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을 읽을 때였다. 잠시 목차 소개.
자유주의 페미니즘, 급진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미국의 유색인종 페미니즘,
전 세계의 유색인종 페미니즘, 정신분석 페미니즘, 돌봄 중심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
실존주의,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제3의 물결 페미니즘과 퀴어 페미니즘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나, 이쪽이네’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두 번째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아, 아니네. 나 급진주의 쪽이네.’ 금방 선회해 버리고. ‘아닌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하다가 ‘아닌데, 나는 사실 유색인종 페미니즘 사상에 가까운데…’ 하면서 정처 없이 방황하던 시간이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구분해 두었고, 또 각각의 시대에 가장 활발했던 운동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들)/페미니즘 운동을 그렇게 확연히 나눌 수 있는 건 아닌 듯싶다.
이를테면, 이 책의 ‘지배 이론’ 같은 경우, 백인 여성의 경험을 보편적인 것으로 설정한다든지, 어머니로서의 경험의 가치를 깎아내린다는 평가(43쪽)를 마주 대하면, 아이를 둘 낳은 한국의 기혼 여성으로서 ‘원치 않지만’ 혹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아온 나 같은 여성으로서는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의 입장, ‘법 이론’의 관점에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조망한다고 할 때,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정형화된 양식이 경제, 정치, 가족 영역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불평등의 원인”이라고 본 지배 이론은 다른 어떤 이론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명료하다. 현재의 법체계, 정치, 경제, 문화의 양식은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대상으로 인식한 상태에서 발전되어 왔고, 그러한 인식이 이토록 강고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법체계, 정치, 경제, 문화 양식 제반은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오천 년 인류 문명은 여성 혐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정희진 선생님의 말씀은 옳다.
낙태 금지, 여성에 대한 성적 접근, 성희롱, 성폭력, 포르노그래피 등 여성 신체에 대한 억압뿐 아니라, 남성보다 적은 임금, 가사노동/돌봄노동/감정노동 등 재생산 노동에 대한 요구, 외모에 대한 압박 등 여성에 대한 억압은 전방위적으로 일어났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으며, 이는 특정한 나라, 특정한 민족, 특정한 문명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되었음을, <가부장제의 창조>는 보여준다.
신석기시대 도구들은 상대적으로 단순해서 누구든 만들 수 있었고, 토지 또한 희소한 자원이 아니었기에 생물학적 재생산의 불규칙성과 생태학적 조건에 영향을 받는 집단의 생존에 가장 주요한 요건은 “더 많은 재생산자들 – 여성들”의 확보에 달려 있었다는 해석이다. 즉 사유재산의 첫번째 전유는 재생산자인 여성의 노동력에 대한 전유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가부장제의 창조>, 91쪽)
다시 지배 이론으로 돌아가자면, “지배 이론은 법률이 여성 억압에 부역하는 사례로 낙태에 대해서는 법이 과도하게 규제하면서도 포르노그래피, 성적 괴롭힘에 대해서는 규제가 미흡하고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이 발생하면 부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을 든다. (39쪽)” 즉, 여성이 남성과 같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 아니라, 남성에 견주어 2등 시민, 제2의 성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 중에 하나가 법률이라는 뜻이다. 낙태에 대한 법은 과도하게 제정되고 집행되는 반면에,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에 대해서는 법이 부적절하게 대처한다는 것인데, 이는 “살인한 매 맞는 여자들은 아내나 연인을 살해한 남자들보다 종종 더 무거운 형을 선고받는” (남자의 평균 형량은 2년에서 6년, 여성은 15년)(278쪽) 것과 직장내 성희롱 사건의 경우 직장 내에서 이루어진 희롱이 “원치 않은” 것임을 ‘입증’해야 하는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는 것(103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친밀한 사이에서 이루어진 여성에 대한 지속적인 폭력과 이별 후의 살해 협박이 실제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에도 공권력의 허술한 대처로 인해 피해자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여성들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하겠다.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고 가해자가 구속되어도 상황은 크게 다를 바 없다. 남자의 목숨값과 여자의 목숨값이 다른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판사가 모두 남자이거나, 판사에게는 아내가 없거나, 판사에게는 딸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하는 판결을 너무나 자주 만나는 요즘이다. 대중의 인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판결, ‘허접한 법의 테두리’ 속에서의 판결이 소중한 목숨(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이러한 법률, 이러한 문명, 이러한 문화, 이러한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해석도, 나는 지배 이론에 주장에 동의한다.
지배 이론을 따르는 자들은 포르노그래피가 여성을 도구화하고 여성의 자율성을 침해한다고 생각했지만, 동등대우 원칙에 대한 지지자들은 여성들은 자기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반응했다. 동등대우 지지자들에게 있어서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법적 규제는, 여성을 수동적인 피해자로 취급하며 보호주의적이었다. 이들은 상정된 조례안이 남성들 및 여성들 모두에 대한 최악의 고정관념들 중 하나인, 모든 남성은 나쁘고 여성들은 국가에 의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고정관념을 암묵적으로 장려했다고 주장했다. (224쪽)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표현의 자유가 될 것이고,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위상이 축소된다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르노그래피의 생산과 유통이 그 산업과 관련되어 일하고 있는 여성 뿐 아니라 여성 전체에 해악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은, 강간 당하고 ‘싶어하는’ 존재가 아니다.
마지막 문장으로 이 문단을 골랐다. 이 지배를,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소녀에 대한 교육임을 기억하면서.
한 소녀를 교육시키는 것은 곧 한 가족을 교육시키는 것이다.
가장 좋은 점은 여학생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 선순환을 영속시킨다는 것이다. 교육을 받은 소녀들은 자라서 그들 자신의 아이들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친다. 그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그들이 대학에 가도록 격려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부업을 한다. 물론 교육받은 남성들도 이러한 방식으로 기여하지만, 여성들은 단연코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한 소녀를 교육시키는 것은 곧 한 가족을 교육시키는 것이다. (305쪽)
원고가 직장 내에서 이루어진 희롱이 "원치 않은" 것임을 입증해야 한다는 말의 이면에는, 원고가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하기 전까지는 직장 내 성적인 행동에 근본적으로 동의했다고 본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는 직장내에서 일상적으로 성적인 행동을 묵인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록 일부 학자들은 "(원고가) 기꺼이 원했다는 사실을 상대방의 적극적 항변 사유로 보지만, 대부분의 판례는 원고가 이를 원치 않았다는 사실, 즉 부정적 요건에 대한 주장을 요구하고 이를 입증하면 반증이 없는 한 성희롱으로 판단한다. - P103
누가 어떤 일을 하고있는지, 무엇을 희생하는지, 어느 정도의 가치로 평가받는지 등 직업의 분리 관련 쟁점을 중시하는 것은 전형적인 페미니즘의 물음이다. 이 캠페인들은 또한 잠재적으로 다인종 조직, 그리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 대학교 교직원들, 그리고 교수들 간의 협력을 촉진할 수 있기에 유익하기도 하다. - P126
샌드버그는 여성들에게 자신의 커리어 쪽으로 달려들라(lean In)"고 지시한다. 이는 곧 자신의 직업 전문성 개발의 고삐를 잡는 것, 스타 멘토를 찾는것, 제도적 장벽을 뛰어넘는 것, 그리고 가정에서 가사 역할을 재협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화 <피넛츠>에서의 루시와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자신들의 "나댐을 찬양해야 한다. - P127
(낙태 반대 폭력의) 범죄의 기소 가능성이 높아지자, FACE로 인해 더 심각한 낙태 시술 의원대상 폭력 중 일부가 감소하게 되었다. 법 제정 이래로 살인, 살인 미수, 살해협박, 스토킹, 의원 입구 봉쇄, 폭탄 설치 등은 감소했다. 그러나 업무 방해, 무단 침입, 피켓 시위, 환자들의 사진 및 동영상 유출, 전화와 이메일을 통한업무 방해 사례는 더 증가했다. - P199
Johnson v. Calvert 사건에서, 유전적 모성과 임신을 통한 모성 간의 형이상학적 투쟁은 한 계약의 내용으로 요약되었다. 재생산을 통한 권한 부여, 어머니가 되는 것의 위대함, 대리모가 되는 하위계층의 폐해는 어떠한가? 두 의견이 모두 이 쟁점을 종종 제기하기는 했지만, 이를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판사들은 이런 물음들에 무관심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들은 대중이 의회를 통해 형량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법원은 일반적으로 법학의 이 분야에서는 깊이, 통일성, 혹은 예측 가능성을 부여하지못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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