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센 뤼팽의 고백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6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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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단편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은 단편이 더 재미있는 것 같다. 물론 장편도 훌륭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뤼팽의 활약에 자꾸 군더더기가 붙는 것 같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긴 분량을 오롯이 채우지 못해 곁다리로 홈스의 이야기가 들어가거나, 어설프게 로맨스가 추가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신파로 끝을 맺거나 평범한 복수극으로 끝나버려 활기 넘치는 중반까지가 아깝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유쾌한 도둑 이야기에는 역시 단편이 제격이다.

 

 

기암성813의 비밀」「수정마개에서 복잡다단하고 심각한 면모를 실컷 보여준 우리의 주인공이 이번에는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에서와 같은 경쾌하고 유연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1911년부터 주 세 투에 연재되어온 단편들을 한데 엮은아르센 뤼팽의 고백은 특히 당대의 본격문학 평단으로부터도 극찬을 받았을 정도로 독창성과 섬세한 매력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그중에서도 "그림자 표시""붉은 실크 스카프" 같은 단편은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작품에 필적하는 걸작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이번부터 당분간 역자 해설을 통해서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를 연재하기로 한다. 아르센 뤼팽을 사랑하는 뤼피니앵들에게 유익한 선물이 되리라고 기대해본다.

 

 

1. 거울놀이

 

하긴 정말 묘한 수수께끼였지......그 일은 왠지 그림자 표시라고 이름붙이고 싶네만......”

나는 내친 김에 계속 몰아붙였다.

사교계에서의 인기는 또 어떻고! 바람둥이 아르센이 저지르고 다닌 온갖 스캔들 말일세!...... 그리고 자네가 남몰래 행한 선행들도 마찬가지이네! ‘결혼반지’, ‘배회하는 죽음등등, 내 앞에서 자네가 슬쩍 흘리고 지나가버린 이야기들이 어디 한둘인가? 뤼팽 이 친구야, 대체 언제지 그렇게 시침만 떼고 있을 셈인가?......자 자, 큰맘 먹고 어디 한 번속 시원히 털어놓아보시게......”

때는, 이미 유명해진 뤼팽이 아직은 그의 가장 끔찍한 격전을 치르기 전, 그러니까 기암성이랄지 ‘813의 비밀같은 엄청난 모험들에 뛰어들기 전이었다. 아직은 프랑스 제왕(諸王)의 수세기에 걸친 보물을 제것으로 삼는다거나, 독일 카이저(皇帝)의 바로 코앞에서 유럽을 도둑질할 생각일랑은 꿈도 꿔보지 못한 채, 보다 소박하고 납득할 만한 잔재주를 부리는 데에 만족하던 시절이라고나 할까? 천성적으로도 그렇지만, 그저 취미 삼아 그때 그때 선행과 악행을 경쾌하게 뿌리고 다니면서 일상에 울고 웃는 돈키호테의 나날들......

 

생각해보게, 라베르누는 금고 속의 끔찍한 내용물에 관해서 알고 있을 테고, 그런 입장에서 바로 남작을 고발하지 않았는가 말이야. 창문을 통해서 그처럼 기발한 햇빛 교신방법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카페에서 죽치고 앉아 신문의 암호 퀴즈 따위를 함께 풀어대던 같은 동네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충분히 추정할 만했지.”

그제서야 나는 이마를 치며 소리쳤다.

, 그것 참! 간단하긴 간단하구만!”

아주 간단한 일이지! 아울러 이번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은 진리를 명심해야 될 것이야. 자고로 범죄를 해결하는 데에는, 제반 사실들을 꼬치꼬치 따지든가, 답답한 추리에 골몰하는 따위의 부질없는 짓거리들보다 훨씬 강력하고 유효한 방법이 있다는 것 말일세. , 누차 얘기하지만, 직관(直觀)! 그리고 예외적인 지성(知性)!......자랑은 아니네만 아르센 뤼팽이 두루 가지고 있는 이 두 가지 장점이야말로 범죄해결의 비결이라고 아니할 수 없지......”

 

 

2. 결혼반지

 

증거라면?”

내가 직접 끊어서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반지 얘기네. 여기 안쪽에 새겨진 글씨를 보게. 그녀가 누구의 이름을 새겨 가지고 다녔는지 좀 보라구.”

그러면서 반지를 내밀었고, 나는 그 안을 살펴보았다.

오라스 벨몽

잠시 뤼팽과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나는 그의 얼굴 한켠에서 다분히 멜랑콜리한, 어떤 감정상태가 어른거리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얘기는 자네가 전부터 내게 여러 차례 암시를 해오던 걸로 아는데......이제 와서 불쑥 털어놓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특별한 이유?”

그러면서 뤼팽은, 때마침 어느 젊은이의 팔을 붙든 채 우리 앞을 지나가는 아리따운 부인 한 명을 눈짓으로 슬쩍 가리켰다.

한데 그녀 쪽에서도 뤼팽을 알아보고는 살짝 인사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바로 저 여자야. 아들과 함께 가는구만......”

뤼팽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니, 자네를 알아보지 않나?”

내 변장이 아무리 뛰어나도 항상 날 알아보지.”

그나저나 티베르메닐 성관 도난사건 이후로 경찰이 뤼팽과 오라스 벨몽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했을 텐데......”

그랬지.”

그렇다면 저 여자도 자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네.”

그런데도 아무 서슴없이 인사를 해?”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나왔다.

뤼팽은 대뜸 내 팔을 거칠게 잡아채며 대꾸했다.

자넨 내가 그녀 앞에서도 뤼팽일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녀가 보기에도 내가 도둑에다 협잡꾼에다 한낱 불량배일 거라고 생각하느냔 말일세?......하긴, 심지어 내가 살인도 불사할 만큼 막돼먹은 인간 말종(末種)이라고 해도, 아마 그녀는 내게 여전히 인사를 건넬 것이네.”

그건 또 왠가? 한때 자네를 사랑했기 때문에?”

저런! 오히려 그 이유라면 나를 경멸할 구실이나 될 수 있겠지......”

그럼 뭔가?”

내가 자네에게 아들을 돌려준 사람이기 때문일세!”

 

 

3. 그림자 표시

 

나는 슬그머니 다가가 그와 마찬가지로 관목의 잔가지들을 살짝 헤쳐 그 너머를 염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이지 예상을 훌쩍 초월하는 것이었다. 내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외마디 탄성이 터져나왔고, 뤼팽 역시 잇새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창문 하나 없는 양쪽 건물들을 경계로 한껏 펼쳐진 공간 안에는, 내가 골동품 상점에서 구입한 바로 그 낡은 그림에 담긴 풍경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게 아닌가!

세부적인 부분까지 정확히 일치했다! 저만치 뒤쪽에는 제2의 담벼락을 배경으로 그림에서와 똑같은 그리스풍의 경쾌한 열주식 원형건물이 버티고 있는가 하면, 중앙에는 마찬가지로 그림에서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돌의자들이 원형계단을 사이에 두고 이끼가 덕지덕지 낀 포석의 연못을 굽어보고 있었다. 한편 왼쪽으로는, 역시 같은 우물이 정교하게 제작된 금속 지붕을 받치고 있었고, 그 바로 가까이에는 대리석 자판에 화살표 모양의 지침을 뽐내며 눈에 익은 해시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다지도 똑같을까! 펼쳐진 광경의 유사점 외에도 신기한 점이라면, 뤼팽이나 내 머리 속에 낙인처럼 찍혀져 있는 그림 속의 수수께끼 같은 날짜, 415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고많은 날들 중 하필 오늘 415, 서로 다른 연배와 사회계층에 속한 10여 명의 사람들이 굳이 그 의문의 날짜를 택해서 파리의 이처럼 외진 구석을 찾아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오후 다섯 시가 되어오자 지저분한 모닝코트 차림의 뚱뚱보 신사가 문득 시계를 꺼내 보았다. 그러자 너도나도 흉내라도 내는 것처럼 각자의 시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마치 저들에게 엄청 중요한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불안하게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뚱뚱보 신사는 낭패라는 듯 제스처를 취한 다음,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모자를 눌러쓰는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졸지에 애도와 슬픔의 분위기가 전체에 확산되었다. 비쩍 마른 두 노자매와 노동자의 아내는 아예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성호까지 긋는가 하면, 강아지를 데려온 아가씩와 거지 아내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흐느껴 울었다. 루이즈 데르느몽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딸을 와락 끌어안는 동작이 여간 애처로운 게 아니었다.

우리도 이만 가세나.”

뤼팽이 속삭였다.

소풍이 끝난 걸까?”

그렇다네. 이젠 우리가 달아나야 할 때야.”

 

 

4. 지옥의 함정

 

푸하하하하-딱한 가니마르! 정말이지 억세게도 운 없는 친구가 아닌가! , 내가 체포되는 현장을 나도 구경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는데......”

여자의 믿어지지 않을 기력에 의지해서 계단을 다 내려온 뤼팽은 곧장 거리로 나갔고, 자동차에 태워졌다.

갑시다.”

여자가 운전기사에게 던지듯 말했다.

오랜만에 탁 트인 공기와 심한 움직임으로 정신이 얼얼해진 뤼팽은 어디를 어떻게 통해서 가는 건지 거의 감지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가 가끔씩 돌아가며 머물되 평소엔 하인만 배치시켜 놓는 여러 숙소들 중 한 곳에 도착하자 그나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데, 여자는 하인에게 대뜸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

자넨 나가 있게.”

아울러 자신도 막 나가려는 것을 뤼팽은 옷자락을 와락 붙들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이대로 가면 안 되지요......먼저 자초지종을 좀 들어야겠소이다......대체 나를 왜 구해준 거요? 당신 숙모 모르게 돌아온 겁니까? 나를 구해준 이유가 대체 뭡니까? 그저 불쌍해서 그런 거요?”

하지만 여자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가슴을 꼿꼿이 펴고 고개를 바짝 치켜든 자세로, 강인하면서도 어딘지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여전히 고수할 뿐이었다. 다만 이전과 약간 다른 점이라면 그 잔혹해 보이기만 하던 입술선()이 왠지 다소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보 보니 그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 속에서도 일말의 우수(憂愁)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뤼팽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논리적인 이해 이전에, 어렴풋한 직관의 힘으로 그녀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짜고짜 여자의 손을 덥석 붙잡았으나, 여자는 증오심과 거부감이 느껴지는 동작으로 펄쩍 뛰다시피 손을 빼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뤼팽이 다시 손을 붙들려고 하자, 이번에는 여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버려두세요!......놓으란 말이에요!......당신을 증오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마주보고 있었다. 뤼팽도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으나, 여자는 그 창백하던 얼굴이 난데없이 벌겋게 물들 정도로, 온통 당혹스런 감정에 휘말린 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뤼팽이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증오한다면 죽게 내버려두었어야 합니다......어렵지도 않은 일이었어요. 왜 그렇게 하지를 않은 거죠?”

왜냐구요? 왜냐고 물으셨어요? 그걸 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느닷없이 여자의 두 손이 얼굴을 가렸고, 뤼팽은 손가락 사이로 두 줄기 눈물이 새어나오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갑작스럽게 감정이 복받쳐오른 뤼팽은 하마터면 애정 어린 말이라도 몇 마디 내뱉을 뻔했다. 마치 잘못된 삶의 길을 헤매는 어린 소녀를 격려하며 올바른 길로 이끌 듯, 보통이라면 따뜻한 위로와 자상한 충고를 은근히 베풀어줄 법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자신의 입으로 그처럼 덤덤하고 점잖은 충고를 늘어 놓기에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뤼팽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지금, 자기 손에 의해서 상처 입은 한 사내를 밤새도록 침대 머리맡에서 간호하는 한 여인의 못브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독한 원수이면서도 그 용기와 호쾌함, 인간 됨됨이에 완전히 매료된 나머지, 불쑥불쑥 치미는 원한과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세 번씩이나 충동적으로 그의 목숨을 구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안타까운 마음이 비장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워낙에 예상치 못한 묘한 일이라, 뤼팽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문가로 뒷걸음질쳐가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도저히 손을 뻗어 붙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 앞에 도달한 여자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살짝 미소를 지은 뒤,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뤼팽은 즉시 호출 벨을 울렸고, 하인이 들어서자 허겁지겁 내뱉었다.

아까 그 여자를 따라가보게......, 아니야......그냥 놔두게......아무래도 그게 낫겠어......”

뤼팽은 한참 동안이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젊은 여인의 형상은 좀처럼 그의 머리 속을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었을지 모르는 그 처절하고 흥분되면서도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을 처음부터 찬찬히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탁자 위의 거울을 들고, 그야말로 환난과 고초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상하지 않은 자신의 말끔한 얼굴을 약간은 우쭐한 기분으로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내 참, 잘생긴 게 뭔지!......”

 

 

5. 붉은 실크 스카프

 

다음부턴 사람 말을 너무 쉽게 믿지 말라는 뜻에서 한마디 하겠네. 누가 자네의 권총 탄약통이 젖어 있다고 하거든, 자네가 아무리 신뢰하는 사람이고, 설사 자기가 아르센 뤼팽만큼 똑똑한 사람이라고 내세우더라도, 결코 거기에 먹혀들지 말게나. 일단 무조건 한번 당겨보는 거야! 그래서 만약 그 누군가가 핑그르르 돌아 거꾸러진다면 자넨 그제야 깨닫게 되겠지.

첫째, 탄약통은 멀쩡하다!

둘째, 카트린 할멈은 대단히 성실한 가정부이시다!

그럼 언젠가는 그 분도 한번 뵐 기회가 있길 바라며, 이만 건투를 비네.

아르센 뤼팽

 

 

6. 배회하는 죽음

 

그렇다면 사전에 놈을 덮칠 수도 있었단 얘기 아닙니까? 한데, 왜 잔의 방에까지 들이닥치도록 놔둔 겁니까? 잔에게 얼마나 큰 위험인지 알면서......안 그래도 됐을 것을......”

천만에요!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다르시외 양은 결코 진실을 수긍하려고 들지 않았을 겁니다. 범인의 얼굴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어요.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면 상황 설명을 잘 해주십시오. 그럼 회복도 한층 빨라질 겁니다.”

하지만......다르시외 씨는......”

그가 사라진 건 좋을 대로 설명해주시면 됩니다......어디 멀리 떠나버렸다든가, 아님 확 미쳐버렸다든가......물론 당분간 찾아보기도 하겠죠......하지만 아마 그에 관해서는 앞으로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을 겁니다.”

박사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요......그렇군요......당신 말이 맞소이다......하여튼 이 모든 일을 당신은 정말이지 놀라운 솜씨로 해결해냈소. 잔에게 당신은 생명의 은인인 셈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당신께 뭐든 보답을 해야 할 처지인 듯 합니다만?......아참, 치안국과 관련 있는 일을 하신다고 했죠?......당신의 용기와 활약을 칭찬하는 편지라도 써드릴까요?”

뤼팽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그야 고마울 따름이지요! 그런 편지라면 내게 아주 유익할 거외다. 그럼 내 직속상관인 가니마르 형사반장 앞으로 한 장 써주시구려. 아마 쉬렌가()에 사는 자신의 귀염둥이, 폴 도브뢰이가 아직도 신나는 활약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걸 알면 매우 기뻐할 겁니다. 그러지 않아도 최근에 그의 지시를 받아 대단한 한 건을 건졌거든요. 아마 당신도 들어서 알고 계실 겁니다. 붉은 스카프 사건이라고......, 훌륭하신 가니마르 씨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즐거워할지!”

 

 

7. 백조의 자태를 지닌 여인

 

이보게, 아르센 뤼팽......자네는 가니마르 형사에 대해서 정확히 어떤 생각인가?”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다네, 친구.”

아주 좋게라고? 한데 왜 기회만 있으면 그를 우스꽝스럽게 농락하려고 드는 건가?”

일종의 악습이지, 나도 늘 후회하고 있네. 하지만 어쩌겠나?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인걸. 여기 착실한 경찰 나리가 있다고 치세. 질서를 수호하고, 온갖 불한당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며, 심지어는 선량한 대중이자 전혀 날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용감한 친구들이 무수히 있다고 쳐. 한데 우리 대중이란 늘 그에 대한 보답으로 신랄한 조소와 경멸만을 그들에게 들려주곤 하지. 어리석은 작태가 아닐 수 없어.”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구만, 뤼팽. 자네 마치 선량한 부르주아처럼 얘기하는군그래.”

그럼 내가 누구라고 생각했나? 비록 남의 재산에 대해선 약간 특별한 입장을 취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게 내 재산이 되고 나면 생각이 완전 뒤바뀌기 마련이지. 아무렴, 누구도 감히 내 것에 손대면 안 된다 이거지. 만약 그럴 경우엔 나도 길길이 날뛸 것이야. , 내 지갑, 내 가방, 내 시계......안 되지......안 되고말고! 이보게 친구, 나는 지극히 보수적인 생각과 소박한 금리생활자의 본능을 가진 사람이라네. 모든 전통에 대한 경외심과 권위를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 바로 그래서 나는 늘 가니마르에게 감사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네.”

 

그래도 경의(敬意)까지는 아니겠지?”

웬걸, 대단한 경의를 표하다마다! 치안국 사람들 모두의 특징이기도 한 불굴의 용기를 갖춘 건 물론이고, 무척 진지하고, 결단력 있으며, 명석한 혜안(慧眼)과 판단력을 소유한 사람이 바로 가니마르일세. 나는 그가 사건을 맡아 대단한 활약을 펼치는 걸 무수히 보아왔네. 그는 분명 대단한 인물이야. 그런 뜻에서, 자네 혹시 사람들이 백조의 자태를 지닌 여인의 사연이라고 부르는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가니마르는 문득 탁자 위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편지 한 통을 발견하고, 내용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편지는 마치 흡족한 서비스를 받고 난 주인이 시종을 위해서 발부한 신원보증서 같은 어투로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아래 서명한 나, 괴도신사이지 전직(前職) 대령이고, 전직 하인이자, 전직 시체이기도 한 아르센 뤼팽은, 이 호텔에 머무는 기간 동안 가니마르라는 인물이 자신의 탁월한 역량을 충분히 선보였음을 보증하는 바입니다. 어떠한 단서도 주어지지 않는 악조건 속에서, 그는 정말 모범적이고도 헌신적인, 그리고 열정적인 행위를 통해서 내 계획의 일부를 저지했고, 보험회사로 하여금 45만 프랑이라는 돈을 절약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이 같은 그의 활약을 높이 치하하되, 아래층 전화가 소냐 크리슈노프의 방에 설치된 전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점은 너그러이 보아 넘기기로 했습니다. 결국 그는 치안국장에게 전화를 함으로써, 그와 동시에 내게도 전화해 즉시 도망치라고 귀띔해준 꼴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 물론 지금까지의 활약상과 그가 거둔 승리를 퇴색시키기에는 어림없는, 하찮은 잘못에 불과합니다.

어쨌든, 그를 향한 나의 아낌없는 찬사와 생생한 애정을 이렇게 글로나마 전하는 바입니다.

아르센 뤼팽

 

 

8. 지푸라기

그랬지만 다시 돌려받았어......, 이것 보라구!”

그러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갖다댄 순간, 구소 영감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으악! 하느님 맙소사! 열쇠가 없잖아!......열쇠를 날치기 당했어!......”

그는 즉각 내달렸고, 그 뒤를 아들들과 사람들이 뒤따랐다.

헐레벌떡 중간쯤 달려갔을까, 언뜻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그 낯선 이방인의 차였다. 이럴 줄 미리 내다보고 운전기사에게 이처럼 멀찌감치 대로상으로 나와 기다리라고 한 것이었다.

숨이 턱에까지 차면서 가까스로 문 앞에 당도한 구소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헐어빠진 나무 문짝 위에 붉은 벽돌 조각으로 휘갈겨 쓴 다음과 같은 글자였다.

아르센 뤼팽

이로써, 구소가 사람들이 제아무리 길길이 날뛰고 울분을 토해도, 트레나르 영감이 돈을 훔쳤다는 것을 법적으로 증명하기는 불가능했다. 오히려 스무 명의 증인들이 부랑 노인에게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노라고 입을 모았을 따름이다. 영감은 단지 몇 달간의 징역으로 모든 것을 모면하게 되었다.

물론 그에게 그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석방되자마자 사사분기(四四分期)마다 몇 날, 몇 시, 어느 길가, 어디에 가면, 매번 금화 3루이(1928년까지 1루이는 20프랑에 해당했다/역주)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통보를 비밀스럽게 전달받았다.

하긴 아사(餓死) 직전까지 갔던 트레나르 영감으로서는 그나마 횡재가 아니겠는가!

 

 

9. 아르센 뤼팽의 결혼

 

앙젤리크 역시 아버지를 닮아 앙상하게 마르고 훤칠한 몸매에, 마찬가지로 골격이 울퉁불퉁하고 건조한 체질이었다. 나이는 서른셋, 언제나 검은 모직 옷을 입고, 늘 소심하며, 어디 가서도 눈에 잘 안 띄는 타입인 그녀는, 머리가 너무 작은 데다, 양쪽으로 잔뜩 눌린 것처럼 납죽해서, 돌출한 콧날이 마치 그러한 비좁은 얼굴 형태에 대한 반발처럼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결코 못생겼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그 두 눈동자가 달고 있는 부드럽고도 진지한 눈빛, 한번 제대로 보면 잘 잊혀질 것 같지 않은, 다소 우수 어린 강렬한 눈빛 때문이었다.

 

한편 바로 그 당일 저녁, 문전박대를 당한 두 기자 중 한 명이 자사 신문 1면에다, 바렌가()의 고풍 찬연한 사르조-방돔가() 저택을 쳐들어갔던 일에 관해서 다소 과장된 필치를 휘두르면서, 늙은 귀족 나리의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신나게 묘사해버렸다.

다음날 또다른 신문에는, 자기 말로 오페라 극장 복도에서 기자에게 붙잡혔다는 아르센 뤼팽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거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나 역시 장래의 장인 어른이 분개하시는 데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그 통지서를 그렇게 섣불리 발송한 것은 분명 오류였으며, 비록 내 책임은 아니지만, 기꺼이 공개적인 사과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한번 생각 좀 해보십시오! 우선 결혼 날짜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장인 어른께선 5월 초로 하자고 하십니다만, 내 약혼녀와 나는 그때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는 입장입니다. 앞으로도 6주를 더 기다려야 한다니요!......

사실 공작의 딸은 다소 몽상적인 데가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혼자 노는 일이 잦았던 그녀는, 대대로 물려내려오는 서가에 언제나 가득 굴러다니던 고리타분한 옛 소설들과 기사도 이야기를 읽으며 성장기를 보냈다. 결국 인생을 한 편의 동화처럼만 보게 되었고, 아름다운 아가씨는 언제나 행복할 것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현실 속에서는 그럴수록 오지 않는 왕자님을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게 다반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구나 사촌이라는 사내들은, 어머니가 남겨준 수백만 프랑의 지참금만을 노리는 것이 뻔한데, 뭐하려 결혼을 하겠는가 말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이 이대로 꿈이나 꾸면서 노처녀로 사는 게 낫지......

 

그제서야 사내는 앙젤리크의 모든 행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 어여쁜 편은 못 되지만 우수 어린 매력이 듬뿍 담긴 그 얼굴 앞에서 사내는 일순 당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찌 해야 할지 거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더 이상 웃을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일종의 존경심이랄까, 약간의 회한(悔恨)과 호의(好意)가 뒤섞인 가슴 찡한 기분이 사내의 전신(全身)을 가르고 지나갔다.

왜 나를 구해주는 겁니까?”

사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 남편이니까요......”

 

사내는 문득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자신한테는 사소하고 우스꽝스러울 따름이지만, 여자에게는 매우 중대한 모든 사안들이 머리 속을 일시에 휘저어놓고 있었다. 그는 별수 없이 같은 말만 되풀이해 흘릴 뿐이었다.

이거 큰일이구만......큰일이야......예상했어야 하는 건데......”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손뼉까지 치며 냅다 소리쳤다.

옳지! 바로 그거야!......내가 바티칸의 주요 인사들 중 한 명과 아주 절친한 사이라오. 아마 교황도 내 부탁이라면 거절을 못할 겁니다......어떻게든 알현을 해보겠소. 모르긴 몰라도 내가 간절히 탄원을 하면 교황 성하(聖下)께서도 마음이 흔들릴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태도로 보나, 그 발상으로 보나 어찌나 순박하고 익살스러운지, 여자는 사내를 바라보며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당신의 아내입니다.”

여자의 눈빛 속에는 그 어떤 적의(敵意)도 경멸도, 일말의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사내는 정말이지 그녀가 자신의 모습 속에서 도적이나 범법자의 정체를 보길 그만 두고, 그야말로 사제(司祭)가 죽을 때까지 맺어준 한 남자의 모습만을 바라보기로 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왠지 자신도 잘 모를, 보다 혼란스런 감정이 지금 그녀의 전 존재를 뒤흔들고 있다는 것을 사내는 직감했다. 황당무계한 상상력과 늘 무언가를 갈망하는 몽상적 기질, 그리고 케케묵은 독서로 다져진 이 노처녀의 복잡한 영혼 속에서, 그동안 천신만고의 사연을 거치는 가운데 서로 만나 오늘 같은 특별한 순간을 함께 맞이한 바로 이 사내의 모습은, 그야말로 바이런 풍의 영웅이랄까, 지극히 낭만적이고 기사도적인, 아주 특별한 존재로 각인되는 중이었다! 생각해보라! 어느 날 밤, 그것도 숱한 장애를 뚫고서, 이미 그 대담무쌍함이나 너무도 유명한 활약상으로 전설이 되다시피 한 사내 대장부가 난데없이 방으로 쳐들어와, 결혼반지를 여자의 손가락에 지그시 끼워주지 않았던가!......

 

사내는 일순 마음이 흔들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격정에 사로잡혀 이렇게 소리치고 말았다.

함께 떠납시다!......같이 달아나자구요!......! 당신은 나의 배필이오......나의 동반자입니다......나의 고난과 환희를 함께 나눕시다......강렬하면서 신비스럽고, 위대하면서 장렬한 인생을 함께하는 겁니다!......”

그 순간 앙젤리크가 눈을 들었고, 그 깨끗하면서도 자부심에 넘치는 눈빛에 이번에는 사내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이런 식의 허풍을 퍼부어대도 될 여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사내는 머뭇머뭇 중얼거렸다.

, 미안하오......여지껏 많은 잘못을 저질러왔지만, 지금보다 더 내 마음을 아프게 할 만한 짓을 한 기억이 없소......나는 나쁜 사람이오......당신 인생을 망쳐놨어......”

하지만 여자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아니에요......당신이야말로 내가 진정 가야 할 길을 가르쳐준 셈이에요......”

그가 내처 질문하려는데, 여자는 이미 비밀문을 활짝 열어 통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더 이상의 말이 오고갈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사내는 그녀 앞에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뒤, 방을 빠져나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부르봉-콩데가()의 공주인 앙젤리크 드 사르조-방돔은 마리-오귀스트라는 이름의 수녀로서, 곧장 도미니크 수녀원에 자신을 가두어버렸다.

그녀가 종신서원식()을 하던 날, 수녀원의 원장수녀 앞으로 봉인된 묵직한 봉투와 편지 한 장이 배달되었는데......

마리-오귀스트 수녀가 돌보는 불쌍한 이들을 위해서라고 쓰여진 편지와 함께 배달된 봉투 안에는 1000프랑짜리 지폐 500장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1

-생김새와 변신능력을 중심으로

 

기암성813의 비밀, 수정마개에서 복잡다단하고 심각한 면모를 실컷 보여준 우리의 주인공이 아르센 뤼팽의 고백에서는 처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에서와 같은 경쾌하고 유연한 괴도신사의 본성으로 돌아온다.

19114월부터 주 세 투에 연재되기 시작한 단편들이 피에르 라피르 출판사에서 하나의 옴니버스식 단편집으로 묶여 출간된 것은 19136월이 되어서였다. 따라서 대부분 개개의 작품 태동은 수정마개보다 빠르지만, 단행본 출간 시기는 그보다 뒤늦은 셈이다.

각 단편들의 질적 수준도 제각각이라, “지푸라기배회하는 죽음같은 작품은 1918년과 1933년에 재출간 시 누락할 만큼 평가를 받지 못한 반면, “그림자 표시와 특히 붉은 실크 스카프의 경우는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들에 필적하는 걸작으로 극찬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 소위 진지한문학평론가로 대접받는 평론가들은 대체적으로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인색한 평을 하기 마련이었는데, 아르센 뤼팽의 고백이 단행본으로 나온 1913년에 무슈 아 투라는 잡지에는 피에르 발다뉴라는 일급 문학평론가의 뤼팽 평이 실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문학적 가치를 신봉하는 독자 여러분에게는 그 전문(全文)을 접해보는 것도 소중한 경험일 것이다.

 

모리스 르블랑 씨의 아르센 뤼팽의 고백을 읽고......

모리스 르블랑 씨의 아르센 뤼팽 신간(新刊)을 읽고 나서 나는 경이로운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천재성이 작렬하는 사건들의 얼개가 인간의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독창성과 정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아르센 뤼팽의 영웅담을 읽으면서 우리는 마치 난해한 문제를 앞에 놓고 엄격한 추론과 새로운 착상을 거듭한 끝에 찬란한 해법에 이르고야 마는 수학자의 심정을 경험하게 된다. 전작(前作)에서와 같은 거대한 모험과는 달리 서로 독립된 소규모 사건들로 이루어진 이번 작품에서 우리는 자신의 천재성과 대담함, 간교함과 고뇌를 최고의 경지까지 밀고 나가는 아르센 뤼팽과 만나게 된다.

사실 그 하나하나가 두터운 책으로 엮일 수 있을 만한 주제들을 가지고 이토록 간결한 구성의 단편들로 소화해내는 것을 보면, 모리스 르블랑 씨는 분명 고갈되지 않을 엄청난 재능의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아르센 뤼팽의 고백의 각 에피소드들은 무척 강력한 매력을 풍기고 있으며, 그 중 몇몇은 에드거 앨런 포를 연상시킬 만큼 강렬한 전율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붉은 실크 스카프배회하는 죽음같은 단편들은 신비스럽고 으스스한 매력을 가득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러한 모든 이야기들을 모리스 르블랑 씨는 참으로 유연하고도 생생한 언어로 실감나게 풀어놓았다는 사실이다.

요즘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책을 낼 때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피에르 발다뉴, 투슈 아 투19138

 

이처럼 아르센 뤼팽의 고백이 본격문학을 위주로 한 평단으로부터도 호평을 받은 데에는 뤼팽 시리즈의 대중적 인기를 넘어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문학적 역량이 무엇보다 큰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은 같은 노르망디 출신인 대()문호 플로베르와 모파상을 흠모해 작가의 길로 들어선 만큼, 그들 작품의 영향을 적잖이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그의 작품들에는 인물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이 탁월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자신을 탄생시킨 작가보다도 등장인물에 불과한 아르센 뤼팽이 훨씬 더 유명해진 것 역시 이 같은 섬세하고 깊이 있는 상상력에 의한 작가의 인물창조 기술에 기인한 바 크다고 할 것이다.

 

역자로서도 누차 강조했듯이, ‘아르센 뤼팽 시리즈 100배로 감상하기의 비결은 무엇보다 아르센 뤼팽이라는 캐릭터의 올바른 이해와 그에 대한 애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 권부터 역자 해설을 당분간 뤼팽의 인물 연구에 집중할까 한다.

아르센 뤼팽이라는 인물은 전적으로 20세기 초, 부르주아의 장밋빛 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 벨 에포크(Belle Epoque, 좋은 시절)라는 독특한 시대의 아들이다. 끊임없이 스스로의 인생을 즐기려 들고, 마치 도박을 하듯 위험천만한 행동에 나서며, 심각하기보다는 가볍고 경쾌하고, 어디까지나 예술과 어여쁜 여성들을 선호하는 가운데, 늘 도전을 꿈꾸는 뤼팽의 면모는 하나같이 벨 에포크의 세련된 신사가 가지는 덕목이다. 그보다 이전 세대인 셜록 홈스와는 달리, 아르센 뤼팽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웃게 만들며, 질서와 상식을 조롱하는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아울러 늘 엄숙하기 그지없는 홈스와는 판이하게, 일견 일관성이 없어 보일 정도로 사건마다 모습을 달리하면서, 심지어는 자신의 정체에 스스로 의혹을 제기할 정도로 극히 인간적인 감정과 면모를 거침없이 보여준다. 이는 난공불락의 명탐정에 대비되는 자유분방한 범죄자로서 아르센 뤼팽이 일반 독자들에게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는 요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상당수 프랑스와 외국의 영화감독들이 괴도신사의 이야기를 크고 작게 영화화해 왔다. 로베르 라무뢰와 조르주 데크리에르 같은 걸출한 배우들의 명연기에도 불구하고, 사실 아르센 뤼팽은 그 누구로도 한정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떤 영화도 제대로 된 인물표현에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뤼팽의 연대기 작가조차 종종 오리무중이라고 실토하는 얼굴 없는 인물을 하긴 어느 배우인들 완벽히 소화해낼 수 있겠는가! 요컨대 아르센 뤼팽은 물리적인 윤곽을 일절 허용치 않는 존재이기에, 오로지 기술(旣述) 행위, 즉 문자를 통해서밖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 그를 대하는 독자들의 상상력 속에서만 온전히 꽃피울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어쨌든 연대기 작가는 뤼팽을 알아볼 수 있는 신체적 특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무척이나 인색한 단서만을 독자에게 제공할 뿐이다.

 

하긴 내가 알고 있는 한결같은 단서가 하나 있기는 하다. 다름 아니라, 어딘가 골똘히 주의력을 집중할 때면 으레 이마 한복판을 파고드는 자그마한 십자형 주름이 그것이다. 당시 뤼팽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하면서 내 눈에 들어온 것도 바로 그 깊은 십자형 주름이었다.

 

요컨대, 하나의 확실한 신체적 이미지를 통해 독자가 아르센 뤼팽이라는 존재를 추적하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하며, 오로지 연대기 작가로 등장하는 모리스 르블랑의 이야기 방식을 통해서만 실재하지 않는 한 인간의 존재가 가능하게 되어 있다.

이처럼 아르센 뤼팽의 정착된 초상(肖像)이 부재하는 반면, 탁월한 변장능력으로 그가 둔갑하는 숱한 인물군상을 통해서 그의 존재를 역추적(逆追跡)하는 방법은 시도해볼 만하다. 이는 그가 어떤 기법들을 활용해서 자신의 특기인 기만술을 매번 성공시키느냐에 관한 흥미로운 고찰이 될 것이며, 아르센 뤼팽이라는 인물의 정수(精髓)를 파악하는 지름길이기도 할 것이다.

 

변신술의 관점에서 볼 때, 아르센 뤼팽과 그의 어둠의 쌍둥이라고 할 수 있는 팡토마스를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아르센 뤼팽보다 뒤늦게 탄생한 팡토마스의 경우, 항상 가면과 소매 없는 망토를 착용하기 떄문에 가면과 망토를 벗어던지는 순간, 그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독자는 어디까지나 팡토마스의 진짜 얼굴을 모르겨, 그가 가면과 망토를 걸쳤을 대에만 비로소 팡토마스임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 속의 모든 등장인물이 팡토마스일 가능성은 늘 열겨 있는 셈이다. 반면 인위적인 가면을 착용하지 않되, 아르센 뤼팽에게서는 그가 변신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곧 그의 가면인 셈이다. 사전에 자신의 인상착의에 관한 그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은 뤼팽을 독자들은 끝끝내 알아볼 수가 없기 떄문이다. 팡토마스나 뤼팽 모두 그 누구로도 변신이 가능하지만, 독자들은 팡토마스가 본래의 모습(가면과 망토)을 취했을 때 그를 알아볼 수 있는 반면, 뤼팽은 본래의 모습을 취한다고 해도 결코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컨대, 아르센 뤼팽의 정체성(identite)이란 곧 그 정체의 식별불가능성(non-identification)으로 가장 잘 특징지어질 수 있으며, 이는 물리적인 부재(absence)가 아니라, 오히려 그 편재성(遍在性,omnipresence)을 통해서 그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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