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읽기 시작한 『섹스할 권리』. 딱 두 쪽 읽어보고 아, 영어로 읽어야겠네, 읽을 수 있겠어, 하고는 알라딘에 원서 검색했더니 가격도 착해. 14,180원. 급하지도 않은데 다른 책 한 권이랑 바로 구매. 30쪽 넘어가면서 바로 후회의 급물살. 왜 그랬니. 도대체 왜.
어제의 발견. 에이드리언 리치. 171쪽이다.
17. 에이드리엔 리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여성에게 이성애가 '선호'가 아닌, 억지로 강요되고 관리되고 조직되고 선전되고 유지되어야 했던 무언가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자유로운 '선천적' 이성애자로 여기는 사람에겐 엄청난 도전이다. 그러나 이성애를 하나의 제도로서 검토하지 못한다면 (…) 자본주의나 인종주의적 계층 시스템이 물리적 폭력과 허위의식 등의 다양한 힘으로 유지됨을 인정하는 데 실패하고 마는 셈이다. 이성애자로 정체화한 페미니스트들이 이성애가 여성의 '선호' 내지는 '선택'이라는 생각에 질문을 던지는 한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에 뒤따르는 지적·감정적 노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발견. 178쪽. 이 문단이 이 책의 질문, 문제의식, 시작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29. 그렇다면 이제 진짜 질문을 꺼낼 차례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성적 권리의식('섹스할 권리')의 여성혐오적 논리라든지, 해방하지 않고 훈육하는 도덕적 권위주의에 빠져들지 않으면서 섹스에 대한 정치비평에 참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오드리 로드의 말처럼 우리 안의 왜곡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욕망을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면으로 돌아서지 않으면서, 정치적 프로젝트를 개인적인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서 그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실천적인 것으로서, 철학자들의 말처럼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아는 것의 문제다. 그리고 방법은 이론적 연구가 아니라 삶의 실험을 통해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의 교훈. 까불지 말고 진중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