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 <청춘의 문장들> 10년, 그 시간을 쓰고 말하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금정연 대담 / 마음산책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루미의 시는 이렇게 묻는다. 오늘 너의 기분은 어땠는지? 마음 속으로 어떤 손님이 찾아왔는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잠자리를 구했다는 사실에 감사하여 행복하게 지내다가 떠난 고마운 손님이었는지, 이불이 더럽다고 화를 내느라 밤새 잠들지도 못하다가 급기야 집을 부수기 시작했던 난폭한 손님이었는지. 네 마음 속으로 그 어떤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너는 언제나 너일 뿐, 그 손님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네 마음속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기꺼이 맞이하기를. 그가 어떤 사람이든 화를 내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말기를.

 

절망하고 좌절하는 이유는 우리가 뭔가를 원했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스무 살 시절에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실패하는 게 일상다반사였네요. 원하는 학과에도 진학하지 못했고, 연애는 대부분 지지부진, 미친 듯이 시를 썼지만 읽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요. 언젠가도 그렇게 쓴 적이 있는데, 열망을 열망하고 연애를 연애하고 절망을 절망하던 시절이었죠. 원하는 현실 대부분은 저 멀리, 아주 멀리 있었어요. 심지어 절망마저도. 그래서 진짜 절망하는 것도 힘들었던 시절이었어요.

 

'열심히 쓰면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어'와 '열심히 쓰면 좋은 소설을 쓸 가능성이 높아져'는 전혀 다른 말이에요. 그 사이에는 우연과 운 같은 게 숨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쓰는 일 뿐이에요. 그 일에서 보람을 찾아야만 하는 거죠. 그 다음에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의 일들이에요.

 

예를 들어 정신과 환자의 불안이 있어요. 앞에 의사가 있잖아요? 상담하면 이 의사가 뭘 물어보겠죠? 대답해야만 하는데, 환자는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정신병이 아니라고 판단하는지 그걸 알 수가 없어요. 의사가 원하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사실 의사는 원하는 게 업을 수도 잇어요. 그렇지만 환자 쪽에서는 먼저 그가 원하는 걸 알아야, 대답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그걸 모르는 상태에서 대답을 강요당할 때 제대로 대답하는 게 맞는지 불안해지죠. 이게 바로 현대인이 가진 근본적인 불안이에요.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 여기서 신경증이 발생하는 것이죠. 연애 초기에는 누구나 이런 신경증 환자죠. 하지만 신경증 환자들만이 현대문학을 할 수 있어요.

 

시간이 하도 많아서 남은 시간 같은 것은 따져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진짜 젊음 사람들이죠. 그래서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걸 수도 있어요. 시간이 너무 많으니까 가능한 거죠. 1988년에 교보문고에 처음 갔는데, 그떄는 교보문고에 있는 책을 다 읽을 것 같았어요. 고 3이었거든요. 레코드 가게에 들어가면 거기 꽂힌 음악도 모두 다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고요. 그땐 시간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탐닉했죠. 심지어는 빈둥거림까지도 탐닉했어요. 중년이 되면 이제 그런 시간은 사라집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모든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요. 그러다보면 점점 고전 쪽으로 관심이 기울게 돼 있어요.

 

C.S. 루이스가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은 참 신기해요. 독서는 혼자서만 할 수 밖에 없는데, 정작 책을 읽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죠. 심지어 수천 년 전의 사람과도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작가로서는 소설 쓰기가 나를 치유해주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요. 소설을 쓰는 일은 치유보다는 나를 넘어서는 일에 가까우니까요. 대신에 노트에다가 뭔가를 쓰는 일은 도움이 됩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노트에다 손으로 뭔가를 쓰면, 그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쓰게 되면 마음이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날마다 일정 분량의 글을 쓰는 일은, 신경안정제를 먹는 일보다 더 좋아요. 그게 무슨 내용의 글이든. 그때는 손으로 쓰시길.

 

사람이 바뀌기란 참 어렵다고는 말했지만, 그건 자신의 의도대로 바뀌는 것을 말해요. 말하자면 아는 대로 행동해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렇게 되려면 상당히 노력을 많이 해야만 하죠.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어떤 사건으로 인해 사람이 바뀌는 일은 인생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그건 의도하지 않는 변화죠. 외부의 사건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니까요. 제가 쓴 소설이 그렇게 작용해서 누군가를 바꿀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저의 의도도, 독자의 의도도 전혀 아닐 거예요. 불가항력적인 우연한 사건에 가까울 테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글로 누구도 바꾸지 못하지만, 제 글은 누군가를 바꾸는 일이 일어날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이게 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사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대개 우리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들이죠. 우리가 '행하는' 일은 극히 드물어요.

 

지는 꽃은 한 때 피어나는 꽃이었다는 사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사실들이 갑자기 의미심장해지는 순간이 찾아오죠. 낙화시절이라는 말이 시어가 되는 이유를 그제야 깨닫게 되고요. 하지만 그것 역시 순간의 깨달음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아요. 이 봄에 제가 진짜 배우는 건 바로 그것입니다. 일순간 깨닫는다고 해서 그게 바로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뭘 아는 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방심하면 잊어버린다는 것, 언제라도 잊지 않는 것들만이 내가 아는 것이 된다는 것, 그런 것들을 배우려고 애쓰는 봄이랄까요. 언제 어떤 순간에도 기억하는 것만이 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진실을 잘 몰라요. 실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매 순간 까먹거든요. 대개의 경우에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요. 그러니까 타인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잊지 않기 위해서, 예컨대 지는 꽃은 한 때 피어나는 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 글은 쓰지만, 글을 쓴다고 해서 내가 그 사실을 늘 기억하는 건 아니에요. 작가의 딜레마입니다. 글 쓰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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