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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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비밀>, <백야행>, <용의자 X의 헌신>등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미스터리 소설의 대가입니다. 저는 <백야행>은 이름만 들어봤고, <비밀>은 히로스에 료코 주연의 영화만 알고 있고, <용의자 X의 헌신>은 읽어봤습니다. (사실 그의 소설 중 읽어 본 것은 이것 밖에는 없네요.^^;;)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용의자 X의 헌신>은 처음부터 범인과, 범인이 아닌 사람을 분명하게 노출시킨 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수많은 용의자 중 알리바이와 동기를 바탕으로 점점 범인을 좁혀나가는 것이 추리 소설의 핵심이라고 볼 때, 이 소설은 추리 소설이기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최소한 그런 노력을 한) 소설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당시 읽으면서 중반을 넘어서고 나서 살짝 지겨워진 부분도 있었지만, 상식을 벗어나는 전개와 작가의 필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2006년 나오키 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아마도 작가에게는 도전이고 모험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자신감 없이는 함부로 시작조차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명탐정의 규칙>은 1996년 출간되어 일본 추리 소설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고 합니다. <용의자...>보다 무려 10년 전에 스스로 몸담고 있는 분야를 낱낱이 까발렸던 거죠. 아마도 이 때 이미 작가는 각오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추리 소설을 아예 쓰지 않던가, 아니면 신선한 소재, 새로운 전개의 추리 소설을 쓰던가... 이 소설은 독자에게 쓰는 일종의 고해 성사이자, 반성문이며, 다시는 이 소설을 쓰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작가 마음속의 배수진이기도 합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제목만 보고도 끌릴 듯합니다. ‘명탐정의 규칙’이라... 정확히 이 책의 ‘추리 소설의 규칙’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명석하지만 치기 어린 명탐정 덴카이치 다이고로, 지방 경찰 본부 수사과에 근무하는 닳고 닳은 경감 오가와라 반조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총 12개의 장이 있는데, 각각의 장은 추리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패턴, 이른바 ‘법칙’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밀실 선언 ― 트릭의 제왕

2. Who done it ― 의외의 범인

3. 폐쇄된 산장의 비밀 ― 무대를 고립시키는 이유

4. 최후의 한마디 ― 다잉(Dying) 메시지

5. 알리바이 선언 ― 시간표의 트릭

6. 여사원 온천 살인 사건 ― 두 시간 드라마의 미학

7. 절단의 이유 ― 토막살인

8. 사라진 범인 ― 트릭의 정체

9. 죽이려면 지금이 기회 ― 동요 살인

10. 내가 그를 죽였다 ― 불공정 미스터리

11. 목 없는 시체 ― 해서는 안 될 말

12. 흉기 이야기 ― 살인의 도구

 

얼핏 보면 전형적인 추리 소설 같습니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에서 앞의 두 개의 단계까지는 실제로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반전이 등장하며 여태껏 나온 추리 소설의 상투성과 부자연스러움이 얼마나 억지스러운지 두 주인공의 입을 빌려 조목조목 비판해내며, 결말에서는 처음에 제시된 그 ‘법칙’을 뒤집어 때로는 어이없고, 때로는 허탈하고, 때로는 기발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프롤로그: 오와기리 반조는 유능한 경감이지만 덴카이치 시리즈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삽질하는 자신의 캐릭터를 싫어함.

"명탐정 소설에는 터무니없는 논리를 펴는 형사가 반드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빈번히 등장한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다. ……진범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않아도 되고, 사건 해결의 열쇠를 놓쳐도 아무 문제없으며, ……하지만 알고 보면 이렇게 힘든 배역도 없다. 우선 범인을 알아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나는 절대로 범인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진범을 밝혀내는 것은 주인공인 덴카이치 탐정의 역할이므로, 그가 멋지게 피날레를 장식하기 전에 내가 사건을 해결해 버리면 주인공은 무의미한 존재가 되고 만다. 무엇보다, 탐정 소설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사건 해결의 핵심이 되는 열쇠를 번번이 놓쳐야 한다. 용의자를 적당히 의심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운 좋게, 혹은 우연이라도 ‘제대로 된’ 의심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1. 밀실선언 - 트릭의 제왕: 트릭의 제왕인 만큼 그만 좀 하라는 식의 불만 토로.

폐쇄된 방에서 일어나는 정통파 살인사건에서 무인도를 무대로 한 사건, 우주공간에서의 사건 (아직 그런 사건을 접한 일은 없지만) 등 다양한 패턴이 있을 수 있다.이들은 모두 "밀실"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그런 종류의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명탐정은 '밀실선언'을 하고 우리 조연들은 놀라는 시늉을 한다.실은 전혀 놀랍지 않은데도 말이다.똑같은 마술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보는 기분이다.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마술의 속임수를 공개하는 방식 정도랄까.하지만 공개방식이 아무리 달라도 감동은 받지 않는다.미녀를 공중에 띄우는 마술은 비록 속이는 데 사용된 기술이 다를지라도 거듭되면 관중이 지루해한다.그런데도 밀실은 반성도 없이 나오고 또 나온다. 도대체 왜 그럴까.독자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다."여러분, 정말로 밀실 살인 사건이 재미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밀실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눈이었던 것입니다. 눈의 무게로 집이 휘어지고 그 결과 현관문이 열리지 않게 됐습니다. 범인은 그 점을 계산해 뒀던 것입니다.그리고 마치 막대기가 문에 걸려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막대기를 문 안쪽에 놓아두었습니다. 이것이, 이것이 이번 밀실사건의 진상입니다."나는 과소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 이번에도 자네에게 깨끗이 졌어."나는 순경 할아버지를 팔꿈치로 건드렸다.당신도 말을 좀 하라는 신호였다."저..쉽게 말해 집이 뒤틀려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말이지요?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해서는 안 될, 금기의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요?"

 

2. Who done it - 의외의 범인: 어처구니없는 범인을 내세우다 보면 독자에게 몰매예약.

 

3. 폐쇄된 산장의 비밀 - 무대를 고립시키는 이유: 장소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민망함을 벗어날 수 없음.

“아무래도 이번 사건은 그 패턴이 될 것 같네요.”

“그럴 거야. 이 작가는 그 패턴을 꽤나 좋아하지. 하지만 말이야……”

나는 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지 않나?”

“그건 문제없을 겁니다. 모두가 이곳에 묵는 건 아닐 테니까요. 아마 대부분 돌아가고 일고여덟 명 정도 남겠지요.”

“그렇다면 괜찮지만.”

“틀림없어요. 이 작가의 능력을 감안할 때 등장인물이 그 이상 되면 인물 설정을 제대로 못해 내거든요.”

“맞아, 맞아.”

 

미스터리 세계에서 외딴섬이나 폐쇄된 산장에서의 살인 사건은 그리 드문 패턴이 아니다. 그것은 이런 패턴을 환영하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입장에서는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좀 더 연구하고 더 고민해서 쓰면 안 될까?“

산장은 언제나 폭설로 고립되고, 외딴섬의 별장도 폭풍우로 늘 고립된다. 이런 식이라면 독자들도 곧 질려버릴 것이 뻔하다. 등장인물 역시 진절머리 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대를 고립시키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고립시키면 용의자를 소수로 한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내 독백을 옆에서 들었는지 덴카이치가 끼어들었다.

“외부인의 범행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성립 불가능한 범죄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선명히 어필할 수 있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고립이라는 패턴은 작가 편의에 의해 자주 채택되는 거지요.”

 

"이번 소설은 집 자체에 조작이 있었다는 패턴이었군..하지만....""뭡니까!"덴카이치가 따지듯 물었다."아니 그게..."이렇게 살인 한 건 하려고 거금을 처발라 가며 케이블카로 움직이는 저택을 만드는 것보다는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하는 편이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지만은 그건 이런 본격 추리 소설에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4. 최후의 한 마디 - 다잉(Dying) 메시지: 죽는 순간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죽다니 어이없음.

“경감님, 이번에는 그거 같네요.”

“그래. 그거야. 흔히 말하는 ‘다잉(Dying) 메시지’라고.”

“골치 아프지요. 그 패턴은.”

“그렇지 뭐.”

나도 얼굴을 찌푸린 채 동의했다.

“작가 입장에서는 아주 쉽게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고, 서스펜스를 높여주는 효과도 있으니 편리하겠지.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스토리 전개가 부자연스러워져.”

“당연히 부자연스럽죠. 도대체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메시지 따위를 남길 여유가 있겠어요?”

“자, 자, 우린 그저 참고 또 참으며 인내로 대처하는 수밖에 없어. 현실 세계에서도 죽기 직전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리려는 피해자가 한두 명 정도는 있을 수 있잖아.”

“그런 것까지는 봐줄 수 있어요. 하지만 왜 죽기 직전에 남기는 메시지가 암호여야 하지요? 범인의 이름을 정확히 써 놓으면 안 되나요?”

 

덴카이치가 쓴 것은 왕척직심이란 네 글자였다."오타쿠씨는 여기서 왕척까지 썼을때 공격을 받았습니다.즉 휴, 왕이라고 쓴것이 아니라, 왕의 왼쪽 옆에 카나카나의 이를 택이라고 쓴 것이 아니라 척의 왼쪽 옆에 카타카나의 시를 써 버린 것입니다.""그렇다면 오타쿠씨가 남긴 메시지는...""색지에 적힌 글자와 깔개의 글자를 연결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죽음을 눈앞에 둔 겐이치로의 마지막 메시지였던 것입니다."'의사불러'

 

5. 알리바이 선언 - 시간표 트릭: 밝힐 수 없는 알리바이 법칙은 애써서 밝힐 필요 없음.

 

6. 여사원 온천 살인 사건 - 두 시간 드라마의 미학: 주부의 시선을 잡기위해 주인공의 성별이 바꿔 버림.

"아니 모르세요? 두 시간짜리 드라마는 대개 주인공이 여자예요. 시청자 대부분이 주부여서 여자가 주인공이 아니면 시청률이 오르질 않아요."

"사실 경감님은 이번엔 그저 그런 조연이 아니에요. 주인공인 여자 대탐정, 즉 이 덴카이치 아리사와 연인관계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설정이에요. 그래서 tv를 보는 주부들은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지 흥미진진해한답니다."

"드라마가 절반 정도 지났어요. 아홉시부터 시작하는 드라마니까 열 시쯤이면 채널을 돌릴 시간이에요. 제 목욕장면으로 시청자들을 잡아야 해요!"시청자 대부분이 여자라면서 이런 야한 장면을 내보내다니...정말로 tv업계는 의혹투성이다. "왜, 아 도대체 왜, 왜 이런 곳에 잠수함이 있는 거야."바다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처음에는 자동차에 치여 는 설정이었어요. 하지만 자동차는 안 된다며 내용을 바꿔버렸지요."이 두 시간짜리 드라마의 스폰서가 자동차업체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나는 바다를 향해 합장했다.

 

7. 절단의 이유 - 토막살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결말.

 

8. 사라진 범인 - 트릭의 정체: 눈 가리고 야웅~ 누구게.?!

그런 덴카이치를 보며 나는 본격 추리소설의 탐정도 참 고생이 많다는 걸 절감했다.이런 경우에서조차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만약 기베 야아치로가 나에게 "변장한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느냐!"고 물었다면 나는 한마디로 끝내 줬을 것이다."어떻게 알았냐고? 그거야 변장한 당신 모습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지,ㅡ 이 바보야!"밥맛 떨어지게 여장을 한 중년 남자에게 너무도 진지하게 논리적인 설명을 계속하는덴카이치를 바라보면서 나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9. 죽이려면 지금이 기회 - 동요 살인: 쉽게 누군가를 죽일 수 없음. 의미 따윈 필요 없다.

괴로운 사람은 역시 덴카이치일 것이다. 명탐정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있지만, 피해자가 여덟 명이 될 때까지 사건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아직 사건을 해결해서는 안 될 시점에 있다. 도중에 범인을 잡았다가는 작가가 가사를 10절까지 준비한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동요 살인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연쇄 살인을 다룬 본격 추리 소설에서도 곧잘 있는 일이다. 너무 빨리 해결해 버리면 스토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10. 내가 그를 죽였다 - 불공정 미스터리: 어떤 이도 범인이 될 수 있음을 명심 할 것.

“마침내 해 버리고 말았어. ‘내’가 범인이라는 흔하디흔한 패턴. 아무나 만들 수 있는 의외성. 멋도 없고 기교도 없는.”

 

11. 목 없는 시체 - 해서는 안 될 말: 작위적 설정의 최고봉 !!

 

12. 흉기 이야기 - 살인의 도구: 하나의 시체. 세 개의 살인도구

 

에필로그: 탐정 시리즈의 정석. 몇 명의 탐정이 지인의 모임에 초대되고 한 명씩 탐정들이 죽는다. 과연 그는 남을 것인가?

 

명탐정의 최후 - 마지막 선택

 

앞서 소개된 목차에 새롭게 설명을 달아봤습니다. 감이 잡히시는지...? 기존의 추리 소설에 대한 통렬한 야유, 상투적 사건해결 패턴의 비틀기, 잔인하다 싶을 만큼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에게 마지막까지 칼을 꽂는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명탐정의 최후’를 읽고 나면 작가의 이미지는 숨을 끊어 놓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칼을 휘두르는 백정이나 망나니의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맨 뒤 작가 해설에서 이 작품이 작가 자신에게 전환점이 되었듯이, 다른 추리 소설 작가들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사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습니다. 장르 자체의 대중화, 범죄-해결사-범인 등 도식화될 수밖에 없는 추리 소설에서 ‘그나마’ ‘달라지기 위해’ 몸부림칠 많은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어찌되었든 많은 독자들은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니까요. 특히 이 책을 선택할 정도라면 나름대로 꽤나 추리 소설을 읽어봤다고 자부하는 독자들일 텐데 우리 입장에서도 추리 소설을 ‘진지하게’ 접근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대목에서만큼은 깔깔거릴 수 있어도 아래 부분만큼은 독자도 씁쓸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힌트만으로는 결코 진실을 밝힐 수 없는 것이 이번 소설의 구조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처럼 논리적으로 범인을 찾아내려는 독자란 없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대부분 직감과 경험으로 범인을 간파해 낸다. 때로는 “나, 소설을 중간쯤 읽다가 범인이 누군지 알아 버렸어.”라고 말하는 독자가 있다. 하지만 추리를 통해서 알아낸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녀석이야!’라고 적당히 꿰맞췄는데 결과적으로 들어맞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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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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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 읽은 것인지. 

아니면 기대를 많이 한 탓인지. 

사람들의 취향이 다양한 것인지. 

 

'퀴르발 남작의 성'을 보고 감탄한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집었지만 

다 읽고 난 후 지금은... 글쎄 잘 모르겠다. 

 

전작이 '이야기의 전달'이라는 틀 안에서 최대한의 비틀기를 시도했다면 

이번 작품은 틀 자체를 해체하거나, 최소한 틀을 흔들고 변형하여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하나의 이야기이고, 다음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를 흐릿하게 한다. 

 

내가 촌스러운 탓인지, 작품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 최대한 '논리적'으로,  

사건의 전후를 잡아보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서평대로, 이 책은 스포일러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작가는 볶고, 굽고, 찌고, 끓여서 

같은 재료를 썼지만 맛은 전혀 다른 네 개의 중편을 만들어냈다.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결국 작가도 이 책을 독자들이 느끼기를 원하지 분석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다만 나는 작가의 전작이 훨씬 더 좋았고, 

이 작품은 내 타입은 아니지만 분명 놀라운 책이며, 

작가의 다음 행보는 매우 궁금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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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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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고슴도치'라는 별명을 붙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고슴도치도 살 동무가 있다"  

"고슴도치한테 혼난 범이 밤송이 보고도 놀란다" 

고슴도치와 관련된 속담은 대략 이 정도. 

그런데 우리 중 실제로 고슴도치를 본 이는 몇이나 될까? 난 본 적 없다. 

그래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나 소, 닭처럼 관련된 속담도 많이 없나 보다. 

범도 고슴도치에게 혼날 정도이니 함부로 주변인이 못 건드릴 정도의 까칠함, 

고슴도치도~, 즉 고슴도치 마저도~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왠지 변변한 친구도 없을 것 같고, 생김새도 비호감인 사람. 이정도? 

그러고보면 헌제는 엄밀히 말해 고슴도치는 아니지 않나? 세상이 보기에 '혹이 딸린 이혼남'이어도 너무나 괜찮은 여자들이 다가오고, 결국 결실도 맺는다. 절대 비호감은 아니란 소리다. 헌제 주변의 사람들은 그를 너무나 만만하게 대한다. 그리고, 헌제의 딸 유진은 깜찍하게 예쁘다. 즉, 헌제는 고슴도치가 아니라 고슴도치이고 싶은 사람, 혹은 고슴도치이기를 가장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디 내 옆에 오기만 와보라고, 가시로 찔러줄 거라고. 그러나 헌제는 그 누구에게도 상처입히지 못하고 오히려 본인이 상처입는 쪽을 택한다. 아니 반대인가? 아내도 연화도 그로 인해 상처받았을 테니까. 피해자인것처럼 굴지만 결과적으로 남에게 더 큰 상처를 입혀서? 그래서 연화를 보내고 그렇게 힘들어했던 자기가 알고 보니 자기 연민에 허우적대던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연화의 결혼 상대에 대해 듣고 힘들었던 건가? 

읽다 보면 헌제의 소심함과 피해 의식에 답답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매사는 아니어도 특정 순간에 한번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또 어디 있으며 나 또한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되자 짠해지기도 한다.  

헌제에게 명신이 다가온 것처럼,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책 읽는 내내 했지만, 마지막 까지 다 읽고 나자 조금 바뀌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명신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지나치게 사람의 의도를 내 나름대로 헤아리거나 지레 의심하지 말고, 조금 손해보더라도 조금 상처받더라도 털털하게 털어버릴 수 있었으면. 정말 좋으면 쓸데없는 자존심 세우지 말고 당당하게 다가갈 수 있었으면. 그러면서도 상대를 배려할 수 있었으면. 누구와도 편안하게 부담주지 않고 대화할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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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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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자주 가는 북카페에서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완득이' 덕분이었다. 

'완득이'는 이 출판사의 청소년문학대상 1회 수상작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2회 수상작이다. 

그 이후로 또 3회, 4회, 계속해서 나왔는지, 지금도 나오고 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모르겠으나 내가 접했던 '완득이'는 '다문화 가정' '장애인' '편부모' 등 우리 사회의 '아픈' 부분들을 성장하는 완득이를 통해 유머러스하면서도 뭉클하게 그려내어 대체 이 작가는 누구이며 또 어떻게 등단했는지 책표지를 한 번 더 들쳐보게 했던 작품이다. 

'완득이'가 정말 좋았던 것은, 장애를 가진 아버지, 지능이 떨어지는 삼촌, 동남아에서 온 어머니 등 정말 '비뚤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환경의 완득이가, 전교 1등하는 같은 반 여자아이나 부모님 잘 계시는 일반 가정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나이 또래 특유의 무심함이나 당돌함을 보인 완득이가 10대의 발랄함을 어느 정도 유지하며 커가는 모습이 대견했고 또 역설적으로 보통 아이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더 눈물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다를' 뿐이지 '틀린'게 아니므로 완득이에게 유별난 관심을 보여줄 필요도 없으며 동정할 필요는 더더욱 없음을, 그저 일반적인 10대로 때로는 야단칠 때도 있고, 때로는 격려해주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점에서 '완득이'와는 좀 많이 다르다.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작가의 배경(?)에 의문을 갖게 만들었던 '완득이'와는 달리, 소설 제목에서부터 판타지 요소를 가지고 들어간다. (위저드라니...) 전체적인 톤도 많이 무거운 편이다. 악몽, 저주, 부두인형, 자살, 강간 등 읽다보면 숨이 막히는 구절도 종종 있다. 술술 읽혔던 '완득이'와는 달리 좀 힘겨웠다. 누가 봐도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완득이의 가정이 어떻게든 마지막에서는 봉합되며 나름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반면, 남들 보기에 꽤 괜찮아 보이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위저드 베이커리로 기어들 수 밖에 없는 소년은 끝내 위저드 점장 이상의 어른을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찾지 못한다는 점도 큰 차이였다. 

이 두 차이는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완득이'가 쉽게 읽히고, 쉽게 공감이 가는 반면, '위저드'는 술술 읽기는 힘겹고, 소년의 고통은 너무나 막막해 선뜻 공감이 가지 않는다. 대신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힘겨웠을 두 소년의 아픔 중 더 절절하게 느껴지는 쪽은 '위저드'다. 비록 그 고통이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생각은 들지만 말이다. 

나의 선택에 책임을 질 것. 선택에 따른 두 결말을 보여주며 소설을 끝을 맺는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게는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몸으로 터득했기에 신선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결말을 보여주기 위해 굳이 판타지 요소를 썼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작가가 청소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과정에서 판타지라는 손쉬운 길을 택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한참 아프게 성장하고 있는 10대에게, 운이 나쁘게도 가정이나 학교 그 어디서도 마음 붙일 곳이 없는, 기댈 어른도 없는 청소년들에게 이 책은 분명히 위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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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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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죽었다. 그리고 한 여자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여자는 말한다. 자기는 영웅이 아니라고. 한 아이에 대한 애정이 있었을 뿐이라고.

아무도 자기만큼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서 직접 나섰을 뿐이라고.

왜 이 여자는 이렇게까지 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든 의문이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스밀라는. 차가워보이는 그녀가 사실은 누구보다 따스한 사람이라서?

남의 일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갖는 것일까? 자기 아버지에게도 ‘노력해서’ 무관심해지려는 사람이?

 

나는 학교 성적이 썩 좋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아마도 이 아이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나는 덜 피곤할 것이고 학교 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며 성적도 더 잘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용돈이 생기니까? 뭐 그것도 이유 중에 하나다. 어차피 과외를 하지 않고 공부에 집중해도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잘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 그것도 맞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굳이 학생을 가르쳐야 할 만큼 경제적인 압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일을 엄청 즐기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 학생을 많이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왜?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이유를 알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이유, 그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는 할까, 내가 내 자신을 챙기기에도 너무나 버겁고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집중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로 느껴질 때, 내 자신의 삶의 무게에 치여서 압사되는 느낌이라 소소한 재미에 차마 눈을 돌리지도 못할 만큼 지쳐있을 때, 과연 내가 쓸모가 있기는 한 지, 지금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혹시나 세상에 왔다 간 게 의미가 있기나 할런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시시하고 재미없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가 주변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끊임없이 자책감이 들 때, 내가 내 인생을 이렇게 재미없고 지루하게 방치해도 되는지 회의가 들 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아가 열정으로 충만한 삶을 끌어오고 싶은데 그게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희미해진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때, 아니 지금이라도 하면 되는데 감히 엄두가 나지 않을 때, 그 때 유일하게 나에게 ‘현재의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이 있다면?

 

앞으로, 미래의, 가 아니라 현재의 나, 지금 내 자신만으로도 충분히 남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일상의 나머지 부분을 견뎌낼 수 있고 힘낼 수 있다는 것, 늘 남에게는 있으나마나한 치이는 존재, 아니 늘 성가시게 굴어서 귀찮은 짐이 되는 존재에 불과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하고 기댈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것.

 

나도 스밀라도, 그래서 그것의 존재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놓치는 순간 내 자신이 무너져버리는 경험을 목격할 수 있으니까. 눈물이 났다.

 

이 두툼한, 꽉 찬, 숨막히는, 대단한, 엄청난 소설에서 수많은 생각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부딪혀고 명멸했다. 그 생각들 중 내가 활자로 옮길 수 있는 것은 위에 언급한 것이다. 나머지 것들은?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야지. 나는 이 책을 사기로 했다. 두고두고 읽으면서 알아내려고. 느끼려고. 내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고. 그러니까 나의 독후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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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생각으로는 아이들의 마음은 열려 있고, 진정한 내적 자아는 밖으로 저절로 스며나온다고 한다. 그런 말은 죄다 틀렸다. 아이보다 더 비밀스러운 사람은 없으며, 아이보다 더 절실하게 비밀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도 없다. 그것은 항상 아이들을 깡통따개로 따서 안에 뭐가 들어 있나 보면서 그 안을 더 쓸모 있는 잼으로 바꿔줘야 하는 게 아닌가 궁금해하는 세상에 대한 대응이었다.(74p)

 

나는 전화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보고 말하고 싶다.(78p)

 

어떤 과학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의 존재만 확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고트호프 길이 아침 5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84p)

 

인생의 어떤 것도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통로가 될 수는 없다. 마치 남겨놓고 가는 유일한 것인 양 매 걸음을 떼어야 한다.(145p)

 

나는 바닥에 대고 다리를 흔들었다. 이제 공포가 찾아들었다. 이것은 내가 37년 동안 피하려고 노력해왔던 것이다. 나는 구조적으로 세상에서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을 연습해왔다. 단념하는 법을. 어떤 것에 대한 희망도 버렸다. 자기 비하의 경험이 올림픽 경기종목이 된다면, 나는 국가대표도 될 수 있다.(250p)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실제로 살아보는 것. 그 문화 속으로 이사하여, 손님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해서 언어를 배운다. 어떤 순간이 되면 이해가 찾아온다. 이해는 언제나 비언어적이다. 무엇이 낯선 것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설명하려는 충동을 잃어버린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그 현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내가 카나크에 대해서 나 자신에게든지 다른 사람에게든지 얘기하기 시작하면 결코 한번도 진정으로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을 다시 한번 잃어버리게 된다. 지금처럼, 수리공의 소파에 앉아 내가 왜 이누이트들과 연관성을 느끼는지 설명하고 싶을 때가 그렇다. 그건 이누이트들이 한 점 의심의 그림자 없이 삶이 의미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자신들의 의식속에서 화해할 수 없는 모순들 사이에서, 절망에 빠지지 않고 간단한 해결책을 찾지도 않으면서 긴장감을 지닌 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이 열락에 이르기까지 짧고도, 짧은 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이 동족 인간을 만났을 때, 판단하지 않고 편견으로 명확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임을.(259p)

 

최악의 것은 분노가 아니다. 최악의 것은 분노 뒤에 있는 욕망이다. 순수한 감정으로 사는 것은 가능하다. 진정으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에게 매달리고 싶은 나의 비밀스러운 갈망이다.(5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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