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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내가 이 소설을 알게 된 계기는 동명의 영화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박범신이라는 유명한 작가의 원작, 신인 여배우의 파격적인 노출, 그리고 영화 자체에 대한 수많은 논쟁, 그 해 모든 영화제의 신인여우상을 휩쓸어버리며 다시 한번 영화와 소설이 동시에 화제에 오르게 된 그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책을 보지 않거나 영화를 보지 않아도 '은교? 그게 뭐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찾아보니 영화의 관객수는 130만명이라고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소설의 판매 부수는 그보다는 적을 것이다. 아마도 69세의 시인이 17살 소녀를 사랑한다는 설정 자체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영화의 예고편, 그리고 평론가들의 리뷰, 영화를 보고 온 지인, 그리고 소설과 영화에 대한 수많은 기사들을 읽으면서 '은교'가 단순히 늙은 시인의 철없는 본능을 논하는 게 아니라, 젊음과 늙음, 시와 인생, 사랑과 죽음에 대해 복합적인 통찰을 담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가 싫었다. 왜, 왜, 인생과 사랑과 시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꼭 나이 어린 소녀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해야 할까, 왜 작가는 꼭 그렇게 설정을 했던 것일까, 하고 생각하자 불쾌해졌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기로 결심하기에는, 그 불쾌한 감정을 떨치려는 어느 정도의 노력이 좀 필요했다. 다 읽고 난 후에는, 놓치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책을 읽으면서 늙은 시인에 대해 든 솔직한 생각은, 역겨움이었다. 그러나 책장을 다 덮고 난 후에는 노인에 대한 연민과 함께,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랑의 한 모습을 보았다는 생각이었다. 그 연민이라는 것이, 아무리 늙어도 사람은 현명해질 수 없으며,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욕정에 지고 마는구나, 하는 생각 끝에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진실로 사랑을 하고, 그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었다. 참, 박범신은 놀라운 작가이며, 이 소설 또한 놀라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에게 있어 연애는 영혼으로부터 감각으로 옮겨가는지 모르지만,
남자에게 연애는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옮겨간다,
라고 그 순간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관념적으로 연애를 상상할 때와 너무도 다른 결론이었다. 나는 은교를 만나기 전까지, 참된 연애란 남녀불문하고 영혼으로 시작된다고 믿었다. 감각은 하나의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은교를 통해 내가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실체 없는 관념이었는지 명백히 알게 되었다.
60년 넘게 산 노시인의 사랑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에 대한 부분이다. 이런 문장도 있다.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확신했다. 아, 이 노인의 사랑은 진짜로구나.
연애를 하면서 동시에 지혜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잠언은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은교에게 서지우의 입술이 포개지던 일도 지워져 없었고, 유난히 더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배웅하던 서지우도 지워져 없었으며, 카페 안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와 은교를 어떻게 볼는지에 대한 염려도 지워져 없었다. 세계엔 나와 은교뿐이었다. 나는 구체적인 욕망을 느꼈다. 내가 지금 하려는 모든 것이 범죄라 해도 내게 공범자가 곁에 함께한다면 무슨 상관인가.
두 사람만의 상점에서 서로 만나서
두 사람만의 술을 우리들은 마신다
너는 조금 나는 많이
늘 마시는 술을 마시면서
낮에 있었던 이야기며 일의 이야기
남의 소문이며 내일의 스케줄을
그리고 갑자기 어둠 속에서의 입맞춤
-이와다 히로시, 「미혼未婚」에서
한때 좋아했던 일본 시인의 시를 나는 암송했다. 내 머리칼들이 곤두서 별에 닿았다. 나는 나의 머리칼로 우주와 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학생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교문에서 좀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비상들을 켜두었다. 은교는 틀림없이 다른 때처럼 뛰어나올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려고 뛰어본 적이 있는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자를 향해 뛰고 있는 사람은 다 아름답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하나의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그리운 그를 향해 뛰는 것이다.
이 부분은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아련하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69세의 나이를 뛰어넘어 이 부분만은 그 어떤 나이가 주는 현명함, 세월이 주는 웅장함이 아니라, 평생 동안 시라는 거대한 세계를 만든 사람이 아닌, 그냥 처음 사랑을 시작한 사람의 수줍음, 그리움, 설렘 만이 가득했다. 바로 뒤이어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 때문인지 대비되어 더 슬프면서 애가 탔다. 충격적인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의 진실, 분노와 슬픔의 시간이 흐른 후 시인의 사랑은 또 이렇게 말한다.
늙어서 힘이 없었다고 오해하지 말라. 나는 회복되었으며, 충분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애는 그 어느 때보다 치명적이라고 느낄 만큼 관능적이었고, 아무런 방비도 없었다. 욕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욕망은 한껏 당겨져 있었다. 그런데도 내 몸은 고요했다. 그것은 고요한 욕망이었다. 한없이 빼앗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 것을 해체해 오로지 주고 싶은 욕망이었다. 아니 욕망이 아니라 사랑, 이라고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비로소, 욕망이 사랑을 언제나 이기는 건 아니라는 확고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비로소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인이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그 이후에 서지우와 은교, 세 사람간의 오해가 부른 파국이 더 비극적이고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은교가 말했듯이, 실제로 사랑한 것은 이적요와 서지우였다고. 둘의 관계는 마치 부자간의 관계 같다. 심리학적 용어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자꾸 떠올랐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이적요 시인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혈육보다도 피 한 방울 안 섞인 서지우를 더 사랑한 것 같다. 아버지이자 스승을 영원히 뛰어넘지 못하는 아들의 좌절과, 아버지의 여자인 어머니를 영원히 가지지 못하는 비극. 엄마가 사준 은교의 거울에 대한 에피소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문학적 감수성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문학을 희구하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참 딱하고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재능이 없는 자의 끝없는 실패와 슬픔을 생각하면 또 냉정하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답답하기도 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이어지지만, 이쯤에서 마쳐야지. 어쨌든 이 이야기는 '은교'를 사랑한 시인의 이야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