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일요일들
은희경 지음 / 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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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가가 소설을 연재했을 시기에, 원래 연재하는 소설 말고 따로 독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개인적으로 트위터에 올린 글들을 모은 책이다.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는 꽤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은유보다는 직유에 가깝다. 그러니까 실제로 연재하는 소설을 주중에 비유한다면, 작가가 연재와는 별개로 그 시절에 쓴 글들은 주말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저 그 당시 작가의 글로써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책으로 나왔다면 더 이상 '일요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한 권의 책이 나왔기 때문에, 여기에 실린 글들은 작가에게 주말이 아닌 주중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감안한다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지나치게 가볍다. 만약 이 글들을 책이 아닌 인터넷 상으로 접했더라면, 처음 이 내용들을 담고 있는 도구 그대로 접했더라면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으리라. SNS는 개인적인 생각을 늘어놓는 공간이지만, 그것이 활자화되어 작가의 이름을 달고 책으로 나왔을 때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여러모로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마음에 드는 구절들은 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는 언제나 좀 막막하다고 말했었죠?

그때는 랩탑에서 글자 크기를 11포인트로 설정해 놓아요.

그런데 어느 정도 소설이 풀리면 10포인트로 다시 바꾼답니다.

소설이 막막할 때는 글자조차 흐리게 보이다가

자리를 잡아가면 그제야 글자가 또렷하게 보인다는 것.

간사하게도 그 단계가 되면 11포인트이기 때문에 화면이 벌어지는 느낌이고 내용까지 산만해지는 것 같다니까요.

 

어떤 기회에 영화배우를 실제로 보게 되면 먼저 드는 생각,

'초점이 잘 맞은 것 같다.'

뭐랄까, 선명하게 보이는 거죠.

예쁘고 멋진 사람을 볼 때에는 뭔가 환하게 잘 보인다는 느낌이 들어요.

머릿속에 설정돼 있는 아름다움의 틀에 딱 맞아떨어지기 떄문에

흐트러지지 않은 선명함으로 찍혀나오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모호하고 흐리게 느껴졌던 모든 것들

혹시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게 보였던 거 아닐까요?

 

 

이 글을 읽으니 작년에 어마어마하게 인기를 끌었던 모 드라마의 주연 배우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같은 드라마에 출연 중인 여배우의 실물을 처음 봤을때, 참 시원했다고. 마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나 경치를 보는 것 같았다는 그런 내용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표현은 달라도 결국 비슷한 것을 느끼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비몽사몽 간에 습관적으로 트위터에 접속.

거기 올라온 글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폴 매카트니 사망설,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나도 곧바로 답글을 올렸거든요.

-아, 7년 전 타코마에서 본 공연의 감동이 아직 잊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링고 스타만 남았군요.

그러자 사망설을 전한 분이 다시 답을 했어요.

-진심으로 슬퍼하시니 힌트를 드리겠는데요, 오늘이 며칠입니까.

 

며칠 지난 다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나는 폴 매카트니의 공연을 봤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곧바로 답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따금 그럴 때가 있어요.

소설 안에다 아는 것을 모조리 다 써놓고

퇴고를 하며 혼자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지는......

 

소설 쓸 때 방해가 되는 것들.

-술과 장미의 나날, 개콘과 하이킥, 영화, 당연히 책, 소풍 욕구, 타락 본능, 새련된 태타 등등.

거기에 '자랑'을 포함시켜야겠어요.

 

 

태타라는 단어가 있었구나. 찾아보니 아주 게으르다는 뜻이라고 한다. 나태하다는 것과 타성에 젖었다는 말을 합쳐놓은 정도의 말이 아닐까. '세련된'이라는 수식어도 참 잘 어울린다.

 

 

한국어는 소수의 언어이다. 한국 작가는 제한된 독자밖에는 가질 수 없다, 고 생각해왔다. 헝가리어를 쓰는 사람은 더 적다. 그런데 자기 언어에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죽은 지 400년 뒤에 유명해진 국민작가가 있는데, 내가 놀란 것은 400년 전에 씌어진 글이 지금도 아무 곤란 없이 잘 읽힌다는 점이다.

 

 

이거 아마도 산도르 마라이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바람직한 독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라는데, 최소한 꼬리를 물지는 못하더라도 저 앞에서 살랑거리는 꼬리의 끝자락은 보면서 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산도르 마라이의 책을 한 권이나마 읽은 게 스스로 대견했다.

 

오래전, 지원자와 청원자 과정에 있는 예비수녀님들을 가르친 적이 있어요. 지도 수녀님 말씀이,
-우린 생활조건이 단순해서 몸도 단순해요. 그래서 아프면 의사들이 진단내리기 쉽다고 해요.

 

 

생활도 단순하니 몸도 단순하고, 진단을 내리는 과정도 단순하구나. 말장난 같지만 당연한 일이다. 생활이 복잡하면 술, 담배, 과식, 카페인, 스트레스, 수면 부족... 온갖 병인들이 전부 뒤엉키는데 생활이 단순하면 이것 저것 고려할 필요가 없다. 요즘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단순하게 살 것을 부르짖는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올해부터는 더 단순해져야겠다. 


 

 이건 어떨까요. 「내가 살았던 집」의 구절인데.
-이루어지건 안 이루어지건 꿈이 있다는 건 쉬어갈 의자를 하나 갖고 있는 일.

 

꿈=쉬어갈 의자. 보통 꿈을 이루기 위해 죽기살기로 뛰거나 멈추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꿈이 있어서 쉬어갈 수 있다라... 그런데 맞는 것 같다. 사회인으로서 생활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꿈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스스로 넌더리를 내게 되겠지. 이루어지면 더 좋겠지만,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꿈이 있다면, 그 꿈은 그저 이 정도에 불과한 일상에 한 줄기 빛이 될 것이고, 숨통을 트이게 할 것이고, 하늘을 바라다 보는 여유를 가져다 주겠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물을 두 번 보게 된다. 한 번은 내 눈으로, 또 한 번은 그 사람의 눈으로. 내 관점과 감각이 두 겹이 되는 게 아니라 두 개의 관점과 취향이 점점 가까워진다.

 

 

두 겹이 아니라 점점 가까워진다는 표현이 참 좋다. 완전히 포개지지는 않지만, 또 다른 프레임으로도 세상을 기꺼이 바라볼 마음이 있다는 것은.

 

 

작가는 직업상 문자에 민감하죠.

현수막이나 포스터, 텔레비전 자막, 간판......

눈에 들어오는 모든 문자에 까칠하게 반응합니다.

틀린 말이나 맞춤법이 거슬려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구요.

물론, 재미있고 좋은 문자라면 가장 먼저 효험을 느끼겠죠.

 

뮤지션에게서 들은 얘기인데요.

아침에 일어나 음악을 들으면 평소보다 템포가 좀 빠르게 느껴진대요.

어? 뭐가 문제지? 생각해보니 자신의 몸이 아직 덜 깨어난 거였다구요.

음악이 빨라진 게 아니라 내 몸이 느리게 깨어나는 중......

그렇군요. 뮤지션은 소리에 민감하군요. 당연한 일.

유리창의 무늬에 민감한 건......유리창닦이일까요?

 

나는 또 무엇에 민감할까.

무엇이 나를 예민하게 만들어 행복과 슬픔과 사랑을 가까이 끌어당겨 주는 걸까.

 

 

나도 맞춤법을 인지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줄임말을 쓰는 것을 이상하게도 싫어한다. 그렇다면 나도 작가가 될 자질을 갖고 있는 것일까?

 

 

누가 말했냐에 따라 엄청나게 뜻이 달라져버리는 말이 있다. 나 소설 못 써요. 이 말이 농담으로 들렸으면 좋겠다. 가끔 내 인생이, 독선적이면서 내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은 사람과의 기나긴 문학 토론이 될 것 같은 우울한 생각이 든다.

 

 

아, 이 문단에서는 단 한 문장도 뺄 수가 없다. 단 한 문장도 보탤 필요가 없다.

 

 

시간을 좀 주세요.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수없이 많은 배선이 엉켜 있어 생각이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많다 보니 그중에는 분명 이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선도 있을 거예요.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선을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는 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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