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었던 책들 중에서 괜찮은 페미니즘 책을 15, 10, 아니 5권만 꼽는다 해도 주저없이 꼽게 될 책은가부장제의 창조』이다.  

 


목축에서 발생한 잉여는 남성의 전유물이 되었고 사유재산이 되었다. 이렇게 사유재산을 획득하게 되자 남성은 그것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상속자에게 물려줄 방법을 찾다가 일부일처제 가족을 구성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였다. 혼전순결에 대한 요구와 결혼에서의 성적 이중기준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함으로써 남성은 자손이 적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재산상 이익을 지킬 수 있었다. 엥겔스는 재산의 공동소유에 근거한 과거 혈연관계의 붕괴와 경제단위로서의 개별가족의 등장이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하였다. (『가부장제의 창조』, 43)

 


<03 성 혁명 제1 : 1830-1930> <엥겔스의 혁명적 취지>를 읽다 보니 거다 러너의 많은 생각들이 엥겔스에게서 나온 것인줄 알겠다. 인간 불평등의 모든 매커니즘은 남성 우월주의와 여성 종속에서 나왔으며, ‘성별로 인한 차별이야말로 이 모든 불평등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최첨단 21세기의 현재를 사는 사람들조차 쉽게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일부일처제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최초의 계급적 억압(248)이라고 이해했다는 점, 가족은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서 여성의 경제적 의존을 강화하고 있음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엥겔스는 당대 뿐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도 깨어있는남성이다.

 

물론,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공적 영역에 진출한 여성들 대부분이 비서직, 기계적인 공장 근무, 요리, 청소 및 어린이와 노인, 병약자들을 돌보는 것을 포함하는 서비스직에 집중적으로 배치되면서 저임금 노동에 대거 투입되었고, 국가를 위한 ‘거대한 노동력 비축분이 되었다는 지적 역시 귀기울여 들을 만하다.(『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176)  

 

또한 여성이 가정에서 해방된다면, 남성과 같은 공적인 영역에서 생산자로 일하게 된다면, 여성과 남성이 평등해질거라고 추측했다는 것인데, 이건 마치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하고,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다 한다는 말과 같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많은 일들이 가정에서 이루어지는데, 가사노동은 자연적으로여성의 영역이라 (남성을 포함한 대부분의 여성들이) 믿고 있기에 오히려 여성들은 -가사-육아의 이중-삼중노동에 빠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관점을 제시한 엥겔스의 탁월함은 반드시 평가되어야만 한다. 여성해방과 남녀평등을 비롯해 그가 예견했던 미래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그는 앞서간 혁명가였다. 페미니즘은 고정된 하나의 사조나 생각이 아닌, 생각들의 집합체로서 역동적으로 존재하기에 시대에 따른 변화가 불가피하지만, 페미니즘 책들을 읽다 보면 비판하기 위한 비판에 몰두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자유주의가 가진 한계가 분명 존재했다면 그에 대한 성과 역시 인정해주어야 한다. 흑인여성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이성애와 동성애에 대한 의견은 첨예하게 대립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이 특별히 반가웠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더 나은 조건, 더 나아진 환경을 위한 발판으로서 이전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그 의미와 의의를 어떻게 살려가야 좋을지 고민하는 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두번째 서문에는, 전형적인 성교 장면을 인용하고 해설을 붙인 이 책의 1장 초고를 읽어주었더니, 친구인 작가 짐 웨이건보드와 저자의 첫번째 남편 후미오가 포복절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19)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즘 문예 비평의 첫 모습은 이러했다. 문학 속에서 페미니즘 찾기,가 그녀의 전공이다.  



 













285쪽에서 301쪽까지 이어지는 샬롯 브론테의빌레뜨』를 비평한 부분은 특히나 반갑다. 여름에 초록초록하고 꽃이 만발한 표지의 『빌레뜨』를 읽으면서 느꼈던 여러가지 감상이 새삼 떠오르는데, 마냥 좋아 보이는 환한 얼굴의 존 그레이엄과 츤데레 폴 에마뉴엘이 박보검과 류준열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이 지긋한 여성을 유능함의 화신으로 여겼던 브론테의 시선을 좇아, 젊고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루시는 자신의 모델이며 친구가 될 만한 여성을 찾는다. 아들만 생각하는 브레튼 부인과 영원한 여성 경찰이자 간수인 베크 부인, 평생 동안 소녀에 머물러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폴리나. 어디에도 그녀가 모방하고 함께하고 싶은 인물이 없다. 그녀는 혼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가야만 한다.

 


루시는 브론테 자매를 표상할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듯 모든 젊고 의식적인 여성의 야망을 표상한다. 루시는 자유를 원한다. 그녀는 도망가기를, 배우기를, 일하기를, 여행하기를 미친 듯이 갈망한다. 루시는 직업을 가진 남성 모두를 시샘한다. 존은 의사고 폴은 학자다. 루시는 또한 그들이 받은 교육을 시샘한다. 존과 폴은 모두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교육은 그들에게 앞으로의 삶을 준비할 수 있게 했다. (295)



 

바람이 차갑다. 이제 아이스 라떼와 진지한 이별을 고해야 할 때가 왔는가. 나는 아직 젊고 싶은데. 나는 아직 아이스를 마시고 싶은데. 나는 아직 아이스고 싶은데. 나는 아직. 아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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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3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3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20-10-2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부장제의 창조.. 보관함 퐁... 단발머리님의 감명깊은 책이라니.. 주저없이. 퐁.
그나저나 이 많은 책들을.. 우짤까요. 흠.. 머리 속에 못 집어 넣으니 머리를 대고 잘까. ㅜ

단발머리 2020-10-23 12:34   좋아요 0 | URL
가부장제의 창조에 더하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다 러너의 다른 책은 <역사속의 페미니스트>가 있고요. <왜 여성사인가>도 있는데 전 이 책은 아직입니다.
책은 정말 많고, 읽을 책도 많고, 읽고 싶은 책도 많습니다. 머리에 대고 자는 방법은 일찍이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유행했던 것으로서, 그 효과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심리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

syo 2020-10-23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정도면 학자급 아닙니까?? 👍

단발머리 2020-10-25 13:31   좋아요 0 | URL
아니어요, 아니어요, 아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