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그림책
헤르타 뮐러.밀란 쿤데라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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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을 알고 있었던 사람

특히 독일어권 작가들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책은 독일에서 기획되었다. 책 원제인 BuchBilderBuch는 독일어로 책.그림.책 이며 아마 편지를 보낼 때에는 독일어로 작품을 낸 적이 있는 작가들 위주로 보내지 않았을까?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독일 문학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관통하는 듯한 그 느낌, 철학적 사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OK.

르네 마그리트와 같은 초현실주의의 그림을 보며 상상하기를 즐기는 사람-이 책의 그림들은 ‘책’이라는 코드가 있기 때문에 수많은 그림을 보다 보면 질릴 수도 있다. 비과학적인 그림 앞에 ‘어디 한 번 상상해봐!’하며 압박을 받는 느낌이랄까. 이러지 않을 수 있을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 OK.

현실의 문제로 심신이 지쳐있는 사람

글을 읽지 않고 그림만 보면서 오후를 보내면 치유될 것 같은 사람

 

위의 언급된 사람을 알고 있는 사람

누군가에게 술술 읽혀 금새 읽지 않아도, 두고두고 책장에 놓았다가 볼 수 있는 책을 선물하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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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할미 2011-01-17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표지에 있는 그림이 제일 마음에 든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여운을 느끼면서 한 장 한 장 음미하며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속도가 경쟁인 이 시대에 치유마저도 순식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천천히 흘러가는 독일과 빠르게 변하는 한국의 차이인지?
 
아미쉬 - 느리게, 단순하게 사는 사람들 이야기
린다 에겐스 지음, 메어리 아자리언 삽화, 조연숙 옮김 / 다지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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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름을 처음 안 것은 ‘홍승기의 시네마 법정’을 통해서였다. 해리슨 포드 주연의 ‘위트니스’의 배경이 된 아미쉬 마을은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 대국에 이런 시간이 멈춘 듯한 마을이 현재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기억에 남았다. 그 다음으로 본 것은 미국드라마 ‘본즈’의 한 에피소드였다. 단순히 아미쉬 마을의 모습을 관객에게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낸(내 짐작이다. 나는 영화 위트니스를 글로만 보았기 때문에) 영화와는 달리, 미드의 에피소드에서는 아미쉬 마을을 떠나고 싶은 마음과, 남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 작품 사이에 있는 세월의 흐름 때문일까.

읽으면서 내내 평화로운 마음을 느꼈다. 로러 잉걸스 와일더의 ‘초원의 집’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장 심란하고 촉박하고 기대고 싶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시험기간에 읽지도 않을 것이면서 책을 괜히 빌린 이유가 이것일 것이다. 편. 안. 함. 을 느끼고 싶어서.......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지난 25년간 북미 전역의 아미쉬인이 두 배로 늘었다고 한다. 2000년에는 144000명이란다. 정작 아미쉬의 시작인 알사스 지역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는 사라진 이 조직은 초기 기독교 교리에 충실하다는 이유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편견으로 인해 시달리기도 했다. 단추는 검소하지 않아서 옷에 달지 않고, 전화도, 자동차도 세탁기도 없다. 서로서로 도와야 하기 때문에 보험에도 들지 않고 정부의 보조도 받지 않는다.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원칙 때문에 군대에 가지도 않고 누군가의 공격을 받아도 대응하지 않는다. 답답하리만큼 고집스러운, 그러면서도 순수한 이들을 보면서 대단하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도 서울대-카이스트 부부가 낙향해 산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정도의 차이일지라도 누구든 살면서 아미쉬 같은 삶을 꿈꾼다. 마치 연어가 가진 본능인 것 같다. 원시시대부터 우리 몸에 내재된 태초의 방식으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다른 것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텔레비전이 없어서 아쉬운 적이 없었듯이 가져 본 적 없는 것을 욕심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지켜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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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위트 사전
앰브로즈 비어스 지음, 정예원 옮김 / 함께(바소책)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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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일본의 ‘독소 소설’ 시리즈 정도는 아니었어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올 정도는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단 문화적 환경이 다르고(같은 동양문화권이 아니라 미국임) 시대가 다르다 보니(저자는 남북전쟁에 참가했던 사람이란다. 지금으로부터100년 전이다.) 읽고, 0.01초 만에 감탄이 나오지 못하고 다소 버퍼링이 걸렸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요즘을 보면, 아무리 혼란기라도 이럴 수가 있는가 할 부분이 많다. 법치주의, 민주주의, 원칙 앞에 어떠한 지연, 학연, 혈연도 통하지 않는 나라(물론 그 rule이라는 것이 패권주의와 가진 자의 자기 방어일 수 있지만, 어쨌든 rule은 rule이다.)가 초창기에는 이런 나라였구나라고 생각하니 새삼 신기하다. 아마도 요새 신문의 만평에 실릴 정도의 이야기일 것 같다. 안 그래도 작가를 검색해보니 비판적인 저널리스트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종교인, 공권력, 정치인에 대한 신랄한 비판들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었겠지만 지금의 시각으로는 주석을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와 일치하는 부분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분명히 우화집이랬는데 우화는 대체 어디 있는 걸까. '환상우화집'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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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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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이 이렇게 재기 넘치고 따뜻한 작가였던가? 1주일간 공항에서 보냈던 그의 이야기는 옮긴이의 말처럼 “한 바퀴 원을 돌며 출발지로 돌아왔지만, 그 원은 평면의 원이 아니라 상승 나선운동을 하는 원”이다. 냉철하고 날카로워서 때때로 정떨어질 정도(!)였던 그의 과거의 작품에 비하면 그의 또 다른 이번 보고서는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원래 작가들은 젊었을 때는 날카롭게 세상을 비판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숙하게 자리한다고 한다. 그래서 몇몇 그의 골수팬들(대부분 그보다 10년씩이나 어린 사람들)에게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러한 변절(?)이 반갑다. 얼마나 그가 변화했는지는 이후에 계속해서 나오는 그의 작품을 보아야 알겠지만. 이 책을 쓸 때의 그는 서른아홉, 우리 나이로 마흔이다. 이전과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또한 변하고 싶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책을 빌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인천 공항의 민영화 논란을 다룬 시사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민영화의 ‘나쁜 예’로 ‘히드로’가 꼽혔다. 뭐에 대한 비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비용이 몇 배가 올랐다고, 결국 그 부담은 이용자에게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아마 영국에서도 꽤나 논란이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보통이 왜 자신이 이른바 ‘고용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그리도 자세하게 쓴 게 이해가 되었다. 중세의 예술가들을 언급하며 슬쩍 자신을 변호하는 모습은 비난하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귀여웠다.

 

무엇보다도 작가로서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수준에서 이 일기가 멈추지 않고, “실체에 비하면 책이란 얌전하다고” 인정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내 주변을 둘러싼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으며, 고향은 많은 가능한 세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코 잊고 싶지 않다”는 말에도 타성에 젖지 않으려는 결의가 느껴진다. 나도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 나이가 들어도 늘 날카롭게, 그 날카로움이란 상대를 찔러서 상처를 내는 날카로움이 아니라 어떤 사물을 보아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날카로움이다.

 

‘다큐멘터리 3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공항 편을 스케치한 적이 있다. 영상이라는 것이 생생함을 전달한다는 매력이 있음과 동시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한다는 단점이 있다. 정확히 이 책과 반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공항이 이렇게 차분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아마도 보통이 지적한 책의 한계가 이것인가 보다.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터미널’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서는 공항을 어떻게 그려냈을지.

 

헤어짐과 만남, 출발과 도착, 떠남과 돌아옴이 있는 곳. 산업 혁명 시절의 핵심적인 공간이 ‘공장’이라면 현대의 특징적인 공간 중 하나는 공항일 것이다. 그 공간을 통해 나와 너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그래서 “현대 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다른 기관에 상주하는 꿈을” 꾼다는 보통의 말이 반갑다. 그가 “은행, 핵발전소, 정부기관, 양로원 같은 곳”에서 쓰는 “무책임하고, 주관적이고, 약간 별나면서도 세상에 대한 보고가 담긴 글”들은 어떨지 기대가 된다.

 

우리 대부분은 치명적인 재난에 가까운 상황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야만 일상생활에서 좌절과 분노 때문에 인정하지 못했던 중요한 것들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일하기 좋은 곳이 실제로도 좋은 곳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조용하고 시설이 잘 갖추어진 서재는 그 흠 하나 없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실패에 대한 공포를 압도적인 수준으로 높이곤 한다. 독창적인 사고는 수줍은 동물과 비슷하다. 그런 동물이 굴에서 달려 나오게 하려면 때로는 다른 방향, 혼잡한 거리나 터미널 같은 곳을 보고 있어야 한다.

 

나의 수첩은 상실, 욕망, 기대의 일화들, 하늘로 날아가는 여행자들의 영혼의 스냅 사진들로 점점 두꺼워졌다. 터미널이라는 살아 있는 혼돈의 실체에 비하면 책이란 얼마나 얌전하고 정적인 것이냐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는 힘들었지만.

 

이런 수정 같은 맑은 관점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다. 다른 현실, 튀니스와 하이데라바드에 존재하는 현실에 관해 알고 있는 것과 고향이 늘 균형을 이루게 하고 싶다. 여기 있는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으며, 비스바덴이나 뤄양의 거리는 다르고 고향은 많은 가능한 세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코 잊고 싶지 않다.

 

그런 순간이면 죽음을 피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죽음을 영원히 계속 속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느낌도 공존하며, 그 때문에 이 장면이 더욱 가슴 아리다. 어쩌면 이것도 죽을 운명에 대비해 연습을 하는 한 가지 방법인지 모른다. 언젠가 지금으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뒤 어른이 된 자식은 일상적인 출장을 떠나기 전에 늘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할 것이며, 그러다 집행유예는 어느 순간 끝이 날것이다. 한밤중에 멜버른의 한 호텔의 20층에 있는 방으로 전화가 걸려와, 세계 반대편에서 아버지가 치명적인 발작을 일으켰으며, 의사들은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그날 이후 이제 어른이 된 소년은 도착 라운지에 늘어선 사람들 속에서 늘 빠져 있는 얼굴 하나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작가들이 가정 내의 경험을 넘어서 밖을 내다보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현대 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다른 기관에 상주하는 꿈을 꿔보았다. 은행, 핵발전소, 정부기관, 양로원 같은 곳. 그런 곳에서 여전히 무책임하고, 주관적이고, 약간 별나면서도 세상에 대한 보고가 담긴 글을 쓰는 꿈을.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우리가 읽은 책, 일본의 절, 룩소르의 무덤, 비행기를 타려고 섰던 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등 모두 다. 그래서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항구를 굽어보는 방 두 개짜리 숙소, 시칠리아의 순교자 성 아가타의 유해를 자랑하는 언덕 꼭대기의 교회, 무료 저녁 뷔페가 제공되는 야자나무들 속의 방갈로. 우리는 짐을 싸고, 희망을 품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회복한다. 곧 다시 돌아가 공항의 중요한 교훈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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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 / 레디앙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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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분명 불편한 책이다. 아니 어느 누군가에게는 분명 불편할 수도 있는 책이다.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라는 부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제목만 보아도 욱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직 그녀보다 한참 젊은 여성인 나 또한 그렇다. 학교에서, 책에서 배웠던 삶과 실제 우리 사회의 관습들이 얼마나 일치하지 않는지를 한참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 양쪽에서 나는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지, 아니 양쪽에서 잘 줄다리기를 하며 가운데로 가야 하는지. 

이 책에 제시된 그녀의 주장에 100퍼센트 동감하는 것은 아니다. 한 회원의 마이리뷰에서처럼 그녀는 끊임없이 자유롭다고 얘기하지만 왠지 편안해보이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크게 공감한다. 이상하게 계속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진정으로 자유로워보이지는 않는다고 느껴져 뭔가 불편했는데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회원의 말처럼 저자가 '일상의 안온함이 아니라 자신이 택한 삶의 방식에 대한 따스한 만족'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자유란 꼭 남다른 생활 양식이나 일탈에서 오는 건 아니라고 본다는 점도. 내가 불편하게 느꼈던 것도 바로 한비야나 류시화의 글에서 느껴지는 그 '느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분명 한국을 떠나기 전보다는 훨씬 더 자유를 느끼고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그녀의 자유로운 삶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본다. 물론 '자유'라는 것 자체에 대한 정의가 그녀에게는 다른 의미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한다. 

한국 사회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경직된 사회다. 비록 나와는 생각이 조금 다르지만, 책에 언급된 그녀의 삶과, 현재 진행 중인 그녀의 삶, 앞으로의 삶 전부에 격려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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