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책 표지를 펼치자마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겉표지 뒷쪽, 작가의 설명의 첫 문구가 '자전거레이서'.

 

김훈은 소설 뿐 아니라 수필 '자전거 여행'으로도 유명하다.

 

'풍륜'이라는 이름을 따로 지어줄 정도로 자전거에 대한 애착이 큰 데, 단지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도 요즘 작가들 중에서는 사소한 부분을 괜히 부풀리거나 스스로를 이슈화 만들려는 모습이 간혹 보여서 약간 거부감이 든 적도 있었다. 물론 김훈의 글을 보면 그가 허례허식이나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설명에 그 어떤 이력보다 제일 먼저 자전거를 타는 사람, 이라는 단어를 붙였을 때는 그가 얼마나 소박하고 꾸밈없는 삶을 지향하고 있는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는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떠올렸었다. 기자로, 작가로, 살고 있는 김훈이기에 그 직업에 대한 애환이 등장하지 않을까, 나름 기대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좋게 말하면 독자를 끌어들일 만한 제목을 잘 붙인 책이고, 나쁘게 말하면 독자를 낚기 쉬운 제목을 붙인 책이다. 이런 생각은 나만 한 게 아닌 것 같다. 김훈의 책이고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절판 된 것을 보면 제목으로 인해 독자를 끌어들였다가 오히려 그 제목과 글의 내용의 불일치로 호감이 깎이게 된 것이 아주 조금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머리말에서는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늙으니까 두 가지 운명이 확실히 보인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벼락치듯 눈에 들어오고, 봄이 가고 또 밤이 오듯이 자연현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 보인다. 그리고 그 두 운명 사이에는 사소한 상호관련도 없다는 또 다른 운명도 보인다. 하루의 시간이 흘러서, 아침과 저녁의 냄새가 바뀌고 빛의 밀도가 성기어진다. 천지를 가득 메운 대낮의 빛들이 사위는 저녁에는 숲의 안쪽까지 잘 들여다보이고 숨쉬기가 편해진다. 빛이 성긴 저녁, 사물의 안쪽은 잘 드러나는데, 그때 대낮의 빛들은 모두 하늘로 불려 올라가 한강 어귀의 노을로 퍼진다. 그런데 나는 왜 그 빛과 노을과 쥐와 새에게로 건너가지 못하고 마루에 주저앉아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이제 묶는 조각글들은 이 물가에 살면서 내 영세한 생계를 버티어내기 위해 쓴 것들이다. 본래 그러한 것들을 향해 입을 벌려 지껄일 필요는 전혀 없을 터인데, 나는 일 삼아 지껄였고 지껄일수록 가난해졌으니 불쌍하다. 나여, 어째서 늙은 강물 옆에서 침묵하지 못하는가.

 

이 문맥만 놓고 보면, 밥벌이를 하기 위해 글을 썼고, 여기에 있는 글조차 다르지 않으며, 이제 늙은 자신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다. 글쎄, 젊은 작가가 패기넘치게 비록 배는 곯을지언정 나의 길을 가겠다고 외치는 모습과는 사뭇 대비되어 마음이 아프고 쓸쓸하다. 어디 김훈 뿐이랴. 대한민국 작가 중에 손 꼽히는 이 사람이 이렇다면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누구나 다 지겹도록 밥벌이를 하면서 살 것이고, 다 먹고 살기 위해서, 라며 스스로를 위로할 것이다. 하여, 김훈의 이 말은 오히려 수많은 우리 같은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위안이 되기도 한다.

 

수많은 조각글들 중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글을 보면 이 책을 쓸 때의 김훈의 생각을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 글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밥벌이는 밑도 끝도 없다. 그러니 이 글에는 결론이 없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근로를 신성하다고 우겨대면서 자꾸만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라고 몰아대는 이 근로감독관들의 세계를 증오한다. 나는 이른바 3D 업종으로부터 스스로 도망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인간들의 저 현명한 자기방어를 사랑한다.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셋이 함께 날아가는 세상>이라는 글을 보면 작가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하나'라는 존재의 모습은 늘 나를 질리게 한다. 산 속의 무덤들은 여럿이 모여 있지만 그 모임은 군집일 뿐 소통은 아니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개별적 행위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다들 혼자 죽어서 저 혼자만의 무덤을 이룬다. 새 두 마리가 날아갈 때, 세상의 질감은 완전히 바뀐다. 새 두 마리가 날아가는 풍경은 '함께'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따로따로 혼자서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둘'이라는 실체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이고, '둘'이란 그 '하나'의 중첩에 불과한 것인가. 새 두 마리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두 마리의 새는 풍경과 대치하고 있기보다는 새끼리 서로 대치하고 있다. 두 마리가 날아갈 때 '너'와 '나' 같은 인칭이 발생하고 비로소 언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발생한다. 세 마리는 '너'와 '나'와 '그'를 이룬다. 세 마리는 각자의 일인칭을 거느리면서 삼인칭의 공간을 날아간다. 세 마리가 날아갈 때, 언어는 더욱 교묘해지고 복잡해진다. 세 마리는 가장 편안한 세상의 모습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세 마리가 날아갈 떄도 새들은 역시 한 마리씩 날아가고 있다. 세 마리가 이뤄 내는 세상 속에서 한 마리가 매몰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은 세 마리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새 세 마리는 따로따로 혼자서 날아가는 새들이다. 하나와 둘과 셋이 함께 날아가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모두에게 환영받을 만한 문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반가운 구절도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고 또 무서워하는 물건은 자동차다. 나는 짐을 가득 싣고 달리는 10톤 트럭이나 탱크롤리 쪽은 쳐다보지도 못한다.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지만, 주로 기차를 타고 간다. 자동차 중에서도 내가 싫어하는 차는 서너 명씩 타게 되어 있는 승용차다. 시내에서 볼일 보러 다닐 때는 가까우면 걸어서 가고 세 정거장 이상 거리면 버스를 타고 간다. 나는 자동차 운전을 할 수 없지만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교통사고 현장을 잘 들여다보면 일상 속에 죽음이 뿌리 깊이 박혀 있으며, 죽음과 일상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잘 달리던 차가, 갑자기 쾅 소리 한 번에 튕겨져 나가면 모든 것이 끝장이고,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사는 사람들이 무섭다. 죽기를 각오한 자는 마침내 죽을 것이고, 그가 죽는 과정에서 또한 남을 죽일 것이다. 겁 많은 사람들이 이 하찮은 삶을 그나마 애지중지하면서 조심조심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다. 자동차가 이처럼 늘어났으니 되도록이면 거리에 나가지 않아야겠다.

 

<달리는 자동차를 보면>이라는 조각글의 일부이다. 지나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 또한 좀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교통사고에 대해 염려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심해서 절대 나쁠 게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작가의 말대로 나는 겁이 많으니까 애지중지하면서 조심조심 살아가도 되겠지. 어쩌면 소소한 자신의 특성을 설명한 글일 수도 있고, 어쩌면 폭력과 광기를 의미하는 모든 것을 전부 거부하는 태도라고도 볼 수 있겠다. <고통의 근원을 사유하며>에는 이런 부분이 잘 나타나 있다.

 

인간에게는 전쟁가지도 문명의 질서와 규칙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허영심이 있다. 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정은 이 허영심을 법제화하고 있다. 스포츠는 승부의 세계를 엄격한 질서와 규율의 통제하에서 운영한다. [삼국지]의 세계에서는 기만, 술수, 뒤통수치기, 뒤에서 쏘기, 함정파기 같은 무질서와 야비함이 선명한 전술로써 작동된다. 전쟁은 스포츠가 아니라 [삼국지]에 가깝다. 국가의 기원이 폭력이라는 학설은 심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렵지만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성이 있다. 제네바협정처럼, 문명개화된 허영의 규칙으로 전쟁의 과정을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질서와 규칙을 지켜가면서, 문명의 품격을 유지하면서, 포로를 신사적으로 대접하면서 살육을 자행하자는 예절 바른 전쟁 규칙은 살육의 야만성을 정당화한다. 제네바협정은 추악한 위선이다.

 

가장 인상깊었던 글은 <치욕>이었다.

 

나는 1948년생으로 올해 55살이다. 전쟁 때 유아기를 보냈고 이승만 치하에서 자라나 박정희 유신 통치 밑에서 신문기자를 했고 전두환 시절에 엎드려 있었다. 더럽고 견딜 수 없는 세월을 살았지만, 그래도 일본이 물러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 태어난 운명에 나는 감사한다. 나는 내가 체험하지 못한 시대의 고통에 관하여 말해야 하는 일이 두렵다. 이 두려움은 내가 체험한 시대의 두려움에 바탕하고 있다. 내가 지금의 신분과 역할로 일제시대를 살았다면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는 일은 식은땀 난다. 나는 인간의 역사 속에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치욕을 긍정한다. 치욕을 도려내버린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 언어화된 이념일 것이고, 역사는 치욕과 더불어 비로소 온전할 터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내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상해와 중경에서 김구 선생을 모셨던 임정의 청년이었다. 그분은 김구 일행과 함께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동포들은 모두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인들 밑에서 노예처럼 비굴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그 비굴한 대다수의 동포들이 바로 민족과 국토와 언어를 보존한 힘이었다"라고. 그때, 나는 내 아버지의 늙음을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내 당대의 사람들이 친일과 반민족의 고통을 말할 때, '늙음'의 바탕 위에서 말해주기 바란다. 내 말은 그 '늙음'의 마음으로 친일과 반민족의 치욕을 뭉개버리자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은, 그 견딜 수 없는 치욕을 치욕으로써 긍정하자는 말이다. 치욕을 긍정하는 또 다른 치욕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 또한 감당되어야 할 치욕인 것이다.

 

그 어떤 거대한 담론이나 이념보다도,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 특히 가장 힘 없고 비참하며 보호받기 힘든 약자에 대한 넉넉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철도 파업의 현장에서 쓴 <늙은 기자의 노래>에서도 알 수 있다.

 

24시간 맞교대는 인간의 몸의 조건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노동제도이다. 24시간 맞교대는 하루나 이틀이라면 몰라도 그 직업을 생애로 삼아야하는 사람들이 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노동제도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 자명함에는 이념이나 노선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진보이기 때문에 24시간 맞교대가 부당하고, 보수이기 때문에 그것이 타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토록 분명하게도 부당한 것들의 부당함이 보이지 않도록 가로막는 것이 이른바 이념이라는 것이었을까. 명백히 잘못된 것들을 고쳐나가는데, 이처럼 막대한 손실과 갈등을 대가로 치루어야 하는 것이 이른바 발전의 원리인 것인가. 인간의 말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던 인간들이 어째서 한바탕 '본때'를 보이고 나면 비로소 말을 알아듣는 것일가. 기어이 '본때'를 보여야 명백히 그릇된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그 '본때 보이기'는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 노동 조건의 개선을 절규하는 무수한 담론과 소설과 시와 음악이 있엇다. 결국 개선은 '본때'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의 성취 내용을 송고하면서 늙은 글쟁이는 비통했다. 말로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이처럼 어려워야 하는가.

 

나는 학창시절 김지하나 신동엽 등 저항 시인의 시를 공부하며 자랐고,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미국의 한 유명 작가의 말을 사춘기 이전부터 깊이 새겼던 사람이라 늘 글 쓰는 사람에 대한 선망과도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다. 세상의 물질적인 욕구에 초연하고, 늘 사회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으며, 조용히 나의 할 일을 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을 진실에 눈을 뜨게 하고 행동하게 한다는. 그래서 이 구절은 조금 의외이기도 했다. 아마도 글쓰기가 밥벌이가 된다면, 이렇게 자신의 일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구나, 하는 무력감에 빠지게 될까. 아무리 귀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는 일이라도 직접 직업이 되면 그 당사자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허탈감을 안겨 주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작가가 나이가 들어서 이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유일하게 작가가 이 글에서 긍정하는 것은 민중들, 스스로 살 길을 찾는 백성들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수몰되지 않는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한때는 석탄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간 에너지였다. 지금 석탄산업은 완전히 저물어간다. 석탄산업이 저물어가자 많은 광부들은 탄광을 떠났고, 늙고 병들어서 떠날 수조차 없는 광부들은 산재병원에 입원했다. 김윤식 씨는 "자식들이 취직해서 좀 살만해지니까 죽을 병에 걸렸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은 진폐의 먼지로 그의 호흡에 실려 그의 허파속에 앙금으로 엉겨 있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탄광촌에 카지노가 들어섰다. 대박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로 카지노는 연일 불야성이다. 김윤식 씨의 큰 딸 김선명 씨는 카지노에서 딜러로 일한다. 김선명 씨 뿐 아니라 이 카지노에서 일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 지방 광부의 자녀들이다. 젊은이들은 카지노, 호텔로 변해버린 고향을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김선명 씨는 "옛 모습이나 지금의 모습이나 양쪽 다 내 고향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늙은 광부가 진폐로 쓰러져가고 인간의 삶은 이렇게 끝없이 이어져가고 있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다 다치거나 망가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시대가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을 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망가진 사람들의 내면에 끝끝내 망가질 수 없는 부분들은 여전히 온전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뿌리뽑히고 거덜난 삶 속에서 삶에 대한 신뢰를 발견하는 일은 늘 눈물겹다. 고난에 찬 삶을 통해서 말없는 실천에 도달한 그들의 삶은 성자의 삶처럼 보였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요, 허무함을 피할 수 없는 과정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간다. 김훈의 책 [칼의 노래]에서 주인공 이순신도 그랬고, 수많은 백성들도 그랬다. 고통과 허무함을 인식하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말없이 견뎌내는 것, 그게 김훈이 찾은 답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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