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타 타츠루의 『유대문화론』을 읽는다. 어디에서 어떻게 추천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도서관 책으로 읽는다.
내용을 요약, 정리하려고 했는데,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다. 유대인에 대해 관심 있는 분이라면 1독을 해도 좋을 듯싶다. 쉽고 재미있고 잘 읽힌다.
유대인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 유대인인가. 아니, 어떤 사람이 유대인이 아닌가, 라는 자신의 질문 끝에 우치다는 이렇게 답한다.
유대인은 '유대인을 부정하려는 자'의 매개를 통해 존재해 왔다. 바꿔 얘기하면 우리들이 유대인이라고 칭하는 존재는 '단적으로 내가 아닌 무엇'에 덧씌운 이름이라는 말이다. (『유대문화론』, 40쪽)
내가 아닌 무엇의 총체로서의 유대인성에 대해 설명하던 우치다는 이를 성차의 문제로 바꿔서 설명한다. 최근의 젠더론에 따르면 생물학적 성차는 자연적 현상도 과학적 사실도 아니며, 디지털적인 섹스 보더border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53쪽) 그의 말이 맞다. 젠더는 스펙트럼이고 모자이크와 같다.
우치다는 크리스틴 델피의 문장을 가져온다. 나도 그대로 가져온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젠더 여성과 남성의 상대적인 사회적 위치가 섹스라는 (명백하게) 자연적인 범주에 기초하여 구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젠더가 존재함으로써 섹스가 이와 관련된 자연적 현상이 되고, 그에 따라 지각 대상의 카테고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 젠더가 해부학적인 섹스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사회 관행이, 오로지 사회 관행이 하나의 자연적 현상(모든 자연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다)을 사고의 카테고리로 변화시킨 것이다. "(54쪽)
우치다가 델피의 이 문장들을 읽고 묻는다. "성별화된 사회의 기원에 있어서 부권제적 사회 관행을 만들어 낸 쪽은 성적으로 어느 쪽인가?"(55쪽) 우치다는 델피의 주장이 '성차'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 될 수 없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질문에 대해 내가 이해할 만한 방식으로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다.(55쪽) 내가 여기 알라딘 서재에서 대답해 줄 텐데 우치다가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제가 여기에 써놓고 갑니다. 잘 보세요.
성별화된 사회의 기원에 있어서 부권제적 사회 관행을 만들어 낸 쪽은 성적으로 어느 쪽인가 하면, 남성 쪽이다. 남성이 부권제적 사회 관행을 만들어냈는데, 이를 위해서는 성차에 대한 강조가 필요했다. 성차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분홍색을 좋아하고, 친구는 노란색을 좋아한다. 나는 키가 크고, 친구는 키가 작다. 이 차이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 차이가 어떻게 해석되는가가 중요하다.
남성 위주의 부권제적 사회 관행이 만들어지기 전의 사회에서 여남을 가를 수 있는 유일한 차이는 재생산 능력의 차이였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쪽도, 젖을 먹일 수 있는 쪽도 여성이었다. 이것이 최초의 성별노동분업이다. 거다 러너가 『가부장제의 창조』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이런 생물학적 성차에 근거한 성별노동분업은 편리(functional)했고, 그래서 남성들과 여성들의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졌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대적 의미로 경제적이었고, 가성비가 높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의 창조』, 78쪽)
그리고 남성들은 발견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가 다른 모양(생물학적 차이)인데 더해서 남성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강제 삽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남성과 여성의 성기가 다른 모양이라는 것, 그것 자체로는 젠더의 작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냥 서로 다르게 생겼을 뿐이다. 하지만, 남성이 자신의 성기를 통해 여성을 강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 방식을 사용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인류의 역사는 크게 요동친다. 수잔 브라운밀러의 문장이다.
남성이 자신의 성기를 두려움을 일으키는 무기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은 불의 사용과 돌도끼의 발명과 함께 선사시대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꼽아야만 한다. 강간은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결정적인 기능을 수행해왔다.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에 묶어두려고 의식적으로 협박하는 과정이 바로 강간이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25쪽)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다. 여성은 곧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한다. 『하나이지 않은 성』에서 '왜 여자들을 교환하는가?"라는 질문에 레비 스트로스는 이렇게 답한다. 여자들은 집단생활에 있어서 희소가치가 있고, 본질적인 필수품들이기 때문이다.(『하나이지 않은 성』, 223쪽)
부족간 교역 물품으로 전락한 여성의 패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 종교, 사회, 문화 여러 방면에서 여성의 열등함과 남성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가 확대 재생산되었다. 남성의 여성 지배는 더욱 공고화되었다.
우치다는 보부아르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이렇게 쓴다.
과거에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 성원의 일부를 학살한 집단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혹은 인류의 여명기에 그런 사회 집단이 존재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집단은 한 세대로 소멸하기 때문에 인류사에 어떠한 흔적도 남길 수 없다). 여성이라는 사회적 존재자가 구성되는 방식과 흑인이나 유대인이 구성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유대문화론』, 45쪽)
마지막 문장에는 동의한다. 흑인이나 유대인이 구성되는 방식과 여성이라는 사회적 존재자로 구성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여성에 대한 방식, 여성을 타자화하는 방식/규칙/문화가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강고하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 성원의 일부를 학살한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집단이 이 집단이다. 그 문명이 지금의 문명이다. 여성은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후로 한결같은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었다. 혐오와 숭배가 같은 것인지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질 테니 여기에서 잠깐 쉬기로 하고.
출산 중에 죽어간, 출산 후에 죽어간 여성들을 논의로 하더라도,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금도 죽임을 당한다. 그건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이슬람만의 문제도 아니다. 여성혐오는 인류 공통의 역사다. 성감별을 통한 여아 살해부터 가족에 의한 명예살인, 그리고 데이트 폭력과 가정 폭력으로 여성들은 폭행당하고, 살해당한다. 물론이다. 남성들도 이러한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요는 여성을 죽이는 사람이 대부분 남성이고, 남성을 죽이는 사람도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이다.
폴 존슨의 『유대인의 역사』에서는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끈질기게 박해받았는지가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을 처형하고 고문하는 광경들을 따라 읽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읽었던 듯한' 기분이 든다. 맞다. 마녀사냥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악마와의 거래, 도덕적 타락, 주문과 주술로 인한 위해가 그들의 죄상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마녀사냥에서 마녀로 몰린 여성에 대한 죄목과 매우 유사하다.
프란츠 파농은 '검은 피부'의 자기 자신이 외부에서부터 중층결정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검은 피부'의 자신과 '(하얀 피부의) 유대인'을 비교한다.
그렇지만 유대인은 자신의 유대인성 안에서 남모르게 지낼 수 있다. 그가 무엇인지와 그 자신이 완전히 하나가 아니다. 사람들은 기대하고, 기다린다.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의 행위, 그의 처신이다. 그는 백인이고, 논쟁의 여지가 많은 몇몇 특징들을 제외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게끔 되었다. 그는 식인 풍습이라고는 아는 바 없던 이들의 인종에 속한다. 자기 아버지를 먹다니 생각만 해도 얼마나 끔찍한가! 잘됐어, 검둥이가 아니면 되니까. 물론 유대인들은 피해를 입었다. 그들은 추격당했고, 절멸당했고, 불가마 속에 던져졌다.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가족사이다. 유대인은 발각되고 나서야 푸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매사가 처음 보는 모습이다. 어떤 기회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외부에서부터 중층결정되었다. 나는 타인들이 나에 대해 가진 ‘관념’의 노예가 아니라 내 외관의 노예이다.(『검은 피부, 하얀 가면』, 113쪽)
이런 생각이 참 쓸데없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어떤 억압이 가장 강력한가. 어떤 억압이 더 끈질기게 작동하는가. 어떤 억압이 더 비인간적인가. 억압은 한 가지만이 아니다. 계급이, 피부색이, 인종이, 억양이, 성이 억압으로서 작동하며, 이런 억압은 동시적으로 교차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파농의 주장에 1을 보태게 되는데, 그의 주장대로 '피부색'에 대한 판단은 처음 보는 그 순간, 1초 만에 종료되기 때문이다. 검은 피부는 숨길 수가 없다. 남성과 여성도 1초만에 판별가능하다.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신경질적이고 과도한 강조와 여성에 대한 코르셋 강요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루어진다. 빠르게 판별하기 위해서. 정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구분하고 차별하기 위해서.
60쪽 읽고 너무 길게 썼다. 일단 조금 더 읽어보고, 못 다 한 말을 이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