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를 읽었다. 레베카는 실제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작품 전체를 주도하는 인물이다. 아름답고 똑똑하며 자신만만한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
『나의 사촌 레이첼』을 3월에 읽었다. 도서관책으로 읽었는데, 단숨에 다 읽고 바로 책을 구입했다.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한 문장, 한 문장씩 아끼면서 천천히 읽는다. 『레베카』를 시작하면서도 최고의 자리는 『나의 사촌 레이첼』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렇게 차분히 소설을 따라 읽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것. 레이첼과는 또 다른 매력의 레베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최고의 작품을 꼭 하나만 골라야 하나.
나는 그런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 친구의 소개로 『제인 에어』를 알게 된 그 날부터 내게 최고는 제인 에어였고, 제인 에어였으며, 영원히 제인 에어여야 했다. 샬롯 브론테의 『빌레뜨』를 읽으면서 제인 에어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원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샬롯 브론테가 샬롯 브론테와 싸우고 있었다. 끝내 승부는 나지 않았다. 『빌레뜨』는 『제인 에어』만큼 좋았고, 『레베카』는 『나의 사촌 레이첼』에 못지 않았다.
강력한 아우라를 풍기는 레베카를 아직 만나기 전, 작품이 끝날 때까지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는 주인공 ‘나’가 등장한다. 이 세상 어디 하나 기댈 곳 없이 가난하고 파랗게 젊은 여성. 하녀는 아니지만 하녀의 일을 해야 하는 여성. 고단하고 지루한 삶을 살아가던 그녀에게 왕자님이 나타난다. 재투성이 그녀와 드라이브를 즐기고 함께 식사를 한다.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그래서 더욱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별을 목전에 두고 그는 그녀에게 청혼한다. 그녀는 가난으로부터, 떠돌이 생활로부터, 가족 하나 없는 불쌍한 처지로부터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맥심과 결혼한다.
그와 함께 돌아간 맨덜리에는 저택의 안주인이었던 레베카, 드윈터 부인의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 새색시 ‘나’는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에 더욱 더 위축된다. ‘나’와 맥심의 결혼 축하 파티를 준비하는 장면에서 이런 면이 특히 도드라진다. 근처의 마을 사람들 대부분을 초대하는 성대한 파티를 준비하면서 맨덜리 저택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로 모두 바쁘게 움직인다. 가구를 재배치하고, 홀을 들꽃으로 장식하고, 음식을 장만하고 악단을 접대한다. 드윈터 부인, 마님인 ‘나’는 무슨 일을 해야할까.
‘나’는 할 일이 없다. 댄버스 부인이 예전 파티의 세세한 것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어 파티 준비를 총괄하고, 하인들은 각각 자기의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할 일이 없다. 그저 예쁘게 꾸미고 앉아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다. 고된 육체 노동의 무게를 무시하려는 뜻은 전혀 없지만, 할 일이 없는 ‘나’의 처지 역시 서글퍼 보인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하인들의 ‘마님, 저쪽으로 조금만 비켜주세요’를 들으며 ‘미안해요’를 연발하는 힘없는 마님. 친하지 않은 사람들을 초대해야만 하는 파티에서 무슨 옷을 입을까, 무슨 가발을 쓸까, 어떤 화장을 할까,에만 신경 쓰는 삶이다 보니 그녀는 더욱 맥심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다. 어느 현자가 말했던가. 우리 인생에서 연애는 5프로 정도라고. 5프로에 목매는 ‘나’가 안타깝고, 맥심의 기분을 살피는 ‘나’가 안쓰럽다. 흥미롭고 인상 깊은 장면들은 아직 레베카를 읽지 않은 '부러운' 사람들을 위해 남겨 둔다. 읽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시라.
부푼 기대를 안고 시작했던 『레베카』를 한 번 더 읽고 싶다. 『나의 사촌 레이첼』처럼 『레베카』도, 영원한 나의 ‘읽고 싶어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