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애란 이 사람한테 받은 걸 저 사람한테 주는 이어달리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전에 사람한테 주지 못한 걸 이번 사람한테 주고 전에 사람한테 당한 걸 죄 없는 이번 사람한테 푸는 이상한 게임이다. 불공정하고 이치에 안 맞긴 하지만 이 특이한 이어달리기의 경향이 대체로 그렇다.

 

마음의 노화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을 앗아가 현실밖에는 남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더 이상 로맨틱 코미디를 즐길 수 없게 된다. 언젠가 저런 영화 같은 일이 내게도 닥칠 수 있다는 설렘과 희망이 사라진 로맨틱 코미디란 얼마나 부질없는가.

 

내가 만드는 음악은 불안과 고통의 산물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상력과는 무관하다. 고통을 잊기 위해 8월의 뜨거운 태양 볕을 피해 아파트 지하주타장을 달리며 만든 5집 앨범은 내가 만든 다섯 장의 앨범 중 가장 많은 것을 안겨다 준 앨범이 되었으며 반면 가장 사건이 없을 때 만든 4집은 그다지 많은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이것은 결코 아이러니한 일이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든 창작자라면 창조는 천재성이 아닌 고통에서 더 많은 것이 비롯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좋은 작품을 내기가 힘들다. 인생의 굴곡이 험준할수록 작품에도 그만큼 진한 드라마가 담기기 마련이니까.

 

친구가 슬프고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함께 슬퍼하고 위로해줄 수 있는 친구와 좋은 일, 기쁜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기뻐해줄 수 있는 친구 중 어느 쪾이 더 크고 진한 우정이라 할 수 있을까.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가게 되었을 때, 마치 그 순간만큼은 원래부터 친했던 사이인 것처럼 진심이 발동해 위로했던 경험을 누구나 몇 번씩은 갖고 있다. 그것은 결코 가식이 아니다. 슬픔의 위로는 대단한 우정이 아니라도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어느 날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그에게 믿을 수 없는 행운이 찾아왔다. 친구는 내게 실시간으로 일의 진행 상황을 전하다 마침내 대박을 알려왔는데, 거짓말처럼 일이 풀려가는 걸 보며 놀랍고 기쁘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에 한 10%쯤의 질시의 감정 또한 커져가던 걸 난 또렷이 기억한다. 내 제일 친한 친구이자 나와는 상관없는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그의 일이 잘 되어도 내 몫이 줄어들거나 나와 비교될 일 같은 건 없을 텐데도 내 맘이 그렇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알게 된 거다. 슬픔을 위로하는 것보다 기쁨을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자신에 대한 기대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실제로 오르기 어려운 산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 깨달음을 스물다섯에 얻는다면 그건 바보 같은 일일 것이고, 서른이라 한들 속단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마흔 언저리쯤 되면 반드시 포기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다. 그떄가 되면 마지막 몸부림도 쳐보고 온몸으로 거부도 해 보지만 결국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확인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 그 잔인한 일 말이다. 자, 자신이 보통의 재능과 운명을 타고난 그야말로 보통의 존재라는 것도 알았고,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세월이 갈수록 나를 가려주던 백열등이 수명을 다해 가고 있음도 직시하게 된 지금.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나의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

 

생을 마친 후 만약 신과 마주하게 된다면 그는 나를 가혹하게 평가할 것인가, 아니면 삶에 지친 나를 가엾이 여겨 쉬게 해줄 것인가. 만약 내게 주어질 천당이라는 게있다면 행불행을 감수하지 않아도 될 만한 공평함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천당일 것이다. 마음이 아파서 병원을 찾은 환자가 쌀쌀맞고 냉정한 의사를 만나 더 큰 상처를 입는 경우가 되지 않도록, 한평생 삶에 대한 회고를 객관적으로, 그러나 따스한 시선으로 들어줄 수 있는 인격과 덕성의 존재가 내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진실만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연애란?

누군가의 필요의 일부가 되는 것.

그러다가 경험의 일부가 되는 것.

나중에는 결론의 일부가 되는 것.

------------------------------------------------------------------------------------

마음에 물결이 치듯이 글을 계속계속 읽고 싶어지도록 잘 쓰는 사람들이 있다. 문장력이 뛰어나다거나 기가 막힌 어휘를 구사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투박하더라도 마음에 와닿게, 때로는 슬프기도 때로는 아름답기도 하다. 그런 글을 읽으면 그 작가에 대해 막 알아보고 싶은 마음과 함께 일종의 질투심이 들기도 하는데, 대개는 인생의 굴곡이 많고 아픔이 많았던 사람인 경우가 많아서 한편으로는 숙연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만약 좋은 글을 쓰는 대신에 나에게 이런 시련과 아픔이 오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삶과, 평생동안 남의 글만 읽고 부러워하는 대신 평탄한 삶을 살게 되는 두 가지 선택 사항 중에서 고르라면 당연히 나는 후자를 선택하지 않을까,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글쓴이는 스스로 가난했던 뮤지션이라고 밝히고 있다. 언니네 이발관은 꽤 알려지긴 했지만, 소위 떼돈을 벌어들이는 연예인은 아닐 것이다. 음악가로서의 삶은 아마도 고달프고도 힘들 것이고, 거기에다 이혼, 그리고 경계성 인격장애와 우울증등으로 인한 정신과 폐쇄병동 입원 등의 일화를 읽다 보면 이런 글을 쓰기까지 그가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힘든 시기를 겪고 이제는 어느 정도 단단하게 발을 딛고 선 작가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작가가 책에서 말하듯이, 창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은 어느 정도 필수일 것이다. 그러나 그 창작물을 향유하는 사람들, 그게 영화의 관객이 되었든, 음반을 구매하는 사람이 되었든, 책의 독자가 되었든 간에, 그들도 똑같이 어느 정도의 고통이 있어야 제대로 감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따지고 보면, 사는 것 자체가 이런 저런 지리함과 멸렬함과 자기 비하와 부끄러움 등으로 여러 번 덧칠되고, 어쩌다 한번씩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시련이 오기 때문에, 예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즉, 감상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창작을 하는 사람만큼의 고통이 없어도, 그저 묵묵히 이 생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자격이 주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정말 힘든 시기가 있고, 그 시기를 지나고 나면 조금 더 견딜만 해지는 게 인생일 수도 있다. 가장 힘든 시기에 이 책을 접했더라면 이 책은 내 인생의 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힘들었던 시기를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지금의 나에게는, 이 책은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편해지기도 한다. 그 시기에 이 책을 접했더라면 마치 나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이 책이 반가웠겠지만, 지금의 나는 잘 읽다가도 중간중간 이 부분은 감정의 과잉 아니야? 혹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는데? 혹은 이렇게 세상을 전부 타자화시킬 필요가 있나? 왜 일부러 자기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해서, 한 동안은 이런 류의 책들만 골라서 읽었는데 요즘은 이런 류의 책들을 될 수 있으면 피하게 된다. 아니면 큰 마음 먹고 단기간에 집중해서 읽어버리든지. 책도 인간관계처럼 적절한 타이밍이 있는 모양이다. 내 인생에서 한 때 이런 책들에 홀릭했던 적이 있다면, 지금은 이런 책이 아니라 다른 책에 또 홀릭할 시기인 것 같다. 그렇게 몇 년을 주기로 좋아하는 책의 부류가 바뀌어가면서 자연스레 또 나의 관심사와 세계관은 조금은 더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