 같은 일정한 원칙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 부당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졸부라든가 사회 기득권 세력인 귀족이나 왕족 등을 범행 대상으로 한다.

둘째, 단순히 재물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피해자를 조롱하고 그 위선을 폭로한다.

셋째, 절도행각 자체가 하나의 예술로 느껴질 정도로 신출귀몰한 방식을 활용한다.

넷째, 여하한 일이 있어도 살인은 피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해치지 않고도 마음대로 법과 질서를 유린하는 괴도(怪盜)의 이미지가 자칫 완벽한 의적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는 것을, 작가 모리스 르블랑은 무슨 의도에서인지 여기저기 인간적인 허점을 노정(露呈)함으로써 스스로 허물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이러한 면면에 유념한다면, 우리는 작가가 진정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아르센 뤼팽의 이미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완벽하면서 난공불락의 절대적 영웅보다는, 당대의 일반 대중에게 감성적으로 어필할 수 있고, 그로써 더더욱 질긴 생명력을 확보할 수 있을 친근한(sympathique) 영웅의 초상(肖像)을 그리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뤼팽 이전의 19세기식 낡은 영웅 이미지와는 달리 이러한 아르센 뤼팽의 참신한 이미지는 영웅의 현대적 의미와 좌표를 새로이 설정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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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뤼팽의 고백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6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단편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은 단편이 더 재미있는 것 같다. 물론 장편도 훌륭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뤼팽의 활약에 자꾸 군더더기가 붙는 것 같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긴 분량을 오롯이 채우지 못해 곁다리로 홈스의 이야기가 들어가거나, 어설프게 로맨스가 추가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신파로 끝을 맺거나 평범한 복수극으로 끝나버려 활기 넘치는 중반까지가 아깝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유쾌한 도둑 이야기에는 역시 단편이 제격이다.

 

 

기암성813의 비밀」「수정마개에서 복잡다단하고 심각한 면모를 실컷 보여준 우리의 주인공이 이번에는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에서와 같은 경쾌하고 유연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1911년부터 주 세 투에 연재되어온 단편들을 한데 엮은아르센 뤼팽의 고백은 특히 당대의 본격문학 평단으로부터도 극찬을 받았을 정도로 독창성과 섬세한 매력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그중에서도 "그림자 표시""붉은 실크 스카프" 같은 단편은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작품에 필적하는 걸작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이번부터 당분간 역자 해설을 통해서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를 연재하기로 한다. 아르센 뤼팽을 사랑하는 뤼피니앵들에게 유익한 선물이 되리라고 기대해본다.

 

 

1. 거울놀이

 

하긴 정말 묘한 수수께끼였지......그 일은 왠지 그림자 표시라고 이름붙이고 싶네만......”

나는 내친 김에 계속 몰아붙였다.

사교계에서의 인기는 또 어떻고! 바람둥이 아르센이 저지르고 다닌 온갖 스캔들 말일세!...... 그리고 자네가 남몰래 행한 선행들도 마찬가지이네! ‘결혼반지’, ‘배회하는 죽음등등, 내 앞에서 자네가 슬쩍 흘리고 지나가버린 이야기들이 어디 한둘인가? 뤼팽 이 친구야, 대체 언제지 그렇게 시침만 떼고 있을 셈인가?......자 자, 큰맘 먹고 어디 한 번속 시원히 털어놓아보시게......”

때는, 이미 유명해진 뤼팽이 아직은 그의 가장 끔찍한 격전을 치르기 전, 그러니까 기암성이랄지 ‘813의 비밀같은 엄청난 모험들에 뛰어들기 전이었다. 아직은 프랑스 제왕(諸王)의 수세기에 걸친 보물을 제것으로 삼는다거나, 독일 카이저(皇帝)의 바로 코앞에서 유럽을 도둑질할 생각일랑은 꿈도 꿔보지 못한 채, 보다 소박하고 납득할 만한 잔재주를 부리는 데에 만족하던 시절이라고나 할까? 천성적으로도 그렇지만, 그저 취미 삼아 그때 그때 선행과 악행을 경쾌하게 뿌리고 다니면서 일상에 울고 웃는 돈키호테의 나날들......

 

생각해보게, 라베르누는 금고 속의 끔찍한 내용물에 관해서 알고 있을 테고, 그런 입장에서 바로 남작을 고발하지 않았는가 말이야. 창문을 통해서 그처럼 기발한 햇빛 교신방법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카페에서 죽치고 앉아 신문의 암호 퀴즈 따위를 함께 풀어대던 같은 동네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충분히 추정할 만했지.”

그제서야 나는 이마를 치며 소리쳤다.

, 그것 참! 간단하긴 간단하구만!”

아주 간단한 일이지! 아울러 이번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은 진리를 명심해야 될 것이야. 자고로 범죄를 해결하는 데에는, 제반 사실들을 꼬치꼬치 따지든가, 답답한 추리에 골몰하는 따위의 부질없는 짓거리들보다 훨씬 강력하고 유효한 방법이 있다는 것 말일세. , 누차 얘기하지만, 직관(直觀)! 그리고 예외적인 지성(知性)!......자랑은 아니네만 아르센 뤼팽이 두루 가지고 있는 이 두 가지 장점이야말로 범죄해결의 비결이라고 아니할 수 없지......”

 

 

2. 결혼반지

 

증거라면?”

내가 직접 끊어서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반지 얘기네. 여기 안쪽에 새겨진 글씨를 보게. 그녀가 누구의 이름을 새겨 가지고 다녔는지 좀 보라구.”

그러면서 반지를 내밀었고, 나는 그 안을 살펴보았다.

오라스 벨몽

잠시 뤼팽과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나는 그의 얼굴 한켠에서 다분히 멜랑콜리한, 어떤 감정상태가 어른거리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얘기는 자네가 전부터 내게 여러 차례 암시를 해오던 걸로 아는데......이제 와서 불쑥 털어놓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특별한 이유?”

그러면서 뤼팽은, 때마침 어느 젊은이의 팔을 붙든 채 우리 앞을 지나가는 아리따운 부인 한 명을 눈짓으로 슬쩍 가리켰다.

한데 그녀 쪽에서도 뤼팽을 알아보고는 살짝 인사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바로 저 여자야. 아들과 함께 가는구만......”

뤼팽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니, 자네를 알아보지 않나?”

내 변장이 아무리 뛰어나도 항상 날 알아보지.”

그나저나 티베르메닐 성관 도난사건 이후로 경찰이 뤼팽과 오라스 벨몽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했을 텐데......”

그랬지.”

그렇다면 저 여자도 자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네.”

그런데도 아무 서슴없이 인사를 해?”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나왔다.

뤼팽은 대뜸 내 팔을 거칠게 잡아채며 대꾸했다.

자넨 내가 그녀 앞에서도 뤼팽일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녀가 보기에도 내가 도둑에다 협잡꾼에다 한낱 불량배일 거라고 생각하느냔 말일세?......하긴, 심지어 내가 살인도 불사할 만큼 막돼먹은 인간 말종(末種)이라고 해도, 아마 그녀는 내게 여전히 인사를 건넬 것이네.”

그건 또 왠가? 한때 자네를 사랑했기 때문에?”

저런! 오히려 그 이유라면 나를 경멸할 구실이나 될 수 있겠지......”

그럼 뭔가?”

내가 자네에게 아들을 돌려준 사람이기 때문일세!”

 

 

3. 그림자 표시

 

나는 슬그머니 다가가 그와 마찬가지로 관목의 잔가지들을 살짝 헤쳐 그 너머를 염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이지 예상을 훌쩍 초월하는 것이었다. 내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외마디 탄성이 터져나왔고, 뤼팽 역시 잇새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창문 하나 없는 양쪽 건물들을 경계로 한껏 펼쳐진 공간 안에는, 내가 골동품 상점에서 구입한 바로 그 낡은 그림에 담긴 풍경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게 아닌가!

세부적인 부분까지 정확히 일치했다! 저만치 뒤쪽에는 제2의 담벼락을 배경으로 그림에서와 똑같은 그리스풍의 경쾌한 열주식 원형건물이 버티고 있는가 하면, 중앙에는 마찬가지로 그림에서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돌의자들이 원형계단을 사이에 두고 이끼가 덕지덕지 낀 포석의 연못을 굽어보고 있었다. 한편 왼쪽으로는, 역시 같은 우물이 정교하게 제작된 금속 지붕을 받치고 있었고, 그 바로 가까이에는 대리석 자판에 화살표 모양의 지침을 뽐내며 눈에 익은 해시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다지도 똑같을까! 펼쳐진 광경의 유사점 외에도 신기한 점이라면, 뤼팽이나 내 머리 속에 낙인처럼 찍혀져 있는 그림 속의 수수께끼 같은 날짜, 415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고많은 날들 중 하필 오늘 415, 서로 다른 연배와 사회계층에 속한 10여 명의 사람들이 굳이 그 의문의 날짜를 택해서 파리의 이처럼 외진 구석을 찾아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오후 다섯 시가 되어오자 지저분한 모닝코트 차림의 뚱뚱보 신사가 문득 시계를 꺼내 보았다. 그러자 너도나도 흉내라도 내는 것처럼 각자의 시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마치 저들에게 엄청 중요한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불안하게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뚱뚱보 신사는 낭패라는 듯 제스처를 취한 다음,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모자를 눌러쓰는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졸지에 애도와 슬픔의 분위기가 전체에 확산되었다. 비쩍 마른 두 노자매와 노동자의 아내는 아예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성호까지 긋는가 하면, 강아지를 데려온 아가씩와 거지 아내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흐느껴 울었다. 루이즈 데르느몽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딸을 와락 끌어안는 동작이 여간 애처로운 게 아니었다.

우리도 이만 가세나.”

뤼팽이 속삭였다.

소풍이 끝난 걸까?”

그렇다네. 이젠 우리가 달아나야 할 때야.”

 

 

4. 지옥의 함정

 

푸하하하하-딱한 가니마르! 정말이지 억세게도 운 없는 친구가 아닌가! , 내가 체포되는 현장을 나도 구경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는데......”

여자의 믿어지지 않을 기력에 의지해서 계단을 다 내려온 뤼팽은 곧장 거리로 나갔고, 자동차에 태워졌다.

갑시다.”

여자가 운전기사에게 던지듯 말했다.

오랜만에 탁 트인 공기와 심한 움직임으로 정신이 얼얼해진 뤼팽은 어디를 어떻게 통해서 가는 건지 거의 감지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가 가끔씩 돌아가며 머물되 평소엔 하인만 배치시켜 놓는 여러 숙소들 중 한 곳에 도착하자 그나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데, 여자는 하인에게 대뜸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

자넨 나가 있게.”

아울러 자신도 막 나가려는 것을 뤼팽은 옷자락을 와락 붙들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이대로 가면 안 되지요......먼저 자초지종을 좀 들어야겠소이다......대체 나를 왜 구해준 거요? 당신 숙모 모르게 돌아온 겁니까? 나를 구해준 이유가 대체 뭡니까? 그저 불쌍해서 그런 거요?”

하지만 여자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가슴을 꼿꼿이 펴고 고개를 바짝 치켜든 자세로, 강인하면서도 어딘지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여전히 고수할 뿐이었다. 다만 이전과 약간 다른 점이라면 그 잔혹해 보이기만 하던 입술선()이 왠지 다소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보 보니 그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 속에서도 일말의 우수(憂愁)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뤼팽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논리적인 이해 이전에, 어렴풋한 직관의 힘으로 그녀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짜고짜 여자의 손을 덥석 붙잡았으나, 여자는 증오심과 거부감이 느껴지는 동작으로 펄쩍 뛰다시피 손을 빼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뤼팽이 다시 손을 붙들려고 하자, 이번에는 여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버려두세요!......놓으란 말이에요!......당신을 증오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마주보고 있었다. 뤼팽도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으나, 여자는 그 창백하던 얼굴이 난데없이 벌겋게 물들 정도로, 온통 당혹스런 감정에 휘말린 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뤼팽이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증오한다면 죽게 내버려두었어야 합니다......어렵지도 않은 일이었어요. 왜 그렇게 하지를 않은 거죠?”

왜냐구요? 왜냐고 물으셨어요? 그걸 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느닷없이 여자의 두 손이 얼굴을 가렸고, 뤼팽은 손가락 사이로 두 줄기 눈물이 새어나오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갑작스럽게 감정이 복받쳐오른 뤼팽은 하마터면 애정 어린 말이라도 몇 마디 내뱉을 뻔했다. 마치 잘못된 삶의 길을 헤매는 어린 소녀를 격려하며 올바른 길로 이끌 듯, 보통이라면 따뜻한 위로와 자상한 충고를 은근히 베풀어줄 법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자신의 입으로 그처럼 덤덤하고 점잖은 충고를 늘어 놓기에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뤼팽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지금, 자기 손에 의해서 상처 입은 한 사내를 밤새도록 침대 머리맡에서 간호하는 한 여인의 못브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독한 원수이면서도 그 용기와 호쾌함, 인간 됨됨이에 완전히 매료된 나머지, 불쑥불쑥 치미는 원한과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세 번씩이나 충동적으로 그의 목숨을 구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안타까운 마음이 비장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워낙에 예상치 못한 묘한 일이라, 뤼팽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문가로 뒷걸음질쳐가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도저히 손을 뻗어 붙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 앞에 도달한 여자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살짝 미소를 지은 뒤,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뤼팽은 즉시 호출 벨을 울렸고, 하인이 들어서자 허겁지겁 내뱉었다.

아까 그 여자를 따라가보게......, 아니야......그냥 놔두게......아무래도 그게 낫겠어......”

뤼팽은 한참 동안이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젊은 여인의 형상은 좀처럼 그의 머리 속을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었을지 모르는 그 처절하고 흥분되면서도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을 처음부터 찬찬히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탁자 위의 거울을 들고, 그야말로 환난과 고초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상하지 않은 자신의 말끔한 얼굴을 약간은 우쭐한 기분으로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내 참, 잘생긴 게 뭔지!......”

 

 

5. 붉은 실크 스카프

 

다음부턴 사람 말을 너무 쉽게 믿지 말라는 뜻에서 한마디 하겠네. 누가 자네의 권총 탄약통이 젖어 있다고 하거든, 자네가 아무리 신뢰하는 사람이고, 설사 자기가 아르센 뤼팽만큼 똑똑한 사람이라고 내세우더라도, 결코 거기에 먹혀들지 말게나. 일단 무조건 한번 당겨보는 거야! 그래서 만약 그 누군가가 핑그르르 돌아 거꾸러진다면 자넨 그제야 깨닫게 되겠지.

첫째, 탄약통은 멀쩡하다!

둘째, 카트린 할멈은 대단히 성실한 가정부이시다!

그럼 언젠가는 그 분도 한번 뵐 기회가 있길 바라며, 이만 건투를 비네.

아르센 뤼팽

 

 

6. 배회하는 죽음

 

그렇다면 사전에 놈을 덮칠 수도 있었단 얘기 아닙니까? 한데, 왜 잔의 방에까지 들이닥치도록 놔둔 겁니까? 잔에게 얼마나 큰 위험인지 알면서......안 그래도 됐을 것을......”

천만에요!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다르시외 양은 결코 진실을 수긍하려고 들지 않았을 겁니다. 범인의 얼굴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어요.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면 상황 설명을 잘 해주십시오. 그럼 회복도 한층 빨라질 겁니다.”

하지만......다르시외 씨는......”

그가 사라진 건 좋을 대로 설명해주시면 됩니다......어디 멀리 떠나버렸다든가, 아님 확 미쳐버렸다든가......물론 당분간 찾아보기도 하겠죠......하지만 아마 그에 관해서는 앞으로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을 겁니다.”

박사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요......그렇군요......당신 말이 맞소이다......하여튼 이 모든 일을 당신은 정말이지 놀라운 솜씨로 해결해냈소. 잔에게 당신은 생명의 은인인 셈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당신께 뭐든 보답을 해야 할 처지인 듯 합니다만?......아참, 치안국과 관련 있는 일을 하신다고 했죠?......당신의 용기와 활약을 칭찬하는 편지라도 써드릴까요?”

뤼팽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그야 고마울 따름이지요! 그런 편지라면 내게 아주 유익할 거외다. 그럼 내 직속상관인 가니마르 형사반장 앞으로 한 장 써주시구려. 아마 쉬렌가()에 사는 자신의 귀염둥이, 폴 도브뢰이가 아직도 신나는 활약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걸 알면 매우 기뻐할 겁니다. 그러지 않아도 최근에 그의 지시를 받아 대단한 한 건을 건졌거든요. 아마 당신도 들어서 알고 계실 겁니다. 붉은 스카프 사건이라고......, 훌륭하신 가니마르 씨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즐거워할지!”

 

 

7. 백조의 자태를 지닌 여인

 

이보게, 아르센 뤼팽......자네는 가니마르 형사에 대해서 정확히 어떤 생각인가?”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다네, 친구.”

아주 좋게라고? 한데 왜 기회만 있으면 그를 우스꽝스럽게 농락하려고 드는 건가?”

일종의 악습이지, 나도 늘 후회하고 있네. 하지만 어쩌겠나?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인걸. 여기 착실한 경찰 나리가 있다고 치세. 질서를 수호하고, 온갖 불한당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며, 심지어는 선량한 대중이자 전혀 날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용감한 친구들이 무수히 있다고 쳐. 한데 우리 대중이란 늘 그에 대한 보답으로 신랄한 조소와 경멸만을 그들에게 들려주곤 하지. 어리석은 작태가 아닐 수 없어.”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구만, 뤼팽. 자네 마치 선량한 부르주아처럼 얘기하는군그래.”

그럼 내가 누구라고 생각했나? 비록 남의 재산에 대해선 약간 특별한 입장을 취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게 내 재산이 되고 나면 생각이 완전 뒤바뀌기 마련이지. 아무렴, 누구도 감히 내 것에 손대면 안 된다 이거지. 만약 그럴 경우엔 나도 길길이 날뛸 것이야. , 내 지갑, 내 가방, 내 시계......안 되지......안 되고말고! 이보게 친구, 나는 지극히 보수적인 생각과 소박한 금리생활자의 본능을 가진 사람이라네. 모든 전통에 대한 경외심과 권위를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 바로 그래서 나는 늘 가니마르에게 감사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네.”

 

그래도 경의(敬意)까지는 아니겠지?”

웬걸, 대단한 경의를 표하다마다! 치안국 사람들 모두의 특징이기도 한 불굴의 용기를 갖춘 건 물론이고, 무척 진지하고, 결단력 있으며, 명석한 혜안(慧眼)과 판단력을 소유한 사람이 바로 가니마르일세. 나는 그가 사건을 맡아 대단한 활약을 펼치는 걸 무수히 보아왔네. 그는 분명 대단한 인물이야. 그런 뜻에서, 자네 혹시 사람들이 백조의 자태를 지닌 여인의 사연이라고 부르는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가니마르는 문득 탁자 위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편지 한 통을 발견하고, 내용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편지는 마치 흡족한 서비스를 받고 난 주인이 시종을 위해서 발부한 신원보증서 같은 어투로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아래 서명한 나, 괴도신사이지 전직(前職) 대령이고, 전직 하인이자, 전직 시체이기도 한 아르센 뤼팽은, 이 호텔에 머무는 기간 동안 가니마르라는 인물이 자신의 탁월한 역량을 충분히 선보였음을 보증하는 바입니다. 어떠한 단서도 주어지지 않는 악조건 속에서, 그는 정말 모범적이고도 헌신적인, 그리고 열정적인 행위를 통해서 내 계획의 일부를 저지했고, 보험회사로 하여금 45만 프랑이라는 돈을 절약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이 같은 그의 활약을 높이 치하하되, 아래층 전화가 소냐 크리슈노프의 방에 설치된 전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점은 너그러이 보아 넘기기로 했습니다. 결국 그는 치안국장에게 전화를 함으로써, 그와 동시에 내게도 전화해 즉시 도망치라고 귀띔해준 꼴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 물론 지금까지의 활약상과 그가 거둔 승리를 퇴색시키기에는 어림없는, 하찮은 잘못에 불과합니다.

어쨌든, 그를 향한 나의 아낌없는 찬사와 생생한 애정을 이렇게 글로나마 전하는 바입니다.

아르센 뤼팽

 

 

8. 지푸라기

그랬지만 다시 돌려받았어......, 이것 보라구!”

그러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갖다댄 순간, 구소 영감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으악! 하느님 맙소사! 열쇠가 없잖아!......열쇠를 날치기 당했어!......”

그는 즉각 내달렸고, 그 뒤를 아들들과 사람들이 뒤따랐다.

헐레벌떡 중간쯤 달려갔을까, 언뜻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그 낯선 이방인의 차였다. 이럴 줄 미리 내다보고 운전기사에게 이처럼 멀찌감치 대로상으로 나와 기다리라고 한 것이었다.

숨이 턱에까지 차면서 가까스로 문 앞에 당도한 구소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헐어빠진 나무 문짝 위에 붉은 벽돌 조각으로 휘갈겨 쓴 다음과 같은 글자였다.

아르센 뤼팽

이로써, 구소가 사람들이 제아무리 길길이 날뛰고 울분을 토해도, 트레나르 영감이 돈을 훔쳤다는 것을 법적으로 증명하기는 불가능했다. 오히려 스무 명의 증인들이 부랑 노인에게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노라고 입을 모았을 따름이다. 영감은 단지 몇 달간의 징역으로 모든 것을 모면하게 되었다.

물론 그에게 그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석방되자마자 사사분기(四四分期)마다 몇 날, 몇 시, 어느 길가, 어디에 가면, 매번 금화 3루이(1928년까지 1루이는 20프랑에 해당했다/역주)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통보를 비밀스럽게 전달받았다.

하긴 아사(餓死) 직전까지 갔던 트레나르 영감으로서는 그나마 횡재가 아니겠는가!

 

 

9. 아르센 뤼팽의 결혼

 

앙젤리크 역시 아버지를 닮아 앙상하게 마르고 훤칠한 몸매에, 마찬가지로 골격이 울퉁불퉁하고 건조한 체질이었다. 나이는 서른셋, 언제나 검은 모직 옷을 입고, 늘 소심하며, 어디 가서도 눈에 잘 안 띄는 타입인 그녀는, 머리가 너무 작은 데다, 양쪽으로 잔뜩 눌린 것처럼 납죽해서, 돌출한 콧날이 마치 그러한 비좁은 얼굴 형태에 대한 반발처럼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결코 못생겼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그 두 눈동자가 달고 있는 부드럽고도 진지한 눈빛, 한번 제대로 보면 잘 잊혀질 것 같지 않은, 다소 우수 어린 강렬한 눈빛 때문이었다.

 

한편 바로 그 당일 저녁, 문전박대를 당한 두 기자 중 한 명이 자사 신문 1면에다, 바렌가()의 고풍 찬연한 사르조-방돔가() 저택을 쳐들어갔던 일에 관해서 다소 과장된 필치를 휘두르면서, 늙은 귀족 나리의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신나게 묘사해버렸다.

다음날 또다른 신문에는, 자기 말로 오페라 극장 복도에서 기자에게 붙잡혔다는 아르센 뤼팽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거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나 역시 장래의 장인 어른이 분개하시는 데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그 통지서를 그렇게 섣불리 발송한 것은 분명 오류였으며, 비록 내 책임은 아니지만, 기꺼이 공개적인 사과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한번 생각 좀 해보십시오! 우선 결혼 날짜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장인 어른께선 5월 초로 하자고 하십니다만, 내 약혼녀와 나는 그때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는 입장입니다. 앞으로도 6주를 더 기다려야 한다니요!......

사실 공작의 딸은 다소 몽상적인 데가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혼자 노는 일이 잦았던 그녀는, 대대로 물려내려오는 서가에 언제나 가득 굴러다니던 고리타분한 옛 소설들과 기사도 이야기를 읽으며 성장기를 보냈다. 결국 인생을 한 편의 동화처럼만 보게 되었고, 아름다운 아가씨는 언제나 행복할 것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현실 속에서는 그럴수록 오지 않는 왕자님을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게 다반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구나 사촌이라는 사내들은, 어머니가 남겨준 수백만 프랑의 지참금만을 노리는 것이 뻔한데, 뭐하려 결혼을 하겠는가 말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이 이대로 꿈이나 꾸면서 노처녀로 사는 게 낫지......

 

그제서야 사내는 앙젤리크의 모든 행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 어여쁜 편은 못 되지만 우수 어린 매력이 듬뿍 담긴 그 얼굴 앞에서 사내는 일순 당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찌 해야 할지 거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더 이상 웃을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일종의 존경심이랄까, 약간의 회한(悔恨)과 호의(好意)가 뒤섞인 가슴 찡한 기분이 사내의 전신(全身)을 가르고 지나갔다.

왜 나를 구해주는 겁니까?”

사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 남편이니까요......”

 

사내는 문득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자신한테는 사소하고 우스꽝스러울 따름이지만, 여자에게는 매우 중대한 모든 사안들이 머리 속을 일시에 휘저어놓고 있었다. 그는 별수 없이 같은 말만 되풀이해 흘릴 뿐이었다.

이거 큰일이구만......큰일이야......예상했어야 하는 건데......”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손뼉까지 치며 냅다 소리쳤다.

옳지! 바로 그거야!......내가 바티칸의 주요 인사들 중 한 명과 아주 절친한 사이라오. 아마 교황도 내 부탁이라면 거절을 못할 겁니다......어떻게든 알현을 해보겠소. 모르긴 몰라도 내가 간절히 탄원을 하면 교황 성하(聖下)께서도 마음이 흔들릴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태도로 보나, 그 발상으로 보나 어찌나 순박하고 익살스러운지, 여자는 사내를 바라보며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당신의 아내입니다.”

여자의 눈빛 속에는 그 어떤 적의(敵意)도 경멸도, 일말의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사내는 정말이지 그녀가 자신의 모습 속에서 도적이나 범법자의 정체를 보길 그만 두고, 그야말로 사제(司祭)가 죽을 때까지 맺어준 한 남자의 모습만을 바라보기로 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왠지 자신도 잘 모를, 보다 혼란스런 감정이 지금 그녀의 전 존재를 뒤흔들고 있다는 것을 사내는 직감했다. 황당무계한 상상력과 늘 무언가를 갈망하는 몽상적 기질, 그리고 케케묵은 독서로 다져진 이 노처녀의 복잡한 영혼 속에서, 그동안 천신만고의 사연을 거치는 가운데 서로 만나 오늘 같은 특별한 순간을 함께 맞이한 바로 이 사내의 모습은, 그야말로 바이런 풍의 영웅이랄까, 지극히 낭만적이고 기사도적인, 아주 특별한 존재로 각인되는 중이었다! 생각해보라! 어느 날 밤, 그것도 숱한 장애를 뚫고서, 이미 그 대담무쌍함이나 너무도 유명한 활약상으로 전설이 되다시피 한 사내 대장부가 난데없이 방으로 쳐들어와, 결혼반지를 여자의 손가락에 지그시 끼워주지 않았던가!......

 

사내는 일순 마음이 흔들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격정에 사로잡혀 이렇게 소리치고 말았다.

함께 떠납시다!......같이 달아나자구요!......! 당신은 나의 배필이오......나의 동반자입니다......나의 고난과 환희를 함께 나눕시다......강렬하면서 신비스럽고, 위대하면서 장렬한 인생을 함께하는 겁니다!......”

그 순간 앙젤리크가 눈을 들었고, 그 깨끗하면서도 자부심에 넘치는 눈빛에 이번에는 사내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이런 식의 허풍을 퍼부어대도 될 여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사내는 머뭇머뭇 중얼거렸다.

, 미안하오......여지껏 많은 잘못을 저질러왔지만, 지금보다 더 내 마음을 아프게 할 만한 짓을 한 기억이 없소......나는 나쁜 사람이오......당신 인생을 망쳐놨어......”

하지만 여자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아니에요......당신이야말로 내가 진정 가야 할 길을 가르쳐준 셈이에요......”

그가 내처 질문하려는데, 여자는 이미 비밀문을 활짝 열어 통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더 이상의 말이 오고갈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사내는 그녀 앞에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뒤, 방을 빠져나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부르봉-콩데가()의 공주인 앙젤리크 드 사르조-방돔은 마리-오귀스트라는 이름의 수녀로서, 곧장 도미니크 수녀원에 자신을 가두어버렸다.

그녀가 종신서원식()을 하던 날, 수녀원의 원장수녀 앞으로 봉인된 묵직한 봉투와 편지 한 장이 배달되었는데......

마리-오귀스트 수녀가 돌보는 불쌍한 이들을 위해서라고 쓰여진 편지와 함께 배달된 봉투 안에는 1000프랑짜리 지폐 500장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1

-생김새와 변신능력을 중심으로

 

기암성813의 비밀, 수정마개에서 복잡다단하고 심각한 면모를 실컷 보여준 우리의 주인공이 아르센 뤼팽의 고백에서는 처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에서와 같은 경쾌하고 유연한 괴도신사의 본성으로 돌아온다.

19114월부터 주 세 투에 연재되기 시작한 단편들이 피에르 라피르 출판사에서 하나의 옴니버스식 단편집으로 묶여 출간된 것은 19136월이 되어서였다. 따라서 대부분 개개의 작품 태동은 수정마개보다 빠르지만, 단행본 출간 시기는 그보다 뒤늦은 셈이다.

각 단편들의 질적 수준도 제각각이라, “지푸라기배회하는 죽음같은 작품은 1918년과 1933년에 재출간 시 누락할 만큼 평가를 받지 못한 반면, “그림자 표시와 특히 붉은 실크 스카프의 경우는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들에 필적하는 걸작으로 극찬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 소위 진지한문학평론가로 대접받는 평론가들은 대체적으로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인색한 평을 하기 마련이었는데, 아르센 뤼팽의 고백이 단행본으로 나온 1913년에 무슈 아 투라는 잡지에는 피에르 발다뉴라는 일급 문학평론가의 뤼팽 평이 실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문학적 가치를 신봉하는 독자 여러분에게는 그 전문(全文)을 접해보는 것도 소중한 경험일 것이다.

 

모리스 르블랑 씨의 아르센 뤼팽의 고백을 읽고......

모리스 르블랑 씨의 아르센 뤼팽 신간(新刊)을 읽고 나서 나는 경이로운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천재성이 작렬하는 사건들의 얼개가 인간의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독창성과 정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아르센 뤼팽의 영웅담을 읽으면서 우리는 마치 난해한 문제를 앞에 놓고 엄격한 추론과 새로운 착상을 거듭한 끝에 찬란한 해법에 이르고야 마는 수학자의 심정을 경험하게 된다. 전작(前作)에서와 같은 거대한 모험과는 달리 서로 독립된 소규모 사건들로 이루어진 이번 작품에서 우리는 자신의 천재성과 대담함, 간교함과 고뇌를 최고의 경지까지 밀고 나가는 아르센 뤼팽과 만나게 된다.

사실 그 하나하나가 두터운 책으로 엮일 수 있을 만한 주제들을 가지고 이토록 간결한 구성의 단편들로 소화해내는 것을 보면, 모리스 르블랑 씨는 분명 고갈되지 않을 엄청난 재능의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아르센 뤼팽의 고백의 각 에피소드들은 무척 강력한 매력을 풍기고 있으며, 그 중 몇몇은 에드거 앨런 포를 연상시킬 만큼 강렬한 전율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붉은 실크 스카프배회하는 죽음같은 단편들은 신비스럽고 으스스한 매력을 가득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러한 모든 이야기들을 모리스 르블랑 씨는 참으로 유연하고도 생생한 언어로 실감나게 풀어놓았다는 사실이다.

요즘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책을 낼 때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피에르 발다뉴, 투슈 아 투19138

 

이처럼 아르센 뤼팽의 고백이 본격문학을 위주로 한 평단으로부터도 호평을 받은 데에는 뤼팽 시리즈의 대중적 인기를 넘어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문학적 역량이 무엇보다 큰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은 같은 노르망디 출신인 대()문호 플로베르와 모파상을 흠모해 작가의 길로 들어선 만큼, 그들 작품의 영향을 적잖이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그의 작품들에는 인물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이 탁월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자신을 탄생시킨 작가보다도 등장인물에 불과한 아르센 뤼팽이 훨씬 더 유명해진 것 역시 이 같은 섬세하고 깊이 있는 상상력에 의한 작가의 인물창조 기술에 기인한 바 크다고 할 것이다.

 

역자로서도 누차 강조했듯이, ‘아르센 뤼팽 시리즈 100배로 감상하기의 비결은 무엇보다 아르센 뤼팽이라는 캐릭터의 올바른 이해와 그에 대한 애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 권부터 역자 해설을 당분간 뤼팽의 인물 연구에 집중할까 한다.

아르센 뤼팽이라는 인물은 전적으로 20세기 초, 부르주아의 장밋빛 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 벨 에포크(Belle Epoque, 좋은 시절)라는 독특한 시대의 아들이다. 끊임없이 스스로의 인생을 즐기려 들고, 마치 도박을 하듯 위험천만한 행동에 나서며, 심각하기보다는 가볍고 경쾌하고, 어디까지나 예술과 어여쁜 여성들을 선호하는 가운데, 늘 도전을 꿈꾸는 뤼팽의 면모는 하나같이 벨 에포크의 세련된 신사가 가지는 덕목이다. 그보다 이전 세대인 셜록 홈스와는 달리, 아르센 뤼팽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웃게 만들며, 질서와 상식을 조롱하는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아울러 늘 엄숙하기 그지없는 홈스와는 판이하게, 일견 일관성이 없어 보일 정도로 사건마다 모습을 달리하면서, 심지어는 자신의 정체에 스스로 의혹을 제기할 정도로 극히 인간적인 감정과 면모를 거침없이 보여준다. 이는 난공불락의 명탐정에 대비되는 자유분방한 범죄자로서 아르센 뤼팽이 일반 독자들에게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는 요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상당수 프랑스와 외국의 영화감독들이 괴도신사의 이야기를 크고 작게 영화화해 왔다. 로베르 라무뢰와 조르주 데크리에르 같은 걸출한 배우들의 명연기에도 불구하고, 사실 아르센 뤼팽은 그 누구로도 한정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떤 영화도 제대로 된 인물표현에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뤼팽의 연대기 작가조차 종종 오리무중이라고 실토하는 얼굴 없는 인물을 하긴 어느 배우인들 완벽히 소화해낼 수 있겠는가! 요컨대 아르센 뤼팽은 물리적인 윤곽을 일절 허용치 않는 존재이기에, 오로지 기술(旣述) 행위, 즉 문자를 통해서밖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 그를 대하는 독자들의 상상력 속에서만 온전히 꽃피울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어쨌든 연대기 작가는 뤼팽을 알아볼 수 있는 신체적 특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무척이나 인색한 단서만을 독자에게 제공할 뿐이다.

 

하긴 내가 알고 있는 한결같은 단서가 하나 있기는 하다. 다름 아니라, 어딘가 골똘히 주의력을 집중할 때면 으레 이마 한복판을 파고드는 자그마한 십자형 주름이 그것이다. 당시 뤼팽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하면서 내 눈에 들어온 것도 바로 그 깊은 십자형 주름이었다.

 

요컨대, 하나의 확실한 신체적 이미지를 통해 독자가 아르센 뤼팽이라는 존재를 추적하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하며, 오로지 연대기 작가로 등장하는 모리스 르블랑의 이야기 방식을 통해서만 실재하지 않는 한 인간의 존재가 가능하게 되어 있다.

이처럼 아르센 뤼팽의 정착된 초상(肖像)이 부재하는 반면, 탁월한 변장능력으로 그가 둔갑하는 숱한 인물군상을 통해서 그의 존재를 역추적(逆追跡)하는 방법은 시도해볼 만하다. 이는 그가 어떤 기법들을 활용해서 자신의 특기인 기만술을 매번 성공시키느냐에 관한 흥미로운 고찰이 될 것이며, 아르센 뤼팽이라는 인물의 정수(精髓)를 파악하는 지름길이기도 할 것이다.

 

변신술의 관점에서 볼 때, 아르센 뤼팽과 그의 어둠의 쌍둥이라고 할 수 있는 팡토마스를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아르센 뤼팽보다 뒤늦게 탄생한 팡토마스의 경우, 항상 가면과 소매 없는 망토를 착용하기 떄문에 가면과 망토를 벗어던지는 순간, 그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독자는 어디까지나 팡토마스의 진짜 얼굴을 모르겨, 그가 가면과 망토를 걸쳤을 대에만 비로소 팡토마스임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 속의 모든 등장인물이 팡토마스일 가능성은 늘 열겨 있는 셈이다. 반면 인위적인 가면을 착용하지 않되, 아르센 뤼팽에게서는 그가 변신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곧 그의 가면인 셈이다. 사전에 자신의 인상착의에 관한 그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은 뤼팽을 독자들은 끝끝내 알아볼 수가 없기 떄문이다. 팡토마스나 뤼팽 모두 그 누구로도 변신이 가능하지만, 독자들은 팡토마스가 본래의 모습(가면과 망토)을 취했을 때 그를 알아볼 수 있는 반면, 뤼팽은 본래의 모습을 취한다고 해도 결코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컨대, 아르센 뤼팽의 정체성(identite)이란 곧 그 정체의 식별불가능성(non-identification)으로 가장 잘 특징지어질 수 있으며, 이는 물리적인 부재(absence)가 아니라, 오히려 그 편재성(遍在性,omnipresence)을 통해서 그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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