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삼각형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8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포탄 파편과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르다. 전시상황이 무대라는 점, 여자의 정체가 소설에서 미스터리로 작용한다는 점, 열렬히 사랑하지만 오해할 수 밖에 없는 두 남녀, 그리고 조력자로 등장하는 뤼팽. 결국 이 모든 일화는 단순히 뤼팽의 비범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는지. 뤼팽의 뛰어남과 두 남녀를 둘러싼 미스터리에서 방향을 다소 잃은 것 같은 이야기들이 아쉬웠다. 누가 봐도 파트리스는 뤼팽의 분신이었는데. 중반부를 지나서 더 이상 뤼팽이 아닌가? 하고 느낄 무렵부터 급속도로 판단력이 떨어지고 삽질(?)을 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약간 아쉬운 부분이었다. 역시 기암성의 소년 탐정만큼의 카리스마와 재치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황금삼각형은 전시상황을 똑같이 무대로 한 포탄 파편과는 달리 실제 전쟁이 소재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물론 애국심이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기는 하나, 어마어마한 황금의 향방을 둘러싼 복잡한 미스터리가 팽팽한 추리적 기법으로 전면에 걸쳐서 펼쳐진다. 연속적으로 독자의 허를 찌르는 기상천외한 범죄수법과 왜곡된 정염(情炎)의 파노라마가 작품 전반에 걸쳐서 음산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결국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뤼팽의 대역전극이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준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의 복합적인 퍼스낼리티를 파헤쳐본다.

 

 

1부 불똥비

코랄리 어멈

오른손과 왼쪽 다리

녹슨 열쇠

화염 앞에서

남편과 아내

오전 719

오후 1223

에사레스 베의 행적

파트리스와 코랄리

붉은 끈

심연 속으로

 

2부 아르센 뤼팽의 승리

공포의 도가니

음산한 못질

낯선 사나이

-엘렌호()

4()

시메옹, 좌충우돌하다

제라덱 박사

시메옹의 최후의 희생자

빛이여 비추시라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3

 

-아르센 뤼팽, 그 복합적인 퍼스낼리티(個性)

 

 

소설 속 아르센 뤼팽을 정신분석학적 시각에서 독특하게 분석한 바 있는 제라르 귀아슈는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의 미묘한 뉘앙스를 분석하면서

 

 

그 인물에 내재하는 복합성(complexite)을 재치 있게 논한 바 있다.* 즉 그리스어인 아르센(arsen)’남성(男性)’이나 남성적인 것’, 혹은 강인한 것을 의미한다는 전제하에, 그 단어를 연상시키는 이름 아르센(Arsene)과 더불어, 뤼팽(Lupin)이라는 성()에서 느껴지는 프랑스어 특유의 섬세하고 우아한 울림이 절묘하게 결합된 것부터가 우리의 영웅이 가지는 복합적인 개성을 반영한다는 이야기이다. 강한 것과 우아한 것의 조합이 이름에서부터 느껴진다는 이와 같은 지적은, 그만큼 아르센 뤼팽의 완벽성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한 인물 내부의 복잡한 이중성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신출귀몰한 솜씨를 자랑하는 괴도, 천하무적의 영웅으로서 불가능이 없어 보이는 아르센 뤼팽은 거의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이미지를 두르는 것이 다반사이나, 여인을 향한 애정에 곧잘 함몰하고, 스스로의 재치에 발목이 잡히는 모습에서는 다분히 인간적인 한계가 느겨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누구로도 둔갑할 수 있고 언제, 어디에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이 곧 인간적인 조건을 초월하여 무소불위의 능력을 휘두르는 신성(神性)의 특징인 것만은 틀림없으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뤼팽은 그 어느 인간보다도 존재의 불안정성에 혹독하게 시달린다.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는 걸. 거울을 보면서도 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니까......”

 

무한하게 모습을 바꿀 수 있기 떄문에 정작 자신의 본모습이 증발해버리고 마는 존재의 패러독스(paradox)......

 

누구로든 둔갑함으로써 존재의 영역을 무한하게 넓힐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이 궁극적으로는 존재에서 극단적인 무()의 상태와 겹쳐지는 셈이다. 이처럼 역설적인 이중성은 아르센 뤼팽의 가장 근간(根幹)이 되는 도둑이라는 정체성에 대해서 그 자신이 표명하는 서로 상반되는 견해를 통해서도 뚜렷이 짚어볼 수가 있다. 그는 작품 여기저기에서 도둑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과시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충만한 존재의식과 자긍심의 이면에 그와는 완전히 정반대인 어두운 자각(自覺)의 얼굴이 늘 고개를 숙인 채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의 뇌리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한아름 안고, 호주머니마다 불룩한 데다, 터질 듯 팽팽한 자루를 둘러맨 자신의 모습이 이 여인에게 어떤 인상을 주고 있을지 서서히 감이 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혼란이 그의 내부로 물밀 듯 밀려왔다. 영락없는 현행범으로 발각된 험상궂은 도둑놈의 모습......아르센 뤼팽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고 있었다.

 

 

마치 신이라도 된 듯 세계를 호령하던 대도(大盜)의 모습은 온데간데 찾아볼 수가 없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거의 신과 같은 확신과 자긍심이 이처럼 인간적인 수치심과 자괴감을 동반하고 있는 현상은 매우 특이하고 복잡한 개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자의식에는 거의 항상 흠모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일종의 중개자로 작용하지만, 뤼팽 본인의 내부에 잠재하는 이중적인 개성을 논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괴도신사(gentleman-cambrioleur)라는 그의 닉네임 자체가 이미 복합적인 개성을 표방하고 있다. 세련되고 우아한 사교계의 신사와 거칠고 험난한 암흑가의 범죄자가 한 인물 안에 공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르센 뤼팽의 이러한 복합적 개성이 그의 탄생배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서로 무척이나 대조적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출신성분에서도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르센 뤼팽의 젊은 시절을 다루고 있는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에는 뤼팽의 아버지에 관한 단서가 비교적 상세하게 암시되어 있다.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라울 당드레지, 즉 아르센 륖애은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다분히 부끄러운 태도를 보인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하층민 출신이며 욥처럼지독하게 가난했고, 복싱과 펜싱, 체조 등을 가르치는 일개 체육교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가 귀족가문의 여식이기에 그러한 면면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겠지만, 아버지의 그림자를 달가워하지 않은 데에는 귀족 출신이었던 어머니와의 태생적인 불균형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뤼팽의 어머니 쪽은 지금은 다소 빛이 바랬으나 원래 내로라하는 지방 귀족 가문이며(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p.19), 라울 당드레지라는 이름에서 당드레지(d`Andresy)라는 귀족의 성()도 바로 어머니의 성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그런 것을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난하고 별볼일 없는 하층민과 결혼한 데다, 그나마 일찍이 사별하여 온갖 고생을 해오며 자식을 길러낸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면서(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왕비의 목걸이참조), 어린 라울의 가슴 속에는 무책임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충분히 싹터 자랐을 수 있다. 결국 뤼팽은 귀족 출신의 연인 앞에서 자신의 진짜 이름(아르센 뤼팽)을 밝히기를 주저하는데, 그 이유는 뤼팽(Lupin)이라는 아버지의 성()에 대한 오랜 거부감 떄문이었다.

  

이처럼 아버지를 부정하는 뤼팽의 태도는 실제로 정신분석학적 견지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형적인 예로 여러 설명이 제기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위의 대사에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 속에는, 분명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근원적 이마고(imago)가 서로 갈등을 치르면서 운명적으로 인생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을 뤼팽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라울 당드레지는 아마 장군이다, 장관, 혹은 대사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아르센 뤼팽만 아니라면요(......) 라울 당드레지......아르센 뤼팽......하나의 조각상에 두 개의 얼굴이 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과연 이 세상의 태양이, 그 영광의 광채가 어느 쪽을 비춰줄까요?”

 

어려서부터 복싱을 비롯한 온갖 거칠고 남성적인 체육훈련을 전수해준 아버지와 귀족 가문으로서의 우아함과 예의 바른 기풍을 심어준 어머니......이 두 상반되는 운명적 인자(因子)는 어느 하나 완전히 말소되지 않은 채, 결국 괴도-신사라는 아르센 뤼팽의 정체성 안에 고스란히 농축되어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중 어느 하나에 전적으로 치중하지 않고, 그 모두를 아우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혁신해가는 뤼팽의 모습이다. 아르센 뤼팽의 어느 모험담에서나 일관되게 느낄 수 있는 사실은 그가 항상 거친 협객이자 괴도이면서 그와 동시에 우아하고 세련된 신사이기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해서, 괴도라는 정체성 안에서도, 정의의 가치에 대한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그와 동시에 사회의 규범을 무시하는 범법자의 모습이 한꺼번에 체현(體現)되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아버지와 어머니 어느 한쪽으로 정리되지 못하기에 항상 불안정한 내적 갈등에 시달리면서도, 그 상반되는 정체성으 요인들을 줄기찬 변신(變身)에의 탐닉 속에서 절묘하게 조절하고,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어가는 그의 모습은 가히 연금술사의 비기(秘技)를 연상시킨다. 괴도임과 동시에 신사이며, 신임과 동시에 인간이고, 천사임과 동시에 또한 악마이기도 한 아르센 뤼팽......그의 복합적인 개성은 결코 한 개인의 음울한 분열증이 아니라, 어쩜 우리 모두의 꿈과 욕망이 가장 찬란하고 화려하게 구현된 살아 있는 원형(原型, archetype)일 터이며, 바로 그렇기에 시대를 초월해 그토록 무수한 이들의 공감(sympathie)과 동화(identification)를 이끌어내는 것이라 하겠다.

 

 

  

 

 

 

 

 

 

 

*Gerard Guasch, 아르센 뤼팽, 디방에 누운 인물(Arsene Lupin, Un caractere sur le divan)L`Harmattan, 1997, P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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