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개의 관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9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벌써 한물간 유행어지만, '민폐 캐릭'이라는 말이 있었다. 주로 드라마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감정적으로 행동하여 일을 그르치거나, 여러 남자들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남자들을 위기로 빠뜨리면서도 정작 본인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여자 캐릭터를 의미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정작 대중문화 속 캐릭터는 예전 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불과 몇 년 전의 이야기이며, 이 경우 시대에 맞추어 변화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작가의 게으름에 대한 질타와, 작품 보는 눈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며 해당 배우에 대한 비웃음이 함께 동반되었다. 물론 지난 일이다. 요즘 이런 캐릭터를 내놓을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드라마 제작진도, 최종 허락을 해 줄 방송국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며 내내 느꼈던 불편함이 바로 이 부분이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 때문일까. 이 소설 속 베로니크는 내내 독자들로 하여금 답답함을 유발하고 끝내는 짜증이 나게 한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랑 어쩌다 보니 결혼, 헤어지고 수녀원에 들어가고 나서도 적응 못하고 나와버리는 모습, 평생 아들과 아버지를 그리워했다면서도 막상 대면의 순간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의 연속... 가장 나를 기함하게 만든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혼자 살아남은 가운데 이후에 일어날 일들이 두려워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배도 떠나보내고 섬에서의 고요함을 은근히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민폐의 총집합인데, 이런 캐릭터가 서브도 아니고 당당히 메인을 차지한 데다가 심지어 제 1부의 제목은 그녀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의 당돌하면서도 발랄한 여자 캐릭터들이 그리워졌다. 이런 식으로 남자 주인공의 인간적인면모를 돋보이기 위해 대상화된 여자 캐릭터들을 등장 시킬 바에는 차라리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처럼 여성을 혐오하여 아예 소설 속에 등장시키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소설은 여러 모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열개의 인디언 인형' 혹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시킨다. 굳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지 이야기하는 것은 입 아프다. 최근 크리스티의 소설이 또 영화화가 될 예정이며 여주인공으로는 안젤리나 졸리가 거론되고 있다는 뉴스가 있었다. 크리스티의 소설이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받은 이유는 단 한 번 등장하고 마는 인물이라도 작가가 그 인물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읽어도 재미있는 모리스 르블랑의 소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유는 소설 속 인물들이 그 시대에 박제된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겠지. 

 

어느 외딴 오두막. 한쪽 손목이 잘린 늙은이의 시신 옆에서 발견된 쪽지에는 브르타뉴 지방 특유의 양갈래 매듭이 늘어뜨려진 검은 벨벳 쓰개를 착용한 세 여자가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고, 나머지 한 여자는 바로 베로니크 자신의 얼굴. 14년 전, 남편 보르스키와 엄격한 아버지 데르즈몽의 납치극으로 가족 모두를 잃고 수도원으로 잠적한 베로니크는, 자신의 처녀적 성이 새겨진 표지를 따라 운명처럼 '서른 개의 관'이란 섬으로 이끌어진다.

 

<서른 개의 관>은 전작(前作) 두편과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어느 외딴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악몽과도 같은 모험담이 펼쳐진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중세의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시편들이 떠들썩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모리스 르블랑은 이런 종류의 시편에서 영감을 받아, 매우 섬뜩하고 피비린내 나는 한 편의 드라마를 구상한다. 역시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특히 프랑스 고대문명에 뿌리를 둔 유구한 전설과 그 신비주의적 분위기가 이색적이며, 극단적인 위기상황 속에서도 항상 경쾌한 기지를 잃지 않는 아르센 뤼팽의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가운데, 특히 막강한 '구원자'로서의 뤼팽 이미지가 완벽하게 부각되고 있다. 해설로는 아르센 뤼팽의 트레이드 마크인 아이러니를 분석해 본다.

 

1부 베로니크

프롤로그

1. 버려진 오두막

여자는 얼른 그것을 주워 펼쳐보았다. 그리고 미처 완전히 펼치기도 전에 손부터 부들부들 떨면서 이렇게 더듬대기 시작했다.

"아!......하, 하느님......맙소사!......아! 하느님! 맙소사!......"

여자는 안간힘을 다해 정신을 가다듬으려 했고, 눈을 부릅뜨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렇게 버틸 수 있던 것도 기껏해야 한 몇 초나 될까? 그나마 그 짧은 시간 동안 점점 더 두텁게 눈앞을 뒤덮으려 하는 안개 너머로 망막에 붉은 빛깔로 각인되어오는 것은 끔찍하게도 네 그루의 나무 줄기에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는 네 명의 여자 그림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면(前面) 중앙에 위치한 첫번째 여자는 베일에 가린 몸뚱어리가 이미 뻣뻣이 경직된 상태였고, 표정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맙소사! 그 얼굴이라는 것이 충분히 알아볼 만한 사람, 즉 자기 자신이 아닌가 말이다! 그랬다. 그것은 틀림없는 베로니크 데르즈몽 자신의 얼굴이었다.

게다가 머리 위, 나무줄기 꼭대기에는 고대 관습에 따라 카르투슈(꽃무늬 등으로 장식된 일종의 틀로서 그 안에 잠언, 가문[家紋] 따위를 새긴다/역주)가 걸려 있고, 그 안에 꼭꼭 눌러 쓴 필치로 처녀시절 베로니크의 서명 이니셜 세 글자와 장식 선이 선명하게 담겨 있는 것이었다. V. d`H. ......즉 베로니크 데르즈몽이라고 말이다!

 

2. 바닷가

3. 보르스키의 아들

4. 사레크 섬의 가엾은 사람들

5. 네 명의 여자가 십자가형을 당하리니...

"가만있자......셈이 맞아떨어지는군......혹시 배에 몇 사람이나 타고 있었는지 아시나요, 우리 세 자매 빼고 말이에요? 알고 있어요? 바로 스무 명이에요......그렇다면, 한번 세어보세요......스무 명에다가 첫번째로 죽은 마게녹이 있고......그 다음으로 무슈 앙투안이 죽었고......다음으로는 프랑수아 녀석과 무슈 스테판이 일단 행방불명이니, 죽은 걸로 치고......그 다음 오노린과 마리 르 고프가 죽었고......가만있자......한번 세어보자구"

 

어스름한 서광이 서서히 하늘 한곳에 번지고 있었다. 주변의 사물들도 그에 따라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현실적인 정체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아울러 다리 전체가 허물어져 깡그리 사라지고 난 뒤의 텅 빈 심연이 베로니크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양쪽 섬 지애 사이에는 50여 미터에 이르는 간격이 생겼고, 저 까마득한 아래에 들쭉날쭉 접근 불가능한 계속의 능선만 두 섬을 한 덩어리로 이어주고 있었다.

드디어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런데, 무심코 고개를 들어 맞은편 언덕을 바라보는 순간, 베로니크는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대(大)참나무 숲의 제일 전방에 위치한 세 그루의 나무가 낮은 가지들이 말끔히 제거된 채로 우뚝 솟아 있었고, 그 위에는 활짝 벌린 두 팔이 뒤로 젖혀지고 누더기 치마 아래로 두 다리가 꽁꽁 동여매인 채, 검은 머리쓰개의 띠로 반쯤 가려진 창백한 얼굴의 아르시냐 자매 세 명이 목에 밧줄이 친친 감긴 처참한 몰골로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었다!

 

6. --비앵

7. 프랑수아와 스테판

8. 일촉즉발

"당신도 아다시피, 이곳 사레크에는 잠수함 기지가 위장되어 있을 가능성을 타진하러, 군 장교들이랄지 공무원들 몇몇이 수차례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근에는 파트리스 벨발(「황금삼각형」참조/역주)대위라는 상이용사가 특별 대리인 자격으로 파리에서 급파되어 무슈 데르즈몽과 인간관계를 맺은 바 있지요. 그때 무슈 데르즈몽은 그에게 섬에 나도는 예의 그 전설들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모두가 느끼고 있는 걱정거리에 대해 귀띔해주었답니다(바로 마게녹이 떠난 다음날이었지요). 한데 벨발 대위는 유달리 그 얘기에 관심을 보이면서 한다는 말이, 파리에 사는 자기 친구 중에 에스파냐이던가 포르투갈이던가, 아무튼 그쪽 출신인 돈 루이스 페레나라는 신사가 있는데, 그에게 모든 얘기를 전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글쎄요, 보아하니 대단한 인물인가 싶던데, 이 세상 제아무리 복잡한 수수께끼도 척척 해결해내고, 엄청 위험하고 대범한 일들을 수행해나가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하더군요......아무튼 벨발 대위가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아 돈 루이스 페레나라는 이름으로 편지 한 장이 왔는데, 그게 바로 내가 얘기한 두번째 편지인 셈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무슈 데르즈몽은 우리에게 그 첫 대목만 읽어주었지요."

 

9. 죽음의 방

10. 탈출

2부 기적의 돌

11. 신의 재앙

"자, 마담......이제부터 우리가 나눠야 할 대화는 아마 길고도 곤혹스러운 내용이 될 거요. 그러니 일단 어디 좀 앉는 게 어떻겠소?"

그리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대답이 얼른 튀어나오지 않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한 태도로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 이 외발 원형탁자 위에 기운을 북돋을 만한 것도 준비되어 있으니......자, 비스킷하고 오래 된 포도주도 조금 있고, 샴페인도 한 잔쯤 나쁠 건 없겠지......"

그는 다소 과장된 예의를 차렸는데, 그것은 마치 반쯤 야만족이나 다름 없는 게르만인들이 우리도 문명의 섬세함을 갖출 만큼 갖췄다고 지레 내세우는 듯했고, 이미 정복자의 당연한 권리로 조금은 거칠게 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여성한테 어울리는 세련된 에티켓쯤 얼마든지 익숙한 처지라며 시위라도 하는 듯했다. 베로니크는 예전부터 바로 그와 같은 면면을 대할 때마다, 남편의 진짜 태생이 어디인지 더없이 생생하게 실감하곤 했었다.

 

12. 골고다 언덕

13.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14. 늙은 드루이드 사제

15. 격돌

16. 보헤미아 왕가의 판석

17. 운명이 점지한 잔인한 왕자

18. 신의 돌

"맞는 말입니다. 심지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일정한 영향을 줄 정도로 집요한 전설이니까요. 솔직히 우리 중 누구도 그 기적의 강박관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웬걸요? 적어도 나는 기적을 믿은 적은 없는 걸요!"

이번에는 대위가 발끈했고, 아이도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아닐걸요! 아마도 속으로는 어느 정도 믿고 있을 겁니다. 최소한 일말의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들 있지요. 만약 그렇지만 았았다면 필경 지금보다 훨씬 이전에 진실을 파헤칠 수 있었을 겁니다!"

 

"바로 맞췄다, 꼬마야! 라듐이지. 사실 방사능현상은 거의 모든 자연현상 속에서 감지된단다. 온천수의 효과에서도 느낄 수 있듯, 자연 전체에서 그런 현상이 확인된다고도 볼 수 있어. 하지만 라듐처럼 보다 극명한 방사능 물질은 좀더 노골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지. 예컨대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라듐에서 방사되어 나오는 성분은 마치 전류가 흐를 때 발생하는 것과 유사한 영향력을 식물체의 생장에 행사하게 된단다. 두 경우 다 영양 중추의 흥분을 가져와 식물체에 필숮거인 요소들의 화합을 보다 용이하게 해서, 결국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는 거란다......또 한 가지 확인된 사실은, 라듐의 방사가 일부 세포들을 파괴하거나 혹은 그 발달을 촉진함으로써, 때로는 진화의 양상까지 조절할 정도로, 생체조직에 확실한 생리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야. 소위 라듐 치료요법이라는 것도 다 그런 원리를 통해, 관절 류마티스라든가, 신경통, 궤양, 습진, 종양 등을 개선, 치유하는 것이지. 요컨대, 라듐이야말로 현실적으로 효험이 있는 치료 인자(因子)인 셈이란다."

 

"위대한 과학자 앙리 베크렐(1852-1908. 1903년에 퀴리 부부와 더불어 노벨 물리학상 수상. 여기 소개된 일화는 1901년 4월에 있었던 실화이다/역주)은 조끼 주머니에 극히 미세한 라듐 알갱이가 담긴 용기를 넣고 다녔다가, 단 며칠 만에 화농이 피부에 도지는 바람에 심한 고생을 한 경력이 있습니다. 이를 알게 된 퀴리는 실험 삼아 같은 행동을 했고, 결과는 마찬가지였지요. 마게녹의 경우는 직접 손에다 라듐 알갱이를 댔으니 이보다 훨씬 심각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아마 암종(癌腫) 모양의 상처가 났겠죠. 과학적인 지식이 있을 턱이 없는 그로서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삶 아니면 죽음을 준다'는 그 기적의 돌이 자기에게 지옥의 불길을 선사하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린 끝에, 그만 제 손목을 자르기에 이른 것이죠."

 

"하긴, 이처럼 아득한 가설을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자연의 오묘하고도 무궁무진한 수단들에 기대기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라듐 알갱이를 하나 온전히 만들어내기 위해서 과연 이 버찌 한 알, 이 장미꽃 한 송이......아니 여기 이 영리한 투-바-비앵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 이상의 뭔가 특별하고 기적 같은 자연의 비법이 반드시 필요했을까요?"

 

"우리의 켈트족 조상처럼 그 돌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종족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많아요. 실은 그 방면으로 내가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는 게 하나 있거든요. 그 돌이 있다면 매우 소중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호랑이 이빨」참조/역주). 한 몇 달 걸리는 사업인데, 다 끝나고 나면 신의 돌을 프랑스로 가지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설립 계획 중인 국립 연구소에 기증할 예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의 돌 때문에 저질러진 악행이 과학의 힘으로 순화되며, 사레크의 추악한 사건도 일거에 상쇄되는 셈이지요. 어떻습니까, 찬성하시는지요, 마담?"

 

"아, 정말이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추악한 사건이었지요! 세상 끔찍한 경험이란 경험은 기가 질릴 정도로 겪어온 몸이지만, 이번 것은 그 모두를 훨씬 능가합니다. 현실의 가능한 영역을 훌쩍 뛰어넘었고, 인간으로서 견딜 수 있는 고통을 저만치 따돌리는, 그런 사건이었어요. 단 한 명의 미치광이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지금처럼 광기와 방황이 지배하는 시기에 발생한 만큼, 너무나도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사건이었습니다......조용하기만 하던 섬에 한 괴물이 나타나 극악무도한 범죄를 구상하고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만약 평화시였다면 제아무리 괴물 같은 존재라고 해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끝까지 물고늘어질 여유가 없었을 거예요. 고립된 섬에서 오늘과 같은 혼란한 시대가 맞아떨어졌기에, 괴물에게 그토록 비정상적인 특수한 조건들이 거저 마련된 셈이지요......"

 

"어때, 멋쟁이 투-바-비앵, 우리 이제 그런 끔찍한 사건일랑 그만 얘기하자꾸나! 하지만 몇 가지 재미나고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은 기억해볼 만도 하지. 안 그러니, 투-바-비앵? 마게녹의 그 으리으리한 화원, 기억나니? 신의 돌에 얽힌 장대한 전설도 그렇지! 기적 같은 생명력으로 충만한 라듐이 그득하게 도사리고 있는 제왕(帝王)의 묘석과 더불어 세계를 방랑하던 켈트족의 대서사시! 정말이지 근사한 구석도 없진 않았지......안 그래? 이건 말이다, 투-바-비앵, 내가 만약 소설가가 되어서 서른 개의 관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 할 입장이라면 얘긴데, 난 결코 험악한 진실에 연연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투-바-비앵, 네 역할을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그려넣을 거라구. 물론 돈 루이스의 지루하기 그지없는 수다는 좀 줄이고 말이야. 대신 너를 과묵하고 용감한 구원자로 내세우겠어. 가증스런 괴물과 싸울 용사도 너이고, 괴물의 악랄한 흉계를 여지없이 분쇄하는 것도 바로 너 투-바-비앵이라구! 그러다 마침내 너의 기발한 본능으로 세상의 악을 벌하고 선에게 승리를 부여하는 거지......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근사할 거야. 왜냐하면 말이다, 삶이란 어떻게든 풀려나가기 마련이며, 결국에는 '모두 다 잘 될 것'이라는 진리를 어느 모로 보나 우리 똑똑하고 멋진 투-바-비앵보다 더 잘 가르쳐줄 만한 선생님이 내가 보기에는 없을 것 같거든......"

해설: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4

-아이러니의 천재, 아르센 뤼팽

 

서른 개의 관은 전작(前作) 두 편과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어느 외딴 섬을 배경으로 한 악몽과도 같은 모험담이 펼쳐진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중세의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시편들이 떠들썩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는데, 모리스 르블랑은 이런 종류의 시편에서 영감을 받아, 매우 섬뜩하고 피비린내 나는 한 편의 신비주의적 드라마를 구상한다. 1918년부터 이 작품에 착수하면서, 르블랑은 19세기 말 고대 프랑스 전문가인 퓌스텔 쿨랑주(1830-1889) 박사의 저작을 꼼꼼히 참조하여 드루이드교()와 켈트 문명에 관한 자료들을 치밀하게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토록 정성을 들인 이 작품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은 길을 걷게 된다. 그 해 5, 어느덧 150여 장에 달하게 된 원고를 소지한 채 탕카르빌의 별장으로 가던 도중, 그만 그 모두를 분실하고 만 것. 결국 전쟁이 끝난 19196월에 가서야 르 주르날지에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겨우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1011일 일단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다가, 19224월에는 상, 하 두 권으로 나뉘어 그 당시 매우 이름을 날리던 액션과 모험 소설(Les romans d`aventure et d`action)총서로 재간되기에 이른다. 역시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킨 이 환상적인 추리, 모험소설은 당대의 저명한 비평가 장-밥티스트 바로니앙에 의해서, “프랑스어로 쓰인 가장 열정적이고 매력적인 추리소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특히 프랑스 고대문명에 뿌리를 둔 유구한 전설과 그 신비주의적 분위기가 이색적이며, 극단적인 위기상황 속에서도 항상 경쾌한 기지(奇智)를 잃지 않는 아르센 뤼팽의 개성이 유감 없이 발휘되는 가운데, 특히 막강한 구원자로서의 뤼팽 이미지가 완벽하게 부각되고 있다.

 

우리가 아르센 뤼팽을 사랑하고 그의 활약에 열광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여유 만만한 유머 기질과 두둑한 배짱을 잃는 법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심할 경우 다소 수다스럽고 경박해 보일 정도인 그 모습은 당시까지만 해도 여타 추리소설의 히어로에게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파격적인 이미지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소 경직된 시선으로 보면 자칫 거부감마저 불러일으킬지 모르는 아르센 뤼팽의 그런 모습 속에는 철저하게 이성적인 전략(戰略)이 숨어 있다.

 

일반적으로 아이러니란 화자(話者)가 어떤 것을 생각하면서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이야기할 때발생한다.1) 이것을 좀더 전문적으로 설명하자면, 아이러니의 의미론적 특성이란 잠재적 기의(起義, signifie latent)와 표출된 기의(signifie manifeste) 사이의 반의적(反意的) 관계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화자가 일련의 의도나 뜻을 품고 말을 하지만, 정작 말하는 내용은 그 정반대로 나타난다는 이야기이다. 가장 쉬운 예로 어리석은 사람을 탓하면서 그래, 너 참 똑똑해!”라고 말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때, ‘똑똑하다라는 말은 일종의 아이러니로서, 사실과 다르다는 점에서는 거짓말이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거짓말과는 성격이 다르다. ‘거짓말이란 화자가 생각하는 것(A)과 반대의 내용(not A)을 말함으로써, 이야기의 상대, 즉 청자(聽者)로 하여금 결국 그 말을 있는 그대로(not A)받아들이게끔 하는 데에 반해서, ‘아이러니는 화자의 생각(A)과 반대의 이야기(not A)를 하지만, 그럼으로써 화자가 생각하는 바(A)를 더욱 실감나게 받아들이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위의 편지 내용에 담긴 뤼팽의 생각, 잠재적 기의상대가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고그래서 아늑한 벽난로 곁을 박차고 나와주기를 바라는마음이다. 하지만 정작 표출된 기의는 그 반대, 수모를 당하는 걸 두고 볼 수 없기에’ ‘아늑한 벽난로 곁에 머물러 계시기를 바라는것으로 제법 예의를 갖춰 치장되어 있다. 물론 셜록 홈스는 이 편지를 받자마자 곧장 뤼팽과의 일전(一戰)을 치르러 프랑스로 건너오게 된다. 아르센 뤼팽의 아이러니가 제대로 적중한 셈이다.

 

분명 은근한 미소를 동반했을 것이 틀림없는 이와 같은 아이러니는 빈정대는 듯한 가면 뒤의 합리적인 지성을 짐작케 하는 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아르센 뤼팽이 그저 툭 내뱉는 듯한 유머러스한 빈정거림 속에는 다분히 전략적(戰略的)인 기도(企圖)가 예리하게 도사리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이 괴상한 연극에도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가 왔나보군......배신자라도 처형하는 장면인가? 이젠 여배우의 연기를 감상할 차례인가보군......()의 여신께서 납셨어......거참 영광인걸!......마담 뒤그리발, 이왕이면 얼굴은 상하지 않게 처단해주시구려.

 

사실, 이와 같은 과감한 아이러니는 그 두둑한 배짱으로 상대를 주눅들게 하려는 전략과 더불어, 자기 내면으로 볼 때에도 무척 심오한 차원의 기도(企圖)를 동반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눈앞에 닥친 절체절명의 현실을 스스로 교묘히 비껴감으로써, 의지(意志)와 용기가 흔들리는 것을 미리부터 차단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 작금의 위협적인 상황을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치부하려는 듯한 태도야말로, 현실을 비현실로 치환(置換)해보려는 자세를 대변한다.

 

나쁘진 않군그래, 당신 아파트, 그런 대로 괜찮아...... 전기 불도 들어오고, 중앙난방장치에다 수세식 변기까지......한마디로 현대식 편의시설을 죄다 갖췄구만......이만하면 완벽해요......교도소장 나리! 이곳에 머물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답답한 감방이 통쾌한 아이러니의 힘을 통해서 안락한 아파트로 둔갑하고 만다. 물론 그렇다고 현실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에 대한 자아(自我)의 반응이 달라지며 이는 곧 그 현실에 도전하고 끝내는 초극(超克)해버리는 뤼팽 특유의 활극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자아의 나르시시즘이 극대화된 나머지 현실의 충격(traumastisme)을 덮어버리고2), 결국에는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열악한 상화에 부딪칠 때마다 자기 자신을 마치 삶이라는 연극의 연출자처럼 위치시킴으로써, 위협받고 상처받은 자아를 효과적으로 치유할 심리적 기제(機制)가 갖춰지는 셈이다. 아르센 뤼팽에게서 흔히 보는 호들갑스러운 수다와 익살은 현실적인 불안과 위협을 물리치고 나르시시즘을 극대화시키는 일종의 마법적 주문(呪文)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초자아(超自我)란 자아를 위로하고자 하며, 고통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를 바란다”3)는 프로이드의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온갖 수다 속에서 호들갑을 떠는 뤼팽은 곧 그 자신의 초자아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이때 뤼팽의 아이러니는 그 초자아의 언어적 체현(體現)이자 현실을 치고 나가는 효과적인 무기(武器)인 셈이다.

 

1) V. jankelevitch, 아이러니(Ironie), Flammarion, “Champs”, 64, p.76.

2) S. Freud,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Le Mot D`espirit et sa relation a l`inconscient), Gallimard, p.323

3) 같은 책,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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