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정희진 선생님은 화이트보드에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나란히 쓰셨다. 근대, 구조, 개인 등에 대해 말씀하시던 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적어도 이 두 사람의 사상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마르크스는 물론 프로이트도. 내게는 너무 먼 당신이여, 머나먼 당신 그대 프로이트여.
프로이트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프로이트 본격 비판서(?)’인 베티 프리던의 <여성성의 신화>가 생각난다. 엄격한 도덕관념과 여성 혐오가 지배하던 빅토리아 문화 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프로이트와 그의 이론은 “그 시대 여성이 간절히 원했던 것이 남근이 아니라, 남근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껏 누리는 자유와 지위(232쪽)”였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프리던은 비판했다.
프로이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필립 로스. 남녀 사이의 성적 긴장이야말로 이 세상 가장 중요한 일이며, 섹스야말로 남녀 사이의 가장 긴급한 용무라는 그의 주장. 뼛속까지 프로이트주의자. 프로이트와 연결해서 보자면 결정판은 역시 <포트노이의 불평>이 될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아는 것이 섹스라는 기발한 주장은 <프로이트 패러다임>에 나온다. 2020년 당시, 엄청 유행하던 ‘syo님표 프로이트 리스트’ 중 하나다.
… 적당한 말이 없어서 일단 인식애적인 충동이라고 번역했는데 원래는 지식을 좋아하는 충동입니다. 지식을 대상으로 하는 충동인 것이죠.
지식을 좋아하는 충동, 물론 이 충동은 당연히 성적인 충동입니다. 성적인 충동 중에는 구강 충동이나 항문 충동이 있듯이 인식애적인 충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입이나 항문으로 충동 활동을 하듯이 머리로 하는 충동 활동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지식욕은 아닙니다. 여기서 지식을 좋아하는 충동이란 뭔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지적인 욕구이긴 한데, 그것이 곧 성적인 충동의 일종인 경우입니다. …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아는 것이 섹스가 되는 경우입니다. 뭔가를 알고자 하는 욕구가 곧 성적인 충동의 연장선상에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곧 성적인 충동의 대상이 되는 경우죠. (157쪽)
양자오의 <꿈의 해석을 읽다>도 프로이트 사상을 대략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으나,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다윈주의에서 받은 영감과 암시에 따라 프로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 인간이 다른 생물과 다르게 진화의 최첨단에서 고등생물로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한편으로 강렬한 성욕을 가졌음에도 다른 한편으로 성욕을 억압하고, 나아가 성욕이 품고 있는 거대한 잠재력을 다른 곳에 쓰도록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131쪽).
(미리 읽어 두어) 뿌듯한 책은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이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과 닿아 있는 부분이 있어 확인한다고 꺼내 두었다. 프로이트 저작은 이 책, 딱 한 권 읽었다. 192쪽, 책은 작고 두께는 얇다. 다음 책은 <늑대 인간>으로 찜해 두었다.
(이제야 나온다) 이 책 <프로이트를 위하여>는 프로이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츠바이크의 애정이 곳곳에 묻어나는 책이다. 1부는 프로이트 평전이고, 2부는 두 사람 간의 편지 & 엽서. 그리고 3부는 프로이트에 관련된 서평, 추모 연설 등을 묶어 두었다.
질병의 유일한 원인이 ‘신’이었던 시대, 치료 또한 ‘신’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현대 의학은 종교적인 것, 마법적인 것과 분리되었고, 이제는 일종의 ‘과학’으로서 대학에서 연구되기 시작했다(26쪽). 과학적 의학에서 주도권은 의사가 쥐고, 오직 의사만이 치료의 주체가 된다. 기적적 치유의 탈신비화에 맞서 싸운(30쪽) 첫 번째 사람인 파라켈수스는 이러한 현실에 반대한다.
이 '취급Behandlung'이라는 단어에 문제의 핵심이 놓여있다. 다시 말해 과학적 의술에서는 환자가 대상으로 취급되는 behandel' 반면, 영적 치유는 환자에게 우선 그 자신이 영적으로 '행위하기handeln'를 요구한다. 그 자신이 '주체'로서, 치료의 담당자이자 실행자로서, 질병에 맞서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능동성을 펼쳐 보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영적으로 떨쳐나서라, 의지의 통일에 집중해라, 자신의 존재 전체를 질병 전체를 향해 내던져라, 하는 환자를 향한 이 호소 속에 모든 정신적 치유의 본질적이고도 유일한 치료제가 존립하며, 그렇기에 많은 경우 치료사의 치료 행위는 다름 아닌 말하기에 국한된다. (33쪽)
수술과 약물을 통해서가 아닌 말하기를 통한 치료. 이 황당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치료법 앞에서 일부는 부정적 감정을 드러냈고, 일부는 혐오의 시선을 보이기도 했다. 과학적 성과와 결과물, 객관성에 역행하는 사기꾼, 거짓말쟁이. 성의 문제를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온 사회에 맞서 정면승부를 벌였을 때는 그에 대한 비난이 한층 더 고조되었다. 프로이트는 끝내 정교수가 되지 못했다. 궁정 고문관도, 추밀 고문관도 되지 못했다. 정교수들 사이의 비정규 교수, 끝까지 프로이트는 비정규 교수였다. (90쪽)
프로이트를 비난하기는 얼마나 쉬운 일인가. 츠바이크는 정신 분석의 한계를 지적한다. 프로이트가 주장한대로 소수정예의 훈련된 전문가를 통한 정신 분석만이 치료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기술이 심리 치료 영역에서 최종적이자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짚어냈다.(146쪽)
하지만 츠바이크는 더 많은 시간 공을 들여 프로이트의 공로를 치하한다. 무의식이라는 대륙의 발견이 어떤 의미인지, 기존의 관념을 깨어 부수기 위해 온 사회와 맞서 혈혈단신으로 싸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한다. 타협하지 않는 의지의 소유자, 프로이트와 같은 불굴의 의지를 가진 자만이 이루어낼 수 있었던 역사적 성과들을 꼼꼼히 되짚는다. 프로이트의 천재성과 위대함에 감탄하게 된다면, 그 반은 츠바이크의 몫이다.
그러나 로고스, 창조력을 지닌 말이 어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지, 입술이 허공 속에 일으킨 그 마법적 진동이 얼마나 많은 세계를 일으키기도 하고 허물기도 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모든 영역과 마찬가지로 치료술에서도 오로지 말로 인해 진짜 기적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위로의 말과 눈길만으로 인격이 인격에게 보내는 그 신호만으로, 오로지 정신에 의해, 때때로 완전히 망가져버린 기관들이 다시 한 번 재건된다는 사실에 그다지 놀라진 않을 것이다. (35쪽)
몸과 정신, 신체와 영혼, 그리고 정신 분석의 역사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1독을 해 봄직하다. 나는 츠바이크의 다음 책으로 간다.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