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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이빨 ㅣ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0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우리 민족 고대신화가 떠올랐다. 이사금 이야기. 우리 나라에서 치아가 많은 사람이 덕이 많다고 했던 것은, 다분히 치위생이 존재하지도 않아 아마도 대부분 치아 건강이 좋지 못했을 고대 사회에서 치아가 썩지 않고 보존된다는 것은 남과는 다른 능력으로 간주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요즘 세상의 딱 벌어진 어깨, 늘씬한 다리, 작은 얼굴, 잡티 없는 피부와 같은 지위가 아니었을까? 참, 호랑이 이빨의 형태가 위와 아래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호랑이 이빨」은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 「813의 비밀」과 더불어 가장 분량이 많은 대작으로, 걷잡을 수 없이 거듭되는 반전은
물론,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논리와 영화화되어도 손색없을 극적(劇的)인 장면 전개가 압권이다. 전쟁 중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후(戰後)의 상황을 무대로
한 점이 이채롭고, 「813의 비밀」에서부터 「황금삼각형」「서른 개의 관」에 이르는 아르센 뤼팽의 행보가 수시로 환기되어, 일관된 삶의 궤적을
되짚어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엄청난 유산 상속권을 둘러싸고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음모의 회오리에 휩쓸리면서도 끝끝내 대의와
진실을 향한 큰 시야를 포기하지 않는 뤼팽의 모습 속에서, 어느덧 40대로 훌쩍 들어선 대협객의 완숙한 경지를 한껏 음미할 수 있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의 야심을 분석 해보기로 한다.
제1부 돈 루이스 페레나
1.
다르타냥, 포르토스, 몬테크리스토
"그렇습니다, 청장님. 동료들은 아르센 뤼팽이라고 부를지 모르나, 우리 상관들은 그를 그냥 '영웅'이라고 부르지요. 마치 다르타냥만큼 용맹하고, 포르토스처럼 강인하며......"
"몬테크리스토처럼 신비스럽겠지요......"
백작의 발끈하는 대꾸를 경찰청장은 히죽 웃으면서 재치 있게 받아넘겼다.
"......모든 사실들이 외인부대 제4연대로부터 입수한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더군요. 뭐 이자리에서 그 내용을 깡그리 소개할 필요까진 없으나, 불과 2년 사이에 전공 훈장과 레종도뇌르까지 수여받고, 전군(全軍)을 앞에 둔 일일명령 시 도합 일곱 번이나 모범용사로 지목될 마큼 미증유(未曾有)의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했습니다. 그리고 또 우연히 주목하게 된 사실은......"
2. 죽어야 할 자
붉은 껍질을 반구 형태로 뚫고 들어간 두 줄의 이빨 자국은 과육 속에까지 산뜻하고 가지런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위쪽에는 여섯 개의 이빨 자국 각각이 선명한 데 반해, 아래쪽에는 그냥 둥그스름한 곡선으로 딱 한 줄 뭉뚱그려져 있었다.
페레나는 그 두 줄의 자국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못한 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호랑이 이빨이로구만!...... 호랑이 이빨이라구! 베로 형사가 가지고 온 초콜릿에 찍혔던 것과 똑같은 자국이야! 우연의 일치치고는 정말 희한한 일이군그래! 정말로 우연일까? 베로 형사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며 경찰청으로 가져온 그 초콜릿의 이빨 자국과 이 능금에 찍힌 이빨 자국이 과연 동일인의 것이라고 믿어도 될까?"
그쯤에서 페레나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조사를 강행하기 위해 이 증거물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어야 할까? 아니면 사법당국에 얌전히 인도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중, 갑자기 손에 닿는 과육의 감촉 자체가 너무도 끔찍하고 거부감이 치밀어올라, 거의 반사적으로 원래 있던 덤불 속에다 훌쩍 내던지고 말았다.
3. 무광 터키석
4. 강철 셔터
5. 흑단 지팡이를 가진
사나이
6. 셰익스피어, 제8권
7. 헛간 속의 유골
8. 뤼팽의 분노
9. 소브랑의 해명
10.
파국
제2부 플로랑스의 비밀
1. 사람 살려!
나중에 아르센 뤼팽이 이 참혹한 모험의 에피소드를 나에게 들려줄 때는, 다소 뻐기는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 당시에도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도 충분히 놀랍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은, 그때 소브랑과 마리-안 포빌의 결백을 즉각적으로 수용해서 문제를 여지없이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는 사실일세. 내 장담하건대, 그거야말로 심리학적인 가치로나 범죄 해결의 관점으로 보거나,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명탐정의 가장 유명한 추리를 훌쩍 능가하는, 일류 솜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마리-안 포빌에 관해서는 이빨 자국 하나만 생각해도 움직일 수 없는 확신에 도달할 정도이니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빅토르 소브랑의 아들이자, 코스모 모닝톤 유산의 상속자가 되는 가가스통 소브랑은 결국 흑단 지팡이의 사나이면서 앙스니 경감의 살해자이니, 남편 살해범으로 밝혀진 마리-안 포빌의 죄목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셈이었지...... 한데, 과연 무엇이 내 안에서 그런 돌발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이겠냐구? 왜 그토록 명백한 증거들과 상반되는 발걸음을 내디뎠겠냐 이 말일세!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사실을 믿게 된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인정할 수 없는 일을 인정한 이유가 무어냔 말일세!......글쎄......아마도 그건, 정녕 소중한 진실이란 지극히 특수한 방식으로 마음을 두드려대기 떄문이 아닐까?"
2. 쉬셰 대로의 폭발사고
3. 증오의 화신
4. 베베르,
복수하다
5. 열려라, 참깨!
7. 황제, 아르센 1세
8. 함정을 조심하라, 뤼팽!
9. 플로랑스의 비밀
10.
루피너스의 장원
그와 플로랑스 르바셰르의 결혼으로 인해 얼마나 세간이 떠들썩했는지는 굳이 이 자리에서 되짚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다시 별의별 논쟁이 들쑤시듯 일어났고, 당장 아르센 뤼팽을 체포해야 한다는 요구도 몇몇 신문에서 제기되었다. 하지만 과연 누가 나설 수 있겠는가? 설사 이제는 그의 진짜 정체에 대해 의혹의 여지가 없고,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과 루이스 페레나라는 이름이 같은 글자들의 바꿔치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고 해도, 합법적으로 아르센 뤼팽은 사망했으며, 합법적으로 돈 루이스 페레나는 생존해 있는 상태. 이 세상 그 누구도 죽은 아르센 뤼팽을 살려낼 수 없고, 살아 있는 돈 루이스 페레나를 죽일 수는 없었다.
오늘날 그는 우아즈 강변으로 내리 뻗은 근사한 협곡들을 끼고 위치한 생-마클루라는 마을에 살고 있다. 화려한 꽃들이 만개한 정원 한 구석, 초록빛 덧창들로 예쁘장하게 장식된 그 장밋빛 아담한 집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일요일만 되면 사람들은 재미 삼아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혹시라도 딱총나무 생울타리 너머, 아니면 마을 광장에서라도 그 유명한 아르센 뤼팽이라는 자의 모습을 흘낏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는 것이다.
핍박받고, 희생당하고, 삶의 열정을 상실한 사회적 약자들......그들 모두에 대해 돈 루이스는 한결같이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명철한 지성과 자상한 조언, 경험과 힘을 그들과 함께 하고, 필요하다면 직접 시간을 할애해 자기 스스로 나서주기도 한다.
아울러 파리 시 경찰청의 밀사(密使)라든가 현지 경찰서 말단형사들이 종종 찾아와 도저히 골치만 아픈 사건을 맡기기도 한다. 물론 그 방면에서도 돈 루이스는 전혀 고갈되지 않은 정신력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오래 된 철학서적들에 둘러싸여 기분 좋은 독서삼매에 빠질 때를 제외하고는, 집 밖으로 나와 정원을 가꾸는 것도 빠트릴 수 없는 일과이다.
크뤽생스 루피너스('크뤽생스'라는 이름은 모리스 르블랑이 임의로 지어낸 이름이다/역주), 알록달록한 루피너스, 향기가 기막힌 루피너스 등등, 그야말로 모든 루피너스의 변이종이 총 집합했다고 볼 수 있는데, 뭐니뭐니 해도 최근에 개발해낸 뤼팽의 루피너스가 최고로 손꼽을 만하다(학명이 루피너스인 이 꽃은 일명 층층이부채꽃[lupin]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철자가 뤼팽[Lupin]의 철자와 동일한 데에서 착안한 장면이다/역주).
"나쁜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그를 그리스의 칠현(七賢)에 비유한다든가, 미래의 세대한테 일종의 귀감으로까지 추어올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에 관한 평가를 우리는 좀 더 관대하게 내려줘야 할 거라는 점만은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의 선행은 끝 간 데가 없는 데 반해, 악행이라고 해봐야 적당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도둑으로서 그가 자잘한 재주를 부릴 때 사람들은 기분 좋게 웃어제치지만, 용기 백배한 모습을 보이고, 과감하면서 위험을 모르는 모험정신을 과시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열광하는 것이지요. 냉정 침착하면서 명석한 사고력과 더불어 유머러스한 기질과 역발산(力拔山)의 호탕한 기개를 두루 갖추고,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활력 넘치는 미덕이 힘차게 들끓던 시대, 자동차와 비행기가 탄생한 영웅적인 시대, 전쟁 이전의 펄펄 살아 숨쉬는 시대(벨 에포크[Belle Epoque]/역주)를 종횡으로 주름잡은 화려한 모습에 우리는 아낌없는 박수를 쳤던 것이지요!"
그러자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과거의 그에 관해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오늘날 그의 모험은 이로써 일단락되었다는 애기인지요?"
"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르센 뤼팽에게 모험이란 삶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살아 있는 한, 그는 온갖 파란만장한 활극의 중심과 종착점에 서 있을 겁니다. 언젠가 그도 이렇게 말했었지요. '내 무덤 위에 이렇게 새겨 주길 바라네. 협객, 아르센 뤼팽, 이곳에 잠들다'(「813의 비밀」p.505 참조/역주). 그저 통 큰 소리 같지만 엄연한 진실입니다. 그는 정녕 모험의 대가라고 할 만하지요. 물론 옛날에는 모험이 그로 하여금 남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방향으로 너무 자주 몰아가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열심히 싸워 이긴 승자에게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영예를 안겨주는 치열한 전쟁터로 이끌어가기도 했지요. 바로 거기서 그는 자기 몫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장면에서 행동하고 분발하며 죽음과 운명마저 분연히 딛고 일어서는 그의 진짜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겁니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따금 경찰서장을 두들겨패고, 가끔은 예심판사의 시계를 슬쩍했던 그를 용서해주어야 하는 거죠......자, 이제 우리의 박력교수(迫力敎授)에게 너그러워져야 할 때가 된 겁니다."
그리고 나서 돈 루이스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결코 간과해선 안 될 그만의 미덕이 있지요. 지금처럼 침울한 시대에는 더더욱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부분인데, 바로 멋진 웃음 말입니다!"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인물 탐구 5
-아르센 뤼팽의 야심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도둑, 즉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시작한 아르센 뤼팽의 경력이 「813의 비밀」, 「포탄 파편」, 「황금삼각형」, 「서른 개의 관」등을 거치면서, 점차 공익(公益)과 질서의 수호자적인 이미지로 옮겨가는 경향의 정점(頂點)을 보여준다는 사실일 것이다. 1920년 8월 31일부터 이 소설을 연재하기로 한 「르 주르날」지는 하누 전인 8월 30일, 작가의 변(變) 삼아, ‘아르센 뤼팽의 도덕성(La Moralite d`Arsene Lupin)’이라는 제목으로 모리스 르블랑 자신의 글을 게재했는데, 그중 이와 같은 경향의 의미를 정확히 짚어낸 대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그(아르센 뤼팽)는 여전히 사회의 변방에서 법질서에 저항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가 법질서를 위반하는 경우란 오로지 사회를 이롭게 하고자 할 때뿐이다. 그는 또한 열렬한 애국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조국에 봉사하고 그 영광을 위해 헌신하므로, 원칙대로라면 범법자인 그를 잡아들여야 할 조국이 어쩔 수 없이 그 노고에 고마움을 표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만다. 근본적으로 그는 무공훈장이랄지 군모(軍帽)의 화려한 깃털장식 따위에 열광하는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측면이 많고, 지독한 반동세력에 속하면서 부르주아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보수주의자다운 데가 있다.
요컨대, 사회의 아웃사이더이자 그 사회의 수호자라는 모순된 정체성이야말로 현대적인 시각에서 우리 모두 진지하게 조명해볼 가치가 있는 아르센 뤼팽의 본령(本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와 같은 정체성은 멀리 로빈후드에서 가깝게는 배트맨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가 유구한 영웅의 계보에 속한다. 때로는 법이라든가 사회체제를 유린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보다 더 넓고 높은 차원의 도덕성을 추구하며, 테두리 내에 속박되지는 않되, 궁극적으로는 그 테두리 안에 속한 가치를 보호하는 영웅의 모습.
이 소설은 일단 연재발표가 끝난 다음, 1921년 “액션과 모험소설” 총서에 두 권으로 분권되어 출간되었고, 1932년에는 “물음표(le point d`interrogation)” 총서의 일환으로 재출간된 바 있는데, 이때는 마지막에 가서 뤼팽이 은둔생활을 때려치우는 것으로 수정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번 번역은 오리지날을 저본(底本)으로 했음을 밝혀둔다.
아르센 뤼팽은 사실 「기암성」이나 「813의 비밀」에서와 같은 엄청난 야심을 품기 이전, 그저 날렵한 도둑의 활약상을 보여줄 당시부터, 일반적인 도둑과는 구분되는 여러 가지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중 「포탄 파편」의 해설에서 다룬 바 있는 의적(義賊) 스타일의 행태를 제하고도 한 가지 뚜렷하게 드러나는 점은, 바로 도둑치고는 금전적인 이득에 대단히 관대하다는 점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또 한 가지 독특한 절도(竊盜) 행태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골동품과 고(古)미술품에 대한 집착이다.
이에 대해, 단순히 골동품의 물질적 가치 때문이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으나, 프랑시스 라카생 같은 뤼팽 전문가는 보다 심오한 차원에서 그 해석을 모색하는 입장이다.1) 유독 골동품과 고미술품에 집착하는 그의 태도 속에는 프랑스의 역사 자체, 그 세습권(世襲權)을 찬탈하려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결코 물질적 가치를 노리는 고가품 절도행위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무상(無常)한 현재를 사는 인간으로서 이른바 대문자(大文字)로 표현되는 역사(History) 속으로 걸어들어가 유구한 시간(Time)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지금 이곳’이라는 시간적 한계를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영웅은 항상 자신의 개체적 능력과 존재의 한계성을 뛰어넘고, 끊임없이 현실을 초극하려는 야심의 주인공이다. 역사와 전통의 산물인 ‘보물’을 손에 넣음으로써 그와 같은 존재론적 변신을 꾀하는 아르센 뤼팽의 모습이 가장 시적(詩的)으로 형상화된 모험담이 바로 「기암성」이다. 여기에서는 아예 프랑스 역사가 지켜보아온 모든 보물이 에기유 크뢰즈라는 속이 빈 기암(奇巖) 속에 통째로 보관되어 있는데, 그 자체로 하나의 왕국이자, 전통(Tradition)이나 다름없는 아지트를 처음 발견했을 때를 두고 뤼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기암성」 p.259).
“(......)내가 제일 처음 이 버려진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날, 기분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아는가? 잊혀졌던 비밀을 되찾고, 그 주인, 그것도 유일한 주인으로서 이곳에 들어서는 그 기분이 과연 어땠겠는가 말이네! 보다시피 저 쟁쟁한 존재들의 뒤를 잇는 당당한 계승자로서 말이야! 제왕(諸王)의 뒤를 이어 기암성에 살게 되다니......!”
「기암성」의 왕(王) 뤼팽이 암벽에 새긴 찬란한 이름에 도취할 뿐, 보물을 뿌리며 통치하는 데에는 무관심했던 반면, 「813의 비밀」에서는 분명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둔 긴박한 국제관계에서 새로운 유럽의 재편(再編)이라는 현실적 전략이 엄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략 자체가 다소 황당하다고 할 정도로 원대한 ‘꿈’인 만큼, 정작 중요한 건 아르센 뤼팽 본인의 고양된 자의식이라는 느낌을 역시 지울 수가 없다(p.499).
‘뭔가 다른 삶’을 향한 열망이 가슴 한복판을 불 지피고 있었을 뿐, 하등의 구체적인 기도(企圖)가 전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개 도둑에서부터 하나의 왕국을 가진 절대자에 이르기까지 아르센 뤼팽을 지탱시켜오는 추진력과 야심은 이처럼 계산적이기보다는 본능적이고, 현실적이기보다는 운명적이다. 비록 「황금삼각형」과 「서른 개의 관」에서는 스케일은 여전히 원대하되, 야심의 지향점이 대단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변하기는 하지만(막대한 황금을 이탈리아의 대전 참전비용으로 충당한다든지, 신의 돌이라는 보물을 프랑스 국립연구소에 기증하는 등), 이는 세계대전 중이라는 극히 예외적인 시대상이 반영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요컨대 아르센 뤼팽에게 ‘야심’이란, 여하한 구체적 대상을 지향하기보다는, 한 개인의 개체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본능적 에네르기 자체를 의미한다. 이는 「호랑이 이빨」에서 그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듯, 끊임없이 모험과 더불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만의 운명이 가진 다른 이름이라고 할 것이다.
“아르센 뤼팽에게 모험이란 삶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살아 있는 한, 그는 온갖 파란만장한 활극의 중심과 종착점에 서 있을 겁니다.”
1) Francis Lacassin, “프랑스 역사에 대한 절도(竊盜)의 예술(L`art de cambrioler I`histoire de France)”, Europe 지(誌) 1979년 8-9월, 뤼팽 특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