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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 150명의 지성에게 물었다
존 브록만 엮음, 최완규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1. 존 브룩만이라는 이 책의 엮은이는, 엣지 재단의 창설자로, 매년 세계 석학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모아 해마다 출판하고 있다. 2010년의 올해의 질문은, "인터넷이 당신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바꾸어놓고 있는가?"였고, 거기에 대한 답을 모아 엮은 책을 번역한 책이 이 책이다.
2. 이 책의 원제는 Is the internet changing the way you think? 이다. 즉, 책의 제목이 상당한 의역을 거쳤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터넷, 당신, 생각이다. 즉, 인터넷이라는 것이 당신 개인에게 있어서 어떻게 생각하는 방법을 바뀌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의역된 제목처럼 '우리는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라고 질문했다면 거시적이며 일반적인 답변이 나왔을 것이다. 엣지 재단에서는 그 대신 질문을 받는 '당신'에 대상을 국한시킴으로써 포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고, 그 결과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3.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 <몰입의 즐거움>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총, 균, 쇠>의 제레드 다이아몬드 등 이 질문에 답한 지성들의 면면은 화려하며, 흥미롭다. 이들의 답변은 길게는 11쪽, 짧게는 단 4줄까지 길이와 내용, 다루는 범위의 넓이와 깊이도 다양하다. 반드시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읽을 필요는 없으며, 목차만 훑어보고 흥미있는 부분만 띄엄띄엄 읽어도 될 것 같다. 물론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읽어가면서 인상 깊은 부분은 다시 반복해서 읽는 편이 이 책의 내용을 머릿속에 박아넣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차피 정답이 없는 문제 아닌가? 세계적 지성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였는데 이렇게나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답변의 효용성, 혹은 미래 사회의 예측에 대한 정확성에 대해 굳이 탐구하듯이 읽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사회에 대한 진단도, 결국 시간이 흐르고 이 시간이 과거가 되어야만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니까.
4.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지만 대중을 상대로 한 책이기에 읽기에 어렵지 않다. 지루해지기 전에 금방 화자가 바뀌기 때문에 집중도가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세계적 지성이 주는 무게감에 비해, 그리고 이 책의 물리적인 두께와 질문의 심오함에 비해, 그다지 책 자체는 임팩트가 없었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았는데 이 책의 핵심 주제, 즉, 인터넷이 어떻게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었나, 라는 명제에 대해서 내가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인터넷이라는 것이 처음 생겨난 때는 몇십 년 전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급속도로 보급된 것이 1990년대 후반일텐데, 그렇다면 이미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인터넷이란 용어가 더 이상 '신기한' 뭔가가 아니었고, 중학교 시절부터는 이미 지금과 비슷한 수준의 인터넷 환경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 자신 그리고 내 또래들에게 있어서 인터넷은 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나라는 사람의 가치관이나 사고 방식, 행동 모습 등을 바꾼 적이 없기 떄문이다. 머리가 굵어지고, 스스로의 판단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사고를 하기 시작하는 사춘기 이전부터 나는 인터넷을 접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사회에 대해서 기억은 할 지언정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5. 만약, 스마트폰이 나를 어떻게 바꾸었나?를 주제로 삼는다면 어떨까? 내가 중학교 시절, 드물게 반에서 한 두 명 정도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고, 고등학교 시절, 상당수의 아이들이 휴대폰을 소유했으며,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스마트폰이 처음으로 출시되었다. 현재 30대인 전세계 사람들에게, 예를 들어 세계 유수 기관의 연구원들, 명문 대학의 박사과정 학생들, 미래가 기대되는 작가들, 촉망받는 음악가들 등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면, 비록 그 깊이나 통찰력은 떨어질지라도 이 책보다는 더 나에게 흥미를 주었을 것이다. 사실, 인터넷이 어떻게 우리 삶을 바꾸었나?와 같은 명제는 나에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유럽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나? 와 다를 게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미래는, 어쩌면 말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오지 않을 시간일 수 있지만, 아마도 나에게는 멀지 않은 시간, 다가오고 있는 현재일 수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석학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에 있어서는 나와는 온도차가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답변이 개인의 경험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주관적이며, 짧다는 것도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깊이있는 사유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이들의 생각이 맞을 지도 의문스럽고, 설령 맞는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짤막짤막하게 진단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결국 어떻게든 큰 변화를 겪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그 변화 앞에서 개개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도 분명한 진실일 텐데.
6. 나에게는 인터넷 이전 시절이 마치 TV 이전 시절, 라디오 이전 시절, 금속활자 이전 시절 처럼 똑같은 과거라면, 양쪽을 전부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어떨까? 그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버티어가면서 기존의 생활 양식을 어떤 방향으로든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의 막막함과 좌절감은, 짐작하기가 힘들다. 우리 아버지같은 경우 스마트폰을 좀 늦게 가지신 편인데, 한번은 젊은 직원들과 식사를 하다가 특정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게 몇년도에 일어난 사건이지~라고 이야기하니까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던 한 직원이 바로 그 자리에서 검색해 보고는 아, 맞네요~ 대단하세요~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작 아버지는 그 상황에 놀랐다고. 아마도 격세지감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정확하게 암기를 한다는 것은 이제 그다지 장점이나 특기가 될 수 없다는 그런 의미의 말을 하셨던 것 같다. 소싯적에 암기, 특히 연도와 숫자에 관한 결벽에 가까울 정도의 정확성을 추구하시던 아버지꼐서는 그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 책에서도 많은 학자들이, 많은 작가들이, 뭔가를 쓸 때마다 컴퓨터를 켜 놓고 사실 확인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나온다. 나에게는 놀랄 것도 없는 이 당연한 사실이, 몇 십 년전부터 도서관과 필기한 노트를 뒤져가며 연구를 해 오던 세계적인 석학들에게는 분명히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만큼 놀라운 사실이리라.
7. 대략적으로 이 책의 대답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번째, 인터넷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두번째,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이 인터넷을 만들어낸 것이다. 즉, 첫번째와는 화살표의 방향이 다를 것이다. 세번째, 대체 이 질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네번째, 잘 모르겠다.
8. 150명의 석학 중 내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70퍼센트 이상이 첫번째의 의견을 보인 것 같다. 여기서도 의견이 또 갈린다. 7과 구분하기 위하여, 1-1. 인터넷을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2. 인터넷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굳이 석학의 의견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 수준에서 알만한 것이 너무 많다. 정보의 접근성, 정치의 민주화, 불평등의 심화, 사생활 침해, 사유 능력의 상실, 비용의 절감, 급속화된 세계화, 판단력의 부재 등등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라면 한번쯤 다 접해보았을 말들이며, 그 중 몇가지는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9. 어찌 보면 대동소이한 이야기들이다. 누가 무슨 주장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어서 각 이야기들 간에 구별은 필요없어지고, 책의 절반쯤 오면 속도가 붙는다. 그 중에서도 물론, 빛나는 몇몇 조각글들이 있다. 과학사학자이자, 기계 속의 다윈Darwin among the machines의 저자인 조지 다이슨George Dyson의 글이 특히 그렇다. 알류트족Aleuts의 카약kayak과 틀링깃족Tlingit의 카누canoe의 비교. 절묘한 비유로 단 한 페이지에 압축적으로 주제가 들어간다. 어느 쪽이 옳은 방향인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했는데, 아마도 저자 스스로 확실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그것도 매력적이다. 다만, 저자의 심정만 정확히 세 문장으로 묘사했다. 분량이 제한되어 있는 밑줄긋기에 본문 전체가 다 들어갈 정도로 짧지만 단단한 글이다.
10. 그 외에도 인터넷은 행태를 바꾼다 _ 시리언 섬너Seirian Sumner의 글이 개인적으로 좋았다. 런던동물원, 동물학연구소 진화생물학 연구 교수인 그는 "change"에 초점을 딱 맞춘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전공이 진화생물학인만큼, 원시 사회의 인간과 지금의 인간의 행태를 비교한 점도 좋았다. 독립 연구가이자 이론가인 주디스 리치 해리스Judith Rich Harris의 단 5줄짜리 글도 좋았고. 그녀가 썼다는 개성의 탄생No Two Alike: Human Nature and Human individuality도 궁금해졌고. 프리폼프로덕션컴퍼니FreeFormProduction Company 설립자인 제시 딜런Jesse Dylan의 글도 흥미로웠다. 영화제작자이면서 의학 사이트 Lybba.org의 설립자인데 전혀 공통점이 없어보이는 두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예를 든 일화도 글쓴이의 이력을 닮았는데, 시신경 척수염의 진단 방법이 발견된 일화를 통해 서로 다른 분야의 상호작용의 긍정적인 결과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양한 분야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너무나 손쉽게 이루어지는 인터넷이 얼마나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지 실감이 들었다.
카약 대 카누-조지 다이슨 북태평양에서는 작은 배를 만들 때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알류트족 등 카약을 선호하는 부족은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땅에 살며 해변에서 주워 모은 나무 조각으로 골조를 세워 배를 만들었다. 틀링깃족 등 나무 속을 파낸 카누를 선호하는 부족은 우림지대에서 나무를 통째로 실어와 카누만 남을 때까지 구석구석 파내 배를 만들었다.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했지만 알류트족과 틀링깃족의 성과는 비슷했다. 최소한의 재료로 최대한의 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인터넷으로 봇물이 터진 정보의 홍수도 비슷한 문화적 분열을 초래했다. 우리는 과거 카약 제조에 익숙했다. 가능한 모든 정보 조각을 주워 모아 물에 뜰 수 있는 골조를 세웠다. 이제는 속을 파내는 카누 제조법을 배워야 한다. 불필요한 정보를 솎아내 그 안에 숨겨진 지식의 속살을 드러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족족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도록 훈련받은 나는 뼛속까지 카약 제조에 익숙하다. 새 기술을 배워야 하는 현실이 정말 싫다. 하지만 배우지 않으면 카누가 아닌 통나무에 올라타 노를 젓는 신세가 되리라.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열려 있는 채팅방이 사라진다고?" "그럼 어떻게 새 친구를 사귀는데?" "외국 나간 친구들이랑 어떻게 연락하는데?" "사람을 진짜로 만나서 직접 물건을 사야 한다는 뜻이잖아!"
낯선 것에 대한 경계와 의심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인간의 습성이다. 자리를 빼앗겨 자원을 도둑맞지 않기 위한 생존 본능이다. 전혀 낯선 사람까지 스스럼없이 보듬어주는 등 무분별한 행동을 부추긴다는 것도 인터넷의 특성이다. 며칠 전, `시리언Seirian`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인 페이스북 그룹에서 초청 메시지를 받았다. 이걸 뿌리칠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 내가 어딜 가서 열일곱 명이나 되는 시리언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겠는가. 마침내 여러 시리언이 참여하는 가상 네트워크에 연결된 노드가 될 기회가 온 것이다. 왜 가입했느냐고? 잃을 게 없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데다가, 현재 소셜 네트워크와 무관한 전혀 다른 사람들의 무리에 끼어보면 어떨까,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더 친근한 인연을 만들수록 잠재적인 보상도 커지기 마련이다.
페이스북 시리언 친구들이 가상 세계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집을 불쑥 찾아와 현관문을 두드렸다면 과연 내가 가입했을까? 역시 어림없는 소리다.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사적이며, 자칫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내가 어디 사는지도 아는데, 전기 코드 뽑듯 간단히 인연을 끊을 수도 없다). 선조들의 행태와는 다르게 우리는 온라인에서 사생활 침해를 용인하며, 인터넷의 성공은 그런 습성 변화에 기대고 있다. 연결성은 사생활 침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그 덕분에 정보 습득과 전송이 크게 향상된다. 페이스북 친구들도 처음에는 연결이 끊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출발했지만, 좀 더 고민해본 다음에는 인터넷이 어마어마한 자원이며 전통적인 정보 저장 및 전송 수단으로서 대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인터넷이 없으면 원하는 걸 어떻게 찾지?" "정보에 아예 접근을 못하게 되잖아." "실제로 쇼핑을 가고 도서관에 가야 한다는 거야?" "너무 느려." "삶이 작아지겠지."
인터넷은 지식 및 연결에 대한 갈망뿐 아니라 우리가 온라인에서 놀라울 정도로 헤프게 베푸는 온정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는 인터넷에서 과도한 애타심을 드러낸다. 생판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조언하거나 다른 사람의 지식을 채워준답시고 익명으로 위키피디아에 기여하며 몇 시간씩 허비한다. 보답이 뒤따를 거라는 보장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은행 관련 정보든 음악적 성향이든) 개인 정보까지 내걸고 친구를 사귀고 낯선 사람을 믿는 것은 자연스럽게 경계심부터 내세우던 선조들의 행태에 배치되는 인터넷 사용자의 기본적인 성향이다. 우리가 페이스북을 통해 기꺼이 내주는 데이터는 전체주의 정권의 비밀경찰이 애를 써서 얻어내려는 천금 같은 정보다. 낯선 사람에 대한 의심(또는 인식)이 느슨해져 (무분별할 정도로) 애타심을 발휘해 우리의 자원을 나누어주고 그 대가로 더 큰 것을 얻곤 한다.
처음에는 나 스스로 인터넷 이전의 경험이 워낙 적어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사뭇 다른 유기체로 초고속 진화를 거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터넷이 꼭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어놓으라는 법은 없지만, 행동을 변화시켜 사고 형성과 방향에 영향을 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프라인에서 우리는 은밀하고, 인색하며, 사생활을 강조하고, 의심이 많으며, 자기중심적일지 모른다. 온라인에서는 박애주의적이고, 온정을 베풀며, 상냥하고, 친근하며, 위험할 정도로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 오프라인 세계라면 온라인 행태는 자연도태되고 말 것이다. 아무도 협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이 대뜸 친구를 맺자는 데 기꺼이 응하거나 온정을 베풀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오프라인 행태는 온라인 세계에서 통하지 않는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양보하지 않으면 자원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우리의 인격마저 바뀌는 이유는 인터넷이 게으른 현실 도피를 위한 관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우스 한 번 움직이면 우리 행동의 결과가 현실이 아닌 듯한 세계에 들어설 수 있다. 온라인 및 오프라인 인격이 얼마나 다른지는 당연히 저마다 정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온라인 삶은 말 그대로 무사태평한 환상의 세계일 것이다. 세컨드 라이프의 환상 속 세계에서 무결점 아바타를 통해 대리 경험을 만끽하며 살지도 모른다. 오프라인 자아가 부대끼는 현실의 무료함과 고달픔에서 도피하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행태 변화는 적응 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궁극적으로 주어진 환경에 최대한 적응해 도태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된다. (말이든 글이든) 의사소통 기술을 사용해 서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꾸도록 남을 설득한다. 우리 선조들 역시 원시적인 구두 의사 소통 방식과 상형문자를 설득의 도구로 삼았다. 인터넷은 인류 의사소통 역사에서 세 번째 위대한 돌파구이며, 그런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려면 유연한 행동이 필수적이다.
결론을 내려보자. 인터넷은 접속할 때마다 내 행동을 바꾸어놓는다. 그런 과정에서 내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다. 과감하고, 장난스러우며, 충동적이고, 상호작용을 즐기는 온라인 인격체는 내가 오프라인 테두리를 벗어나 생각하도록 부추긴다. 나는 인터넷에 맞게 생각한다. 인터넷의 지식을 사용해 내 사고에 영감을 주고 기존 사고를 흔들어놓는다. 이 에세이가 그 생생한 증거다. 페이스북이 내 사고에 불을 지피고, 이 에세이의 밑거름이 되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에세이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딱 좋아`의 기쁨-주디스 리치 해리스 인터넷이 정보를 쏟아내는 본새는 케첩 병이 케첩을 쏟아내는 본새와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너무 적다 싶더니 이젠 너무 많다. 그 중간쯤에 잠시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딱 좋아`의 순간이 있었다. 내게는 10년가량 지속되었다. 내 인생 최고의 시기였다.
메이요클리닉Mayo Clinic에서 시신경 척수염neuromyelitis optica(NMO, 데빅 병Devic`s disease 또는 데빅 증후군Devic`s syndrome이라고도 알려져 있다)이라는 희귀병에 관한 영화를 만들 때였다. 이 병의 진단 방법이 발견된 경위에 관해 들었다. 다발성 경화증multiple sclerosis 전문가가 한 심포지엄에서 연설하는데, 암 연구 학자가 듣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우연 덕분에 진단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보아하니 절대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메이요클리닉을 세운 메이요 형제일 수도 있다)가 심포지엄을 다양한 분야의 연구 학자와 의사가 참석하는 행사로 만들어 그런 교류가 가능한 시스템을 수립한 덕분이다. 그런 사람과 아이디어가 합쳐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기에 진단법이라는 통찰을 얻게 된 것이다. 또 그 덕분에 희귀병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등 긍정적인 결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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