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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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아마도 에브리맨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단 한 문장을 꼽으라면 바로 이 문장일 것이다.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는 마치 작은 돌멩이가 연못에 던지는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돌멩이가 그리는 동심원이 커지는 느낌이다. 나는 정말 아마추어일 뿐인가, 적어도 내가 성공하고 싶은 분야에서 나는 영영 아마추어일 것인가, 평생 아마추어로 살 것인가.

 

 

랜디와 로니는 그의 가장 깊은 죄책감의 근원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자신의 행동을 그들에게 해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청년이었을 때는 여러 번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때는 둘다 너무 젊고 분노가 강해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 나이가 들고 분노가 강해 이해 못했다. 사실 이해할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외려 그가 이해할 수 없었다-그들이 지금까지도 집요하고 또 진지하게 격분하면서 그를 탄핵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그의 일을 그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엇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변함없이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자세는 그럼 용서받을 만한 것인가? 아니면 그 결과가 덜 해로운가? 그는 이혼을 하여 가족을 깬 미국 남자 수백만 명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고 그가 그들의 어머니를 떄렸는가? 그들을 때렸는가? 그들의 어머니를 부양하지 못했는가, 아니면 그들을 부양하지 못했는가? 그들 가운데 누구라도 나한테 한 번이라도 돈을 구걸해야 했던 적이 있는가? 내가 한 번이라도 모질었던 적이 있는가?  할 수 있는 제안이라면 다 하지 않았던가? 무엇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가 할 수 없었던 일, 즉 그들의 어머니와 결혼한 채로 계속 사는 것 외에 달리 무슨 일을 했으면 그들이 나를 받아들여주었을까? 그들이 그것을 이해해주느냐 아니면 이해해주지 않느냐, 둘 중의 하나였다-그러나 그에게는(그리고 그들에게도) 슬픈 일이었지만, 그들은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또 그들이 잃은 그 가족을 그도 잃었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그 자신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틀림없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것 또한 똑같이 슬픈 일이었다. 그에게도 슬픔이 있었고, 가책이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방어하려고 푸가처럼 이어지는 질문들을 던지고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그런 슬픔과 가책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소리나는 책에서 읽힌 부분이다. 삶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한 회한이 담긴 부분이라는 DJ의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 또한 이 구절을 읽었으나, 내가 느낀 감정은 좀 달랐기 때문이다. 아이를 둘까지 낳고도 자신의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다시 재혼하였으나 두 번째 결혼마저 깨고 스물 여섯 살이나 어린, 20대의 젊은 외국 모델과 바람을 피워 세 번째 결혼을 감행한 아버지에게 경멸 이외의 다른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평생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는 생각이 들고, 단 한번도 이성이 감성을 누른 적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구절이야말로 자기 합리화, 내지는 죽은 날을 앞둔, 외롭고 쓸쓸한 지점이 바닥까지 내려가서야 그제서야 아들들에게 위로받고 싶어하는 이기심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직 내가 어린 탓일까. 가정 폭력도 하지 않았고, 이혼한 전처와 두 아들에 대한 부양 의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이 사람은 충분히 위로받아야 마땅한가. 살면서 나 자신을 영위하기도 힘든 세상, 아직 어려서 능력이 없는 누군가가 세상을 살기에 경제적으로 부족함없이 지원해주었다는 사실로도 그 사람은 동정받아야 할까. 나이를 먹으면 좀 더 잘 이해하게 될까.

 

그래, 그는 세 번 이혼했다. 한때 헌신보다는 비행과 실수로 더 유명했던 연쇄 남편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계속 혼자 감당해 나가야 할 터였다. 이제부터는 모든 걸 혼자 처리해야 했다. 자신이 고지식하다고 생각했던 이십대에도, 그리고 오십대에 들어설 떄까지도 그는 그가 괜찮게 생각하는 여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미술학교에 들어갈 떄부터 그런 관심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의 운명인 듯했다. 그러다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예측하지 못했고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 한 세기의 사분의 삼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는데, 이제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생활방식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생산적인 남성의 매력도 소유하지 못했고, 남성적인 기쁨이 싹트게 할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너무 강렬하게 갈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전에는 혼자 있을 때면 잠시, 사라진 구성요소들이 기적처럼 돌아와 그를 다시 거역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주고 그의 지배를 재확인해줄 것이라고, 실수로 그에게서 잘려나간 권리가 회복되어 불과 몇 년 전에 중단되었던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수많은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점점 줄어드는 과정에 있었으며, 종말이 올 때까지 남아 있는 목적 없는 나날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야야 할 것 같았다. 목적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그는 생각햇다. 이거야 미리 알 도리가 없는 거지.

낸시의 어머니와 함께 만을 헤엄치던 남자는 자신이 가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꾼 적이 없는 곳에 이르렀다. 이제 망각을 걱정해야 할 때였다. 지금이 그 먼 미래였다.

 

소리나는 책에서 읽어 준 두번째 부분이다. 책 결말에 가까운 부분이며, 이 사람의 인생을 요약해 놓은 부분이다. 주인공은 끝까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에브리맨은 주인공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 가게 이름이지만, 여기에서는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모든 사람을 이야기한다. 읽으면서 마음이 싸하게 아파오기는 하지만, 아직 이 소설을 완벽하게 이해하기에는 내 나이가 젊은 것 같다. 아마도 주인공은 작가의 분신일 텐데, 이런 느낌 또한 지금 여든을 넘긴 작가가 꽤 오래 전부터 느껴왔을 것이고, 지금도 완벽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문장을 쓰면서 작가는 어떤 심정으로 썼을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썼을까? 아니면 담담하게?

 

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노년이란 참 쓸쓸한 것 같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닥쳐 올 일들이지만, 어차피 후회를 할 것이라면, 최대한 그 후회는 줄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도록 사는 것이 좋지 않겠나. 내가 꼽은 이 책의 문장은 바로 이 것이다.

 

'네 손이 아직 따뜻할 때 주는 게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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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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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무도한 사건을 접했을 때 그 가해자를 욕하는 것은 쉽다. 반면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을 던지는 행위는 그 당시에는 불편할 수도 있지만, 타인과 사회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된다.

 

정유정 작가가 인터뷰 중 한 말이다.

어린 아이를 차에 치고, 목을 졸라 살해한 후 물 속으로 그 시신을 던져버린 사내.

여기에 그 어떤 동정심이 개입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여기에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을 던지고, 그날의 사건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소설을 읽어나가는 행위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타인과 사회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소설은 아직도 불편하다. 비록 한 순간의 실수였다고는 하더라도, 또 더 악독하고 잔인한 사람이 바로 옆에서 대비되기는 하더라도, 나는 왠지 이런 저런 이유를 대어서 무면허에 음주 운전을 상습적으로 한 평소의 습관으로 결국 사고를 내고야 만 사람에 대해 이렇게까지 동정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한 주제가 있다면, 차라리 음주 운전과 무면허 운전은 설정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은 예전부터 내려온 말이지만, 실제로 그 말을 가슴 한 구석에 올려놓기에는 아직 내 나이가 어린 탓인지, 인생을 덜 살아본 탓인지, 사람을 덜 겪어본 탓인지, 용납하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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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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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소설을 알게 된 계기는 동명의 영화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박범신이라는 유명한 작가의 원작, 신인 여배우의 파격적인 노출, 그리고 영화 자체에 대한 수많은 논쟁, 그 해 모든 영화제의 신인여우상을 휩쓸어버리며 다시 한번 영화와 소설이 동시에 화제에 오르게 된 그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책을 보지 않거나 영화를 보지 않아도 '은교? 그게 뭐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찾아보니 영화의 관객수는 130만명이라고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소설의 판매 부수는 그보다는 적을 것이다. 아마도 69세의 시인이 17살 소녀를 사랑한다는 설정 자체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영화의 예고편, 그리고 평론가들의 리뷰, 영화를 보고 온 지인, 그리고 소설과 영화에 대한 수많은 기사들을 읽으면서 '은교'가 단순히 늙은 시인의 철없는 본능을 논하는 게 아니라, 젊음과 늙음, 시와 인생, 사랑과 죽음에 대해 복합적인 통찰을 담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가 싫었다. 왜, 왜, 인생과 사랑과 시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꼭 나이 어린 소녀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해야 할까, 왜 작가는 꼭 그렇게 설정을 했던 것일까, 하고 생각하자 불쾌해졌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기로 결심하기에는, 그 불쾌한 감정을 떨치려는 어느 정도의 노력이 좀 필요했다. 다 읽고 난 후에는, 놓치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책을 읽으면서 늙은 시인에 대해 든 솔직한 생각은, 역겨움이었다. 그러나 책장을 다 덮고 난 후에는 노인에 대한 연민과 함께,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랑의 한 모습을 보았다는 생각이었다. 그 연민이라는 것이, 아무리 늙어도 사람은 현명해질 수 없으며,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욕정에 지고 마는구나, 하는 생각 끝에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진실로 사랑을 하고, 그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었다. 참, 박범신은 놀라운 작가이며, 이 소설 또한 놀라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에게 있어 연애는 영혼으로부터 감각으로 옮겨가는지 모르지만,

 

남자에게 연애는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옮겨간다,

 

라고 그 순간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관념적으로 연애를 상상할 때와 너무도 다른 결론이었다. 나는 은교를 만나기 전까지, 참된 연애란 남녀불문하고 영혼으로 시작된다고 믿었다. 감각은 하나의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은교를 통해 내가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실체 없는 관념이었는지 명백히 알게 되었다.

60년 넘게 산 노시인의 사랑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에 대한 부분이다. 이런 문장도 있다.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확신했다. 아, 이 노인의 사랑은 진짜로구나.

 

연애를 하면서 동시에 지혜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잠언은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은교에게 서지우의 입술이 포개지던 일도 지워져 없었고, 유난히 더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배웅하던 서지우도 지워져 없었으며, 카페 안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와 은교를 어떻게 볼는지에 대한 염려도 지워져 없었다. 세계엔 나와 은교뿐이었다. 나는 구체적인 욕망을 느꼈다. 내가 지금 하려는 모든 것이 범죄라 해도 내게 공범자가 곁에 함께한다면 무슨 상관인가.

 

 

두 사람만의 상점에서 서로 만나서

두 사람만의 술을 우리들은 마신다

너는 조금 나는 많이

늘 마시는 술을 마시면서

낮에 있었던 이야기며 일의 이야기

 

남의 소문이며 내일의 스케줄을

그리고 갑자기 어둠 속에서의 입맞춤

 

-이와다 히로시, 「미혼未婚」에서

 

 

한때 좋아했던 일본 시인의 시를 나는 암송했다. 내 머리칼들이 곤두서 별에 닿았다. 나는 나의 머리칼로 우주와 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학생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교문에서 좀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비상들을 켜두었다. 은교는 틀림없이 다른 때처럼 뛰어나올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려고 뛰어본 적이 있는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자를 향해 뛰고 있는 사람은 다 아름답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하나의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그리운 그를 향해 뛰는 것이다.

 

이 부분은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아련하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69세의 나이를 뛰어넘어 이 부분만은 그 어떤 나이가 주는 현명함, 세월이 주는 웅장함이 아니라, 평생 동안 시라는 거대한 세계를 만든 사람이 아닌, 그냥 처음 사랑을 시작한 사람의 수줍음, 그리움, 설렘 만이 가득했다. 바로 뒤이어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 때문인지 대비되어 더 슬프면서 애가 탔다. 충격적인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의 진실, 분노와 슬픔의 시간이 흐른 후 시인의 사랑은 또 이렇게 말한다.

 

늙어서 힘이 없었다고 오해하지 말라. 나는 회복되었으며, 충분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애는 그 어느 때보다 치명적이라고 느낄 만큼 관능적이었고, 아무런 방비도 없었다. 욕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욕망은 한껏 당겨져 있었다. 그런데도 내 몸은 고요했다. 그것은 고요한 욕망이었다. 한없이 빼앗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 것을 해체해 오로지 주고 싶은 욕망이었다. 아니 욕망이 아니라 사랑, 이라고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비로소, 욕망이 사랑을 언제나 이기는 건 아니라는 확고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비로소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인이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그 이후에 서지우와 은교, 세 사람간의 오해가 부른 파국이 더 비극적이고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은교가 말했듯이, 실제로 사랑한 것은 이적요와 서지우였다고. 둘의 관계는 마치 부자간의 관계 같다. 심리학적 용어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자꾸 떠올랐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이적요 시인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혈육보다도 피 한 방울 안 섞인 서지우를 더 사랑한 것 같다. 아버지이자 스승을 영원히 뛰어넘지 못하는 아들의 좌절과, 아버지의 여자인 어머니를 영원히 가지지 못하는 비극. 엄마가 사준 은교의 거울에 대한 에피소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문학적 감수성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문학을 희구하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참 딱하고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재능이 없는 자의 끝없는 실패와 슬픔을 생각하면 또 냉정하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답답하기도 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이어지지만, 이쯤에서 마쳐야지. 어쨌든 이 이야기는 '은교'를 사랑한 시인의 이야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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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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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니, 아는 것 자체는 그렇게 늦지는 않았는데 직접 들어보기까지가 오래 걸린 것 같다. 한 달에 두번 업데이트 되다가 일주일에 한 번 업데이트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데 1년이 총 52주이고 지금까지 100회를 넘겼으니 대략 2년쯤 되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2012년 5월 1일이 첫방송이었다고 한다. 만으로 2년을 넘겼구나, 아니 곧 3년이 되겠구나, 헤아려보니 대단하다. 단순히 길게 끌었다는 게 아니라, 이 방송은 언급된 수많은 책들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렸고, 심지어 절판이 된 책을 재출간시키는 힘을 보여줬다고. 내가 이 방송을 듣게 된 것은 얼마 전 읽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때문. 지인의 추천으로 이 책을 읽고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다가 부랴부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떨까, 이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서 검색창에 쳐봤는데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 관련 검색어에 뜨더라. 알고 보니 이 책을 심도 있게 다룬 방송이 있었고, 순전히 책 때문에 한 회 방송을 듣다가 반해 결국 1편부터 정주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바로 그 첫 회에서 다룬 책이 천명관의 고래. 무려 2000년대 이후 최고의 한국 장편 소설로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과 나란히 꼽힌 이 책은, 그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왠지 선뜻 읽게 되지는 않았던 책을 읽게 만들었다.

 

이 책의 줄거리는 참 요약하기 힘들다. 삼대에 걸친 이야기들, 고래로 상징되는 판타지, 그러나 한국 전쟁과 유신 시대 등 이 땅의 역사를 의미하는 수많은 장치들로 인해서 분명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실화처럼 느껴지는 힘. 누군가는 그를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그가 여태까지 우리가 생각하던 소설이라는 것의 영역을 뛰어넘었다고 한다. 솔직히 읽으면서 이런 소설을 접한 적이 별로 없기에 당혹스러웠고 낯설었으며, 그로 인해 약간의 저항감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마치 마르지 않는 샘처럼 퍼도 퍼도 계속 솟아오르는 느낌이고, 그 넘치는 물에 온 몸을 다 흥건히 적시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일단 읽기 시작하면 등장 인물들이 어떻게 될 지, 결말은 어떻게 끝날지 집중하고 몰입하게 만든다. 한 줄로 요약하기가 참 힘든 책이자,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단을 뽑아내기도 힘들다. 다만, 내가 찾은 이 책의 한 부분은 이것이다.

 

춘희는 자신의 인생을 둘러싼 비극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녀의 육체는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천형의 유니폼처럼 단지 고통의 뿌리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 거대한 육체 안에 갇힌 그녀의 영혼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여줬던 불평등과 무관심, 적대감과 혐오를 그녀는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었을까? 혹, 이런 점들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독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이야기꾼이 될 충분한 자질이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란 바로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만이 세상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한 줄 또는 두 줄로 세상을 정의하고자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명제가 그런 것이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춘희는 평등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이야기란 바로 부조리한 인생의 탐구, 그것은 절대 간단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 중 풍부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소설가가 될 것이고 작가 또한 그런 사람이겠지, 라고 생각을 잇다 보면 그가 생각하는 소설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노파는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옆에서 춘희가 먹는 양을 지켜보다 어느샌가 함지를 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것이 일찍이 남의 집 부엌살이로 떠돌다 딸에게 연인을 빼앗기고 버러지처럼 땅바닥을 기어다니며 지독하게 돈을 모았지만 끝내 한푼도 못 써보고 결국 그 돈 떄문에 목숨까지 잃어 한 많은 생을 마감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불에 타 죽게 함으로써 스스로 복수를 완성한 노파의 마지막 모습니었다.

 

한 노파의 세상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 거대한 이야기가 발단 전개 절정 위기를 맞게 되고, 결말에 거의 이르러서 등장한 노파의 모습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서술로 노파의 복수도, 이 소설도 종점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춘희의 이야기도 결말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벽돌을 굽는 일에 그토록 필사적으로 매달렸을까? 그녀는 그 단조로운 작업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무슨 생각을 한 걸까? 그 작업 안에 어떤 좋교적 희원이 담겨 있어싸면 그 바람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감동적이리만치 순정하고 치열했던 그 열정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그녀를 단순하고 정태적인 진술 안에 가둬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그 옛날 남발안의 계곳을 스쳐가던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

 

종점에 다다라서, 그래서 대체 이 작가는 뭘 말하고 싶은 거였을까, 흔히 말하는 소설의 주제, 가 있다면 이 소설의 주제는 그래서 뭐란 말인가? 하고 되묻고 싶어질 무렵, 등장한 이 구절. 손안에 쥐기도 어렵고 금방 사라지고야 마는 것에 대해 구구절절 캐묻고 연구하는 게 아니라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함으로써 더 큰 감동에 가 닿을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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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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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애가 신용카드 삼매경에 빠진 까닭은, 그렇게 하면 착각에 빠져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돈도 없지, 학력도 없지, 딱히 이렇다 하게 내세울 능력도 없어요. 얼굴 하나로 먹고살 만큼 예쁜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삼류 이하 회사에서 묵묵히 사무나 봐야 하죠. 그런 인간이 마음속으로 텔레비전이나 소설이나 잡지에서 보고 듣는 풍요로운 생활을 그려보는 거예요. 옛날에는 그나마 꿈을 꾸는 선에서 끝났어요. 그게 아니면 어떻게든 그 꿈을 실현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죠. 그래서 실제로 출세한 사람도 있을 테고, 나쁜 길로 빠져 쇠고랑을 찬 사람도 있었겠죠. 그래도 옛날에는 얘기가 간단했어요. 방법이야 어떻든 자기 힘으로 그 꿈을 이루거나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 안 그래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꿈을 이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포기하긴 억울하다. 그러니 꿈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라도 느껴보자. 그런 기분에 젖어보자. 안 그래요? 지금은 방법이 많으니까요. 쇼코의 경우는 어쩌다 그게 쇼핑이나 여행처럼 돈을 쓰는 방향으로 나갔을 뿐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분별없이 쉽게 돈을 빌려주는 신용카드나 신용대출이 나타난 것뿐이죠."

 

"친구 중에 성형 중독인 애가 있어요.벌써 열 번 가까이 얼굴에 손을 댔을 거예요. 철가면 같은 완벽한 미인이 되면 인생은 100퍼센트 장밋빛, 행복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거죠. 그렇지만 아무리 성형을 해도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원하는 '행복'이 찾아오지 않아요. 고학력 고수입에 발군의 외모를 갖춘 남자가 나타나서 자기를 공주처럼 떠받들어줄 리 없죠. 그러니 몇 번이고 성형을 할 수밖에요. 이래도 안 돼? 이래도? 하면서. 같은 이유로 다이어트에 미쳐 있는 여자도 많아요."

 

"남자들 중에도 그런 부류가 있어요. 오히려 여자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죠. 죽어라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 애쓰는 것도 그런 거 아닌가요? 다 착각이에요. 다이어트에 미친 여자를 비웃을 순 없어요. 다들 착각에 빠져 사니까."

 

"옛날에는 자기 착각대로 살아볼 만한 군자금이 아무한테나 없었잖아요? 그런 군자금을 투입할 대상도,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요인도 적었고요. 예를 들자면 미용도, 성형도, 강력한 입시학원도, 명품들을 늘어놓은 카탈로그 잡지도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별것 아니에요. 꿈을 꾸리고 마음먹으면 간단하죠. 하지만 그러려면 군자금이 필요하고, 돈이 있는 사람이야 자기 돈을 쓸 테죠. 그러니까 자기 돈 없이 '빚'이라는 형태로 군자금을 만드는 사람은 쇼코처럼 되는 거예요. 그애한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넌 설령 자전거조업으로 돈을 빌리더라도 맘껏 쇼핑하고, 사치하고, 비싼 물건에 둘러싸이면 네가 꿈꾸던 고급스러운 인생을 실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행복했던 거지?라고."

 

소름이 끼친다.

 

등장 인물의 이름을 영희, 철수와 같은 한국 이름으로 바꾸고,

도쿄와 오사카를 서울과 부산으로 바꾸고,

화과자를 사오라는 말을 경주빵을 사오라는 말로 바꾸고...

 

이런 식으로 단어 몇 개만 바꾸면 그냥 우리나라 이야기이다.

 

전혀 이질감이 없는, 충분히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더 소름이 끼친다.

 

남의 나라 일이라고 팔짱을 낄 수가 없기에, 만약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 일어난다면? 하고 상상할 필요도 없기에. 왜? 이미 이런 일들이 우리나라에도 일어나고 있을 테니까.

 

추리 소설의 방식을 띄고 있지만, 결국엔 사회에 대한 고발과 엄청난 일을 저지른 주인공에게 차마 돌을 던질 수 없게 만드는 이 서술. 단연 최고다.

 

 

소설을 여러 편 읽다 보면, 왜 이 사람이 여기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왜 '이렇게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소설 속 인물에 대한 심리적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인물의 심리에 정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소설 속 인물의 행동은 무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신조 교코에게는 주위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풀이 죽어 있으면 위로해주고 어려운 일에 빠져 있으면 힘을 빌려주고 싶어지는, 가련하고도 애처로운 매력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구리사카 가즈야와 구라타 고지는 비슷한 점이 많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학교에서는 우등생이었고, 부모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사회적인 체면을 번듯하게 지켜냈다. 외모도 괜찮고 능력도 평균 이상이다. 그러나 그렇게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청년들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부모에 대한 반항심을 숨기고 있을 게 틀림없다. 비행 청소년처럼 폭력을 통해 표출하는 저돌적인 형태는 아닐 테지만, 강한 부모, 훌륭한 부모, 자기에게 행복한 어린 시절을 제공하고 이상적인 인생의 궤도를 깔아줄 만한 힘이 있는 부모에 대한 반항심. 그것을 누그러뜨리고, 정면으로 대결해봐야 평생 이길 수 없을 부모를 대신해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존재가 바로 교코라는 여자였을 것이다.

가즈야도 구라타도 제아무리 발버둥쳐본들 부모를 겨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지만, 성인이 된 그들은 부모가 마련해준 코스를 걸어가면서도 자기만 의지하고 자기의 능력을 확인시켜주는, 감싸고 보호해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교코는 그런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

그녀는 머리가 좋은 여자다. 그런 심리를 꿰뚫어보고 남자에게 기댔을지도 모른다. 좋은 표현은 아니겠지만, 속임수로 용병을 흥분시킬 수 있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 직접 전장에 나갈 필요는 없다. 남을 대신 싸우게 하고, 돌아왔을 때 충분히 노고를 치하해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가즈야나 구라타가 근본적으로 약삭빠른 남자였다면 교코의 입장이 그다지 바람직하게 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숨겨진 여자'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본처가 따로 있는 가운데 교코는 아까운 청춘만 소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청년은 진정 순수한 '도련님'이었다. 나이도 젊었다. 그래서 지극히 정상적인 방식으로 교코를 필요로 한 것이다.

하긴 그렇게 조종한 것 역시 교코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무 살 안팎의 나이였지만, 그 당시 교코는 이미 온실에서 자란 구라타 같은 사람은 백 년이 지나도 알 수 없는 강인함을 갸냘픈 팔 안쪽에 감추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참 이런 소설이 좋다. 개인의 심리에 정통하고, 등장하는 인물의 행동이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나오며,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하는 행위들이 서로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것은 거대한 사회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마지막 마무리도 압권이었고, 독자들에게 생각을 던져주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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