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다닐 때니까 백 만년 전 일이다. 옆자리의 J씨는 나보다 1개월 먼저 들어왔지만 수습 기간도 끝나지 않은 신입이라서 친하게 지냈다. 같은 신입이어도 J씨는 회사 생활에 아주 잘 적응한 터여서, 마음 편히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었는데, 이를 테면 입사는 확정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입사 전, 부서 야유회에 따라가서 즐거운 카드놀이 시간에 부장님, 차장님, 과장님 돈을 몽땅 따버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위아래로 모든 사람들과 허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주고 받곤 했다.
일이라는 게 오래했다고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케이스도 종종 나오는 것이라서, 당시로서는 아주 기초적인 건이었겠지만, 과장님께 직접 여쭤 보기 어려운 것들은 J씨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면 컴퓨터에서 해당 서식이나 폼을 뽑아 주기도 했는데, 같이 J씨 모니터를 쳐다보다 이런 폴더를 보게 됐다. ‘나의 꿈 나의 미래’.
사람마다 정렬하는 법이 제각각이겠지만 우리 부서는 보통 국가나 고객별로 폴더를 정리하고 또는 한글, 영문, 이런 식으로 폴더를 만드는 편인데, ‘나의 꿈 나의 미래’는 일단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걸로 보였다. 나의 꿈 나의 미래? 비웃으려고 웃은 건 아니지만, 일단 웃기는 했고,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J씨도 적잖이 부끄러워했다. 그 파일도 좀 보여달라고 반은 진심으로, 반은 농담으로 말했는데, J씨는 ‘나의 꿈 나의 미래’를 클릭하지 않았다.
과장님 리뷰를 마치고, 그날 중으로 나갈 서류를 영문팀에 맡기고 나면 그 서류가 돌아올 때까지는, 그러니까 4시 50분부터 5시 30분까지는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여유롭게 오케이 사인과 함께 돌아올 서류를 기다리는 시간이면 조랑조랑 옆자리의 J씨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특히 자주 하는 이야기가 로또 이야기였다. J씨는 로또가 당첨되었을 때, 의외로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면서, 내게 로또가 당첨되었을 때의 행동 방침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했다. 첫째는 당첨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책상 서랍에 로또를 넣어놓고 평소와 똑같이 출근하고 퇴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니까, 그 로또가 이 서랍 안에 있는 거에요. 이야아! J씨는 키가 180센티미터에 가깝고 큰 덩치에 하얀 얼굴의 호감형이었는데, 로또 이야기를 마치고 이야아! 하고 외칠 때는, 생후 8개월의 아직 소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영아가 팔 전체를 휘두르듯 양팔을 휘저었다. 이야아!!
J씨에게 있었던 ‘나의 꿈 나의 미래’가 내게도 있었던가. 나는 없었던 것 같다.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잘하는 것도 없었다. 수학을 못 해서 문과에 갔고, 중학교때부터 찜해 두었던 학과에 갔지만, 취직 하기 직전까지 내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 했다. 추상적으로도 구체적으로도, 내 삶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알지 못 했다. 상상조차 못 했다.
우리가 왜 오래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기다리는 사람이 없고, 기다리는 저녁, 기다리는 세상이 없다면요. 지키고 돌봐야 할 것이 없다면요. (『아무튼, 메모』, 119쪽)
이 문단은 몸에 대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것을 꿈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것. 그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뜻이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뜻이다. 꼭 해야할 일이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일. 아직은, 하고 싶은 일.
몇 년 전, 내 인생에 ‘페미니즘’이라는 폴더가 생겼다. 차곡차곡 여성의 '말’들을 모았다. 저번주부터는 내 인생에 ‘프랑스어’라는 폴더가 생겼다. 파일 한 두개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중이었는데, J씨처럼 나도 폴더로 만들어 보았다. 폴더명으로 뭐가 좋을까. 나의 꿈 나의 미래는 너무 거창하다.
나의 꿈 나의 취미
나의 꿈 나의 공부
나의 꿈 나의 필기
나의 꿈 나의 불어
나의 꿈 나의 오늘
아니면, 나의 꿈 나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