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기숙사 생활을 마치고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 한 학생이 있다. 평소에는 맨날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듯싶더니, 3인실을 독방인냥 혼자서 4개월을 지내다 보니 사람이 그리웠던가. 늦은 저녁, 다림질하려고 스탠딩 다리미판 앞에 서 있는 내 맞은편 자리에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앉더니,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 없냐고 묻는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고 최근에 읽은 두루미 아내 이야기를 해준다. 아무거나 현재 읽고 있는 책 이야기하는 사람이 자기 엄마인 줄 아는 아이는 고분고분하게 이야기를 듣는다. 이 두루미 아내가, 이게 시리즈더라구. 우리나라에 <우렁각시>가 있잖아. 이게 논농사를 짓는 나라에서는 거의 공통적인 민간 설화라고 하대. 베트남 쪽에도 <우렁각시> 이야기가 있대. 근데 일본에는 두루미 아내가 있다고, 내가 <우렁 각시> 해설편에서 봤거든, 저번 주에. 근데 이번주에 <두루미 아내>가 눈에 띄어서 말이야. 일본 작가가 쓴 거고, 일본 작가가 그린 건데….



가난한 총각 요헤이, 어느 날 눈 쌓인 길에서 화살을 맞은 두루미를 구해준다. (이토록 강한 복선이라니요^^) 그 날 밤, 아리따운 처녀가 요헤이를 찾아오고, 요헤이는 그녀와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는데, 찌들어진 가정 형편을 알게 된 아내는 자신이 베를 짜겠다며, 그 대신 방문 안을 절대 들여다보면 안 된다고 말한다. 3일이 지나고, 나흘째 되는 날 해쓱해진 아내는 마치 선녀가 짠 듯한 아름다운 베를 내어놓고, 요헤이는 이 베를 시장에 내다 팔아 한동안 고생을 잊고 산다. 가난한 형편은 금세 나아지지 않는 법. 아내는 한 번 더 베를 짜겠다고 하면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한다. 이번에는 나흘이 지나서야 방문을 열고 나오는 아내,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다. 요헤이는 다시 아내의 베를 시장에 내다 판다. 이번 베는 지난번보다 더 비싼 값에 팔렸다. 그러던 중, 요헤이 아내의 베를 본 이웃 남자가 이 귀한 물건을 도성의 부잣집에 팔게 되면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거라 요헤이를 꼬드긴다. 철없는 남편은 다시 아내에게 베 이야기를 꺼내고, 이 정도면 먹고 살 수 있는데, 왜 욕심을 부리냐는 아내의 말에 요헤이는 금방 포기하는 듯하다. 하지만, 아내들이 항상 수행하는 고도의 감정 노동, 해상도 높은 표정 스캔의 결과, 아내는 요헤이가 앉으나 서나 돈 생각 뿐(책의 표현 그대로임)임을 알게 되고, 한 번만 더 베를 짜기로 결심한다.



    <아내가 건네주는 베를 보며 기뻐하는 요헤이의 모습과 대조되는 해쓱한 아내의 모습> 




이번에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거라는 말과 함께 베를 짜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 아내. 그런데 나흘이 지나 닷새째에도 아내가 나오지 않는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요헤이는 방문을 살짝 열어보는데피에 젖은 두루미가 자기 깃털을 부리로 뽑아 베틀에 꽂아 베를 만들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그만 그 자리에 혼절하고 만다. 정신을 차린 요헤이에게,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토록 부탁을 드렸건만 흉한 꼴을 보이고 말았으니 더 이상 인간 세상에 머무를 수가 없군요. 저는 언젠가 눈길에서 그대가 구해 준 두루미. 당신의 친절한 마음이 그리워, 그 마음만을 기리며 당신 곁에 있었습니다. 아무쪼록,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세요.” 목놓아 불러보아도 아무 소용없는 것을두루미 아내는 저 멀리 하늘로 훨훨 날아간다. , 두루미 아내여.



요헤이의 파국의 원인은 무엇일까. 더 큰 돈을 벌고자 하는 탐욕이었을까, 아니면 두루미 아내의 정체를 본 것이었을까. 나는 아내의 참모습을 봐 버린 것이 요헤이 파국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보지 않았다면, 들키지 않았다면, 요헤이가 더 큰 욕심을 부려도, 혹은 두루미 아내에게 또 다른 무언가를 요구했어도 나는 두루미 아내가 그의 부탁을 들어 주었을거라 짐작한다. 두루미 아내는 요헤이에게 그런 사랑을 보여줬다. 그런 사랑을 줬다.



아내의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고 요헤이가 혼절한 점도 의미심장하다. 문을 열고 보니, 아내가 앉았던 자리에 두루미가 앉아 있다면, “여보, 여보! 나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고생하다니나 때문에 이런 고초를 겪다니…!!” 라고 말하며 아내를 부둥켜안아도 부족할 판에, 요헤이는 가볍게 기절을 해 버린다. 으악! 나랑 사는 사람이 두루미였어? 나랑 다른 종족? 나랑 다른 족속? 나랑 다른 무엇? 갑자기 생각나는 해러웨이. 생각만 날 뿐, 어떻게 해러웨이랑 연결해야 할지는 모르겠네요. 저는 그냥…. 해러웨이가 생각났어요.



요헤이가 목격한 장면 역시 각별하다. 두루미 아내는 방에 갇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요헤이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두루미 아내는 자신을 파괴한다. 자신을 주고, 주고 또 준다.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다른 존재에게서 무언가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려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장면, 자기희생의 결정적 장면을 요헤이는 감당하지 못한다. 두루미 아내가 지극한 사랑을 주었건만 그는 기절해 버린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겠다. 지극한 사랑은, 나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하는 그런 찐한 참 사랑은,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을 기절시킨다. 사랑과 기절, 희생과 혼절.




신나게 이야기하다 보니 와이셔츠 두 장을 다 다렸다. “여보! (톤 주의) 제가 다림질하는 동안에는 저를 쳐다보시면 안 돼요. 얼른 안방에 들어가서 다른 셔츠 있나 찾아서 가져오세요.” 남편은 웃지도, 대답하지도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안방으로 들어가 흰색 셔츠 2개와 푸른 계열의 셔츠 하나를 들고나온다. 결혼 22년 차답게 남편은 곁눈질로도 나를 쳐다보지 않아, 나는 여전히 다림질 아내이며, 내 자신을 희생하는 지극한 사랑을 주지 않아 남편을 기절시키지 않았으며,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했으며 




댓글(9)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3-06-26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더위에 다림질하시는 두루…아니 단발님.
500원 안 받겠사오니,
옛날 얘기 더 해줘요.

단발머리 2023-07-01 10:11   좋아요 0 | URL
일단 이번주는 현대 문학 쪽으로 옮겨왔다고 할까요.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를 빌려왔습니다 ㅋㅋㅋ
다음 주를 기대해 주세요^^

책읽는나무 2023-06-26 16: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 전래동화를 읽고 너무 슬퍼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었던 감수성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제 깃털을 뽑아 베틀에 꽂아 베를 짜다니요?ㅜㅜ
이런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았잖아요.
쳐다 보면 안되는데 몰래 들여다 보면 아내는 동물의 모습을 하고서 붉은 구슬을 목구멍에서 토해 내어...적다 보니 구미호뎐이군요.ㅋㅋㅋ
드라마 구미호뎐은 잘생긴 이동욱이랑 김범이 남자 구미호로 나와서 백두대간 산신(이동욱 분)이라며 싸움도 잘하고 염라대왕 여동생에게 운명도 바꿔달라고 반말 찍찍하고 그러던데 말입니다.(갑자기 드라마 얘긴 여기서 왜?)

암튼 이야기는 듣는 것이나, 보는 것이나 다 재밌는 것 같아요.
우렁 각시나 두루미 아내 이야기는 맴찢이지만요. (구미호뎐 드라마에 우렁각시 나왔어요.ㅋㅋ)
현대판 아내는 다림질 아내로군요?ㅋㅋ
저는 애를 셋을 낳아버려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고 남편한테 맨날 항의하고 있습니다만....🙄
암튼 재미납니다.
이야기 또 들려주세요^^

단발머리 2023-07-01 10:14   좋아요 1 | URL
우렁 각시든 두루미 아내든 사회가 여성, 결혼한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밥상 차리기, 청소(우렁 각시), 베짜기(두루미 아내)인데요. 요는 안 보일 때 해야한다는 점에서 가사노동의 비가시성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이불을 거실에 쌓아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서도, 그렇다는 걸 꼭 지적은 해야겠네요 ㅎㅎㅎ

책나무님 그거 아세요? 어느 동화에서는 선녀가 얘가 셋이라 못 날아가지만 어느 동화에서는 양쪽에 하나씩 끼고 하나를 업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셋도 가능하답니다. 그러나 책나무님 하늘로 날아가시면 알라딘 허전해서 안 돼요. 절대 절대 안됩니다!!!
남편분보다 우리가 더 절박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6-30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 글을 이제야 봤습니다. 두루미 아내 이야기 전에도 그랬지만 다시 봐도 슬프네요.

다시 한 번 읽었더니 ‘흉한 꼴을 보였으니‘ 더 이상 인간 세상에 (당신 곁에) 머무를 수가 없다는 말이 눈에 밟히네요. 아내는 흉한 꼴을 보여서는 안되는 것인가...


수이 2023-07-01 10:13   좋아요 1 | URL
어여쁘고 아름다운 아내와 어여쁘고 아름다운 딸을 곁에 두면 남자들은 므흣해하더라구요. 왜 그러나 몰라 대체. 이긍. 아침에 쫄반바지 입고 밥 하고 있노라니 엉덩이가 터질 거 같고 허벅지가 터질 거 같아서 이번 여름에도 비키니는 물 건너갔구려 하고 남편이 이야기해서 내 터질 거 같은 엉덩이와 허벅지가 나는 너무 예쁜데 니 눈에는 안 이쁘냐고 흉하기만 하냐고 그럼 나를 당장 버리라고 트로피 아내를 얻으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내 흉한 뱃살을 참아주는 당신이 있는데 그 무슨 소리요. 해서 난 네 뱃살 좋은데 했더니 그렇다면 나도 당신의 두꺼운 허벅지를 더 사랑하겠소 해서 오늘 아침 웃었죠. 그러면서 흉한 아내와 예쁜 아내의 차이는 대체 무엇인가 했습니다. 수하님 댓글 읽고 있노라니 아침부터 주절거리고 있네;;;

단발머리 2023-07-01 10:25   좋아요 0 | URL
수하님 / 전 그 점은 생각 못 했어요. 수하님 말씀이 맞네요. 흉한 꼴을 보이면 안 된다는 점에서 아내에게 요구되는 꾸밈노동, 혹은 ‘여자다워야 한다‘는 강요가 존재한다는 걸.... 동화를 통해 알 수 있네요. 전, 그 흉한 모습이 희생의 모습이었다는 게 슬펐거든요. 넘나 희생하면 안 되는 것이다. 몸을 다 내어놓는, 자신을 다 내어주는 이런 희생은 안 돼... 이렇게요. 히잉.....

수이님 / 아... 수이님 아침부터 이렇게 섹시하고 아름답고 흐뭇한 대화를 ㅋㅋㅋㅋ 부지러하신 분들 ㅋㅋㅋㅋ 우리집에는 아직 해가 안 떠서요. 블라인드도 안 올려서 겁나 어둡고 저는 아직 요가도 안 했고요. 김연아 유퀴즈 보고 있어요. 우리 연아 멋지다, 하면서요 ㅋㅋㅋㅋㅋㅋㅋㅋ두 분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수하님이랑 저는 우리 둘이 행복할랍니다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7-01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단발머리 님, 정말 너무 훌륭하게 성장해서 두루미 얘기에 도나 해러웨이 떠올리게 되었네요. 멋져 😭

단발머리 2023-07-01 11:55   좋아요 0 | URL
<종과 종이 만날 때>를 떠올리며 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