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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평점 :
알랭 드 보통이 이렇게 재기 넘치고 따뜻한 작가였던가? 1주일간 공항에서 보냈던 그의 이야기는 옮긴이의 말처럼 “한 바퀴 원을 돌며 출발지로 돌아왔지만, 그 원은 평면의 원이 아니라 상승 나선운동을 하는 원”이다. 냉철하고 날카로워서 때때로 정떨어질 정도(!)였던 그의 과거의 작품에 비하면 그의 또 다른 이번 보고서는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원래 작가들은 젊었을 때는 날카롭게 세상을 비판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숙하게 자리한다고 한다. 그래서 몇몇 그의 골수팬들(대부분 그보다 10년씩이나 어린 사람들)에게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러한 변절(?)이 반갑다. 얼마나 그가 변화했는지는 이후에 계속해서 나오는 그의 작품을 보아야 알겠지만. 이 책을 쓸 때의 그는 서른아홉, 우리 나이로 마흔이다. 이전과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또한 변하고 싶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책을 빌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인천 공항의 민영화 논란을 다룬 시사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민영화의 ‘나쁜 예’로 ‘히드로’가 꼽혔다. 뭐에 대한 비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비용이 몇 배가 올랐다고, 결국 그 부담은 이용자에게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아마 영국에서도 꽤나 논란이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보통이 왜 자신이 이른바 ‘고용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그리도 자세하게 쓴 게 이해가 되었다. 중세의 예술가들을 언급하며 슬쩍 자신을 변호하는 모습은 비난하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귀여웠다.
무엇보다도 작가로서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수준에서 이 일기가 멈추지 않고, “실체에 비하면 책이란 얌전하다고” 인정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내 주변을 둘러싼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으며, 고향은 많은 가능한 세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코 잊고 싶지 않다”는 말에도 타성에 젖지 않으려는 결의가 느껴진다. 나도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 나이가 들어도 늘 날카롭게, 그 날카로움이란 상대를 찔러서 상처를 내는 날카로움이 아니라 어떤 사물을 보아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날카로움이다.
‘다큐멘터리 3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공항 편을 스케치한 적이 있다. 영상이라는 것이 생생함을 전달한다는 매력이 있음과 동시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한다는 단점이 있다. 정확히 이 책과 반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공항이 이렇게 차분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아마도 보통이 지적한 책의 한계가 이것인가 보다.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터미널’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서는 공항을 어떻게 그려냈을지.
헤어짐과 만남, 출발과 도착, 떠남과 돌아옴이 있는 곳. 산업 혁명 시절의 핵심적인 공간이 ‘공장’이라면 현대의 특징적인 공간 중 하나는 공항일 것이다. 그 공간을 통해 나와 너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그래서 “현대 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다른 기관에 상주하는 꿈을” 꾼다는 보통의 말이 반갑다. 그가 “은행, 핵발전소, 정부기관, 양로원 같은 곳”에서 쓰는 “무책임하고, 주관적이고, 약간 별나면서도 세상에 대한 보고가 담긴 글”들은 어떨지 기대가 된다.
우리 대부분은 치명적인 재난에 가까운 상황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야만 일상생활에서 좌절과 분노 때문에 인정하지 못했던 중요한 것들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일하기 좋은 곳이 실제로도 좋은 곳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조용하고 시설이 잘 갖추어진 서재는 그 흠 하나 없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실패에 대한 공포를 압도적인 수준으로 높이곤 한다. 독창적인 사고는 수줍은 동물과 비슷하다. 그런 동물이 굴에서 달려 나오게 하려면 때로는 다른 방향, 혼잡한 거리나 터미널 같은 곳을 보고 있어야 한다.
나의 수첩은 상실, 욕망, 기대의 일화들, 하늘로 날아가는 여행자들의 영혼의 스냅 사진들로 점점 두꺼워졌다. 터미널이라는 살아 있는 혼돈의 실체에 비하면 책이란 얼마나 얌전하고 정적인 것이냐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는 힘들었지만.
이런 수정 같은 맑은 관점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다. 다른 현실, 튀니스와 하이데라바드에 존재하는 현실에 관해 알고 있는 것과 고향이 늘 균형을 이루게 하고 싶다. 여기 있는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으며, 비스바덴이나 뤄양의 거리는 다르고 고향은 많은 가능한 세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코 잊고 싶지 않다.
그런 순간이면 죽음을 피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죽음을 영원히 계속 속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느낌도 공존하며, 그 때문에 이 장면이 더욱 가슴 아리다. 어쩌면 이것도 죽을 운명에 대비해 연습을 하는 한 가지 방법인지 모른다. 언젠가 지금으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뒤 어른이 된 자식은 일상적인 출장을 떠나기 전에 늘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할 것이며, 그러다 집행유예는 어느 순간 끝이 날것이다. 한밤중에 멜버른의 한 호텔의 20층에 있는 방으로 전화가 걸려와, 세계 반대편에서 아버지가 치명적인 발작을 일으켰으며, 의사들은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그날 이후 이제 어른이 된 소년은 도착 라운지에 늘어선 사람들 속에서 늘 빠져 있는 얼굴 하나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작가들이 가정 내의 경험을 넘어서 밖을 내다보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현대 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다른 기관에 상주하는 꿈을 꿔보았다. 은행, 핵발전소, 정부기관, 양로원 같은 곳. 그런 곳에서 여전히 무책임하고, 주관적이고, 약간 별나면서도 세상에 대한 보고가 담긴 글을 쓰는 꿈을.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우리가 읽은 책, 일본의 절, 룩소르의 무덤, 비행기를 타려고 섰던 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등 모두 다. 그래서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항구를 굽어보는 방 두 개짜리 숙소, 시칠리아의 순교자 성 아가타의 유해를 자랑하는 언덕 꼭대기의 교회, 무료 저녁 뷔페가 제공되는 야자나무들 속의 방갈로. 우리는 짐을 싸고, 희망을 품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회복한다. 곧 다시 돌아가 공항의 중요한 교훈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