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메리카노를 못 마신다. 정확히는 아메리카노 핫을 못 마신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다면 무조건 아이스로 마셔야 한다. 아메리카노는 너무 쓰다. 주로 라떼를 마시고 가능한 곳에서는 우유를 두유로 바꿔 마신다. 커피=아메라고 하던데, 아직도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없으니 나는 진짜 커피맛을 모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거의 라떼를 마시지만 가끔 카라멜 마키아또를 마실 때가 있다. 너무 피곤할 때, 너무 애썼다고 느껴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싶을 때. 그럴 땐 카라멜 마키아또의 진한 단맛이 전해주는 위로를 받고 싶다.

 

카라멜 마키아또를 마시는 심정으로 이 책을 주문했다. 좀 달달한 연애이야기를 읽고 싶어서. 이제는 내게 먼.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연애를 추구한다면, 그건 다른 이름으로 불릴 테니까. 연애라는 상큼한 단어가 아니라 ㅂㄹ이라는 스산한 단어로.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내가 추구하는 '달콤함'이 자본주의 체제 속의 '사랑-연애-결혼'으로 이어지는 이성애 가족의 성취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잠깐 미뤄두기로 하자. 나는 카라멜 마키아또를 주문하지 않았던가.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Love, Rosie> 2014년에 개봉되었다. 단짝 친구 로지와 알렉스는 영국의 작은 고향을 떠나 미국 보스턴의 대학에 함께 가기로 약속한다. 우정에서 사랑으로, 편안함에서 설레임으로 한 발짝 다가서려는 바로 그 때,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두 사람은 각자 다른 파트너와 졸업파티에 참석하고, 하룻밤 로맨스 때문에 로지는 고향에 남게 된다. 그 이후론 전형적인 패턴이다. 로지가 고백하려는 찰나 알렉스 옆에는 임신한 여자친구가 있고, 알렉스가 고백하려는 찰나 로지 옆에는 돌아온 나쁜 놈이 서 있다. 그렇게 엇갈리던 두 사람은 결국 마음을 확인하고, 그렇게 해피엔딩.

 


그러니까 내가 바랬던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였다. 그런데 원작은 달랐다. 첫째, 이 소설은 편지형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나는 어떠어떠하다. 그는 어떠어떠하다라는 식의 서술이 주는 한계가 있다. 글 속의 는 최대한 객관적인 것처럼, 최대한 사실을 묘사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 사실은 다를 수도 있고, 어떤 경우 정확히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난 나는 어떠어떠하다라는 자신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서술 방식을 좋아한다. 필립 로스의 글처럼 말이다. 편지글은 다르다. 로지가 알렉스에게 쓴 편지를 통해 로지의 심정을 추측해야 하고, 알렉스가 형 필립에게 쓴 편지를 통해 알렉스의 속마음을 탐구해야만 한다. 로지와 친구 루비와의 대화를 통해 로지의 심정을 예상해야 하고, 그리고 또, 또 다음 편지가 이어진다.

 

또 이런 부분.


 

All I do is wander around the house like a robot, picking up teddy bears and toys that I trip over. It’s hard to bring Katie anywhere because she just screams wherever we are; I’m afraid people think I’m kidnapping her or being a terrible mother. (62)

 

 

로지처럼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어떤 엄마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아이를 낳았고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엄마됨을 후회하지 않았지만 엄마여서 겪는 로지의 고통을 읽는 일이 즐겁지 않았다. 내가 그녀의 고통을 가벼이 보아서가 아니라, 그녀의 고통이 너무 잘 이해되어서.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가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이미 기혼자이었기에, 그들의 사랑이 아무리 아름답고 소중하다 해도 그들의 배경으로 총천연색 무지개를 펼쳐줄 수는 없었다. 도덕적 잣대로 평가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오랜 시간 서로를 알았면서도 서로에 대해 이렇게까지 모를 수 있다는 점이, 울화 포인트였다.

 


이야기는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나이를 서른 여섯에서 서른 여덟쯤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원작에서는 지천명에 이르러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이른바 하늘의 뜻을 깨닫게 된 것이다.

 



생각만큼 달콤하지 않아 마카롱을 불렀다. <소희네> 마카롱은 날 실망시키지 않았으니, 야무지게 달콤했고 충분히 푹신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생각나는 그런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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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4-06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오래전에 이 영화 봤었어요. 원작이 있는줄은 몰랐어요.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기 때문에 함께 진학하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게 안타까웠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돌고 돌아 결국 서로에게 가던 것도. 그런데, 왜 그들에겐 돌고 도는 과정이 필요했을까요? 왜 어떤 관계에는 그게 필요할까요?

그나저나, 단발님 ‘핫‘아메리카노 못 마시는 건 오늘 처음 알았어요!

단발머리 2020-04-06 16:13   좋아요 0 | URL
그렇게나 돌고 돌아 전 정말 어지러웠답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로는 좀 부족한.... 그 어떤 어지러움.
영화에서는 알렉스가 로지의 18번째 생일파티에서 뽀뽀를 했는데, 술에 잔뜩 취해 고생한 로지가 뽀뽀를 기억하지 못한 채,
어젯밤 최악이야. (내가 술에 취해 쓰러진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마, 했는데 알렉스는 그게 뽀뽀 때문인줄 알고... 그 후로 그냥 돌고 돌죠.

보통은 따뜻한 라테를 마시구요. 여름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기도 해요. 집에서 카누 블랙 미니를 반정도만 타서 마시기도 하는데, 그건 커피보다 보리차에 가까워서요. ㅋㅋㅋㅋㅋㅋ

moonnight 2020-04-06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이 있었군요@_@;;; 영화는 미남미녀 보는 재미로 즐겁게 봤었네요ㅎㅎ 릴리 콜린스가 필 콜린스 딸이란 걸 최근에 알았어요. 와이프가 엄청 미인인가보다 생각을..^^; 저는 잠깐 커피를 못 마시겠던 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500ml정도 병에 상온의 물과 카누블랙 세 개(미니 아님ㅎㅎ)를 넣고 흔들어서 마셔요. 너무 뜨거운 것도 너무 찬 것도 싫어하는데 이 조제법이 제게 잘 맞더라구요^^

단발머리 2020-04-07 13:48   좋아요 0 | URL
미남미녀 대잔치죠. 저는 메모장에 ˝알렉스, 알러뷰!˝ 이렇게 써놓기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갑자기 고백타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말씀해주신 제조법으로 저도 만들어보고 싶어요. 근데 상온의 물이라서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어요. 저도 따뜻한 커피 식혀 먹는경우 많지만 처음부터 상온이면 어쩔까 싶어요.
카누는 집에 많이 있어서, 곧 도전해보겠습니다!

2020-04-06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7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0-04-07 0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아메리카노 써서 못 마시는 일인입니다ㅋㅋㅋ
예전에 다락방님 서재에서 직장동료에게 ‘어른은 아메리카노죠!!‘라고 말하는 글을 읽고 뜨끔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 난 언제 어른이 될까??그러면서요ㅋㅋㅋ
무조건 라떼 라떼에요~~집에선 믹스 믹스에요~ㅋㅋㅋ
믹스 마시다 위염 도질땐 좀 참다가 몸 생각해서 잠깐 원두 드립백을 사다 마시기도 하는데....저도 물을 많이 추가?해서 보리차 마시듯 해서 다시 믹스,라떼로 넘어가게 되더라구요? 결국 종점은 믹스나 라떼로~^^
근데 너무 단건 못마셔서 캬라멜 마끼아또는 또 피하게 되더라는~~그러면서 조각케잌 같은 단건 또 찾으면서~ㅜㅜ
취향이 차암~~~^^

요즘 코로나덕에 하숙집 아줌마 하느라 넘 바쁘고 피곤해서 믹스커피 꼬박꼬박 챙겨마시고 크림빵 엄청 챙겨먹고 있어요.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를 또 엄청 챙겨보고 있거든요~~근데 갈수록 달달하고 좀 행복한 영화나 드라마쪽으로 고르게 되더라구요.
지금 꽂힌 드라마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이에요.(조정석 넘 좋아해서~^^)
맨날 눈물 콕 찍으면서도 의사들의 우정이 사랑스럽고 웃겨 행복하게 느껴지더라구요.
영화도 좀 행복해지는 게 없을까?고심중인데...이 영화를 한 번 챙겨봐야겠군요~^^
‘더 테이블‘앞부분 정유미편 좀 보다가...한숨 절로 나온~~ㅜㅜ
집에 갇혀 사는데 우울한 얘기는 참~~힘들어요^^

암튼 또 댓글이 길어졌네요~~대화를 못하고 사니 여기저기 댓글로 수다?를 풀고 있는 듯한 시간들입니다ㅋㅋㅋ
모쪼록 건강 유의하시구요~~늘 달달한 날들 만드시구요♡

단발머리 2020-04-07 13:59   좋아요 1 | URL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책나무님이 아메리카노 써서 못 마셔요, 이부분에서 제가 웃는 소리입니다. 암요, 암요. 우리는 어른이 아닙니다. 커피란 자고로 아메이죠. 그러나, 저는 철없는 어린아이. 아직도 아메가 써서 마실수가 없어요. 우리는 계속 어린이랍니다, 책나무님!!! 책나무 어린이님!!!
전 믹스는 자주 안 마시게 되더라구요. 취향이 고급져서가 아니라 먹고 나서 속이 너무 불편해요. 그냥 블랙을 보리차처럼 아주 연하게 해서 마시는데 그래도 가끔 진한 커피가 마시고 싶기도 하구요. 드립백 사면 기본 3번은 우려먹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맞아요, 아이들하고 계속 함께 있다보면 저절로 수련이 되지요. 전 그냥 너도 놀아라, 나도 놀겠다, 이런 심정으로..... 조정석은 저도 좋아하는데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한 번도 못 봤어요. 저도 책나무님 추천따라 살짜쿵 봐야겠어요.
코로나 대피 수다 앞으로도 제 방에서 해 주세요. 저도 책나무님 댓글 읽다가 맘 편히 웃는 이 시간이 너무 좋아요.
우리 자주 만나요. 못 다 한 이야기는 내일 만나서 하는 걸로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