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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말했다 : 우리를 닮은 그녀의 이야기
김성원 지음, 김효정 사진 / 인디고(글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참 이상하기도 하다.
처음 내가 이 책을 샀을 때는 꽤나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 같기도 한데,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단어 하나에 떨렸고
오랫동안 사진을 바라보며 가슴 뭉클했던 것 같기도 한데,
꽂아 놓아도 예쁘고 꺼내어 놓아두어도 예쁘고
어느 장을 펼쳐 놓아도 마음에 쏙 들도록 책이 예뻐서
늘 흐뭇하게 바라봤던 것 같기도 한데,
언제부터인지 있는지도 잊어버린 채, 한 동안 그저 그대로 책장에 두었었다.
우연히 책 정리를 하다가 아, 맞아, 이 책 있었지,
내가 이 책을 샀을 때, 그러고 보니 그게 벌써 언제지? 27살 때인 것 같다.
그때 내가 이 책을 왜 샀는지도 기억난다. 늘 가던 서점이 아니었고,
내가 거주하고 생활하는 도시가 아닌 다른 곳에서,
그 날, 할 일은 없는데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웠고,
또 무섭고 슬펐던, 그런 밤이었다고 기억한다.
밤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고, 감성에 젖어서 한편으로는
위로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는데,
참... 그때 내가 했던 수많은 공상들.
지금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지만, 어쨌든 미래를 꿈꾸는 것은 현재를 견디게 하니까.
우습게도 그때 와닿았던 구절들이, 지금 보니까 약간 오글거리는 것 같고,
그때 무심히 넘겼던 문장들이, 지금 나에게 뜨겁게 울린다.
좋은 책의 조건은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혀지는 책이라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참 좋은 책이다.
나도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의 그 시간에서 참 많이도 변했고.
그때 당시에는 그로부터 몇 년 뒤의 내가 지금 이런 모습일거라고
또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느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책을 샀을 때를 기준으로 지금까지 내가 변했다면,
정확히 그 시간만큼 흐르고 나서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또 다른 구절을
문장을, 단어를, 나는 발견하고 감동받겠지.
그런 기회가 없어진다는 것, 아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책을 정리하는 데에 미련은 없었다. 홀가분하다.
아마도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처음 내가 이 책을 샀을 때의 그 암담했던 날의 기분이 떠오르고,
어쩌면 그 느낌을 영영 기억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편으로는 한 때 외로웠던 순간,
그 절절한 감정을 고스란히 잊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달콤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제 박차고 앞으로 나가려는 나,
가뜩이나 지나온 상념이 붙잡고 놔주지 않아 이리저리 마음 다잡기 힘든 나를
어떻게 해서든 일으켜 세우려면 쓸데없는 감정적인 소모는
스스로 노력해서라도, 이런 행동을 통해서라도 의식적으로 매듭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독이 얼마나 달콤할 수 있는지, 외로움이 얼마나 반짝일 수 있는지
절실히 깨닫고 있는 요즘,
원래 외로운 나 자신을 즐겼었던 나지만,
더 이상 코스프레로라도, 허세로라도, 그냥 농담으로라도, 장난으로라도,
고독은 피하고 싶었기에 더 빨리 이 책을 정리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해피엔딩이, 시끌벅적이, 무모한 용기와 활발함이,
목젖을 넘어갈 정도의 웃음이, 열정이,
단순하고 관조하는 삶, 조용한 미소, 정돈된 상태에서 오는 편안함,
감성적이고 예민한 것, 질서 정연함보다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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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 나는 첫눈에 반하고 말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걸 설득시켜야 했다.
나는 그녀가 다니던 대학의 대학원을 다녔다고 말했다.
그녀와 나의 나이 차이로 볼 때 우리는 그 시절에 교정에서
서로 스쳐 지나갔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것도 몇 번이나.
그때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로,
작은 방해물로,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 장면을 상상하자,
우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로맨틱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빠져 있었기에 그녀가 나를 좋아해 주기만을 바랐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우연히 스쳐 지나간 적이 있을 거라는 사실이
가슴을 설레게 했었다. 그런데 헤어지고 난 후에는,
우연히 스쳐 지나갔다는 사실이 가슴을 무너지게 했다.
영원히 머물 줄 알았던 사랑이,
또다시 스쳐 지나가는 존재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
내가 세상에서 배운 가장 무서운 사실이다.
-<어떻게 만났는데 이렇게 잃어버리는 거니> 중에서
그와 헤어진 직후에 여행을 갔는데, 여행지에서 한순간,
마치 그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 것처럼 그리움이 간절해졌다고 한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져서 한동안 그대로 서있었다.
'이게 뭘까?'하면서 두리번거리다가 깨달았다고 한다.
그 사람이 즐겨 쓰던 향수 냄새를 맡았다는 걸.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젠 잊었어."
얼마 전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이 그 향수를 뿌리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음이 아프기는커녕 이런 생각이 들어 홀가분해졌다고 한다.
'그래, 이건 누구나 뿌릴 수 있는 향수일 뿐이야.'
유일한 존재가 평범한 존재가 되는 순간,
그때 그녀는 그를 잊었다.
-<유일한 존재가 평범한 존재가 되는 순간> 중에서
그녀가 참을 수 없었던 건, 전 남자친구에게 새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가 후줄근한 복장으로 혼자 있을 때 그를 만났다는 사실도 아니었다.
그녀가 진짜 참을 수 없었던 건, 그녀와 만날 땐
7년 동안 단 한 번도 떡볶이를 먹지 않았던 그가
다른 여자와는 먹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떡볶이를 권하면 자긴 싫어한다면서
입도 대지 않았던 그였다.
그녀는 그의 뒤쪽으로 살짝 다가가,
있는 힘을 다해 젓가락을 휘둘러 그 애의 하얀 티셔츠에
떡볶이 국물로 북두칠성 모양을 그려 줬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자, 몰래 빠져 나왔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빨간 떡볶이 국물로 남은 여자였다.
<헤어진 후에도 참을 수 없는 것>중에서
"제가 대신해 드릴게요. 차에서 내리세요."
그녀의 얼굴에서 초조한 기색이 사라지고
평소 익숙하게 보았던 약간은 게을러 보이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차를 주차하다가 그만 차 옆쪽을 긁고 말았다.
운전 경력이 5년인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사태를수습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창문을 내리고 "죄송합니다. 제가 변상해 드릴게요."하고 말했다.
새 차를 처음 갖게 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녀는 변상이라는 말에도
별 위안을 받지 못했다.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나에게
"어쩜 좋아요. 며칠 전에 뽑았는데......."하고 말했다.
나는 그 순간 그녀가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의 차를 고쳐 주겠다며, 전화번호를 교환했고,
그 후 매일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사랑은 게으르게 다가오고, 차 사고처럼 시작된다.
<사랑은 게으르게 다가오지만>중에서
참 이상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CD로 들을 때도 좋긴 하지만,
라디오에서 들을 땐 좋은 느낌이 몇 배가 된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건 그 노래를 누군가가 같이 듣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적어도 음악을 소개했던 DJ가 들었을 것이며
그 방송을 들었던 다른 사람들도 들었을 테니까.
라디오를 틀어 놓고 꽉 막힌 도로 위해 멈춰 서있었다.
가슴 한쪽이 콱 막힌 듯이 아팠던 시절이었다.
도로가 막히자 온갖 잡념들이 떠올랐다.
나는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그때 옆에 서있던 차에서도 똑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때, 가슴의 통증이 가라앉았다.
그 순간, 그 황량한 도로에서,
어떤 누군가와 똑같은 노래를 들었고
나는 행복해졌다.
우리를 설레게 하고 반하게 하는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더 즐거워진다.
<사람들은 즐겁다>중에서
그녀가 일하는 곳에선 한 달에 한 번 매출액을 점검했다.
그런데 그녀의 실적은 목표량에서 한참이나 부족했다.
자칫하면 일자리를 잃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D-day를 딱 하루 남겨 둔 날, 거짓말 같은 일이 생겼다.
한 손님이 외국에 가게 됐다면서 한 달 치 매출에 해당하는 물건을 사간 것이다.
그 한 사람 때문에 그녀의 실적이 꼴찌에서 1등으로 올랐다고 한다.
미리 걱정하지 말자.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
비록 우리 앞에 보이는 건 어둠뿐일지라도
어둠에 익숙해지면 문이 보일 것이다.
<숨은 해답 찾기>중에서
"얼마 전에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봤어.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어, 이게 진짜야?'하는 사이에 다 끝나 버렸지."
자신이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을 것.
완전한 형태를 갖지 못한 소원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기회는 별똥별처럼 나타나 안개처럼 사라지니까.
<별똥별이다>중에서
그는 구두를 벗기고 서랍에서 목이 짧은 털양말을 꺼내어
그것을 여인의 발에 신겨 주었다.
"자, 이만하면 조금은 낫겠지. 괴로울 때도 하찮은 일에서도
위안을 찾아내도록 해야 해요. 옛날부터 내려오는 군인들의 철칙이랍니다."
하찮은 일에서 위안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괴로울 수밖에 없다.
온몸이 행복감에 사로잡히는 순간은
우리 인생에서 몇 분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들>중에서
전 세계에서 몰려든 배낭여행객들이 유럽의 명소로 손꼽히는 광장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너바나의 노래를부르자, 국적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많은 청년들이 다 같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우연히 모이게 되어 캠프파이어를 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노래를 합창하게 될까. 많은 사람들에게 가슴 아린 추억이 있는 노래, 한 시절을 관통하는 젊음의 서러움이 서려 있는 노래, 그런 노래는 무엇일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자연스럽게 볼륨을 키우게 되는 것. 친구가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그 노래를 부르면 저절로 합창을 하게 되는 것. 공연장에서 그 노래가 나오면 수많은 관객들이 다 같이 따라 부르면서 눈물을 글썽이게 되는 것.
"스무 살 무렵, 그땐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것에도 상처받았고 내일마저 불확실했기에 무언가에 열렬히 빠져들 수 있었어. 그리고 그 노래들이 우리의 빈 곳을 채워 주었던 거야."
스무 살 무렵에 만났던 청춘의 송가는 그전에도 그후에도 다시 느낄 수 없는 유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감동은 아픈 자의 특권이다.
<청춘의 송가>중에서
언니는 방금 지은 따듯한 밥을 퍼서 공기에 담았다.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반찬 그릇들이 파리해서
밥과 김치찌개가 더 따근하게 느껴졌다.
"모든 게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게, 비정상 아닐까?
다들 뒤죽박죽으로 살다가, 가끔 청소해서 조금 정리하고,
다시 어지르고, 그러는 거야. 우리도 일주일 만에 청소했잖아."
세상 일이 모두 수학 문제집처럼 문제와 정답이 한꺼번에 주어진다면
우리의 고민은 아예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답안지도 정답도 없는 문제에 맞서
훌륭한 결과를 끌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인지도 모른다.
지나온 자취는 뒤죽박죽이고, 갈 길은 멀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걸어왔다.
<다시 한 번, 걷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