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부인의 복수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9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총 20권에 이르는 뤼팽 전집을 읽으면서 청년부터 중년의 뤼팽까지 한 인물의 일대기를 훑다 보면, 분명히 가상의 인물임에도 그가 한 때 프랑스에서 살다가 지금은 남들이 모르는 어느 한적한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메인 탐정들에게 크리스티는 나름의 결말을 부여한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젊은 연인에서 손자 손녀가 있는 노부부가 되었고, 누군가는 세월의 흐름을 몸으로 겪으며 늙어간다. 작가가 등장 인물의 죽음을 작품에서 손수 그리는 것은 그 누구의 덧붙임이나 상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완벽주의 때문이겠지만, 때로는 작가의 실수로, 오해로, 사정상 인물의 결말을 그려내지 않은 것은 독자에게 그 인물이 이후에 어떻게 죽었을까 상상하는 해방감을 준다. 사실상 뤼팽의 마지막 말년의 거대한 모험담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어떻게 생을 마무리를 했을까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1894년 사랑에서 시작하여 증오로 끝이 난 것처럼 보인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과의 악연(惡緣)은 30년이 지난 1924년 섬뜩한 미스터리를 동반하면서 다시 증오로 부활하여 결국에는 사랑으로 마감하게 된다. 뿌리가 다른 사건들이 서로 절묘하게 교직(交織)되는 가운데, 그 연결 고리를 열쇠로 한 수수께끼가 이번에도 독자의 두뇌를 적잖이 괴롭힌다. 20세였던 라울 당드레지가 이제는 50줄을 훌쩍 넘은 라울 다베르니로 등장하는 만큼, 미숙한 격정보다는 중후한 능란함이 뤼팽의 이미지로 전면에 부각된다. 실제 저자의 의도대로 마지막 모험담이 되지는 못했지만(마지막 모험담은 4년 후에 발표된다), 말년에 이른 영웅의 내면이 유감 없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의 수많은 다른 이름들, 그 다채로운 정체성들을 일괄해 살펴보는 기회를 마련한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서 뤼팽의 파란만장한 전력을 다시 한 번 반추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아르센 뤼팽의 서문
나는 이 자리를 빌려 내 연대기 작가에 의해서 나와 관련한 것으로 기술된 일련의 모험담이 정확한 사실에 부합함을 확인하며, 그 노고에 고마움을 표함과 동시에, 그것이 기술된 방식에 관해서는 다소 아쉬움을 표명하는 바이다.

자고로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대중의 구미에 맞게 다듬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은 법이다. 나와 관련한 사건의 경우에는 아마도 가장 괜찮은 방법을 고르려다보니, 나를 항상 돋보이게 표현하고, 언제나 중요한 인물로 부각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연대기 작가는 내가 살아오면서 어쩔 수 없이 상황에 얽매이고, 적들에게 당하거나, 귀하신 경찰 나리들에게 매몰찬 대접을 받았떤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소홀히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설사 실제와 완전히 배치되지는 않더라고, 그것들을 임의로 조절하고, 배열하며, 때로는 발전, 과장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이 겸허한 심성을 더 이상 편히 가질 수 없도록 몰아온 것은 사실이다.

이제 나는 그런 식의 이야기에는 동조할 수가 없다.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의 한계를 알고 그것을 사랑해야만 하리......' 나 역시 나의 한계를 알고 있으며, 그것들을 느낀다는 점을 오히려 뿌듯해하는 사람이다. 대신 모든 초인간적이고 비정상적이며 과도하고 불균형하 것에는 끔찍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로 충분한 것이다.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나는 괴이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내 약점 중의 하나가 바로 우스꽝스런 꼴로 보이는 것을 대단히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제1부 두번째 사건
1. 싸움을 좇아서

철책문 양쪽으로 두 개의 별채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중 오른쪽에 정원사가 거주하고 있었다. 뤼팽은 지체 없이 초인종을 울렸고, 즉시 건물 안으로 안내되었다. 첫인상은 대만족이었다. 일부는 다소 낡고 거의 허물어지기 일보직전이나 다름없었지만, 전체적으로 공간이 잘 배분되어 있고, 언제든 잘만 보수하면 기막힌 별장이 될 것 같았다.

뤼팽은 속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바로 이거야...... 나한테 필요한 게 이거라구! 그러지 않아도 파리 근교 어디쯤 적당히 몸 붙일 곳을 마련해서 주말이면 종종 찾아가 쉴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가 말이야!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게다가 이 어인 횡재인가! 정말 기막힌 우연의 일치 아니겠는가! 일단 운명이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거처를 눈에 띄게 해줌과 동시에, 지갑 한 번 풀지 않고 그것을 통째로 삼킬 수 있게 되다니! 저 모로코 가죽 서류 가방도 결국 이 집을 얻는 데에 보탬을 주기 위해 애당초 눈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어쩜 이리도 일이 척척 맞아떨어지는고!


2. 학살

엘리자벳은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자기 방으로 올라갔고, 개폐식 책상을 열어 늘 하던 습관 그대로 일기장에다가 몇 줄을 끄적였다. 결과적으로는 그녀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들이 그 안에 담겨진 꼴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오늘 제롬은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긴 듯, 멍한 표정이었다. 나는 무슨 일 때문에 그러냐고 물었고, 그는 내가 잘못 본 거라고 대답했다. 내가 계속 다그치자, 똑같은 대답을 하긴 했는데, 조금 더 애매 모호하게 말끝을 흐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엘리자벳.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소. 우린 이제 곧 결혼할 건데 말이오. 무려 1년 전부터 가꿔온 꿈이 조금 있으면 실현될 텐데 말이야. 다만......"

"다만 뭐죠?"

"가끔 미래가 불안하게 생각된다오. 당신도 아다시피 나는 부자도 아니고, 나이가 서른이 가까워오도록 이렇다 할 직장도 없소."

 

"어머나! 하지만 우리의 보물은 진짜로 있답니다, 제롬...... 내가 언젠가 애기한 거 생각 안 나요?...... 우리 부모님 옛 친구 분 중에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이 한 분 계신데, 오랜 세월 보지도 못하고 연락도 두절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우릴 무척이나 아껴주신다고 했어요...... 그런데 내 가정교사인 아멜리가 내게 글쎄 이러는 거에요. '마드모아젤 엘리자벳, 아씨는 엄청난 부자가 될 것입니다. 아씨의 오랜 친척 되시는 조르주 뒤그리발께서 자신의 전 재산을 아씨에게 물려주실 게 분명해요. 엘리자벳 아씨에게 말입니다. 지금 병환 중에 있거든요......' 내 말 알겠어요, 제롬?......"


3. 라울이 개입하다

"다시 찾아내려면 어떻게 생긴 건지나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회색 천으로 된 자그마한 자루입니다."

"안에 뭐가 들었죠?"

가브렐 씨는 순간 버럭 화를 냈다.

"그건 오직 내 문제입니다!...... 내 사적인 문제예요...... 돈이든 서류든 잘 갈무리해두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는 여부는 오로지 내 소관 아닙니까?"

"그러니까, 결국 은행권 지폐가 있었던 겁니까?"

가브렐 씨는 점점 더 안달을 내며 내뱉었다.

"아뇨!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왜 거기 은행권 지폐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죠? 아니에요...... 그냥 편지가 있었습니다...... 별 쓸모도 없는 서류들하고 말이죠."

"그러니까 결국......"

"결국 내가 회색의 자그마한 헝겊자루를 찾고 있는 만큼, 사법당국으로서는 그것만 찾아다주면 된다 이겁니다!"


4. 구소 형사의 공세(攻勢)

구소는 퉁명스레 말을 받았다.

"나는 그저 진실의 모든 요소들을 취합하고자 힘쓸 뿐이오."

"이거 보세요, 형사 나리. 자고로 그런 모든 요소들도 어디까지나 예감으로 느껴지는 어떤 진실의 통념에 맞춰서 취합하는 법입니다."

"내게 진실이 어떠하리라는 생각 따위는 없소이다."

"천만에요, 그렇지 않을걸요. 지금 경우만 봐도 당신이 심문해온 과정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첫째, 당신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사건, 즉 은행권 다발의 도난과 두 건의 야간습격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 둘째, 간밤에 펠리시앵이 밖으로 나가서 오랑주리 정원에 도달하기 위해 남의 보트를 이용했고, 결국 지폐가 담긴 회색 헝겊자루를 훔쳐냈으며, 새벽 한 시경에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어둠 속에 매복했다가 잠시 후 이미 희생된 여자의 약혼자인 무슈 제롬 엘마를 용케 미행해 공격했다는 것이지요. 아울러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펠리시앵이 또다른 부상자인 시몽 로리앙마저 건드린 장본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도사리고 있다 이겁니다!"


5. 포스틴 코르티나와 시몽 로리앙

"내가요? 당신은 나를 알지도 못하잖습니까?"

"천만에! 난 당신을 알아요."

"나를 안다구요, 당신이 라울 다베르니를 알아요?"

"무슨 소리! 당신은 아르센 뤼팽이야!"

라울은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당돌한 직격탄이 날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진짜 이름이 이처럼 모욕적으로 내뱉어지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도대체 이 여자가 그것을 무슨 수로 알았단 말인가?......

 

라울은 그런 의문점들에 관해 여자가 아무것도 속 시원히 밝힐 입장이 못 될 것이며, 설사 그럴 수 있어도 단호히 거부할 것임을 대번에 눈치챘다. 저 고집스럽게 생긴 이마와 눈빛만 봐도 그 정도는 단박에 감이 왔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저토록 완강하게 버티는 가운데에도, 여자는 다소 야성적인 매력과 믿을 수 없을 만큼 기품 어린 분위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본능인지 습관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미모를 항상 적절하게 내세우며 써먹을 줄 아는 여자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비단 블라우스가 날씬한 몸의 윤곽과 균형 잡힌 어깨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6. 조각상

알바르는 즉시 조각상을 공개했고, 바로 그 순간 라울은 엄청난 탄식을 내뱉었다. 그것은 조각가가 느끼기에는 단순히 작품의 아름다움으로 인한 감탄사에 불과했으나, 실은 그보다 더 놀랍고 아연실색한 정신상태가 고스란히 반영된 비명 소리에 가까웠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 조각상은 포스틴 코르티나를 형상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여자 얼굴의 형태와 표정, 부드러운 옷감 속으로 짐작할 수 있는 몸의 윤곽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듯했다.


7. 장지-바르

젠틀맨은 부키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졸고 있었다. 후텁지근하고 무거운 밤 공기는 두터운 구름 아래로 점점 짙게 쌓여가고 있었다. 정박해 있는 바지선의 불빛이 수면에 반사되어 조용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맞은 편 기슭에는 검게 늘어선 건물들과 트로카데로 궁전의 위용, 교각의 아치들이 건너다 보였다. 제방에는 행인 한 명 눈에 띄지 않았다.

토마 부키는 슬그머니 젠틀맨의 저고리와 조끼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호주머니를 더듬었다. 급기야 안전핀으로 채워진(그것을 열기란 얼마나 까다로운가!) 조끼 안주머니에 이르러서야 은행권 지폐들로 이루어진 두둑한 다발의 촉감이 손가락 끝에 전해왔다. 그는 지체 없이 그것을 빼냈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안전핀 끝에 손이 깊숙하게 찔렸고, 그 바람에 움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박에 젠틀맨의 선잠이 흐트러졌고, 미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지하지 못하면서도 사내는 화들짝 몸을 도사렸다. 부키는 더 이상 개의치 않고 노골적으로 힘을 모았고, 상대는 빠져나가려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악착같이 붙들고 늘어졌다.

토마가 예상한 것보다 만만치 않은 저항이었다. 상대는 아예 손톱을 세워 살갗을 파고들면서까지 매달렸다. 뿐만 아니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요란을 떠는 것이었다.

순간 부키는 더럭 겁이 났다. 온힘을 다해 상대를 뿌리치는가 하면, 매달리는 몸뚱어리를 바닥에다 질질 끌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힘이 부쳤는지 상대가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이미 부키의 흥분은 스스로 멈출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선 상태였다. 아까보다 정신도 말짱하겠다, 그 내용이 정확히 뭐였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해서는 안 될 속내 얘기를 털어놓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공연히 부아가 났다. 완전히 서로 떨어진 두 남자는 강물이 흐르는 바로 옆에서, 서로 싸우다 만 사람들처럼 마주보며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부키는 순간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부키는 냅다 젠틀맨의 몸을 밀쳐 강물로 떨어뜨렸다. 그는 거의 무의식 중에 저지르고 만 자신의 행동에 기겁을 하며 잠시 동안 멍하니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저지른 것일까? 단순히 젠틀맨의 돈을 날치기하려고? 아니면 5000 프랑을 주기로 한 신사와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려고?

저만치 아래를 내려다보니 젠틀맨은 아직 수면을 들락날락하면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침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부키는 몸을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젠틀맨은 약 1분가량 수중에 그대로 잠긴 채 물살 흐르는 방향으로 헤엄을 쳐가고 있었다. 더 이상은 부키의 시선이 미치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나서야 그는 수면 위로 올라와 제방을 따라 능란한 수영실력을 발휘했다. 결국 그가 땅에 닿은 것은 그르넬 다리 조금 못 미쳐서였다.

근처에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차에 올라 옷을 갈아입은 다음, 곧장 베지네로 향했다.

새벽 세 시, 라울은 클레르-로지의 아늑한 침대에 몸을 파묻고 잠을 청했다.

 

8. 토마 부키

"아이를 맡기고 농장을 떠난 자동차가 마을을 10킬로미터쯤 벗어난 지점에서 고장이 났고, 이웃 마을에 차를 멈춘 여인은 예비 부품이 공급될 때까지 당분간 기다려야 했다는군. 한데 수리공장에 있던 정비공이 자동차 쿠션 및에서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는 거야.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여인의 이름이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이라나......"

순간 다베르니는 펄쩍 뛰었다.

 

"자네는 그 편지를 직접 봤나?"

"그건 아니지만, 바르텔르미가 읽어줬지."

"내용은 기억하겠구만?......"

"내용까지는 몰라도......"

"그럼?......" 

"이름 하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어떤 이름인데?"

"아이 아버지의 이름."

라울은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다그쳤다.

"당장 말해봐!"

"라울......"

그는 곧바로 상대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부여잡고는 우악스레 내질렀다.

"거짓말 마!"

 

"바르텔르미, 그 놈 완전히 사기꾼이구만. 난 그 자를 알지도 못해. 그 역시 나를 알리 없고 말이야."

"아니, 알고 있던데......"

"무슨 소리야?"

"당신 밑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던걸!"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건가?"

"당신의 옛 부하들 중 한 명이었다고 했어."

"바르텔르미가?"

"그때는 그 이름이 아니었지."

"무슨 이름이었는데?"

"오귀스트 델르롱! 뤼팽이 치안국장으로 있을 당시 총리실 수석경비원 자리에 앉혀놓았던 사람이지!(「813의 비밀」참조)"


9. 대장(大將)

토마 부키는 잔뜩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마침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랬다.

"그건 너무 위험해! 나까지 공범이라고 몰아붙일 텐데! 생각해보라구. 오랑주리 별장이 어떻다느니, 보트를 타고 있었다느니 하다보면, 다들 내가 이 사건에 대해 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 아니겠나?"

"공범이긴 하되 수동적인 차원에 머물렀다고 보겠지. 기껏해야 여섯 달 살다 나오면 돼. 무엇보다 자네한테 중요한 건, 자네 형제와 제롬 엘마가 습격을 당했던 시각에 자네는 파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는 거야."


10. "나,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이 명하노니..."

거기에는 흡사 어떤 도당의 우두머리나 폭군이 수하들에게나 내렸을 법한 강력한 명령조의 글귀가 한 줄, 아니 두 줄 적혀 있었다. 필체는 고고하면서도, 굵고 묵직하게 꾹꾹 눌러쓴 티가 역력했다. 아뿔사, 처음 보는 순간, 라울은 할 말을 잃었다...... 예전에 라울 스스로 악마 같은 존재로 불렀던 여자의 필체를 어찌 알아보지 못할쏜가! 늘 가공(可恐)할 지시를 아랫사람에게 내릴 때, 언제나 사용하던 그 여자의 거만하고 혹독한 어투를 어찌 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세 번씩이나 라울은 다음과 같은 끔직한 글귀들을 읽고 또 읽었다.

 

아이를 도둑으로, 가능하면 살인자로 만들라.

그래서 나중에 제 아비와 맞서게 하라.

 

검을 휘두른 것처럼 두 겹의 선으로 끄트머리에 한껏 멋을 부린 서명 또한 여전했다.

 

요컨대, 사태는 괜찮은 방향으로 전환한 듯싶었고, 그 와중에 몇 가지 문제도 명확하게 밝혀진 셈이었다. 이를테면 이 사건에서 포스틴의 역할이라는 것도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그녀는 옛날에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과 지극히 미미한 관계에 머문 적이 있고, 우연한 기회에 시몽 로리앙과 사랑에 빠져 프랑스로 오게 된 이후, 자기도 모르게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일 뿐이었다. 물론 바르텔르미와 그 아들이 꾸민 음모와는 지극히 먼 관련만 있을 따름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사랑에 빠진 일개 아녀자였고, 자신이 사랑한 사람을 위한 복수심 외에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이러는 게 전혀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칼리오스트로가(家)의 여인이 죽었다는 사실은 라울에게 더없이 다행한 소식이었고, 옛날 그녀가 서명한 저 끔찍한 명령이 실제로 펠리시앵에게 적용되었음을 믿게 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라울을 상대로 해서는 오로지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직접적인 지도 없이는 성공이 불가능한 작전이기에, 그것이 과연 바르텔르미라든가 그의 변변치 않은 두 아들 같은 2류급 인력에 의해 제대로 추진되었으리라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설사 억지로 강행되었다고 해도 결과는 어처구니없이 부정적일 게 뻔하다. 실제로 현재 라울 다베르니는, 어쩌면 자기 자식일지도 모를 한 청년을 느닷없이 앞에 두고도 바르텔르미와 시몽 로리앙이 둘 다 죽어버린 탓에, 숨겨진 진실에 도달할 방법이 전무한 상태인 것이다.

제2부 첫번째 사건
1. 결혼 소식

'오늘에 와서는 적어도 나한테는 모든 게 단순, 명확해졌어. 두 개의 사건이 서로 완전히 분리가 된 거라구. 그러니까, 두 번째 사건(바르텔르미의 협박 건)은 바르텔르미 그 자신과 시몽의 죽음으로, 또 토마 부키의 체포와 포스틴의 고백으로 깨끗하게 걸러진 셈이지. 그런가 하면 첫번째 사건(가브렐 자매 건인데, 사실 나로서는 간접적인 흥미밖에는 없는 사건이지)은 아직 그 어떤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은 채 계속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어. 남는 문제는 펠리시앵인데, 아직 그 정체가 모호한 이 문제야말로 이상 두 사건에 공히 걸쳐서 늘어져 있는 느낌이란 말씀이야......'


2. 수상한 방문객

"그 뒤로 친척이라는 사내는 얼굴 내민 적 없구요?"

"전혀 없었지요. 단, 그 뒤로 죽을 때까지 마담 알렉상드르 가르벨은 딸들을 데리고 바닷가 카부르(영불해협 연안인 칼바도스 지방에 위치한 해수욕장. 벨 에포크 시대의 명소/역주)에서 매년 여름을 나긴 했었지요. 한데 그 카부르라는 곳이 말입니다. 마담 알렉상드르의 친척인 무슈 조르주 뒤그리발이 현재 사는 캉에서 불과 2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점이 좀 이상하죠. 그것 가지고 또 우리끼리 부엌에서는, 틀림없이 카부르의 해변에서 둘이 몇 차례는 만났을 것이다 하며 얘기가 돌았었죠. 물론 두 어린 딸은 모르게 말입니다. 그러다가 오랑주리의 여자 요리사가 한번은 이러는 겁니다. '두고 봐요, 그 남자가 자기 전 재산을 마드모아젤 엘리자벳한테 양도할 테니까...... 보나 안 보나 뻔한 사실이라우. 이미 그 사람과 마담 알렉상드르 사이에 합의가 된 모양이에요. 아, 마드모아젤 엘리자벳은 지참금 하나는 두둑하게 벌어놓은 셈이지!'......"


3. 납치

"그럼 뭐야 이거? 운동선수 아냐? 아주 사내 대장부 아닌가 말이야! 오로지 자기 하는 일에만 노심초사하던 건축가의 껍질을 한 꺼풀 벗기니까, 근육과 운동신경과 의지와 용기, 대범함을 두루 갖춘,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사나이가 튀어나오지 않았는가 말이야! 하여튼 그 젊은 치구, 제법 멋쟁이인 것만은 확실해! 주주츠와 복싱, 그리고 사바트(「초록 눈동자의 아가씨」p.131 참조/역주)만 조금 개인교습 해주면 아주 괜찮은 인물 하나 만들어낼 수 있겠어! 이보게 뤼팽...... 자, 어떤가? 그가 자네 아들이라 해도 생각만큼은 나쁘지 않겠지? 아무튼 두고 볼 일이라구, 뤼팽 이 친구야!"


4. 푸른 보석함

'아이를 도둑으로 만들라......'

분명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의도는 그대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펠리시앵은 도둑질을 했고, 그것도 아비가 보는 앞에서 저질렀다. 따지고 보면 이 얼마나 끔찍한 복수란 말인가!

 

그는 깔끔하게 자물쇠를 해체했다. 그러면서 문득, 다른 사람에 의해 도둑질이 행해졌을 경우 속을 뒤흔드는 울분 어린 혐오감을 자기 스스로 남의 서랍을 뒤질 때만큼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아이러니컬한 사실이 계속해서 머리 속을 맴도는 것이었다.


5. 결혼이 가능할까?

"괴롭지가 않단 말이더냐? 잠시 후면 벌어질 일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어? 아니, 어떻게!...... 네가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는데, 그걸 두고만 바라본단 말이냐? 도대체 그럼 왜 여자를 납치한 거지?"


6. 증오

"그럼 이걸 봐! 이걸 똑똑히 보라구! 이보다 더 다정하고 사랑스런 여자는 없었어...... 그녀는 너를 사랑했는데, 너는 그녀를 죽였어! 오, 이 가증스런 인간......"


7. 퇴장할 사람

롤랑드의 목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앞의 남자에 대한 경멸과 증오로 온몸이 후들거리면서, 그녀는 온 기력을 다하여 위협과 모욕을 가하고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바짝 치켜들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뭐가 어째?"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이거야? 나를 비난하는 거야 알겠는데, 정식으로 고발할 거냐구?"

"그렇다! 이미 편지를 써놓았어."

"부쳤나?"


8. 프리네 상(像)

라울은 1년이 넘도록 여행을 다녔다. 그러는 가운데 두 남녀와 긴밀한 서신 교환을 유지했다. 펠리시앵은 자신이 설계한 도면들을 보내왔고, 그에 대해 자주 조언을 구했으며, 그럴수록 점점 신뢰하는 마음을 편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라울은 그 이상의 가까운 관계는 둘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녀석은 틀림없이 클라리스 데티그와 나 사이에 난 아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를 많이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내 안에 아비로서의 마음가짐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그나저나, 포스틴, 당신 맞죠?......"

"나라뇨? 누가요?"

"맞아! 당신은 제롬이 진범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고, 롤랑드가 그를 쫓아낼 거라는 것도 예상했었어. 결국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 것이 두려워 도망치기 전에, 먼저 그가 자기 집에 들르리라는 것 또한 당신은 훤히 내다보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요?"

"당신은 그의 집 문 앞에서 숨은 채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가 문을 열 때를 기다려 냅다 총을 발사했을 테고...... 그렇게 된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제롬은 자살을 감행할 사람이 못 되거든......"

여자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멀리 희미한 수평선을 가리켰다.

"저 너머가 우리 고향이에요...... 코르시카 말이에요...... 어떤 날에는 이곳에서도 어렴풋이 보인답니다...... 저곳에서는 남한테 해침을 당한 사람이 유일하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란 복수를 이루었을 때뿐이지요......"

"그래서 당신은 지금 행복하오, 포스틴?"
"아주 행복해요. 과거와 그 깨끗한 결말 때문에 더없이 행복하답니다. 그리고 현재 때문에도 행복해요. 어느 부유한 이탈리아 귀족이 나한테 마음을 바친 데다, 제노바에 장밋빛 대리석 궁전까지 선사한 걸요."

"그럼 결혼을 했단 말인가?"

"그럼요."

"그를 사랑하오?"

"그는 일흔 다섯 살이에요. 그나저나 라울 당신은 어때요? 행복한가요?"

 

둘은 평지에서 평지로 이어지는 산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가끔씩 알프스의 눈부신 설경과 깎아지른 듯한 산악 풍경이 나무들 틈으로 펼쳐졌다가는 사라졌다.

마침내 대형 정자(亭子)의 열주(列柱)가 이중으로 에워싼 맨 꼭대기 평지까지 다다랐을 대였다.

정중앙에 그야말로 여신의 찬란한 자태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듯한 프리네 조각상이 눈부신 모습으로 서 있는 게 아닌가!

포스틴은 자기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오! 나야!...... 나라구!......"

 

그로부터 10여주 동안을 포스틴은 자신의 이름을 딴 그 별장에서 머물렀다.


해설: 아르센 뤼팽의 작품론 5

굳이 그의 본명을 들라면 아버지의 성(姓)을 딴 이름, 즉 아르센 라울 뤼팽(Arsene Raoul Lupin)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름을 그대로 내세우며 이 천하의 풍운아가 활개를 치는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다. 그나마 자기 본면을 별로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름을 변형하는 경우라면, 라울을 뺀 아르센 뤼팽 그 자체와, 또 아르센을 빼고 모계 쪽 성(姓)을 이어받은 라울 당드레지(Raoul d'Andresy)가 전부이다. 나머지 여러 다른 이름들은 전혀 본명을 추측할 수 없는 글자 그래도 가명(假名)이거나, 보통 관찰력으로는 본명과의 연관성을 눈치채기 어려운 철자 바꾸기(anagramme) 유희의 결과물들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순수한 창작을 통해서 작명(作名)한 것에서부터, 생사에 관계없이 남의 이름을 빌려 쓰는 작태도 허다하다. 한 작품에 하나의 이름만을 사용하는 경우를 비롯해, 여러 다른 이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는 경우까지, 모두 40여 종을 훌쩍 상회하는 이름들을 각기 최초로 등장한 순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

 

*라울(Raoul)

두말할 것 없이 아르센 뤼팽이 6세 때 처음 도둑질을 하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이름이다. '왕비의 목걸이'에서 간접적으로 환기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가 하면 무려 26년이 지난 뒤의 얘기를 다룬 「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에서도 이 라울이라는 이름이 단독으로 등장한다.

 

*아르센 뤼팽(Arsene Lupin)

일단 이 이름을 최초로 내걸고서 본격적인 범죄의 길로 뛰어든 사건이 저 유명한 '마담 앵베르의 금고' 사건이라는 점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뤼팽의 나이 대략 18세 때의 사건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전혀 대단할 것 없는, 단순하고 어딘지 상스러운 이름일 뿐이었다. 벨 에포크 시절, '라울'이 보통 귀족풍의 품위 넘치는 이름으로 통했던 반면,2) '아르센'이라는 이름은 다소 거칠고 저속한 느낌을 주는 이름이었다.

 

*로스타(Rostat)

19세의 뤼팽이 마법사 딕슨 곁에서 괴도수업을 받을 때 차용한 가명. '아르센 뤼팽 탈출하다'에서 재판장의 입을 통해서 환기된다.

 

*라울 당드레지(Raoul d'Andresy)

단연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주인공이다. 20세의 팔팔한 나이로 진정한 괴도로 입문하면서 선택한 이름인 만큼, 뤼팽에게는 매우 각별한 이름이라 하겠다. 후에는 아예 뤼팽이라는 이름도 감추고 라울 당드레지 자작으로 행세한다.

 

*베르나르 당드레지(Bernard d'Andresy)

27세인 뤼팽은 이 이름으로 대서양 횡단 여객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신분은 어엿한 백작. 마케도니아에서 사망한 친척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다. 결국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에서 가니마르에 의해서 정체가 폭로된다.

 

*데지레 보드뤼(Desire Baudru)

28세 때, 일명 '아르센 뤼팽 탈출하다'로 세간에 알려진 희대의 탈옥사건을 연출하기 위해서 바로 이 이름을 가진 부랑자의 모든 것을 취한다. 뤼팽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변장 솜씨가 제일 처음 제 값을 발휘했을 때의 가명이기도 하다.

 

*기욤 베를라(Guillaume Berlat)

마찬가지로 28세 때 '수상한 여행객'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취한 이름. 뜻밖의 사건의 희생자가 될 뻔했지만, 기민한 대처로 난관을 극복한다. 최초로 직접 경찰에게 도움을 주는 모습이 등장한다.

 

*플로리아니(Floriani)

기사 작위를 가졌으며, 이탈리아가 고향이고 아마추어 탐정 노릇을 하는 뤼팽의 또다른 이름이다. 드뢰-수비즈 백작부부를 상대로, 20여 년 전에 자신의 손으로 저지른 '왕비의 목걸이' 도난사건의 비밀을 대범하게 공개한다.

 

*장 다스프리(Jean Daspry), 살바토르(Salvator)

뤼팽이 그의 모든 모험단을 세상에 소개할 연대기 작가 모리스 르블랑과 처음 알게 될 때, 바로 이런 이름이었다. 계기가 된 사건은 '세븐 하트' 사건이다. 그 사건 속에서 뤼팽은 또한 「에코 드 프랑스」지의 통신원인 살바토르라는 인물로도 둔갑한다.

 

*그리모당(Grimaudan)

'흑진주' 사건에서 흥신소를 운영하는 전직 형사로 둔갑해 이 이름을 사용한다.

 

*오라스 밸몽(Horace Velmont)

이 이름을 표방하는 뤼팽의 모습이 직접 등장해 모험담을 펼치는 최초의 사건은 '셜록 홈스, 한 발 늦다'이며, 이후 29세 때인 '결혼반지'에서도 아슬아슬하고 멋진 역할로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52세 무렵의 사건인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에서까지 이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뤼팽이 차용한 이름 중 '라울(Raul)'과 더불어 최장수 가명(假名)으로 간주해도 될 듯싶다. 그만큼 처지도 유명 화가에서 사교계 바람둥이, 의젓한 후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미셸 보몽(Michel Beaumont), 무슈 니콜(Nicole), 베른(Vernes) 박사

모두 다 저 격렬했던 「수정마개」사건 때 뤼팽이 차용한 이름들이다. 직업도 수집가, 가정교사, 의사로 제각각이며, 연령이나 행색도 다양하다. 뤼팽 시리즈 전체에서도 워낙 치열한 것으로 유명한 모험담이었던 만큼, 다양한 분신(分身)들로 화할 필요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자크 당브와즈(Jacques d'Emboise)

29세 대의 뤼팽이 이 이름을 가진 실존인물의 모든 정보를 주도면밀하게 빼내, 아예 그 인물 자체로 둔갑함으로써 사르조-방돔가(家)의 여식과 기상천외한 결혼을 성사시킨다. '아르센 뤼팽의 결혼'이라는 단편으로 전해지는 이 해괴한 모험담은 뤼팽의 두번째 결혼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슈 들랑글(Delangle)

니콜라 뒤그리발의 돈다발을 소매치기하기 위해서 치안국 형사 행세를 하면서 잠깐 차용한 이름이다. 이 일로 그는 '지옥의 함정'으로 유명한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다.

 

*장 도브뢰이(Jean Daubreuil)

'붉은 실크 스카프' 사건 해결을 위한 아지트를 확보하느라 도용한 이름.

 

*폴 도브뢰이(Paul Daubreuil)

'배회하는 죽음' 사건에서 치안국과의 비밀 업무관계를 둘러대며 의문의 소굴을 파고들기 위해서 차용한 이름.


*자니오(Janniot)

30세인 뤼팽이 '그림자 표시'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해서 둔갑한 퇴역 육군 대령.


*막심 베르몽(Maxime Bermond), 펠릭스 다비(Felix Davey), 데스트로(Destro)

셋 다 '금발의 귀부인' 사건을 두고 셜록 홈스와 대결하기 위해서 차용한 이름들. 막심 베르몽의 경우는 젊은 사업가이자 건축가로, 펠릭스 다비의 경우는 세련되고 우아한 기품이 묻어나는 젊은이로 행세하지만, 결국 둘 다 셜록 홈스에게 정체를 간파당하고 만다. 그런가 하면 데스트로는 호텔 지배인이 레스토랑에 있던 한 인물을 지칭하는 장면에서 딱 한 번 스쳐 지나는 이름으로, 이 역시 아르센 뤼팽의 천의 얼굴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 「수정마개」에서와 마찬가지로, 만만치 않은 모험담일수록 한 사건 안에서 동시다발적인 둔갑술을 부린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는 「기암성」과 「813의 비밀」 등, 뤼팽 최고 경지의 모험들에서 여실히 증명될 것이다.


*라울 드 리메지(Raoul de Limezy), 소비누(Sauvinoux)

라울 드 리메지는 뤼팽이 31세 때 경험한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에서 차용한 이름. 탐험가 남작으로 천재적인 활약을 펼친다. 소비누는 원래 치안국 형사로, 뤼팽이 그 상관인 마레스칼을 농락하기 위해 둔갑한 인물.


*짐 바르네트(Jim Barnett), 로랭(Laureins) 남작, 데느리스(d'Enneris) 남작, 실베스트르(Sylvestre)

짐 바르네트는 32세의 뤼팽이 본격적인 사설탐정으로 나서면서 취한 정체성으로, 본연의 뤼팽 모습에 버금갈 만큼 생생히 살아 숨쉬는 개성 만점의 인물형이다. 「바르네트 탐정사무소」를 통해서 모두 아홉 건의 사건('에메랄드 반지' 포함)을 해결한다. 로랭 남작은 그중 '흰 장갑...... 하얀 각반......'에서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잠깐 취한 이름. 또한 '에메랄드 반지'에서는 바쁜 친구 바르네트를 대신한다면서 데느리스 남작이라는 사교계 바람둥이로 나카나 올가 공작부인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하인 실베스트르로 감쪽같이 둔갑해 베슈 형사의 넋을 빼놓는 장면도 압권이다.

 

*돈 루이스 페레나(Don Luis Perenna)

훗날 무척이나 유명하게 될 이 에스파냐귀족의 이름은 사실 「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에서 일개 시골 성채경매 장면을 통해 제일 처음 선을 보인다. 그러나 이후, 이 이국적인 이름은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벌어질 굵직굵직한 모험들, 즉 「813의 비밀」,「황금삼각형」,「서른 개의 관」, 그리고 「호랑이 이빨」 등에서 종횡무진 맹활약을 보임으로써,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을 제하고는 가장 화려한 이름이 될 운명이다. 루이스 페레나(Luis Perenna) 라는 이름은 이후에 등장할 폴 세르닌(Paul Sernine), 폴 시너(Paule Sinner)와 함께 아르센 뤼팽(Arsene Lupin)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철자 바꾸기를 통해서 만들어진 가명이다.

 

*장 데느리스(Jean d'Enneris)

33세의 뤼팽이 1년간의 모터보트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와 「불가사의한 저택」 사건을 해결하면서 취한 이름. 일명 마도로스-신사, 혹은 탐정-신사라는 새로운 닉네임을 동반한 자작(子爵)으로 활약한다.

 

*자크 드 샤르므라스(Jacques de Charmerace)

원래는 1905년 뤼팽이 목숨을 구해주려다 실패한 어느 공작의 이름이었다. 4막 짜리 연극 「아르센 뤼팽」에 뤼팽의 또다른 정체성으로 본격 등장한 이후, 유명한 '왕관사건'과 결부되어 여러 차례 언급되는 이름이다.

 

*스파르미엔토(Sparmiento) 대령

'백조의 자태를 지닌 여인'에서 34세인 뤼팽이 이 이름을 가진 브라질 갑부로 분해, 기가 막힌 트릭을 선보인다.

 

*안프레디(Anfredi) 남작, 마시방(Massiban), 루이 발메라스(Louis valmeras), 에티엔 드 보드렉스(Etienne de Vaudreix)

모두가 35세의 뤼팽이 겪는 일생일대의 대모험 「기암성」에서 천재소년 이지도르 보트를레를 현혹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이름들. 눈 깜짝할 새에 이들 네 존재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뤼팽의 현란한 둔갑술은 이즈음 해서는 거의 신기(神技)의 경지에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보드를레는 매번 속아넘어갔다가 간신히 빠져나오곤 한다. 아마도 「기암성」은 이보다 4년 뒤의 이야기인 「813의 비밀」과 더불어 뤼팽의 화려한 둔갑술이 가장 빛을 발한 경우라고 할 것이다.

 

*라울 다브낙(Raoul d'Avenac)

36세인 뤼팽이 「바리바」의 엄청난 미스터리를 파헤칠 때 사용한 이름. 라울 다브낙 자작의 이면에 아르센 뤼팽이 숨어 있음을 베슈 형사만은 훤히 알고 있다.

 

*세르주 레닌(Serge Renine)

37세인 뤼팽이 자신의 친구 레닌 공작 이야기라며 모리스 르블랑에게 들려준 여덟 가지 섬세한 에피소드는, 불가능을 쫓는 사나이의 기개가 여성을 추구하는 기사도적인 애정관에 절묘하게 융합한 예를 보여준다.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이 에피소드들의 주인공 레닌 공작의 모습에서, 연대기 작가 르블랑은 자연스러게 뤼팽의 모습을 감지한다.

 

*르노르망(Lenorman), 폴 세르닌(Paul Sernine), 앙드레 보니(Andre Beauny)

르노르망 치안국장과 러시아 귀족 세르닌 공작은 마치 빛과 어둠 혹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구도처럼, 정확히 극과 극으로 양분된 페르소나의 모습을 환기한다고 할 수 있다. 뤼팽의 나이 38세에서 시작되어 39세까지 진행된 대모험 「813의 비밀」에서, 적어도 어느 한쪽의 정체가 드러나 둘 간의 균형이 깨지기 전까지, 뤼팽은 르노르망 치안국장과 세르닌 공작의 1인 2역을, 즉 법의 수호자와 그것의 유린자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앙드레 보니는 세르닌 공작이 케셀바흐 부인을 수월하게 만나기 위해서 잠깐 사용한 이름이다.

 

*제라덱(Geradec) 박사

불혹의 나이를 갓 넘겨 이제 막 41세가 된 뤼팽이 「황금삼각형」의 악한(惡漢) 에사레스 베를 퇴치하기 위해, 일종의 극약처방으로 분한 역할이다. 그가 상대에게 자살을 부추기는 장면은 이 사건의 명장면으로 기억될 만하다.

 

*세즈낙스(Segenax)

43세의 뤼팽은 보르스키라는 광인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전설적인 현인(賢人) 세즈낙스의 몰골을 그대로 흉내내면서 한바탕 연극판을 벌인다. 「서른 개의 관」에서 세즈낙스로 분한 뤼팽의 명연기는 거의 보는 자의 혼을 빼놓을 정도이다.

 

*무슈 르콕(Lecocq)

45세 때 치른 「호랑이 이빨」사건에서 리볼리가(街)의 작은 아파트를 구하기 위해 잠시 빈 이름.

 

*빅토르 오탱(Victor Hautin), 마르코스 아비스토(Marcos Avisto)

49세에 이른 뤼팽은 전직 검사의 아들이자 건전하고 유능한 치안국 형사 지망자인 빅토르 오탱이 사망하자 그 정체성을 몽땅 사들여, 오히려 도둑맞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희대의 기상천외한 모험담에 뛰어든다. 다른 자의 이름을 빌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뤼팽의 묘한 모습은 결국 우리 모두의 '정체성 찾기'라는 힘겨운 여정을 보여주는 드라마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페루 출신 관광객 마르코스 아비스토는 그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뤼팽의 또다른 배역이다.

 

*라울 다베르니(Raoul d'Averny)

「백작부인의 복수」에서 나이 50에 이른 뤼팽이 분한 역할. 아버지의 이름 아르센 뤼팽이 라울 다베르니라는 가명 뒤에 가려진 것처럼, 장 당드레지라는 아들의 정체 역시 펠리시앵 샤를이라는 또다른 가면 뒤로 영영 가려진 채 끝이 나는 데에서 일말의 비애(悲哀) 어린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폴 시너(Paule Sinner)

뤼팽 시리즈 최후의 작품인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52세에 이른 아르센 뤼팽(Arsene Lupin)의 철자 바꾸기를 통한 가명이다.

 

1) 사실 뤼팽 시리즈의 전체 모험담을 시기순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작품이 집필된 순서와 그 내용의 연대기적 순서가 워낙 뒤죽박죽이거니와, 작품 속에 엄밀한 단서가 주어진 것도 아니어서 연구자의 시각에 따라 여러 편차를 보일 수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일례로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으로 본 제라르 귀아슈(Gerard Guasch)의 견해(「수정마개」해설 참조)와 장르 문학 전문가이자 뤼팽 연구가이기도 한 앙드레-프랑수아 뤼오(Andre-Francois Ruaud)의 견해(「아르센 뤼팽」1996, DLM)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단 여기에서는 편의상 좀더 상세한 구분을 해 보이고 있는 후자의 견해에 따르기로 한다.

2) 「오페라의 유령(Le Fantome de I'Opera)」의 라울 드 샤니(Raoul de Chagny) 자작을 떠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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