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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평점 :
이 작품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비밀>, <백야행>, <용의자 X의 헌신>등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미스터리 소설의 대가입니다. 저는 <백야행>은 이름만 들어봤고, <비밀>은 히로스에 료코 주연의 영화만 알고 있고, <용의자 X의 헌신>은 읽어봤습니다. (사실 그의 소설 중 읽어 본 것은 이것 밖에는 없네요.^^;;)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용의자 X의 헌신>은 처음부터 범인과, 범인이 아닌 사람을 분명하게 노출시킨 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수많은 용의자 중 알리바이와 동기를 바탕으로 점점 범인을 좁혀나가는 것이 추리 소설의 핵심이라고 볼 때, 이 소설은 추리 소설이기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최소한 그런 노력을 한) 소설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당시 읽으면서 중반을 넘어서고 나서 살짝 지겨워진 부분도 있었지만, 상식을 벗어나는 전개와 작가의 필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2006년 나오키 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아마도 작가에게는 도전이고 모험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자신감 없이는 함부로 시작조차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명탐정의 규칙>은 1996년 출간되어 일본 추리 소설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고 합니다. <용의자...>보다 무려 10년 전에 스스로 몸담고 있는 분야를 낱낱이 까발렸던 거죠. 아마도 이 때 이미 작가는 각오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추리 소설을 아예 쓰지 않던가, 아니면 신선한 소재, 새로운 전개의 추리 소설을 쓰던가... 이 소설은 독자에게 쓰는 일종의 고해 성사이자, 반성문이며, 다시는 이 소설을 쓰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작가 마음속의 배수진이기도 합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제목만 보고도 끌릴 듯합니다. ‘명탐정의 규칙’이라... 정확히 이 책의 ‘추리 소설의 규칙’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명석하지만 치기 어린 명탐정 덴카이치 다이고로, 지방 경찰 본부 수사과에 근무하는 닳고 닳은 경감 오가와라 반조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총 12개의 장이 있는데, 각각의 장은 추리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패턴, 이른바 ‘법칙’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밀실 선언 ― 트릭의 제왕
2. Who done it ― 의외의 범인
3. 폐쇄된 산장의 비밀 ― 무대를 고립시키는 이유
4. 최후의 한마디 ― 다잉(Dying) 메시지
5. 알리바이 선언 ― 시간표의 트릭
6. 여사원 온천 살인 사건 ― 두 시간 드라마의 미학
7. 절단의 이유 ― 토막살인
8. 사라진 범인 ― 트릭의 정체
9. 죽이려면 지금이 기회 ― 동요 살인
10. 내가 그를 죽였다 ― 불공정 미스터리
11. 목 없는 시체 ― 해서는 안 될 말
12. 흉기 이야기 ― 살인의 도구
얼핏 보면 전형적인 추리 소설 같습니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에서 앞의 두 개의 단계까지는 실제로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반전이 등장하며 여태껏 나온 추리 소설의 상투성과 부자연스러움이 얼마나 억지스러운지 두 주인공의 입을 빌려 조목조목 비판해내며, 결말에서는 처음에 제시된 그 ‘법칙’을 뒤집어 때로는 어이없고, 때로는 허탈하고, 때로는 기발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프롤로그: 오와기리 반조는 유능한 경감이지만 덴카이치 시리즈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삽질하는 자신의 캐릭터를 싫어함.
"명탐정 소설에는 터무니없는 논리를 펴는 형사가 반드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빈번히 등장한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다. ……진범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않아도 되고, 사건 해결의 열쇠를 놓쳐도 아무 문제없으며, ……하지만 알고 보면 이렇게 힘든 배역도 없다. 우선 범인을 알아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나는 절대로 범인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진범을 밝혀내는 것은 주인공인 덴카이치 탐정의 역할이므로, 그가 멋지게 피날레를 장식하기 전에 내가 사건을 해결해 버리면 주인공은 무의미한 존재가 되고 만다. 무엇보다, 탐정 소설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사건 해결의 핵심이 되는 열쇠를 번번이 놓쳐야 한다. 용의자를 적당히 의심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운 좋게, 혹은 우연이라도 ‘제대로 된’ 의심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1. 밀실선언 - 트릭의 제왕: 트릭의 제왕인 만큼 그만 좀 하라는 식의 불만 토로.
폐쇄된 방에서 일어나는 정통파 살인사건에서 무인도를 무대로 한 사건, 우주공간에서의 사건 (아직 그런 사건을 접한 일은 없지만) 등 다양한 패턴이 있을 수 있다.이들은 모두 "밀실"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그런 종류의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명탐정은 '밀실선언'을 하고 우리 조연들은 놀라는 시늉을 한다.실은 전혀 놀랍지 않은데도 말이다.똑같은 마술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보는 기분이다.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마술의 속임수를 공개하는 방식 정도랄까.하지만 공개방식이 아무리 달라도 감동은 받지 않는다.미녀를 공중에 띄우는 마술은 비록 속이는 데 사용된 기술이 다를지라도 거듭되면 관중이 지루해한다.그런데도 밀실은 반성도 없이 나오고 또 나온다. 도대체 왜 그럴까.독자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다."여러분, 정말로 밀실 살인 사건이 재미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밀실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눈이었던 것입니다. 눈의 무게로 집이 휘어지고 그 결과 현관문이 열리지 않게 됐습니다. 범인은 그 점을 계산해 뒀던 것입니다.그리고 마치 막대기가 문에 걸려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막대기를 문 안쪽에 놓아두었습니다. 이것이, 이것이 이번 밀실사건의 진상입니다."나는 과소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 이번에도 자네에게 깨끗이 졌어."나는 순경 할아버지를 팔꿈치로 건드렸다.당신도 말을 좀 하라는 신호였다."저..쉽게 말해 집이 뒤틀려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말이지요?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해서는 안 될, 금기의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요?"
2. Who done it - 의외의 범인: 어처구니없는 범인을 내세우다 보면 독자에게 몰매예약.
3. 폐쇄된 산장의 비밀 - 무대를 고립시키는 이유: 장소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민망함을 벗어날 수 없음.
“아무래도 이번 사건은 그 패턴이 될 것 같네요.”
“그럴 거야. 이 작가는 그 패턴을 꽤나 좋아하지. 하지만 말이야……”
나는 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지 않나?”
“그건 문제없을 겁니다. 모두가 이곳에 묵는 건 아닐 테니까요. 아마 대부분 돌아가고 일고여덟 명 정도 남겠지요.”
“그렇다면 괜찮지만.”
“틀림없어요. 이 작가의 능력을 감안할 때 등장인물이 그 이상 되면 인물 설정을 제대로 못해 내거든요.”
“맞아, 맞아.”
미스터리 세계에서 외딴섬이나 폐쇄된 산장에서의 살인 사건은 그리 드문 패턴이 아니다. 그것은 이런 패턴을 환영하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입장에서는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좀 더 연구하고 더 고민해서 쓰면 안 될까?“
산장은 언제나 폭설로 고립되고, 외딴섬의 별장도 폭풍우로 늘 고립된다. 이런 식이라면 독자들도 곧 질려버릴 것이 뻔하다. 등장인물 역시 진절머리 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대를 고립시키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고립시키면 용의자를 소수로 한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내 독백을 옆에서 들었는지 덴카이치가 끼어들었다.
“외부인의 범행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성립 불가능한 범죄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선명히 어필할 수 있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고립이라는 패턴은 작가 편의에 의해 자주 채택되는 거지요.”
"이번 소설은 집 자체에 조작이 있었다는 패턴이었군..하지만....""뭡니까!"덴카이치가 따지듯 물었다."아니 그게..."이렇게 살인 한 건 하려고 거금을 처발라 가며 케이블카로 움직이는 저택을 만드는 것보다는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하는 편이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지만은 그건 이런 본격 추리 소설에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4. 최후의 한 마디 - 다잉(Dying) 메시지: 죽는 순간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죽다니 어이없음.
“경감님, 이번에는 그거 같네요.”
“그래. 그거야. 흔히 말하는 ‘다잉(Dying) 메시지’라고.”
“골치 아프지요. 그 패턴은.”
“그렇지 뭐.”
나도 얼굴을 찌푸린 채 동의했다.
“작가 입장에서는 아주 쉽게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고, 서스펜스를 높여주는 효과도 있으니 편리하겠지.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스토리 전개가 부자연스러워져.”
“당연히 부자연스럽죠. 도대체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메시지 따위를 남길 여유가 있겠어요?”
“자, 자, 우린 그저 참고 또 참으며 인내로 대처하는 수밖에 없어. 현실 세계에서도 죽기 직전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리려는 피해자가 한두 명 정도는 있을 수 있잖아.”
“그런 것까지는 봐줄 수 있어요. 하지만 왜 죽기 직전에 남기는 메시지가 암호여야 하지요? 범인의 이름을 정확히 써 놓으면 안 되나요?”
덴카이치가 쓴 것은 왕척직심이란 네 글자였다."오타쿠씨는 여기서 왕척까지 썼을때 공격을 받았습니다.즉 휴, 왕이라고 쓴것이 아니라, 왕의 왼쪽 옆에 카나카나의 이를 택이라고 쓴 것이 아니라 척의 왼쪽 옆에 카타카나의 시를 써 버린 것입니다.""그렇다면 오타쿠씨가 남긴 메시지는...""색지에 적힌 글자와 깔개의 글자를 연결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죽음을 눈앞에 둔 겐이치로의 마지막 메시지였던 것입니다."'의사불러'
5. 알리바이 선언 - 시간표 트릭: 밝힐 수 없는 알리바이 법칙은 애써서 밝힐 필요 없음.
6. 여사원 온천 살인 사건 - 두 시간 드라마의 미학: 주부의 시선을 잡기위해 주인공의 성별이 바꿔 버림.
"아니 모르세요? 두 시간짜리 드라마는 대개 주인공이 여자예요. 시청자 대부분이 주부여서 여자가 주인공이 아니면 시청률이 오르질 않아요."
"사실 경감님은 이번엔 그저 그런 조연이 아니에요. 주인공인 여자 대탐정, 즉 이 덴카이치 아리사와 연인관계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설정이에요. 그래서 tv를 보는 주부들은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지 흥미진진해한답니다."
"드라마가 절반 정도 지났어요. 아홉시부터 시작하는 드라마니까 열 시쯤이면 채널을 돌릴 시간이에요. 제 목욕장면으로 시청자들을 잡아야 해요!"시청자 대부분이 여자라면서 이런 야한 장면을 내보내다니...정말로 tv업계는 의혹투성이다. "왜, 아 도대체 왜, 왜 이런 곳에 잠수함이 있는 거야."바다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처음에는 자동차에 치여 는 설정이었어요. 하지만 자동차는 안 된다며 내용을 바꿔버렸지요."이 두 시간짜리 드라마의 스폰서가 자동차업체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나는 바다를 향해 합장했다.
7. 절단의 이유 - 토막살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결말.
8. 사라진 범인 - 트릭의 정체: 눈 가리고 야웅~ 누구게.?!
그런 덴카이치를 보며 나는 본격 추리소설의 탐정도 참 고생이 많다는 걸 절감했다.이런 경우에서조차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만약 기베 야아치로가 나에게 "변장한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느냐!"고 물었다면 나는 한마디로 끝내 줬을 것이다."어떻게 알았냐고? 그거야 변장한 당신 모습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지,ㅡ 이 바보야!"밥맛 떨어지게 여장을 한 중년 남자에게 너무도 진지하게 논리적인 설명을 계속하는덴카이치를 바라보면서 나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9. 죽이려면 지금이 기회 - 동요 살인: 쉽게 누군가를 죽일 수 없음. 의미 따윈 필요 없다.
괴로운 사람은 역시 덴카이치일 것이다. 명탐정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있지만, 피해자가 여덟 명이 될 때까지 사건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아직 사건을 해결해서는 안 될 시점에 있다. 도중에 범인을 잡았다가는 작가가 가사를 10절까지 준비한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동요 살인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연쇄 살인을 다룬 본격 추리 소설에서도 곧잘 있는 일이다. 너무 빨리 해결해 버리면 스토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10. 내가 그를 죽였다 - 불공정 미스터리: 어떤 이도 범인이 될 수 있음을 명심 할 것.
“마침내 해 버리고 말았어. ‘내’가 범인이라는 흔하디흔한 패턴. 아무나 만들 수 있는 의외성. 멋도 없고 기교도 없는.”
11. 목 없는 시체 - 해서는 안 될 말: 작위적 설정의 최고봉 !!
12. 흉기 이야기 - 살인의 도구: 하나의 시체. 세 개의 살인도구
에필로그: 탐정 시리즈의 정석. 몇 명의 탐정이 지인의 모임에 초대되고 한 명씩 탐정들이 죽는다. 과연 그는 남을 것인가?
명탐정의 최후 - 마지막 선택
앞서 소개된 목차에 새롭게 설명을 달아봤습니다. 감이 잡히시는지...? 기존의 추리 소설에 대한 통렬한 야유, 상투적 사건해결 패턴의 비틀기, 잔인하다 싶을 만큼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에게 마지막까지 칼을 꽂는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명탐정의 최후’를 읽고 나면 작가의 이미지는 숨을 끊어 놓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칼을 휘두르는 백정이나 망나니의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맨 뒤 작가 해설에서 이 작품이 작가 자신에게 전환점이 되었듯이, 다른 추리 소설 작가들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사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습니다. 장르 자체의 대중화, 범죄-해결사-범인 등 도식화될 수밖에 없는 추리 소설에서 ‘그나마’ ‘달라지기 위해’ 몸부림칠 많은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어찌되었든 많은 독자들은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니까요. 특히 이 책을 선택할 정도라면 나름대로 꽤나 추리 소설을 읽어봤다고 자부하는 독자들일 텐데 우리 입장에서도 추리 소설을 ‘진지하게’ 접근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대목에서만큼은 깔깔거릴 수 있어도 아래 부분만큼은 독자도 씁쓸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힌트만으로는 결코 진실을 밝힐 수 없는 것이 이번 소설의 구조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처럼 논리적으로 범인을 찾아내려는 독자란 없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대부분 직감과 경험으로 범인을 간파해 낸다. 때로는 “나, 소설을 중간쯤 읽다가 범인이 누군지 알아 버렸어.”라고 말하는 독자가 있다. 하지만 추리를 통해서 알아낸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녀석이야!’라고 적당히 꿰맞췄는데 결과적으로 들어맞은 경우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