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나, 의 스토리 중에는 하루키의 이야기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팀명이 야구르트였던가. 야구 관중석에서 3루 쪽으로 날아가는 공을 지켜보다가 불현듯 ‘아, 나도 소설을 쓸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 이야기(정확하지 않으니 혹 정확히 기억하시는 분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
1956년, 축구장을 가로질러 하교하던 중에 그냥 갑자기 그렇게 된 거였어요. 머릿속으로 시를 쓴 뒤 종이에 옮겨 적었는데 그때부터 오로지 글을 쓰고 싶다는 것 외엔 아무 생각도 안 났어요. 내가 쓴 시가 훌륭한지 어떤지도 몰랐지요. 하지만 알았대도 아마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경험이었으니까요. 너무 가열한 경험이었어요. 내게 비작가에서 작가로의 변화는 B급 영화에서 유순한 은행원이 송곳니 뾰족한 괴물로 변신하는 것만큼이나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43쪽)
마거릿 애트우드에게 운명의 장소는 축구장이었다고 한다.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여! 야구장으로 가라. 축구장으로 가라. 농구장으로 가라. 배구장으로 가라.
내가 마거릿 애트우드를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이미 세계적인 작가였고, 강력한 노벨상 후보 중의 하나였다. 『시녀 이야기』의 마거릿 애트우드라니. 그 이름을 부르기도 황송한 세계적인 작가. 이 책에는 그녀가 이제 막 읽기와 쓰기를 배웠던 아주 어릴 적부터 ‘작가’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영역으로 진입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져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떠나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 살 것 같은 내가 보기에, 마거릿 애트우드는 중심에 속한 사람이다. 하얀 피부의 백인이고 영연방 왕국에 살고 있으며 세계공통어가 아니라 지구어인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가 작가가 되려고 할 때의 사정은 내 예상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미국도 그랬겠지만, 유럽 대륙에 대한 동경과 문화적 열등감은 캐나다 문화계에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똑같은 신생 국가였지만 거대한 출판 시장을 가지고 있던 미국과는 달리 캐나다의 시장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풍토에서 애트우드는 꿈꿨다.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지는 작가가 되겠노라고. 문학 장르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다는 시를 써 보겠노라고. 남자도 성공하기 어려운 이 세계에 여자로서 발을 들여놓겠노라고.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중심인가.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중심은 생각보다 훨씬 더 협소하다. 클럽하우스는 초대장을 가진 사람만 입장할 수 있어서 인기가 있다. 이너써클은 이너써클로 존재할 때만이 빛을 발한다.
내가 보기에 이너써클로 보이는 마거릿 애트우드마저도 자신이 중심이 아닌 주변에 속해 있음을 알았다.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성공하기 어렵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그녀는 자기가 해야할일을 해나갔다. 그냥. 묵묵히. 꾸준히. 중심이 아닌 주변에서만 보이는 풍경을 포착하면서. 주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을 풀어내면서. 주변에서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작가는 언제나 좋은 독자여서 작가들의 책 목록을 엿보는 일은 항상 즐겁다. 작가들의 이름은 언뜻 들어본 듯하지만 작품들은 처음 보는 게 많았다. 애트우드를 좋아하니 그녀가 좋아하는 책을 찾아보고 싶지만, 많아도 너무 많다. 다 받아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래도 이 부분을 읽을 때는 흥에 겨웠다. 몰리님의 추천으로 레이 브래드버리를 알게 되었고, 원서도 한글 개정판도 바로 구입해 두 번이나 읽었으며, 식구들에게 즐겁게 ‘해설’했던 작품 <화성인>을 애트우드님이 두 페이지에 걸쳐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사람에겐 누구나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작품(보통은 어린 시절 읽은 책이지요)이 있습니다. 내겐 그중 하나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에 실린 단편 <화성인>이지요. … 브래드버리는 설명합니다. “그의 얼굴에 각자의 요구가 녹아들었다.” (197쪽)
중심의 기록 대부분은 승자의 것이다. 지구인의 말, 침략자의 말, 강한 자의 말, 지배자의 말 그리고 남자의 말. 그들의 말에 속지 않으려면, 그들의 요구대로 녹아버리지 않으려면. 방법은 단 하나. 변방의 자리에서 쓰는 것. 쓰고 다시 쓰는 것.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의 조애나 러스가 기술한 것처럼.
그래서 그들은 썼다. So they write. (45p)
사실 ‘천재’라는 단어와 ‘여성’이라는 단어는 영어에서 보통 어울려 다니지 않아요. 남성 ‘천재’들이 하는 기이한 행동을 여성이 하면 보통 ‘미쳤다’는 꼬리표가 붙거든요. 심지어 ‘재능 있는’ ‘대단한’ 같은 단어들도 마찬가지예요.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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