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다섯이다.
책 분량이 짧다는 일각의 지적에 ‘수많은 독자들이 나에게 책을 다 읽자마자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고 말했다. 고로 나는 이 작품이 삼백 페이지짜리라고 생각한다 (원서로는 이 책이 150페이지 정도다)’고 답했다더니(옮긴이의 말, 260쪽), 그 말이 100% 이해된다.
앨릭스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다면, 에이드리언은 카뮈와 니체를 읽었다. 나는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를 읽었다. 콜린은 보들레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어디까지나 도식화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22-23쪽)
나는 누구를 읽었나. 나의 카뮈는, 나의 니체는, 나의 조지 오웰은 누구인가.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엽서 - 클리프턴 현수교 사진이 있는 - 나 집어들어 이런 식으로 썼다. ‘이십일일자로 온 자네의 서신을 수령하면서, 본인은 모든 것을 유쾌하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명시하고자 상찬과 기원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치네, 벗이여.’ (77쪽)
항상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던 전 여자친구 베로니카가 대학시절 동경의 대상이었던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토니. 그녀와 사귀어도 괜찮냐는 에이드리언의 편지에 토니는 이렇게 답한다. 정확히는 이렇게 답했다고 기억했다. 그 편지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에이드리언에게, 아니,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베로니카, 개같은 년. 잘 지냈나? 너도 함께 이 편지를 읽도록.) (165쪽)
토니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자신의 필체로 남아있는 자신의 편지. 기억하지 못 했던 또 다른 나의 모습. 자기가 동경했던 친구를 저주하고, 자기를 초라하게 만들었던 그녀를 만신창이내며 토니는 말한다. ‘내가 너희를 소개해준 날을 저주하게 되길.’
베로니카의 일갈은 그에게 상처가 되지 않겠지. 결국은 이렇게 된 거니까.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러니 그냥 포기하고 살지그래.‘ (246쪽)
이 책은 마지막을 덮을 때, 아~~~~~~~~ 하고 깊은 탄식을 하게 되는데, 그 이야기를 자세히 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만둔다. 직접 읽어보시길.
문득 두려워진다. 내가 기억하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나’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문득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