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가신 사랑
평일 오전, 시내 대형서점에서 빈 자리를 발견하면 죄책감이 든다. 모두 바쁘게 자기 자리를 찾아, 자신의 일을 찾아 서둘러 나섰는데, 혼자 남겨져 있다는 생각, 혼자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평일 오전, 시내 대형서점에서 자리를 발견하지 못 하면 기쁘다.
이 책은 앞부분만 살짝 살펴보려다 자리를 발견해 앉아서는 그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몇일 전부터 한국과 베트남 언론을 동시에 들끓게 했던 가정 폭력, 정확히는 남편에 의한 아내 폭행 사건의 가해자가 구속 전 심사에서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고 말했다던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말이 맞다는 증거가 이 책에도 차고 넘친다.
나는 삼촌이 왜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 편을 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삼촌은 어머니의 친오빠가 아니던가. 삼촌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험하게 두들겨 맞아 얼굴이 퉁퉁 붓는 것을 수없이 보고도 누이를 위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삼촌은 지난 50년 동안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버지와 변치 않는 단단한 유대 관계를 맺어왔다. (87쪽)
남성 연대는 이 둘만이 아니다.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눈물 겨운 남성 연대. 눈물 겨운 남성 연대의 힘, 폭력, 권력.
2. 다시 책으로/책읽는뇌/유리알유희 1,2
『책읽는뇌』에서 매리언 울프는 “인류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으며, 독서는 뇌가 새로운 것을 배워 스스로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인류의 기적적인 발명이다”라고 주장한다. 제일 기억에 남는 주장은 알파벳 조합으로 의미를 표현하는 영어의 사용자가 표의문자 중의 하나인 ‘한자’를 읽거나 쓸 때, 영어를 사용할 때와는 다른 부분의 뇌영역이 활성화된다는 것.
『다시 책으로』에서의 화두는 ‘깊이읽기’다. 저자는 디지털 매체로 읽는 행위가 읽기 방식을 바꾸고 나아가 깊이 읽기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가 실험 대상이 된다. 저자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소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다시 읽기 시작한다. 겉핥기식으로 건너뛰며 읽는 방식에 익숙해졌음을 발견한 저자는 예전의 읽는 나를 찾기 위해 짧고 집중적으로 깊이 읽기 훈련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디지털 유목민인 유아들의 읽기 교육은 어떠해야 할까.
저는 최대 두 시간만 사용하게 하라고 권고하지만 이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이에 따라 차이가 많겠지요. 저는 낮에는 아이 스스로 주도하는 놀이와 인간적인 접촉에 시간을 내어주고, 밤에는 주로 이야기를 읽어주거나 종이책을 보게 하라고 권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디지털 기기와 함께하는 시간이 하루 네 시간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217쪽)
제 생각에 입학 후 첫 몇 년 동안은 종이책과 인쇄물을 주로 사용해 읽기를 가르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좋습니다. 이미 여섯 번째 편지에서 말씀드렸었지요. 부모와 아이가 인쇄물로 읽는 것은 읽기에서 핵심적인 시간적, 공간적 차원을 강화하고, 어린 읽기 회로에 중요한 촉각적인 연상을 더하며, 최고의 사회적, 정서적 상호작용을 제공합니다. (258쪽)
좋은 독자의 삶이란 첫번째, 책을 통해 정보를 모으고 지식을 얻는 것이다. 두번째는 즐거움을 위한 독서이다. 몰입에서 오는 강렬한 즐거움, 육감적인 로맨스 소설로의 도피, 가즈오 이시구로, 엘레나 페란테 같은 작가들의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것, 성인들의 전기, 유발 노아 하라리의 논증을 따라가는 것을 포함한다. 좋은 독자의 세 번째 삶은 읽기의 절정이자, 위의 두 삶의 종착지이다. 바로 관조적 독서. 읽고 있는 장르가 무엇이든 완전히 보이지 않는 개인적인 영역으로 진입하게 해, 모든 종류의 인간상을 관조하고 우주를 숙고하게 된다.(283쪽)
별천지 PC방 신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디지털 유목민 1인을 관조적 독서가로 탈바꿈시켜야 할텐데… 물론 지금 한가로이 앉아 새 시대를 맞이할, 새 인류를 걱정할 때가 아니긴 하다. 네이버뉴스와 기타 단발식 일간지 기사에 길들여진 나, 바로 내가 제일 걱정.
3. 권오숙 교수의 해설과 함께 읽는 리어 왕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됐는데, 나는 진짜 셰익스피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잘,이 아니라면 거의. 거의,가 아니면 전혀.
셰익스피어는 운문 대사에서 주로 ‘무운시’라는 형식을 사용했는데, 무운시란 약강 5보격이면서 압운(rhyme)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약강 5보격’은 약강의 운율 규칙을 가진 음보가 한 행에 다섯 개 들어 있는 것이고, 압운은 시에서 행의 끝부분 등에 같은 음을 반복해 음악성을 주는 기법이다. 셰익스피어는 극 속에서 일부 대사만 빼고 각운을 맞추지 않아, 일정한 운율을 사용하여 리듬감을 주면서도 압운은 맞추지 않았다. 가끔 번역본을 보면 아래와 같이 편집이 이상한 형태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셰익스피어가 때에 따라 두 행씩 각운을 맞추는 2행 연구(couplet)를 사용했기 때문인데, 대체로 각 장 끝 대사에서 이 형식을 사용했다고 한다. (35쪽,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기 전에>)
재산을 물려받은 후 안면을 몰수하고 아버지를 내친 딸에 대해 욕설을 쏟아놓는 리어왕. 억울한 마음 모르는 바 아니나, 진실을 볼 줄 모르고 잘못된 판단을 했던 스스로에 대한 한탄에 비해 딸에 대한 저주는 너무나 촘촘하고 찰지다.
4. 여성주의 고전을 읽는다/젠더트러블/주디스버틀러읽기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를 하면서 좋은 책들을 많이 읽었고, 또 다시 읽게 됐다. 조만간 다시 읽고 싶은 책은 『가부장제의 창조』. 얼른 다시 읽어야 하는 책은 『성의 변증법』. 꼼꼼히 다시 읽어야 할 책은 『제2의 성』. 오늘은 이 책을 읽는다.
보통은 앞에서 뒤로 차근히 읽는 편인데, 이 책은 <들어가는 글 - 고전으로 살펴본 여성주의 사상의 역사>를 읽고, 마지막 챕터 <10. 젠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먼저 읽는다. 버틀러는 페미니즘 이론에서 유토피아적인 물자체로 남아 있는 본질로서의 섹스를 해체하고자 했다.(452쪽) 자연, 생물학적인 섹스란 없으며, 푸코의 분석을 빌려와 섹스가 규율적인 관행을 통해 일관된 성적 정체성으로 생산되었다고 주장한다.
동성애 금지와 근친상간 금지가 반복적으로 수행되고 인용될 때, 여자다운 여성, 남자다운 남성이라는 젠더가 만들어지고 이성애가 강제적으로 형성된다. 이렇게 본다면 생물학적인 남녀, 이성애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근친상간 금지와 동성애 금지의 결과로 구성되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강박적인 이성애와 근친상간 금지가 만들어낸 효과로서의 섹스가 마치 젠더의 원인이자, 필연이며, 자연인 것처럼 전도되어 있다는 것이 버틀러의 지적이다. (455쪽)
동성애 우울증을 설명할 때도 버틀러는 프로이트의 우울증 개념을 가져오는데, 유아에게 일차적인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의 애정을 갈구하는 과정에서 남아와 여아는 상이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고 논증한다. 물론 이 과정 자체는 여아에게 더 복잡하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여아는 여성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근친상간과 동성애 금지로 인해 두 번의 좌절을 경험한다. 이러한 좌절의 어두운 그림자가 가감없이 펼쳐지는 책이 바로 『성가신 사랑』이다. 앞뒤가 똑같은. 수미상관.