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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그애가 신용카드 삼매경에 빠진 까닭은, 그렇게 하면 착각에 빠져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돈도 없지, 학력도 없지, 딱히 이렇다 하게 내세울 능력도 없어요. 얼굴 하나로 먹고살 만큼 예쁜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삼류 이하 회사에서 묵묵히 사무나 봐야 하죠. 그런 인간이 마음속으로 텔레비전이나 소설이나 잡지에서 보고 듣는 풍요로운 생활을 그려보는 거예요. 옛날에는 그나마 꿈을 꾸는 선에서 끝났어요. 그게 아니면 어떻게든 그 꿈을 실현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죠. 그래서 실제로 출세한 사람도 있을 테고, 나쁜 길로 빠져 쇠고랑을 찬 사람도 있었겠죠. 그래도 옛날에는 얘기가 간단했어요. 방법이야 어떻든 자기 힘으로 그 꿈을 이루거나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 안 그래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꿈을 이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포기하긴 억울하다. 그러니 꿈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라도 느껴보자. 그런 기분에 젖어보자. 안 그래요? 지금은 방법이 많으니까요. 쇼코의 경우는 어쩌다 그게 쇼핑이나 여행처럼 돈을 쓰는 방향으로 나갔을 뿐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분별없이 쉽게 돈을 빌려주는 신용카드나 신용대출이 나타난 것뿐이죠."
"친구 중에 성형 중독인 애가 있어요.벌써 열 번 가까이 얼굴에 손을 댔을 거예요. 철가면 같은 완벽한 미인이 되면 인생은 100퍼센트 장밋빛, 행복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거죠. 그렇지만 아무리 성형을 해도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원하는 '행복'이 찾아오지 않아요. 고학력 고수입에 발군의 외모를 갖춘 남자가 나타나서 자기를 공주처럼 떠받들어줄 리 없죠. 그러니 몇 번이고 성형을 할 수밖에요. 이래도 안 돼? 이래도? 하면서. 같은 이유로 다이어트에 미쳐 있는 여자도 많아요."
"남자들 중에도 그런 부류가 있어요. 오히려 여자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죠. 죽어라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 애쓰는 것도 그런 거 아닌가요? 다 착각이에요. 다이어트에 미친 여자를 비웃을 순 없어요. 다들 착각에 빠져 사니까."
"옛날에는 자기 착각대로 살아볼 만한 군자금이 아무한테나 없었잖아요? 그런 군자금을 투입할 대상도,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요인도 적었고요. 예를 들자면 미용도, 성형도, 강력한 입시학원도, 명품들을 늘어놓은 카탈로그 잡지도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별것 아니에요. 꿈을 꾸리고 마음먹으면 간단하죠. 하지만 그러려면 군자금이 필요하고, 돈이 있는 사람이야 자기 돈을 쓸 테죠. 그러니까 자기 돈 없이 '빚'이라는 형태로 군자금을 만드는 사람은 쇼코처럼 되는 거예요. 그애한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넌 설령 자전거조업으로 돈을 빌리더라도 맘껏 쇼핑하고, 사치하고, 비싼 물건에 둘러싸이면 네가 꿈꾸던 고급스러운 인생을 실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행복했던 거지?라고."
소름이 끼친다.
등장 인물의 이름을 영희, 철수와 같은 한국 이름으로 바꾸고,
도쿄와 오사카를 서울과 부산으로 바꾸고,
화과자를 사오라는 말을 경주빵을 사오라는 말로 바꾸고...
이런 식으로 단어 몇 개만 바꾸면 그냥 우리나라 이야기이다.
전혀 이질감이 없는, 충분히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더 소름이 끼친다.
남의 나라 일이라고 팔짱을 낄 수가 없기에, 만약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 일어난다면? 하고 상상할 필요도 없기에. 왜? 이미 이런 일들이 우리나라에도 일어나고 있을 테니까.
추리 소설의 방식을 띄고 있지만, 결국엔 사회에 대한 고발과 엄청난 일을 저지른 주인공에게 차마 돌을 던질 수 없게 만드는 이 서술. 단연 최고다.
소설을 여러 편 읽다 보면, 왜 이 사람이 여기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왜 '이렇게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소설 속 인물에 대한 심리적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인물의 심리에 정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소설 속 인물의 행동은 무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신조 교코에게는 주위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풀이 죽어 있으면 위로해주고 어려운 일에 빠져 있으면 힘을 빌려주고 싶어지는, 가련하고도 애처로운 매력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구리사카 가즈야와 구라타 고지는 비슷한 점이 많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학교에서는 우등생이었고, 부모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사회적인 체면을 번듯하게 지켜냈다. 외모도 괜찮고 능력도 평균 이상이다. 그러나 그렇게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청년들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부모에 대한 반항심을 숨기고 있을 게 틀림없다. 비행 청소년처럼 폭력을 통해 표출하는 저돌적인 형태는 아닐 테지만, 강한 부모, 훌륭한 부모, 자기에게 행복한 어린 시절을 제공하고 이상적인 인생의 궤도를 깔아줄 만한 힘이 있는 부모에 대한 반항심. 그것을 누그러뜨리고, 정면으로 대결해봐야 평생 이길 수 없을 부모를 대신해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존재가 바로 교코라는 여자였을 것이다.
가즈야도 구라타도 제아무리 발버둥쳐본들 부모를 겨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지만, 성인이 된 그들은 부모가 마련해준 코스를 걸어가면서도 자기만 의지하고 자기의 능력을 확인시켜주는, 감싸고 보호해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교코는 그런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
그녀는 머리가 좋은 여자다. 그런 심리를 꿰뚫어보고 남자에게 기댔을지도 모른다. 좋은 표현은 아니겠지만, 속임수로 용병을 흥분시킬 수 있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 직접 전장에 나갈 필요는 없다. 남을 대신 싸우게 하고, 돌아왔을 때 충분히 노고를 치하해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가즈야나 구라타가 근본적으로 약삭빠른 남자였다면 교코의 입장이 그다지 바람직하게 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숨겨진 여자'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본처가 따로 있는 가운데 교코는 아까운 청춘만 소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청년은 진정 순수한 '도련님'이었다. 나이도 젊었다. 그래서 지극히 정상적인 방식으로 교코를 필요로 한 것이다.
하긴 그렇게 조종한 것 역시 교코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무 살 안팎의 나이였지만, 그 당시 교코는 이미 온실에서 자란 구라타 같은 사람은 백 년이 지나도 알 수 없는 강인함을 갸냘픈 팔 안쪽에 감추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참 이런 소설이 좋다. 개인의 심리에 정통하고, 등장하는 인물의 행동이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나오며,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하는 행위들이 서로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것은 거대한 사회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마지막 마무리도 압권이었고, 독자들에게 생각을 던져주는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