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선현경의 일일일락
황인숙 글, 선현경 그림 / 마음산책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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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기술요법이 신앙치료나 정신의학보다 중요하다. 기술을 습득하게 되면 그 기술 자체가 쓸모없는 것이라고 해도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삶의 의미도 형식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 가령 노숙자에 대한 에릭 호퍼의 처방이다. 기술이란 뭔가를 고치거나 만드는 재주다. 그러니까 삶의 기반이 되는 물질세계에 가장 쓸모 있는 재주다. 설사 별 쓸모없더라도 어떤 기술이 있다는 것은 머리와 손끝이 팽팽하게 소통하고 있다는 건데, 그건 생명감을 자극한다.

내게도 뭔가 기술이 있으면 좋겠다. 재미있고 너무 고되지도 않고 위험하지도 않은 기술, 뭐 없을까? 알량하나마 내가 가진 유일한 기술, 기술記述하는 기술技術이 그렇긴 하지만 다른 진짜 기술 말이다. 바지런히 몸을 움직이면 돈벌이도 되는 양재, 미용, 요리, 제과, 도배, 스포츠 마사지 등등 소프트한 기술. 그런게 그런 기술양성 학원들은 왜 하나같이 곧 사라질 듯한 모습으로 이런저런 상가 건물에 숨어 있는 걸까?

그곳에서 습득한 기술로 영세 자영업자가 된 사람들이 홀연히 모여들어 파트릭 모디아노 소설의 배경같은 상가를 이룬다.

-> 짧은 글에 소중한 내용이 가득하다. 에릭 호퍼의 처방도 그렇고,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도읽어보고 싶다. 무엇보다 재미있으면서 고되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소프트한 기술에 대한 로망은 나도 있었기에 공감이 갔다.

 

1년여 틈틈이 전화통화를 시도하다 지쳐서 더 이상은 전화를 걸지 않게 된 친구가 있다. 그녀와 친하게 어울리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문득 생각나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됐다. 너무 기뻤으나, 그녀는 남편과 모처럼 외식 중이라며 오기를 거절했다. 그전 같았으면 마주 반기며 남편과 함께 나중에라도 합류했을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통화였다. 생각해보니 그때도 내가 다른 사람의 휴대폰을 이용해서 나인 줄 모르고 전화를 받았던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그녀 인생에서 퇴출된 모양이다. 나도 그녀를 좋아했지만 그녀도 내게 과분할 정도의 호감을 가졌었다. 그 호감을 지키지 못한 게 씁쓸하다.

우리가 따르는 한 어른이 명륜동으로 이사를 했을 때였다. 그 집들이 연락책을 맡아 그녀에게도 연락했는데 오기로 하고 오지 않았다. 그 며칠 후 웬일인지 궁금해서 다시 전화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시무룩이 "근데 무슨 일이라구요?" 물었다. 순간 벌컥 화를 내며 전화를 거칠게 끊어 버렸다. 다른 일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큰일이 그녀에게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그녀의 마음이 굳게 닫힌 뒤다.

-> 짧은 이 전문의 제목은 퇴출이다. 인간관계에서는 퇴출당하는 쪽보다 퇴출하는 쪽이 더 가슴아픈 게 아닌가 싶다. 단순히 회피나 불편함 정도로 설명 되지 않는다. 나 또한 실제로 누군가를 내 인생에서 퇴출시켰던 경험이 있기는 있었다. 그 때의 가슴앓이를 생각하면 근거없이 마음이 아파져서 되도록 떠올리지 않으려고 한다. 또 그 경험을 겪고 나서, 누군가가 나에 대해 소극적이라면, 억지로 적극적이 되려고 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나또한 부족한 인간이기에, 상대가 나를 로그아웃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서다.

 

 

체제도 관습도, 부모도 형제도 이웃도, 아무것도 거스르지 않고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며 착실히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이 별일 없이 굴러간다. 그들이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고 집을 고치고 물건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밥을 짓고 아이를 키우며 '별 볼일 없는' 인새을 거부하지 않은 덕분에 혁명가도 반하아도 예술가도 히피도 태어나고 살아갈 수 있다. 삶의 엄연한 쳇바퀴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 그들이라고 나는 말한다. '우리'가 아니고. 그건 내 인생이 별 볼일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내가 세상의 장남 장녀들에게 얹혀사는 족속이라는 걸 알 따름이다. 그 같은 족속인 우리가 등 대고 다리를 뻗던 듬직한 존재가, 어느 날 문득 자기의 인생을 별 볼일 없다 비하하며 뼈저려 하는 걸 보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하다.

->일본 영화 '유레루'를 보고 작가가 느낀 점. 아, 정말 내 가슴을 친다.

 

 

지금은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 제법 체화돼 만사 덤덤한 편이지만 예전에는 나도 기가 죽거나 비탄에 빠지던 순간들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대개 '생애주기'가 걸림돌이었던 것 같다. 학업 적령기에 놀고 있던 것, 내 나이 평균보다 항상 가난했던 것, 꽃다운 청춘시절을 고치 속에서 보내고 훌쩍 장년에 접어든 것 등등.

동갑내기 남자인 한 친구가 장가간다는 말을 들었던 날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삽십 대 초반이었다. 그와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자주 만난 것도 아니고, 그저 보면 반가운 친구였을 뿐인데, 기분이 무지 이상했다. 마치 한밤에 숨바꼭질을 하다가 마지막 술래가 된 듯했다. 다들 집에 들어가 잠이 들었는데 혼자 남아 두리번거리는.

-> 이 느낌을 나도 느꼈었고, 내 주변 친구들도 느끼고 있다. 혼자만 뒤쳐지는 그 느낌을 숨바꼭질하다가 마지막 술래가 된 경우에 비교하다니! 한밤중에 혼자 남았구나, 하는 그 두려움, 절실히 다가온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애주기는 내가 흔히 알고 있는 생애주기와는 사뭇 다른 개념인가보다. 어쩌면 개념은 하나인데 잘못 인용해서 쓰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날 저녁, 루비처럼 예쁜 핏방울 모양의 배지를 아버지께 수줍게 보여드리며 헌헐을 자랑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셨다! 칭찬은 못하실 망정 헌혈했다고 야단을 치다니. 실망했지만, 자식이 자해한 꼴을 본 것 같았을 아버지 심정을 알 듯도 했다.

-> 나이가 들면 자식을 낳지 않아도 부모 심정을 이해하게 되는 걸까? 아니면 특별히 시인이라 상대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감수성이 풍부해서 그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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