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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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아마도 에브리맨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단 한 문장을 꼽으라면 바로 이 문장일 것이다.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는 마치 작은 돌멩이가 연못에 던지는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돌멩이가 그리는 동심원이 커지는 느낌이다. 나는 정말 아마추어일 뿐인가, 적어도 내가 성공하고 싶은 분야에서 나는 영영 아마추어일 것인가, 평생 아마추어로 살 것인가.

 

 

랜디와 로니는 그의 가장 깊은 죄책감의 근원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자신의 행동을 그들에게 해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청년이었을 때는 여러 번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때는 둘다 너무 젊고 분노가 강해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 나이가 들고 분노가 강해 이해 못했다. 사실 이해할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외려 그가 이해할 수 없었다-그들이 지금까지도 집요하고 또 진지하게 격분하면서 그를 탄핵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그의 일을 그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엇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변함없이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자세는 그럼 용서받을 만한 것인가? 아니면 그 결과가 덜 해로운가? 그는 이혼을 하여 가족을 깬 미국 남자 수백만 명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고 그가 그들의 어머니를 떄렸는가? 그들을 때렸는가? 그들의 어머니를 부양하지 못했는가, 아니면 그들을 부양하지 못했는가? 그들 가운데 누구라도 나한테 한 번이라도 돈을 구걸해야 했던 적이 있는가? 내가 한 번이라도 모질었던 적이 있는가?  할 수 있는 제안이라면 다 하지 않았던가? 무엇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가 할 수 없었던 일, 즉 그들의 어머니와 결혼한 채로 계속 사는 것 외에 달리 무슨 일을 했으면 그들이 나를 받아들여주었을까? 그들이 그것을 이해해주느냐 아니면 이해해주지 않느냐, 둘 중의 하나였다-그러나 그에게는(그리고 그들에게도) 슬픈 일이었지만, 그들은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또 그들이 잃은 그 가족을 그도 잃었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그 자신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틀림없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것 또한 똑같이 슬픈 일이었다. 그에게도 슬픔이 있었고, 가책이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방어하려고 푸가처럼 이어지는 질문들을 던지고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그런 슬픔과 가책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소리나는 책에서 읽힌 부분이다. 삶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한 회한이 담긴 부분이라는 DJ의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 또한 이 구절을 읽었으나, 내가 느낀 감정은 좀 달랐기 때문이다. 아이를 둘까지 낳고도 자신의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다시 재혼하였으나 두 번째 결혼마저 깨고 스물 여섯 살이나 어린, 20대의 젊은 외국 모델과 바람을 피워 세 번째 결혼을 감행한 아버지에게 경멸 이외의 다른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평생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는 생각이 들고, 단 한번도 이성이 감성을 누른 적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구절이야말로 자기 합리화, 내지는 죽은 날을 앞둔, 외롭고 쓸쓸한 지점이 바닥까지 내려가서야 그제서야 아들들에게 위로받고 싶어하는 이기심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직 내가 어린 탓일까. 가정 폭력도 하지 않았고, 이혼한 전처와 두 아들에 대한 부양 의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이 사람은 충분히 위로받아야 마땅한가. 살면서 나 자신을 영위하기도 힘든 세상, 아직 어려서 능력이 없는 누군가가 세상을 살기에 경제적으로 부족함없이 지원해주었다는 사실로도 그 사람은 동정받아야 할까. 나이를 먹으면 좀 더 잘 이해하게 될까.

 

그래, 그는 세 번 이혼했다. 한때 헌신보다는 비행과 실수로 더 유명했던 연쇄 남편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계속 혼자 감당해 나가야 할 터였다. 이제부터는 모든 걸 혼자 처리해야 했다. 자신이 고지식하다고 생각했던 이십대에도, 그리고 오십대에 들어설 떄까지도 그는 그가 괜찮게 생각하는 여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미술학교에 들어갈 떄부터 그런 관심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의 운명인 듯했다. 그러다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예측하지 못했고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 한 세기의 사분의 삼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는데, 이제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생활방식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생산적인 남성의 매력도 소유하지 못했고, 남성적인 기쁨이 싹트게 할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너무 강렬하게 갈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전에는 혼자 있을 때면 잠시, 사라진 구성요소들이 기적처럼 돌아와 그를 다시 거역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주고 그의 지배를 재확인해줄 것이라고, 실수로 그에게서 잘려나간 권리가 회복되어 불과 몇 년 전에 중단되었던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수많은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점점 줄어드는 과정에 있었으며, 종말이 올 때까지 남아 있는 목적 없는 나날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야야 할 것 같았다. 목적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그는 생각햇다. 이거야 미리 알 도리가 없는 거지.

낸시의 어머니와 함께 만을 헤엄치던 남자는 자신이 가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꾼 적이 없는 곳에 이르렀다. 이제 망각을 걱정해야 할 때였다. 지금이 그 먼 미래였다.

 

소리나는 책에서 읽어 준 두번째 부분이다. 책 결말에 가까운 부분이며, 이 사람의 인생을 요약해 놓은 부분이다. 주인공은 끝까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에브리맨은 주인공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 가게 이름이지만, 여기에서는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모든 사람을 이야기한다. 읽으면서 마음이 싸하게 아파오기는 하지만, 아직 이 소설을 완벽하게 이해하기에는 내 나이가 젊은 것 같다. 아마도 주인공은 작가의 분신일 텐데, 이런 느낌 또한 지금 여든을 넘긴 작가가 꽤 오래 전부터 느껴왔을 것이고, 지금도 완벽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문장을 쓰면서 작가는 어떤 심정으로 썼을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썼을까? 아니면 담담하게?

 

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노년이란 참 쓸쓸한 것 같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닥쳐 올 일들이지만, 어차피 후회를 할 것이라면, 최대한 그 후회는 줄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도록 사는 것이 좋지 않겠나. 내가 꼽은 이 책의 문장은 바로 이 것이다.

 

'네 손이 아직 따뜻할 때 주는 게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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